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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 한국어판 서문
머리말 시: 비탄의 패러독스 프롤로그 1부 | 오끼나와: 슈퍼마켓 주인 2부 | 야마구찌: 평범한 주부 3부 | 나가사끼: 시장 에필로그 초판 후기 개정판 한국어판 후기 옮긴이의 말 해제: 권혁태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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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폭주가 연일 계속되고 ‘도대체 왜’라는 의문이 터져나오면서 이에 대한 각양각색의 분석이 봇물처럼 쏟아지는 지금의 시점에서 보아도 이 책은 여전히 유효하다. 물론 히로히또는 생물학적으로는 1989년에 죽었다. 하지만 지금의 일본을 보면, 그는 여전히 계속해서 ‘죽어가고’(dying) 있을 뿐이다. 히로히또가 병석에 누운 이래 일본 사회에 휘몰아쳤던 사회파시즘이 오늘날에는 현실주의라는 이름 아래 한층 더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죽어서도 지금을 지배하고 있다.
--- 본문 중에서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은 압박에 저항할 권리가 있습니다. 중요한 건 저항이죠. 지금 우리가 일장기나 키미가요를 그냥 수용한다면 앞길은 뻔한 거예요. 이것이 바로 현대를 사는 일본 시민으로서 우리가 결정해야 할 선택들입니다. (……) 쇼오이찌의 가족들은 강제적 자살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그의 이러한 거리감이 그로 하여금 희생자에 대한 각별한 동정을 갖게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각별한 동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는 생존자들을 향해 오끼나와인은 일본의 침략행위에서 자신들의 공범성을 인식하라고 설득할 수 있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 1988년 6월 1일 일본의 최고재판소는 14대 1로 하나의 역사적 판결을 내렸다. 한 부인이 죽은 남편의 위패를 신또오의 신사에 모시는 일에 정부가 개입하는 것이 적법한지 여부를 묻는 장장 1년이나 끌어온 사건에 대해 1?2심의 판결을 뒤엎고 원고 패소 결정을 내린 것이다. 죽은 자기 남편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국가의 행위를 그 아내가 저지할 수 없다니! 아내의 이 요구를 국가가 거부하고 또 그것을 한 나라의 최고사법부는 냉소하며 승인하다니! 나는 분노와 절망감에 휩싸였다. --- 본문 중에서 3개월 남짓한 기간에 일본 전국은 물론이고 해외에서까지 시장 앞으로 보내온 7,300통 이상의 편지?엽서?전보 들이 모또시마 발언의 위력을 가장 웅변적으로 그리고 확실하고도 오래도록 증언하고 있다. 이 편지들은 쇼오와라는 시대를 산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쓴 그 시대의 하나의 역사가 되었다. 다음은 그 편지들이다. “그 당시 군대가 정권을 쥐었기 때문에 국민도 일치단결하여 국난에 대비한다는 것이 대동아전쟁으로 발전한 것이므로, 그것은 국민 전체의 책임인 것이며, 전후에 오늘날의 평화가 있는 것도 각 가정에서 바친 영령들 덕택입니다. 전후에는 전국민이 총력을 다하여 전에 없는 노력을 함으로써,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옛말처럼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으로까지 발전해온 일본국입니다.” “천황도 오래 살고 싶겠지요. 그리고 천황의 가족들도 어떻게든지 그를 오래 살려두고 싶겠지요. 그러나 전쟁에 나가서 죽은 사람들, 원폭이나 공습을 맞아 미래를 빼앗긴 어린이들, 또한 일본군에 학살된 오끼나와의 어린이들도, 천황의 목숨과 똑같은 하나하나의 목숨입니다. 나는 이 어린이들 중 어느 하나도 전쟁 따위에 잃고 싶지 않습니다.” --- 본문 중에서 20여년이 지나는 동안 나는 일과 가족에 사로잡혀 더 큰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작은 관심을 잠시 스치듯 기울였을 뿐이다. 1960년대 미일안보조약 개정에 반대한 전국적인 참여, 1970년대 억압적인 정권이 고도성장경제로 가면을 바꿔쓴 것에 항거한 학생운동, 이 모든 것의 기억이 1989년 무렵에는 멀어져버렸다. (……) 민주주의적 저항의 거듭되는 패배가 우리를 희망 없는 상태로 놓아둘 것인가? 이노우에 히사시의 문장들을 떠올려본다. “세상에는 절망에 굴복하는 선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 하지만 희망에 찬 나쁜 놈들도 너무 많다.” 아마 영웅이라면 의아해하겠지, 누군가 우리를 절망에서 희망으로 옮겨줄 (밧줄 같은) 무언가를 찾아내지 못하는 건가?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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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장기를 끌어내려 불태운
오끼나와의 슈퍼마켓 주인 치바나 쇼오이찌 : 국민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묻는다 1987년 오끼나와 요미딴촌의 슈퍼마켓 주인 치바나 쇼오이찌(知花昌一)는 요미딴촌에서 개최가 예정된 국민체육대회(한국의 전국체전) 전날 경기장에 들어가 게양된 일장기를 끌어내려 불태웠다. 그가 25일간 구금되어 조사받고 재판이 진행되는 사이에 우익들은 마을을 에워싸고 공격했다. 쇼오이찌의 슈퍼마켓에 불을 질렀고, 살해하겠다고 협박했다. 동네 사랑방 구실을 하던 슈퍼마켓에는 손님이 뚝 끊겼고 마을 공동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쇼오이찌는 주민들에게 한동안 외면당했다. 가족들은 마음껏 바깥출입을 하기 어려웠다. 우익의 협박은 점차 기세가 꺾여갔지만 저자 노마 필드가 그를 만나러 간 1989년까지도 진행 중이었다. 저자는 쇼오이찌와 가족, 그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과정에서 무엇이 평범한 주민으로 하여금 국기를 불태우도록 만들었는지, 일장기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섬세하게 성찰한다. 알려진 바와 같이 오끼나와(류우뀨우 열도)는 일본에서 예외적 존재다. 2차대전까지는 일본 본토의, 전후에는 일본과 미국의 탄압을 받았다. 전쟁 말기에는 (본토) 일본이 주입한 군국주의 이데올로기로 인해 미군에 점령당할 것을 두려워한 주민들의 집단자결이 벌어졌고, 혹은 일본군이 협박과 강요로 주민들을 죽음으로 내몰기도 했다. 그 상흔은 생생하게 마을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있다. 쇼오이찌의 일장기 소각사건은 이러한 지울 수 없는 역사적 기억의 연장선에서 일어난 것이다. 일견 돌발적이고 무모한 듯 보이는 이 사건을 풀어가다 보면 마을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털어놓는 끔찍한 집단자결 또는 학살의 실상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천황을 정점으로 한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근본적 성찰로 나아간다. 내 부모, 내 형제를 눈앞에서 죽게 만드는 그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 국가는 나에게 무엇인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요미딴촌 주민들은 이 기억을 바탕으로 쇼오이찌의 행동에 대체로 공감했으며, 그의 취지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 그의 재판을 뒷바라지하고 후원하면서 긴 시간을 버텨간다. 그들은 단지 버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집요하게 묻고 있다. 저자는 여기에다 미군기지 수용의 댓가로 요미딴촌 아름다운 바닷가에 건설되는 일본 본토 자본의 고층 호텔과 리조트를 대비시킨다. 요미딴촌의 ‘개발’은 화려한 경제발전 뒤에서 작동 중인 사회파시즘의 숨은 얼굴인 것이다. 자위대원 남편의 신사 합사를 거부한 야마구찌의 평범한 여성 나까야 야스꼬 : 일본 사회의 소수종교와 여성의 지위에 도전하다 나까야 야스꼬(中谷康子)의 남편 나까야 타까후미(中谷孝文)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창설된 경찰예비대(자위대의 전신)에서 복무하다 1968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3년 후 자위대 지방연락부는 나까야 야스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그의 출생지인 야마구찌현 호국신사에 합사한다고 통지해온다. 이에 대해 나까야 야스꼬는 친가와 시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소송을 제기했다. 이 재판은 장장 15년을 끌다가 1988년 6월 대법원의 패소 판결을 받았다. 이 판결은 전후 일본 사회에서 단순한 법률적 의미를 뛰어넘는 것이다. 전쟁의 추동력인 일본 군국주의와 소수종교에 대한 처우(나까야 야스꼬는 일본에서 1%를 차지하는 기독교인이다), 일본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에 대한 도전(‘미망인’의 유족연금 수령과 망자의 명예 때문에 시가에서는 그녀의 소송에 반대한다)인 이 문제제기에 대해 일본 사법부, 나아가 일본 사회가 적절히 대처할 능력도 의지도 없음을 공표한 셈이다. 또한 이 판결은 전후 일본 헌법 제20조의 신앙의 자유와 정교(政敎)분리 조항이 완전하게 작동하지 않고 있음을 입증하기도 한다. 저자는 나까야 야스꼬만이 아니라 그녀의 15년 법정싸움에 함께 헌신해온 든든한 동반자 우라베 요리꼬(浦部賴子)와 야마구찌 싱아이(信愛)교회 신도 모임, 그리고 나까야 야스꼬의 친가와 시가의 계모?시모?숙모 등 다양한 세대의 일본 여성들을 만나 그들의 삶의 내력에 귀 기울인다. 시가와 가족에 죽는 날까지 철저히 봉사하도록 교육받고, 그 자신 그에 묶여 질곡의 삶을 살고 다시 자신의 며느리에게 그 질곡을 대물림해주는 ‘전통’의 계승은 군국주의의 가족화된 형태로서 가부장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여성들의 발언을 통해 생생한 실감으로 다가온다. 나까야 야스꼬는 종교적 양심으로 그 고리를 끊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사회적 약자로서 거대한 구조에 맞서는 과정에서 법과 역사, 정치의 추상적 개념들을 생활의 구체적 사실들과 조응해서 생각하는 힘을 기르게 된다. 생각하는 개인으로 거듭난 한 사람의 힘은 작지만 소중한 것이다. 대일본제국을 위해 죽은 망자 추모의 정점에 서 있는 야스꾸니 합사 반대운동이 교회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전국에서 찬반의 편지들이 쇄도했다. 그런 중에도 시립보육원 조리사로 자신의 생활을 굳건하게 꾸려가는 생활인으로서 나까야 야스꼬는 흔들림 없이 자신을 지켜가고 있다. 저자는 기원한다. 가장 예측불가능하고 난해한 싸움, 일상생활이라는 장 속에서 나까야 야스꼬의 여행이 무사하기를. 새로 만난 공동체와 함께 끊임없이 새로운 동지들을 발견해가기를. 죽어가는 천황의 전쟁책임을 확언한 나가사끼 시장 모또시마 히또시 : 자민당 정치인, 보수의 근간을 뒤흔들다 천황 히로히또는 1988년 가을부터 위중한 상태로 병상에서 생명을 이어가다 1989년 1월 7일 사망했다. 그가 와병 중인 동안 일본 전역은 쾌유를 비는 물결로 뒤덮였다. TV 광고가 사라지고 웃음이 자제되고 축제를 연기하고 각종 행사에서 음주가 금지되었으며 검문이 일상화되어 자동차 트렁크에 든 과도 하나 때문에 구류를 살거나 조사를 받기도 했다. 가히 신경증적인 ‘자숙(自肅)’이었다. 이 와중에 1988년 12월 자민당 출신 나가사끼 시장 모또시마 히또시(本島等)는 시의회 정례회의에서 ‘(병상에 누워 있다 해도) 천황에게 전쟁책임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고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당연하게도 전국적 항의가 거세게 타올랐다. 우익의 가두선전차가 시청사를 둘러싸고 쉼없이 항의해댔고 살해 위협이 속속 날아들었다. 경찰의 24시간 경호에도 불구하고 모또시마 시장 본인뿐 아니라 가족들까지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없었다. 외식도 할 수 없고 명절도 쇠기 어려울 만큼 감옥 같은 일상을 이어갔다. 자민당 현별연합회라는 정치적 기반을 잃었고, 보수단체들은 시정(市政) 협력을 거부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동조와 격려, 감사의 목소리도 쇄도했는데, 3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전국은 물론 해외에서까지 7,300통 이상의 편지·엽서·전보 들이 날아들었다. 이 가운데 300통은 책으로 출간되어 천황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전쟁책임을 둘러싼 각계각층의 생각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나는 천황이 자신의 책임에 대한 분명한 자각 없이 그 생애를 마치려 하는 데 깊은 슬픔과 분노를 느낍니다. (…) 나는, 천황이 전후에 한 다음과 같은 말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 “(전쟁책임에 대해서) 그러한 말의 수사학에 대해서는, 문학 분야를 깊게 연구한 적이 없어서 잘 알지 못합니다.”(1975년 10월 31일 신문기자단과 가진 인터뷰) “원자폭탄이 투하된 데 대해서는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다 전쟁 중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히로시마 시민들에게는 미안한 얘기가 될는지 모르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같은 글) 이런 말들을 볼 때 천황이 일본 국민을 사랑한다는 소리는 전부 빈말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267~68면) 당신(모또시마 시장)이 말하는 책임이 어떤 의미인지 분명치 않으나 가령 도의적 책임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라면, (…) 매년 8월 15일에 폐하께서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고 하시는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폐하는 각지로 행차하실 적마다 반드시 그 지방의 호국신사를 찾아 머리를 숙이시는데 그 기분, 그 심정은 헤아리고 남음이 있다. 그 이상의 도의적 책임을 폐하께 요구한다는 것은 일본인의 도리가 아니다. (282면) 전쟁을 지도하는 행위가 죄라면, 일본으로 하여금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게끔 유도한 루스벨트나 원폭투하를 명령해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트루먼에게는 어찌하여 죄를 묻지 않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극동군사재판과 뉘른베르크 군사재판이 모두 승자가 패자에 대해 행한 일반적 보복재판이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284면) 천황에 대한 질책과 동정, 패전국 국민으로서의 참회와 자괴감이 뒤섞인 이런 의견들은 일본 사회가 패전 후 44년이 지나도록 전쟁책임을 제대로 묻지 못하면서 만들어낸 사회적 균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전후 70년이 지난 지금은 과연 어떤가. 모또시마 시장은 살벌한 위협과 불이익 속에서도 평화운동과 핵무기 철폐, 원폭 피해자의 국가 지원을 촉구하는 국내외적 행보를 거침없이 이어갔다. 1990년에는 실제로 저격을 당하기까지 했으나 굴하지 않았고,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4선에 성공했다. 박해받은 일본 초기 기독교도 ‘숨은 키리시딴’의 후예로서 그는 자기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인류 보편의 평화운동의 이념과 결합해 더 큰 힘을 만들어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2002년 한국의 원폭 피해자들과 나가사끼의 원폭 피해자 후손, 학교 선생님들이 모여 설립한 한일평화교류 공로상의 첫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아직 죽지 않은 천황의 나라에서 개인은 연대를 통해 세계와 대면한다 : 군국주의와 파시즘의 망령이 여전히 배회하고 있다 여기 등장하는 세 사람은 불복종하는 시민으로서 좁게는 일본이 자행한 침략전쟁의 책임에서부터 개인의 종교의 자유, 정교분리, 군국주의 이데올로기, 나아가 국가의 의미를 묻고 있다. 저자는 이들 세 사람과 그들이 만들어낸 작지만 강한 공동체의 이야기 사이사이로 저자 자신의 예사롭지 않은 개인사를 정밀하게 복원하여 섬세하게 엮어낸다. 이로써 개인의 역사가 사회의 역사와 맞물리는 지점 혹은 역사가 개인의 삶에서 작동하는 모습이 생생하고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미 군속 문관이던 미국인 아버지와 개명한 집안 출신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미군점령기 일본에서 미국인 학교를 다니며 일본의 안이자 밖에, 식민지이면서 점령국의 일원으로 존재했던 저자 노마 필드의 유년 경험은 지배적인 사회구조와 주류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는 예외적 소수자에 대한 깊은 이해로 연결되면서 큰 울림을 낳는다. 권혁태 교수는 “노마 필드의 개인적인 고백이면서 문학, 역사학, 사회학, 인류학, 논픽션이 만나는 그 어떤 지점에 서 있다”라는 말로 이 책의 가치를 평가한다. 저자가 누누이 강조하듯이 그리고 세 사람의 역사가 더없이 생생하게 보여주듯이 연대는 불복종하는 사회적 개인들의 유일한 힘이다. 개인은 연대를 통해서만 세계와 대면할 수 있다. 전쟁책임의 당사자 히로히또는 죽었지만 천황으로 대표되는 군국주의와 파시즘의 망령은 언제라도 부활할 준비를 갖추고 우리 곁을 배회하고 있다. 그것은 비단 일본만의 일인가. 지역패권을 둘러싼 각축 속에서 동아시아 각국은 모두 같은 위험 속에 놓여 있다. 또한 국민의 안전을 담보하지 못하는 국가, 책임을 방기하는 사회 지도층, 지고지상의 가치가 된 물질적 이익 앞에서 다른 생각을 가진 개인들의 존재는 더욱 절실하지 않은가. 이 책이 거듭 일깨우는 것이 바로 그 점이며 그것이 오늘 다시 이 책을 읽는 의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