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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그럴 리가
9 - 이세계로 떨어졌는데 □ ---이 없다 l 한유주 25 - 나는 기억한다, 책을 l 서성진 41 - 영원한 저항 l 천쓰홍 55 - 책을 금지하는 세상 l 이유진 71 - 가장 오래된 보호구역 l 이정모 2부 그렇지만 89 - 세상의 카프카들에게 내리는 빛 l 고명섭 105 - 건축을 죽인 자는 누구인가 l 박구용 123 - 소크라테스와 책 없는 세상 l 전병근 147 -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l 심의용 161 - 성의 없음의 디스토피아 l 김경수 3부 그럴지도 179 - 03.12.2124 그날 밤 l 조태성 197 - 실리카겔 - 책이 없는 세상에서 책은 어떻게 시작될까 l 이다희 211 - 잠 클리닉 l 김보경 227 - 엄밀하게 말해 인간이 아닙니다 l 한미화 241 - 신 없는 고통은 견딜 수 있지만 l 장은수 257 - 지구로 돌아온 조종사의 눈물 l 박산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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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책이 없었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컸을까? 태어나면서부터 책이 아예 없었다고 가정해보자. 너나 나나 도대체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사람이기는 할까?
--- p.14 나는 기억한다, 다섯 칸짜리 한옥의 끝방에 있던 외가 식구의 책을. --- p.27 나는 기억한다, 친구가 이성애 결혼을 한다고 알려왔을 때 내가 한 질문을. “그 남자 책장이 얼만한데? 책장에 무슨 무슨 책이 있는데?” 반은 농담이었다. 당연히 반은 진담이었다. --- p.34 상상할 필요도 없이 수많은 사람의 세상이 주도적으로 책을 없애고 있다. --- p.46 “나도 한때 소설가가 꿈이었다는 것 모르지? 하지만 소설가가 되면 굶어죽는 수밖에 없어. 그래서 역사 교사각 된 거야. 너도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봐. 나중에 내게 고맙다고 할 게 분명하니까.” --- p.49 그의 지시로 바닥부터 쌓여 올라가 마치 동굴의 석순처럼 위로 자라고 있던 책 기둥들이 하나둘 무너졌다. 책벌레가 파먹어 부서진 책, 오래된 보고서와 자료집들이 도처에서 발견됐다. 허물어뜨린 책들 사이로 미라처럼 말라붙은 박쥐 사체가 나오기도 했다. 그 작은 생물은 진짜 ‘책 동굴’에서 살다 간 것이다. 지적인 동물 같으니라고. --- p.58 사람들은 다이어트엔 줄곧 실패했지만 책의 다이어트는 성공적이었다. 너무 성공적이라 요요현상은 단 한 번도 관찰되지 않았다. 처음엔 300쪽이던 책이 30쪽, 3쪽으로 줄었고, 마침내 책은 두께 3밀리미터의 카드형 아이템이 되었다. --- p.74 과거에는 가정마다 수십에서 수천 권의 서적이 군락을 이루었으나, 현재는 일부 학술 기관과 골동품 수집가의 서가에서만 희귀하게 발견된다. --- p.79 책은 불러야 깨어난다. 어떤 문자는 낮은 부름에도 눈을 뜬다. 아주 사소한 목소리도 문자를 깨울 수 있다. 무겁게 잠들어 있어 웬만한 목소리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문자도 있다. 마음을 다해 큰 소리로 불러야만 몸을 뒤척이는 문자도 있다. 너무 깊이 박혀 있어 도무지 깨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문자가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킨다. --- p.92 지식과 권력을 독점한 사람들이 고안한 아주 오래된 하지만 가장 새로운 책이 바로 건축이다. --- p.116 첫째는 글에 의존하면 기억력이 감퇴한다는 것. 사고 외주화의 위험이다. “기억에 대한 연습을 게을리함으로써 배운 사람들의 혼에 망각을 줄 거요.” --- p.127 그리하여 마침내 소설의 언어는 거대한 오케스트라, 대화적 언어, 상호 관계성의 언어, 혼성의 언어가 된다. 세상에서 아직 결정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세상과 세상에 대한 최종 판단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 세상은 열려있고 자유로우며, 모든 것은 여전히 미래에 있으며 영원히 미래에 있을 것이다. --- p.138 책은 인생의 모든 것이 적혀 있거나 비밀스런 내용을 까발리는 재현물이면서 죽음과 함께하는 신체의 일부다. --- p.150 AI로 모든 정보가 이전되고, 그래서 마지막 책이 수장고로 들어가던 날 인류 문명의 새 시대, 거대한 도약이 일어났다는 축하 쇼가 열렸다. 인간이 만드는 책엔 인간적 오류가 묻어 있게 마련이지만, 광대한 AI는 상호 교차 검증을 통해 그 오류를 모두 교정한 것이라 안심하고 믿어도 된다는 설명이 따라 붙었다. --- p.189 안녕. 사랑해. 나는 두 단어를 정말 열심히 가르쳤다. 그 외에 저주의 말들은 키야가 알아서 배웠다. 안녕. 사랑해. 어디 갔어? 나쁜 년. 지옥에서 만나. --- p.209 ‘엄마는 왜 이렇게 걱정하는 걸까요. 내가 잠을 못 자는 게 그렇게 나쁜 일인가요. 내가 자다 자꾸 깨는 건 알겠는데, 일부러 안 자려고 하는 건 아니에요. 자꾸 뭔가 생각이 나는 걸 어떻게 해요.’ 왜 잠을 못 자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해야지라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아저씨는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 p.215 독서는 고독한 일이고, 인간은 누구나 고독한 시간을 필요로 하니까요. --- p.226 책 없는 세계에서 살 때, ‘그것’은 외롭고 힘들었다. 책은 그에게 개인적인 감정, 특히 절망과 우울을 알게 해주는 한편, 영웅적 행위의 고상함과 형이상학 탐구의 심오함도 가르쳤다. 그 결과, 그는 사람을 괴물로 만들지 않는 건 결국 우애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 p.248 무슨 이유에서인지 미래의 지구인은 머리를 박박 깎고 무채색의 옷을 입고 있어서 다 똑같아 보였는데, 그중 하나가 조종사를 도서관에 데려다줬다. 조종사가 반가운 마음에 책 한 권을 덥석 집어서 넘긴 순간 바로 책장이 바스라지며 먼지가 되어 허공으로 날아가버린다. --- p.2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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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책이 사라졌다는 발칙한 상상
경제 불황, 디지털 기기의 발전과 자료의 디지털화, 영상 콘텐츠의 대중화,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AI의 학습 속도. 단군 이래 계속되어 온 출판계의 숱한 위기에 아무리 발 빠르게 대처해도 종이책은 너무나 무겁고 느리다. 종이책이 사라진다는 예언과 아무도 책을 읽지 않게 될 거라는 호언장담 속, 이 책은 그 한 가운데를 뚫고 들어와 이렇게 제안한다. ‘진짜로 책이 사라져 버린 세상을 이야기해 봅시다!’라고. 『책이 사라진 세상』은 픽션과 논픽션 2권으로 출간되었다. 7명의 SF 작가와 16명의 각 분야 전문가가 필진으로 모여 머리를 맞대고 세상의 모든 책이 사라진 세상에 관한 발칙한 상상을 시작했다. 그 상상을 담아낸 픽션은 정말로 ‘사라졌’(*10월 26일까지만 판매되었다)고, 논픽션만이 지금-이곳에 남아 16명 작가의 다양한 시선을 통해 현실과 과거, 미래를 넘나들며 ‘책이 없는 세상’을 비추어낸다. 책은 결국 인간의 ‘이야기’다. 인간이 밝혀내거나 상상하거나 구전해 온 이야기. 우리는 먼 옛날부터의 이야기를 잊지 않기 위해 지독히 오랫동안 그 이야기들을 모으고 또 모아, 책이라는 형태로 만들어 읽어왔다. 그런 책이 사라진다면, 인간의 이야기는 어떻게 쓰일까. 어떻게 남아, 어떤 이야기를 전할 수 있게 될까. 책이 사라진 자리, 인간의 이야기 16명 작가의 이야기를 담은 논픽션은 3부로 나뉜다. 1부 ‘그럴 리가’, 2부 ‘그렇지만’, 3부 ‘그럴지도’. 주어도 동사도 목적어도 없이 부사만으로 이루어진 각 장의 제목은 ‘책이 사라진 자리, 인간의 이야기는 어떻게 이어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인 동시에 작가뿐 아니라 독자의 상상까지도 기꺼이 담아내는 넉넉한 빈칸의 역할을 해낸다. 1부 ‘그럴 리가’에는 바로 그 상상의 시작을 여는 작품을 담았다. 작가 한유주의 「이세계로 떨어졌는데 □ ---이 없다」와 편집자 서성진의 「나는 기억한다, 책을」은 각자의 기억과 경험을 내어오며 과연 책이 없는 세상이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합당한지를 차근차근 살핀다. 이어 작가이자 배우 천쓰홍의 「영원한 저항」, 이유진 기자의 「책을 금지하는 세상」에서는 쓰는 행위와 읽는 행위, 특정 책이 권력에 의해 ‘금지’된 상황을 ‘책이 사라진 세계’ 옆에 나란히 놓아두며 반복된 역사 속 우리가 이미 목도해온 장면을 일깨운다. 과학커뮤니케이터 이정모의 「가장 오래된 보호구역」은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에서 외계인의 시선을 가정하며 결국 인간이 책에서 이어온 것, 책이 사라진 이후에도 영영 이어가게 될 것은 ‘이야기’임을 다시금 확인한다. 2부 ‘그렇지만’은 오래전 책과 글, 말과 이야기에 관한 논의를 해온 인물과 그들의 작품을 경유해 ‘책이 사라진 세상’이라는 이야기를 확장한다. 단호한 불신을 품고 헤매다 이른 깨달음을 책으로 쓴 데카르트, 책을 씀으로써 자신을 끌어올린 니체, 약혼녀에게 온 마음을 담아 쓴 편지가 책이 된 카프카에 관한 이야기가 철학자 고명섭의 「세상의 카프카들에게 내리는 빛」에, 태초의 책에서 시작해 문자 언어와 음성 언어, 종교와 권력의 관계를 언어(책)로서의 건축으로 톺아낸 이야기가 박구용 교수의 「건축을 죽인 자는 누구인가」에 담겨 있다. 지식큐레이터 전병근의 「소크라테스와 책 없는 세상」에는 책을 경계하며 정작 자신은 책을 쓰지 않았던 소크라테스와 그가 그토록 중시했던 ‘대화’에 관한 고찰을 통해 문자 언어로서의 ‘책’을 환기한다. 이어 철학자 심의용은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에서 불온하고 공포스러운 ‘책’이 죽은 세상과 죽지 않은 세상을 보여준다. 『성경』, 『화씨 451』, 『전쟁과 선』이라는 세 권의 책뿐 아니라 마르셀 뒤샹, 제프 쿤스의 작품을 통해 사회적 작용과 반작용을 명료하게 담아냈다. 영화평론가 김경수의 「성의 없음의 디스토피아」는 ‘책이 사라진 세상’을 AI가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세상으로 전제하며, 이미 문학과 영상,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AI가 활약해 온 일련의 사건 연장선에서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AI가 인류를 지배한다는 상상보다, ‘AI를 통해 자행되는 성의 없음’ ㅡ 비인간적인 인간의 태도임을 역설한다. 3부 ‘그럴지도’에는 1부와 2부에서 차곡차곡 톺아낸 과거와 현재를 딛고 쏘아 올려진 상상 혹은 단단하게 기대하는 미래의 모습을 그린다. 조태성 기자는 「03.12.2124 그날 밤」에서 비상계엄이 선포된 어느 밤에 관한 이야기를 AI에게 물으며 벌어지는 섬뜩한 이야기를 그렸다. 이다희 시인의 「실리카겔 - 책이 없는 세상에서 책은 어떻게 시작될까」에는 ‘한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랑’한 여배우와 악기의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 구해두고 남은 다섯 개의 실리카겔, ‘안녕’과 ‘사랑해’만 가르쳤으나 ‘그 외의 모든 나쁜 말을 자연스럽게 배워’ 말하는 앵무새 키야가 시적으로 공명한다. 이후 키야의 말을 끊임없이 받아적는 ‘나’로 수렴하며 이 책에 다 담기지 않은 어떤 책의 시작을 상상하게 만든다. 지와인 김보경 대표의 「잠 클리닉」은 불면증에 시달리는 아이를 위한 치료법을 가진 ‘잠 클리닉’에 관한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통해 쏟아지는 콘텐츠, 디지털화된 세상 속 책의 역할과 의미를 제안한다. 「엄밀히 말해 사람이 아닙니다」에서 한미화 출판평론가는 도쿄, 김포, 제주, 대구 등 각 지역의 동네책방을 호명하며 책에서 동네책방으로 이어지는 지역 커뮤니티가 어떻게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지를 이야기한다. 편집문화실험실 장은수 대표는 「신 없는 고통은 견딜 수 있지만」에서 최초의 SF 소설 『프랑켄슈타인』과 단어 ‘로봇’이 처음 쓰인 작품 「R.U.R」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서 우리가 지식과 지혜, 영혼과 정체성 - 인간 삶의 본질에 가까이 가게끔 돕는 것은 결국 ‘책’임을 다시금 짚어낸다. 마지막으로 박산호 작가는 「지구로 돌아온 조종사의 눈물」에서 번역가이자 작가로서 ‘책이 없는 세상’을 상상한다. 직업인으로서 감각한 삶을 확장하는 책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독자는 이 책의 가장 마지막 문장, ‘나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라는 작가의 선언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한다. 즐거운 상상이자 단단한 비책으로서의 ‘책’ ‘책이 사라진 자리,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을까.’ 16편의 작품이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아직 책이 완전히 사라진 세상은 오지 않았으며, 그러니 이 책의 필진 중 아무도 그 시간을 사는 중은 아니므로. 다만 우리가 이야기를 듣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을 때 늘 그렇듯, 우리가 멀리까지 다녀올 수 있게끔 돕는 이 모든 ‘상상’이 우리를 이전보다 훨씬 넓고 크게 확장할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니 이 책은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거대한 ‘상상 놀이’이자, 닥쳐올 미래에 대한 단단한 비책이다.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필연적으로 펼쳐질 ‘책이 없는 세상’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