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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의 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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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淳雨, 호는 혜곡, 본명은 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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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히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부석사 무량수전」중에서 그처럼 신기한 천연색 사진으로도 잘 구워진 고려청자의 맑고 조용한 푸른빛의 아름다움을 재현할 수는 없다. 제아무리 희한한 물감이 있다 해도 고요와 사색에 사무친 고려청자의 아득하고도 깊은 빛깔을 그처럼 물들일 수는 없다. 만약에 영험스러운 마술사가 있어서 그리고 뛰어난 화학자가 있어서 고려청자의 그 희한한 푸른빛의 비밀에 부딪쳐 보면, 그것은 아마도 고려 사람들의 담담한 심상心像의 아름다운 벽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중에서 갓맑은 비취옥색의 티없는 바탕에 순백한 칠흑색만으로 이루어진 모란꽃 한 송이의 솜씨야말로 고려 도공들이 지닌 안목의 높이와 조형 역량의 저력을 발휘해 준 것이라고도 할 수 있고 또 그러한 배색의 효과를 그들은 생활 속에서 덤덤하게 피부만으로도 가누어낼 수 있는 비상한 천성의 소유자들이 아니겠느냐고 생각을 해 보게도 된다. ---「청자상감모란문항」중에서 바라보고 있으면 허허하고 웃음이 나올 지경이 된다. 이 병을 만든 사람이나 이것을 즐겨서 쓰던 이조시대 사람들이 모두 이 병을 바라보고 느끼는 지금의 내 심정과 같은 흥건한 기분이었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세상사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숨김없는 마음의 자세가 이 병에 새겨진 성근 그림처럼 야무지지도 못하고 모질지도 못했던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백자상감초문편병」중에서 한국의 흰 빛깔과 공예 미술에 표현된 둥근[圓] 맛은 한국적인 조형미의 특이한 체질의 하나이다. 따라서 한국의 폭넓은 흰빛의 세계와 형언하기 힘든 부정형不整形의 원圓이 그려 주는 무심스러운 아름다움을 모르고서 한국미의 본바탕을 체득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이조시대 백자항아리들에 표현된 원의 어진 맛은 그 흰 바탕색과 아울러 너무나 욕심이 없고 너무나 순정적이어서 마치 인간이 지닌 가식 없는 어진 마음의 본바탕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백자달항아리」중에서 산곡山谷의 여름 물을 그려서 물보다도 더 시원한 맛을 낼 줄 아는 화가가 겸재다. 말하자면 겸재는 한국 산하가 지니는 습기와 여름 물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알고 너무나 좋아했기 때문이다. 낭랑하게 소리치며 흐르는 성급한 여울물이 있는가 하면 도란도란 흐르는 작은 계류가 있고, 또 도도히 흐르는 대하의 용용수가 있어서 한국의 여름 물 경치의 멋은 아마도 겸재가 독차지했나 싶을 때가 있다. ---「겸재의 조옹도」중에서 단원의 그림을 살펴보면 새 한 마리 나뭇가지 하나에 이르기까지 한국 풍토의 독자적인 멋과 아름다움이 너무나 흥겹게 표현되어 있어서 시속화가時俗畵家들의 그림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라는 점에 다시금 놀라움을 금치 못할 때가 많다. 말하자면 풍토감각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같은 복숭아 나뭇가지 하나만도 나라에 따라 각기 그 자라는 자세와 마디가 다르고, 또 환경이 달라서 미술작품에 나타난 자연 풍정도 제각기 다르기 마련이다. ---「단원의 봄까치」중에서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달라졌고 단단해졌다. 새로운 근육이 생겼고,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마주했다. 창의력과 유연함, 용기는 더 깊게 쌓여갔다. 덕분에 사랑의 방식도 달라졌다. 내가 그 남자에게 어울릴까 걱정하지 않고, 나에게 어울리는 남자를 찾았다. 내 마음은 창공을 날았다. ---「혜원의 연당의 여인」중에서 수다스러운 듯싶어도 단순하고 화려한 듯 보여도 소박한 동심적童心的인 즐거움을 표현한 점이 한국 민속 공예의 장식 무늬가 지닌 하나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별 야심이 없이 다루어진 무늬들, 특히 이조시대 나전칠기의 좋은 도안들을 보고 있으면 늣늣하고도 희떱고 희떠우면서도 익살스러움이 한 가닥의 즐거움을 자아내어 준다. ---「나전칠기 송죽무늬함」중에서 항아리의 오른쪽에는 덩실덩실 춤추는 토끼 한 마리, 왼쪽에는 지지리도 못생긴 두꺼비 한 마리가 앞발을 들고 토끼와 마주 서 있다. 두꺼비 등에 돋은 우툴두툴한 무늬 모양이라든가 넉살스러운 그 얼굴 맵시는 간사하고 경쾌해 보이는 토끼의 맵시와는 매우 대조적이지만 이러한 대조에서 오히려 미소를 자아내는 해학의 흥겨움이 솟아나는 듯도 싶고 옛 설화를 이렇듯 짜임새 있게 윤색해 낸 신라 와공瓦工의 솜씨가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신라의 막새기와」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