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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문학은 자유의 기계이다 7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 『녹턴』, 가즈오 이시구로 인간은 심판을 당하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네메시스』, 필립 로스 희망은 작은 형태로 존재한다 『작은 것들의 신』, 아룬다티 로이 읽다, 일하다, 상상하다, 사랑하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아브라카다브라, 슬픔은 기쁨이 되어라 『한밤의 아이들』, 살만 루슈디 조용히 책 읽는 어머니와 활기차게 떠나는 딸들 『소네치카』,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뿌리 뽑힌 자의 기억을 찾다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단어가 더 많은 의미를 품는 세계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혜는 고통의 형식을 띤다 『절반의 태양』,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작은 인간의 속삭임을 모아 우주적 합창곡을 완성하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유리의 도시에서 유령처럼 살아가다 『뉴욕 3부작』, 폴 오스터 인종주의를 넘어서 지구 행성적 휴머니즘으로 『하얀 이빨』, 제이디 스미스 얼마나 쉽게 노예가 만들어지는지 보아라 『킨』, 옥타비아 버틀러 카우보이의 서부에서 퀴어의 서부로 『브로크백 마운틴』, 애니 프루 연주하는 것은 내 작은 심장 조각 『세상의 모든 아침』, 파스칼 키냐르 죽음이 웅웅대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화이트 노이즈』, 돈 드릴로 책을 불태우다, 삶을 불태우다 『화씨 451』, 레이 브래드버리 모든 사랑이 이별로 끝나는 세계에서 『여름 별장, 그 후』, 유디트 헤르만 빌어먹을 놈들에게 절대 짓밟히지 말라 『시녀 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아버지, 거칠지만 삶을 사랑하는 사람 『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폭력의 세계에서 어떻게 해야 인간일 수 있는가 한강의 작품 세계 에필로그 | 읽다, 일하다, 사랑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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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한 양난의 상황에서 문학이 우리를 돕는다”
운명의 순간에 죽은 척 가만있으면, 압도적 사건에 완전히 삶을 떠맡길 수밖에 없다. 운 좋으면 어제의 삶을 돌려받아 반복하는 것이고, 운 나쁘면 고양이 앞의 쥐처럼 한껏 희롱 당하다가 아무 흔적 없이 스러질 뿐이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이 양난의 상황에서 문학이 우리를 돕는다. 더 이상 이 삶이 지속되지 않고, 지속될 수 도 없을 때, 문학은 우리에게 숙명적 수동성에서 벗어나 적극적·능동적으로 삶을 바꾸는 방법을 가르친다. --- p.10 “여분의 인생을 등에 얹은 문장들이 한 줄씩 쌓인다는 사실 자체가 여분의 희망을 일으킨다” 작가는 이 잔혹한 운명을 차분한 어조로 전한다. 사건은 전혀 높낮이를 만들지 못한다. 눈을 빼앗길 만한 아름다운 묘사도 없고, 마음에 담을만한 격정의 표출도 드물다. 존재하는 것은 단정한 문장들의 연속체뿐이다. 그런데 읽다 보면 이상한 일이 생긴다. 굴곡 없는 단어들이 천천히 이어 지는 것이, 여분의 인생을 등에 얹은 문장들이 한 줄씩 쌓인다는 사실 자체가 어느새 여분의 희망을 일으킨다. 녹턴을 들을 때 우리는 저절로 눈물을 흘린다. 우리의 삶이란 운명의 손가락이 곳곳에서 연주하는, 녹턴의 ‘라이트모티프’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그러나 동시에 삶이란 결론을 전부 확인한 후에도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며 ‘한 번 더’를 외쳐대는 일이기도 하다. 「크루너」에서 한물간 스타 가수인 토니 가드너가 베네치아의 선상 가수인 ‘나’한테 말한다. “나는 더 이상 스타가 아니라오.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과거 의 영광에 만족하고 살 수 있소.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아니,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하고 말이오.” --- p.21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며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겸손한 사람들만이 이 부조리한 세계를 견딜 수 있다." 신과 달리, 인간은 세상 비극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지려 해서는 안 된다. 우연한 폭력, 어쩔 수 없는 비극 앞에서 몸을 낮추어야 한다. 인간이 온전히 선하게 살아야 한다고 믿는 것은 불가능한 오만이다. 그러나 이 세상이 악으로 가득 차게 내버려두는 것은 끔찍한 좌절이다. 오만한 자들은 자신을 순수한 천사로 여겨서 파멸하고, 좌절한 자들은 자신을 더러운 벌레로 생각해서 타락한다. 물론, 삶이 비극에 떨어지도록 내버려두어선 안 된다. 온 힘을 다해서 비극과 싸울 때, 인간은 고귀해진다. 이 투쟁은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한다. 중요한 건 성공이든 실패든 모두 하나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생에서 진짜 추구해야 할 것은 완전함이 아니라 겸손함이다. 약간의 실패도 용인하지 않는 두려움에 빠져서 버키처럼 자신을 극단으로 몰아선 안 된다. 한계를 인정하면서 인생을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에브리 맨』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현실을 다시 만드는 건 불가능해.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여.” 만약 좋은 삶이 있다면, 오직 이 한 문장으로 압축될 수 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겸손한 사람들만이 이 부조리한 세계를 견딜 수 있다. --- p.33 "추악한 현실을 무찌르고 아름다운 내일이 오도록, 희망은 작은 거미의 형태로 존재한다." 암무의 가족을 둘러싼 인도 현실은 암울하기만 하다. 그러나 그럴수록 암무와 벨루타가 남긴 사랑의 흔적은 절정의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마지막 장에서 암무와 벨루타 두 사 람은 “작은 거미” 한 마리에게서 인간의 미래를 찾아낸다. 어느 날 두 사람은 마늘 껍질 조각을 거미의 집에 기부한다. 그러자 거미는 놀라서 껍질을 벗어던진 채 “알몸으로” 바깥으로 뛰쳐나온다. 이후 며칠 동안 갑옷도 입지 않은 연약한 상태로 거미는 방 안을 헤맨다. 그러다가 거미는 서서히 새로운 앙상블을 갖추어 입기 시작한다. 작은 거미가 거부한 “쓰레기 껍질”은 “유행이 지난 세계관”처럼 세워져 있다가 한순간에 “부스러진다.” 이로써 낡은 신분의 옷을 벗어던지 고 새로운 집을 마련하고 싶어하는 두 사람의 마음이 선명한 상징을 얻는다. 이 참혹한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말라얄 람어 “나알레이”, 즉 내일로 끝난다. 오늘은 ‘작은 것들의 신’ 이 ‘큰 신’에게 패배했지만, 언젠가는 추악한 현실을 무찌르고 아름다운 나알레이가 올 수도 있지 않을까. 희망은 이렇게 작게 거미의 형태로 존재한다. --- pp.49-50 "소냐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건 문학이다." 그러나 가혹한 현실과 힘든 노동은 소냐를 전혀 굴복시 키지 못한다. 힘겨운 일들이 거듭되는 와중에도 그녀는 기쁨을 만드는 기계처럼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행복의 파편을 하나하나 모아간다. “한낮에 게으른 비가 내리던 날, 다리가 구부러진 거대한 회갈색 새가 텃밭에 내려앉던 날, 딸의 부푼 잇몸에서 처음으로 치아의 울퉁불퉁한 선이 나타난 날”같은. 이것들은 남들 보기엔 “자잘하고 무의미한 것”이지만 그녀한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상의 흔적들이다. 이런 기쁨이 있는 한, 아무리 가혹한 현실도 책으로 다져진 소냐의 고귀한 내면을 무너뜨릴 수 없다. 언제나 인간은 작디작은 행복만으로도 큰 고통을 이길 수 있다. 이것이 우리 같은 비루한 소시민들, 작은 인간들의 삶이다. --- p.81 소냐를 성녀로 만든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문학이다. 독서를 통해 그녀의 내면에 자리 잡은 “위대한 러시아 문학의 공간”이다. 그녀 이름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 나 오는 소냐와 같은 건 우연이 아니다. 로베르트의 불륜을 확인한 후 집으로 돌아온 소냐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결혼 이후 처음으로 푸시킨 작품을 읽으면서, “완벽한 단어로 구현 된 고상함이 주는 조용한 행복”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힘들 게 마련한 집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철거당하고, 모두가 떠나 버린 상태에서 홀로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을 때에도 소냐는 슬픔과 고독 속에서 우연히 이삿짐에서 떨어진 실러를 읽는다. 문학이 있는 한, 인간은 패배하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한마디로, 소냐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건 문학이다. 문학에서 그녀는 불행과 고통으로 가득한 외적 현실을 이겨낼 힘을 얻는다. 어떠한 비참에도 좌절하지 않는 소냐의 삶은 내면에 빛이 있는 인간이 얼마나 강한 지를 보여준다. 이것이 울리츠카야의 구원이다. --- p.85 "감정의 역사, 한 사태에 휘말린 사람들의 심정적 진실을 기록하는 이야기를 문학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무엇이라 하겠는가" 스베틀라나는 작가보다는 기자에 가까운 형태로 일한다. 그녀는 제2차 세계대전, 아프가니스탄 전쟁, 체르노빌 원전 참사 등 역사적 사건에 우발적으로 휩쓸렸던 시민들 수천 명의 증언을 일일이 듣고 하나하나 채록한 다음, 이들 의 목소리가 독자들에게 감정적인 공명을 일으킬 수 있도록 정밀하게 배치한다. 스베틀라나는 말한다. “나는 전쟁의 역사가 아니라 감정의 역사를 쓴다. 나는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역사가다.” 감정의 역사, 즉 한 사태에 휘말린 사람들의 심정적 진실을 기록하는 이야기를 문학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무엇이라 하겠는가. 스베틀라나는 문학을 통해서 소비에트 공식 기록이 억압해왔던 진실을 우리 앞에 드러낸다. --- p.128 "묻는다는 것은 항상 다르게 존재하는 법의 출발점이다" 라리세는 왕성한 호기심을 품고, 몬태그에게 끝없는 질문을 던진다. “그동안 태웠던 책 중 읽어보신 책은 없나요?” “제트카가 거리를 질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으세요?” “하늘을 보실래요?” “아저씬 행복하세요?” “오래된 나뭇잎 냄새를 맡아보신 적이 있나요?” 묻는다는 것은 항상 다르게 존재하는 법의 출발점이다. 질문은 삶의 속도를 늦추고, 생각의 구름을 일으키며, 아이디어의 번개를 유발한다. 덕분에 몬태그는 그녀에게 ‘왜 학교에 가지 않느냐’라고 처음으로 물을 수 있게 된다. 각성의 징조이다. 클라리세는 소녀답지 않은 깊은 통찰이 깃든 질문으로 그에게 되묻는다. 마치 소크라테스처럼 말이다. --- p.235 "사랑의 가능성이 모조리 소진된 세계에서 끝내 아름다운 언어를 찾아낸다"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인물들의 무관심과 무기력, 그들 사이의 끔찍할 정도로 서먹한 관계, 소통 불능으로 인한 이별은 헤르만 소설의 주요 서사다. 그녀는 꽉 막혀 버린 세계에서 자유를 꿈꾸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세대의 절망을 그려낸다. 이 세대의 사랑은 모두 이별로 끝난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모두 이별 이후에 쓰였다. 그러나 작가는 말한다. “언어를 찾아내고 싶고, 그 언어로 세상과 교류하고 싶고, 그걸 창작에서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유디트 헤르만은 사랑의 가능성이 모조리 소진된 세계에서 끝내 아름다운 언어를 찾아낸다. 전망 없는 세계에서 우리가 여전히 살 수 있는 것은, 뒤늦게라도 타인의 존재에 다가설 수 있는 건 문학이 있기 때문이라는 듯이 말이다. --- p.264 "이야기가 계속되는 한 인간은 패배하지 않는다" 무력無力이야말로 어쩌면 무력武力일지 모른다. 오브글렌이나 닉처럼, 모든 주체가 기꺼이 정의를 위해 투쟁에 나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순응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살아있는 모든 인간은 흔적을 남긴다.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더욱 선명해지는 기억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무기가 된다. 오브프레드와 리디아가 어떤 식으로든 기록을 남기려 하는 이유다. 죽어가는 아내 타비사 역시 아그네스한테 동화 같은 이야기를 남긴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통해 아그네스는 친어머니를 둘러싼 진실을 알아차리고 용기를 발휘해 행동에 나선다. 기억이 있고, 이야기가 있는 한 인간은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서글프고 굶주리고 황폐하고 절뚝거리고 사지가 절단 된 이야기”일지라도, 후미진 곳에 아주 작은 글씨로 암호로 남긴 기록일지라도, 이야기가 있으면 어딘가에 ‘당신’도 반드시 있다. ‘당신’이 있다면, 물론 연대도 있고 사랑도 존재 한다. 오브프레드는 말한다. “나는 이야기한다. 고로 당신은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를 계속할 생각이다. 그래서 스스로 견뎌낼 작정이다.” 이것은 작지만 커다란 목소리 이고, 동시에 이 아름다운 소설을 읽는 우리의 희망이다. 인간은 이야기의 존재다. 이야기가 계속되는 한 인간은 패배하지 않는다. --- p.277 "우리를 끝내 인간으로 남게 만드는 건 영혼" 한강은 폭력이 넘쳐나는 피바다의 세상에서 우리를 끝내 인간으로 남게 만드는 건 영혼이라고 말한다. 내면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영혼의 존재를 느끼는 한, 우리는 벌레나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다. 문제는 우리 안의 영혼은 깨지기 쉬운 유리 같은 것이어서 조심히 돌보지 않으면 쉽게 망가진다는 점이다. 형, 영혼이란 건 아무것도 아닌 건가. 아니, 그건 무슨 유리 같은 건가. 유리는 투명하고 깨지기 쉽지. 그게 유리의 본성이지. 그러니까 유리로 만든 물건은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거지. 금이 가거나 부서지면 못쓰게 되니까, 버려야 하니까. (『소년이 온다』 중에서) --- p.314 "작품을 읽는다는 건 인간으로 남기 위해 고통에 참여하는 행위" 위대한 작품은 항상 공동체의 고통 한복판에서 탄생한다. 역사와 사회의 고통을 정면으로 끌어안고, 그 고통의 치유에 이바지하는 언어를 찾아낼 때 문학은 비로소 고귀해 진다. 작품을 읽는다는 건 인간으로 남기 위해 결국 그러한 고통에 참여하는 행위일 것이다. 한강은 새삼 이 엄연한 사실을 우리에게 깨닫게 한다. 타인의 고통을 감지해서 자신의 고통으로 삼을 수 있다는 건 인간의 고귀함을 증언하는 최후의 방어선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소년이 온다』 중에서) --- p.3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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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고 적었다. 하지만 삶이 우리를 속일 때 우리는 슬퍼지고 노여워진다. 개인적 결핍, 타인으로부터의 몰이해, 경제적 무력함, 사회적 재앙인 전쟁과 계층 갈등, 재해의 순간들까지. 거대한 역사와 운명의 소용돌이 앞에서 우리의 사고가 정지하고 얼어버리는 순간. 문학은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맞설 것인가?"
이 책에서 운명의 장벽은 여성, 계급, 노동자, 정체성 혼란, 욕망, 역사와 계급의 부조리 등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현대의 다양한 문제들로 나타난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녹턴』 등에서는 현대인의 욕망과 고립, 무력감으로,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 등에서는 불평등한 노동 현실이 부각된다. 식민주의와 계급적 부조리를 다루는 아룬다티 로이 『작은 것들의 신』, 문명과 자연과 맞부딪히는 델리아 오언스 『가재가 노래하는 곳』, 또한 현대의 문제를 파헤친다. 그러나 저자 장은수는 예리한 시선으로 현대의 문제 뿐 아니라 인간의 인간다운 저항을 더욱 강조한다. 그것이 ‘읽기’로 가능하다고 말한다. 문학을 읽는 것이 우리에게 닥친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다만 작품 안에 그려진 타인의 낯선 삶과 낯선 감정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나의 시선을 변화시키고, 고통과 고독의 순간을 돌파해 나갈 마음의 힘을 길러주는 것이다. 그래서 읽기의 힘은 결국 나를 점점 넓혀 주고, 낯선 세상을 새로운 자아로 살아가게 한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질문에 답하듯 이 책에서 소개하는 이십 여권의 문학작품은 이 모든 좌절과 역경의 서사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삶의 의지를 완성해 간다. 저자 장은수는 친절한 안내자가 되어 그 과정을 보여준다. 아무리 현실이 참혹하다 해도 작은 희망의 내일을 보여주는 것(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이나, 사회적 억압이나 검열이 그 더럽고 냄새나는 폐지 속에서도 영롱한 지성의 불빛을 끝내 삭제할 수 없다는 것(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확인하면서 독자들은 읽기와 함께 운명에 저항하는 인간의 여러 모습을 만나게 된다. 책만 사랑하던 한 평범한 여성이 인내와 관용의 힘으로 어려운 현실을 이겨나가는 이야기 ( 『소네치카』)에서는 ‘아무리 가혹한 현실도 문학으로 다져진 인간의 내면을 무너뜨릴 수 없으며, 인간은 작디작은 행복만으로도 큰 고통을 이길 수 있다’는 용기를 대면하게 된다. '문학은 더 나은 존재가 되려고, 그리고 더 나은 삶을 살려고 분투하는 마음이 일으키는 변화를 추적해 보여준다. 이 책에서 다룬 작품들은 우리 삶을 고역으로 만드는 현대적 삶의 조건 속에서 변화를 가져오려고 일을 벌이고 애를 쓰는 인물들을 우리 눈앞에 그려낸다. 자기 삶을 바꾸는 데 관심 있는 사람들은 이 작품들에서 앞날을 위한 눈부신 비전을 얻을 것이다.' p.322 저자는 이 책에서 세헤라자데 같은 이야기꾼이 된다. 그가 설명하는 문학은 흥미진진하고 다채롭다. 그는 이 이십 여개의 ‘모던 클래식’을 안내하는 충실한 동반자가 되어 작품 읽기의 길을 열어주고, 독자들이 본질적인 질문과 마주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가 소개하는 작품 속의 세계는 더러 낯설고 잔인하고 무겁지만 그럼에도 그의 안내가 더없이 친절하고도 적실하여 작품을 직접 읽고 싶다는 마음을 일으킨다. 읽다 보면 그의 ‘안내’ 또한 하나의 훌륭한 서사라는 것을 알게 된다. 홀린 듯이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폭풍 같은 인용문이 곳곳 등장하여 작품의 정수를 엿보게 해준다. 그렇게 하나의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독자는 매번 본질적인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어떻게 맞설 것인가?” 거기서부터 독자는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게 될 거라 기대한다. 한편, 저자는 문학을 통해 맞이하는 가장 성숙한 체험은 저항이지만, 맞서는 것만이 저항은 아니라고 말한다. 과거와 현재의 시공간을 넘나들며 흑인 노예제도의 역사 한복판을 관통해가는 『킨Kindred』의 다나를 통해 ‘삶을 포기하고 싶고 무력하게 만드는 가장 큰 장벽 앞에서 어떤 경우엔 생존 자체가 가장 거룩한 저항’이라고 말해주기도 한다. "작품 속을 여행하면서, 나는 읽어서 재생의 힘을 얻고, 일해서 나와 세상을 바꾸며, 사랑해서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확인하는 인물들을 수없이 마주쳤다. 이 물신에 중독된 세계에서 문학은 우리가 짐승이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려준다." p.323 저자는 '사랑의 가능성이 모조리 소진된 세계에서 끝내 아름다운 언어를 찾아내는 것이 문학'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읽고, 일하고, 사랑하는 것’은 '무의미와 공허가 가득한 이 세계에서 우리 영혼을 지켜주는 세 가지 기본 동사'이다. 사랑은 삶의 충만한 의미가 되어주고, 일하기는 현실적인 삶을 지탱하는 보루가 된다. 그런데 사랑을 빼앗기고 일의 터전을 상실하는 참혹한 상황에서 인간은 여전히 인간일 수 있는가. 읽기는 독자에게 그런 상황을 제시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삶, 자신의 인간다움을 돌아보게 한다. 이러한 성찰하는 읽기가 일하기, 사랑하기와 연결될 때 인간은 보다 더 충만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읽다, 일하다, 사랑하다’를 세 가지 기본 동사라 말한 이유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 장은수는 한강 문학을 통해 새로운 저항의 차원을 강조한다.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인간으로 남기 위해 타인의 고통에 참여하는 행위다. 타인의 고통을 감지하는 감수성이 곧 저항의 내용이다. 문학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민감해질 뿐 아니라 ‘고통의 연대’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점진적으로나마 운명을 바꿔나갈 수 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돕는다’는 한강의 말은 ‘허구가 현실을 돕는다’는 말로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2020년 10월부터 2024년 7월까지 발행된 풍월당의 문화예술 무크지 『풍월한담』의 연재 내용을 다듬고 정리, 보완하여 묶은 것이다. 저자 장은수는 이 책이 문학에 관한 이론이나 평론이 아니라고 말한다. 읽기를 통해 문학 속 낯선 인생과 낯선 감정을 겪을 때에야 자기 삶 바깥에서 벌어지는 지혜를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문학 읽기는 타인의 이야기를 자기 삶의 나침반이요 인생 지도로 삼을 줄 아는 지혜다. 그런 지혜를 더 많은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는 것이 이 책을 펴내는 저자의 소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