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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오래된 옥탑방에게
1장 시장의 소년들 2장 불가촉천민 소년 3장 처음 맛본 챠트 4장 말라카 지팡이 5장 홀리 축제 6장 짜릿한 힘 7장 가출 8장 단잠을 자다 9장 매력적인 소년 키션 10장 지붕 위의 방 11장 악마 클럽 12장 피크닉 13장 다시 만난 후견인 14장 비밀 15장 폭풍우 16장 울지 마, 제발 울지 마 17장 혼혈아 18장 텅 빈 데라에서 19장 몬순이 시작되다 20장 하르드와르행 기차에 오르다 21장 커다란 분노 22장 선택 23장 나는 모든 것이에요 옮긴이의 말 |
Ruskin B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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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러스티에게 금지된 땅이었다. 선교사 부인은 시장이 ‘도둑과 세균이 들끓는 곳’이라고 했다. 러스티는 꿈속 말고는 그곳에 들어가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p.25 안개가 서서히 걷히더니, 마치 빛나는 신처럼 온몸이 기름기로 번들거리는 살집 좋은 사내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의 앞에는 석탄불 위에 놓인 거대한 냄비가 있었고, 그 안에서는 기름이 파도처럼 출렁이며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사내는 민첩하고 노련한 손놀림으로 냄비 속 감자전을 모양 잡아 연신 뒤집었다. ---p.37 “그게 진실이야. 난 네 아빠의 바람대로 널 영국인으로 키우려고 노력했어. 하지만 네가 우리의 방식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니, 분명하게 말해두지. 너에게 유일하게 영국적인 건 네 아버지 하나밖에 없어. 넌 청소부 녀석보다 나을 게 없는 놈이라고. 알아?” ---p.68 자신이 이런 짓을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짜릿한 해방감에 휩싸였다. 러스티는 더는 아이가 아니었다. 이제 거의 열일곱 살이 다 된 남자다. 그도 타인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깨달음은 아주 특별한 발견이었다. 그의 몸에는 힘이(그게 악마든 신이든) 있었고, 그는 그 힘 안에서 자신감을 얻었다. 이제 러스티는 어른이었다! ---p.69 자려고 누웠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도 그녀였다. 그는 그때 처음 그녀의 아름다움, 그녀의 따뜻함과 부드러움을 의식적으로 떠올리면서 그녀를 좋아하기로 마음먹었다. ---p.115 둘은 지붕 위에 한 시간 동안 앉아서 해가 지는 풍경을 바라봤다. 소미가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를 때 그의 시선은 밤 풍경 속을 정처 없이 떠돌았고, 그 순간 그는 세상과 러스티에게서 벗어난 듯했다. 그가 별을 노래할 때 그는 별이 되었고, 강을 노래할 때는 강이 되었으니까. 그는 평범한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의 마음을 러스티에게 전하고 있었다. ---p.126 매그놀리아와 재스민 향기가 풍기는 그윽한 침묵. 그런데 침묵은 갑작스러운 날카로운 소리에 산산이 깨어졌다. 사방으로 울려 퍼진 비명이 가늘게 떨리는 공기를 타고 메아리쳤다. 놀란 러스티는 본능적으로 메나를 끌어안았다.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선지 아니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는지 알 수 없었지만, 꼭 껴안았다. ---p.154 부드러우면서 투명한 달빛이 방안을 적셨다. 들개들이 짖는 소리가 바로 바깥 들판에서 나는 것처럼 가까이 들렸다. 러스티는 생각했다. “들개는 죽음과 같지. 추하고 비겁하고 미쳤어….” 그 순간, 문간에서 희미한 뭔가가 킁킁거리며 냄새 맡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러스티는 고개를 들어 그쪽을 노려보았다. 달빛을 배경으로 어두운 형체, 비쩍 마르고 갈망에 찬 들개의 윤곽이 드러났다. 번갯불처럼 번뜩이는 눈빛은 악의로 가득 차 있었다. ---p.190 그건 마치 강가 근처에 살아서, 강물이 항상 집 근처를 지나 멀리 흘러가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집 안에 있는 러스티에겐 강물은 흐르지 않았다. 물은 계속 흘러갔지만, 강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뭔가 일어나길 열망했다. ---p.212 ‘난 가야 해.’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난 철이 다 끝나버린 망고처럼 썩고 싶지도 않고, 하루가 저물어갈 무렵의 태양처럼 다 타버리고 싶지도 않아. 나는 오늘에는 관심 없어. 난 내일을 원해. 난 도마뱀 무리와 같이 이 작은 방에서 벗어나야 해. 난 도 아니면 모가 되고 싶어. 흐지부지하게 평범한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 ---p.217 네가 데라에서 행복하지 않은 건 알아. 분명 외롭겠지. 조금만 참고 기다려봐. 그러면 안 좋은 시절은 지나갈 거야. 우리는 왜 사는지 이유도 모르고 살아가지. 그걸 알아내려고 해봤자 소용 없어. 우리는 살아야 해, 러스티, 그게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거니까. 그리고 그걸 원하는 한, 우리는 살아갈 이유, 심지어 그것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뭔가를 찾아내야 해. ---p.222 하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앞에 무엇이 기다릴지 몰라 두렵고, 알 수 없는 미래가 무서웠지만, 뒤로 가는 것보다는 앞으로 나아가는 게 더 쉬웠다. ---p.223 평소라면 스쳐 갔을 풍경들이 이제 그의 마음에 생생하게 새겨지고 있었다. 기차가 역을 벗어날 때 분주히 짐을 나르는 짐꾼들의 몸짓, 바나나 껍질을 핥는 개 한 마리, 짐 더미 사이에서 벌거벗은 채 목이 터지도록 울고 있는 아기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기차 승강장, 과일 노점들, 광고판들이 하나둘 모두 눈앞에서 사라져갔다. 기차에 속력이 붙자 객차는 삐걱거리며 미친 듯이 흔들렸다. 하지만 역과 마을에서 멀리 벗어나자 바퀴는 리듬을 되찾았고, 레일과 박자를 맞추며 노래를 불렀다. 그것은 끈질기면서도 슬프고 치명적인 노래였다. 또 하나의 삶이 끝나가고 있었다. ---p.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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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관심 없어, 나에겐 내일이 필요해.”
열일곱 살 소년이 쓴 열일곱 소년에 관한 이야기 『지붕 위의 방』은 러스킨 본드가 열일곱 살에 집필한 첫 소설이자, 자신의 유년 시절을 바탕으로 한 반자전적 성장소설이다. 영국계 인도인으로 태어나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했던 작가의 정체성 감각은, 부모를 잃고 영국인 후견인 밑에서 살아가는 소년 ‘러스티’ 모습에 그대로 투영된다. 어른에 대한 막연한 불신, ‘여기 말고 다른 곳’을 향한 동경, 이유 없이 흔들리는 불안과 갈망- 청소년 특유의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열일곱 살의 시선 그대로 생생하게 담겨 있다. ‘러스티’는 러스킨 본드 자신의 그림자이자 분신이다. 식민지 시대와 독립 이후의 인도를 모두 경험한 작가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한 소년의 성장 서사로 풀어낸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더라도, 스스로 선택한 자리에서 내일을 꿈꿀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이 이 이야기의 중심에 놓여 있다. 이러한 질문과 감정은 러스킨 본드 문학의 세계관과도 맞닿아 있다. 인도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그는 삶의 진리를 단정적으로 말하기보다, 외로움과 호기심 같은 미세한 감정의 결을 포착해 온 작가다. 그의 문학은 어린 시절을 보낸 히말라야 산기슭의 데라둔과 무수리의 풍경, 즉 숲과 비, 시장과 좁은 골목, 낯선 도시가 품은 고독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정서는 『지붕 위의 방』에도 깊게 스며 있다. ‘영국인답게’ 자라야 한다는 명목 아래 억압적인 통제를 받던 러스티는, 금지된 시장에 발을 들이면서 비로소 세상의 현실과 맞닥뜨리고, 난생처음 자유의 감각을 경험한다. 소년의 첫 번째 방, 스스로 선택한 곳에서 꾸는 꿈 성장은 ‘떠남’에서 시작된다. 이 소설에서 성장은 어른이 되기 위해 참고 견디는 시간이 아니라, 익숙한 세계를 떠나 낯선 세계를 직접 통과하는 경험으로 그려진다. 러스티는 억압적인 후견인의 집을 벗어나 인도의 거리와 시장, 축제와 사람들 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해 왔는지, 또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지를 알아간다. 도망처럼 보였던 선택이 자기 발견의 과정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영국 문화와 규범 속에서 자랐지만, 인도 친구들과 어울리며 전혀 다른 삶의 온도와 리듬을 경험한 러스티는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선택하기보다, 그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간다. ‘나는 어디에 속해야 하는가’에 매달리기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배워간다. 이 모든 여정의 중심에는 ‘지붕 위의 방’이 있다. 작고 허름한 이 방은, 문학적으로 영국 가정과 인도 사회 사이, 어린 시절과 어른의 세계 사이, 도망과 선택 사이에 놓인 중간 지대를 상징한다. 후견인의 집을 떠나 ‘지붕 위의 방’을 얻는 순간, 그 공간은 단순한 거처를 넘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자리’가 된다. 그곳에서 러스티는 완전히 보호받지도, 완전히 책임지지도 않는 상태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을 시험한다. 타인의 기대나 규범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삶의 방향을 정하겠다고 마음먹는 그 순간, 소년은 비로소 어른이 된다. 『지붕 위의 방』이 반세기 넘게 독자들에게 읽혀 온 이유 또한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그는 돌아갈 수 없었다. 앞에 놓인 일이 두려웠고, 미지의 세계가 두려웠지만, 뒤로 가는 것보다 앞으로 나아가는 게 더 쉬웠다.” -본문 중에서 영화 〈세 얼간이〉를 떠올리게 하는 울고 웃기는, 사랑스러운 성장소설 영화 〈세 얼간이〉를 좋아한다면 『지붕 위의 방』 역시 자연스럽게 마음에 닿을 것이다. 〈세 얼간이〉가 청년들의 방황과 우정, 사회 규범 앞에서 흔들리는 마음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듯, 이 소설 또한 미숙해 보이는 청소년기의 시간을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다. 웃음과 슬픔이 교차하는 순간들 속에서도 청년들의 들끓는 마음의 열기를 생생하게 담아낸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닮았다. 이러한 태도는 작품 전반에 펼쳐지는 인도의 풍경과 일상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지붕 위의 방』의 또 다른 매력은 인도의 삶을 감각적으로 살아 느끼게 한다는 데 있다. 형형색색의 가루가 흩날리는 홀리 축제, 지글지글 튀기고 볶는 거리 음식의 소리와 냄새, 남녀노소가 뒤엉켜 북적이는 시장의 열기, 우물가에 모여 담소를 나누는 선량한 이웃들, 제약 없이 거리를 활보하는 소들과 원숭이들까지, 평범한 일상의 리듬이 영화처럼 펼쳐진다. 몬순이 몰고 오는 갑작스러운 비와 눅눅한 공기, 수시로 지붕 위로 날아드는 화려한 깃털의 새들까지, 독자는 인도의 문화와 풍경, 일상을 오감으로 경험하게 된다. 세련된 영국식 문장과 순수한 인도적 감성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이 작품을 두고 〈뉴욕 타임스〉는 이렇게 평했다. “열기로 가득 찬 바자르(시장)처럼 이 책은 냄새와 소리, 혼돈과 일상적 삶의 미묘함까지 담아냈다.” 집을 뛰쳐나온 러스티에게 지붕 위의 방은 단순한 거처가 아니다. 그곳은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자, 삶을 배워가는 공간이다. 아침 햇살에 눈을 뜨고, 몬순의 폭풍우에 창문이 날아갈까 두려워하며, 창밖에 드리운 망고나무가 달콤하게 익어가기를 기다리는 곳. 위험과 설렘, 두려움과 기쁨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 방에서 러스티는 삶의 감각을 배운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메나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키션마저 자취를 감추면서 러스티는 다시 혼자가 된다. 돈도, 가족도, 미래에 대한 확신도 없는 상황에서 그는 영국으로 떠날 것인지, 인도에 남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선다. 이 소설은 소년의 탈출기로 시작되지만, 그 끝은 도망이 아니다. 러스티는 깨닫는다. 자유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품은 채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겠다고 선택하는 용기라는 것을. 『지붕 위의 방』이 오랜 시간 사랑받아 온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울고 웃고 흔들리면서도, 끝내 앞으로 한 걸음 내딛는 이야기, 우리 모두의 청소년기를 닮은 성장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