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프롤로그 004
chapter 1 불우했던 노마 진 먼로의 어머니, 글래디스│생후 12일 만에 위탁가정으로│ 개방적이었던 두 번째 위탁가정 노마 진의 후견인 그레이스 맥키│노마 진을 아꼈던 위탁모 애나 로우어│열여섯에 제임스 도허티와 결혼하다 chapter 2 배우 마릴린 먼로의 탄생 마릴린 먼로의 가능성을 알아본 벤 리언│무명 시절에 만난 로버트 슬래처│배우의 길로 이끌어준 대릴 자누크│뉴욕포스트 기자 시드니 스콜스키│조건 없이 손을 잡아준 존 캐롤│할리우드 최고의 거물 조지프 쉔크│연기 코치 나타샤 리테스│노래와 춤을 가르쳐준 프레드 카거│젊은 부호 헨리 로젠펠드│마지막 삶을 먼로와 함께하고 싶어 한 자니 하이드 chapter 3 먼로, 시대의 아이콘이 되다 메소드 연기를 주창했던 엘리아 카잔│연기력을 인정받은 영화 〈밤의 충돌〉│〈플레이보이〉 창간호를 장식한 먼로│ 먼로의 첫 주연작 〈언제든지 노크하세요〉│최고의 섹스 심벌로 인정받은 〈나이아가라〉│춤과 노래가 일품이었던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톱스타임을 입증한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가수로도 이름을 날린 〈돌아오지 않는 강〉│뮤지컬 코미디 〈쇼처럼 즐거운 인생은 없다〉│최고 여배우와 최고 야구 선수의 결혼│먼로가 뽑은 최고의 무대, 주한 미군 방문 공연│먼로의 아이콘이 된 〈7년만의 외출〉 chapter 4 먼로의 새로운 도전과 좌절 유명 사진작가이자 연인이었던 밀튼 그린│‘마릴린 먼로 프로덕션(MMP)’을 만들다│연기력 향상을 위해 꾸준히 연기 수업을 받다│정서 불안에 시달렸던 먼로│먼로의 피난처이자 방패였던 아서 밀러│20세기 폭스와 혁명적 새 계약을 맺다│먼로에게 특별했던 영화 〈버스 정류장〉│아서 밀러, 하원 비미활동조사위원회 조사를 받다│극작가 아서 밀러와의 ‘세기의 결혼’│MMP의 첫 번째 영화 〈왕자와 쇼걸〉│흑백 코미디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이브 몽땅과 함께한 〈사랑을 합시다〉│먼로와 사랑에 빠진 이브 몽땅│아서 밀러 각본, 먼로 주연의 〈미스핏〉│먼로의 최측근 랠프 로버츠와 패트 뉴컴│아서 밀러와 이혼하고 다시 혼자가 되다 chapter 5 케네디 가문과 주변 인물들 정치적 야심이 컸던 조지프 케네디│장남 조지프 2세와 둘째 존 F. 케네디│케네디와 닉슨, 존슨, 그리고 부시│케네디의 부인 재클린 케네디│케네디의 매제인 미남 배우 피터 로포드 1960년 대통령 선거│정권의 2인자가 된 로버트 케네디│마피아 보스 샘 지안카나│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프랭크 시나트라│케네디의 복잡한 여자 문제│문제의 여인, 주디스 캠벨 엑스너│먼로와 케네디 chapter 6 먼로, LA로 돌아오다 정신과 병동에 갇히다│디마지오, 먼로를 구해 내다│뉴욕에서 LA로 돌아오다│오랜 친구 지니 칼멘│먼로를 정신적으로 지배했던 랠프 그린슨│먼로의 법률 담당 변호사 밀튼 루딘│케네디 대통령의 LA 방문 chapter 7 1962년 그해 로버트 케네디의 LA 방문│브렌트우드에 집을 사다│멕시코시티 방문으로 감시의 대상이 되다│팜 스프링스에서 대통령을 만나다│문제가 많았던 영화 〈무엇이든 해야〉│매디슨 스퀘어가든 행사와 리셉션│먼로와 케네디 형제가 함께 찍힌 사진│아찔한 누드 수영 사진│케네디, 먼로를 버리다│일방적인 해고와 먼로의 반격│‘먼로의 승리’로 끝나다│로버트 케네디와 그의 처가 스케이컬 가문│로버트, 네바다 핵 실험장을 찾다│마릴린 먼로와 FBI│5월 말~7월 말, 먼로와 케네디 형제│로버트 케네디와 링컨 컨버터블 chapter 8 먼로의 죽음과 의문투성이 사건 현장 칼 네바 카지노 호텔에서 생긴 일│먼로의 마지막 한 주│로버트 케네디의 1962년 8월 3~8일│1962년 8월 4일 자정~5일 오전 5시│1962년 8월 5일 오전 5시~6일│먼로의 수면제 미스터리│의혹의 사건 현장│로버트 케네디, 헬기로 떠나다│먼로, 부검대에 오르다│석연치 않은 부검 결과│마릴린 먼로의 장례식 chapter 9 로스앤젤레스 경찰국 ‘죄악의 도시(Sin City)’ LA│LAPD 국장의 특별한 법적 지위│희대의 LAPD 섹스 스캔들│미국 역사상 가장 막강했던 윌리엄 파커 국장│LAPD와 로버트 케네디│케네디와 LAPD의 특별한 관계│대릴 게이츠, LAPD 국장이 되다 chapter 10 진실의 문을 열다 먼로 죽음을 재수사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지다│진실의 문을 열게 한 앤서니 서머스│절친 지니 칼멘의 기억│진실의 단서를 제공한 나탈리 트룬디│도청 전문가 프레드 오타시의 증언│방영되지 못한 마릴린 먼로 다큐멘터리│끝내 침묵을 지킨 패트 뉴컴│1982년 11월 주간 〈글로브〉 기사│앰뷸런스 구급요원의 진실│마릴린 먼로 30주기 chapter 11 범죄의 재구성 사망 하루 전 1962년 8월 3일│1962년 8월 4일 오전 8시~오후 3시│1962년 8월 4일 오후 3시~오후 10시│1962년 8월 4일 운명의 밤│1962년 8월 5일에서 장례까지 에필로그 마릴린 먼로, 사망 후 참고 문헌 |
李相敦
이상돈의 다른 상품
|
‘조물주가 창조한 최고의 미인’이라는 찬사를 들었던 먼로.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그녀의 삶은 순탄하지 못했다, 밖으로는 화려했지만 내면적으로는 외로웠고, 자의식은 강했으나 동시에 의존성이 강한 양면성을 지녔다. 대중은 그녀의 연기에 환호했으나 정작 자신은 연기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렸다. 그러한 모순은 그녀를 납득하기도, 설명하기도 어려운 이상한 죽음으로 이끌었다.
--- p.4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불과 2년 10개월의 재임 기간에 쿠바 문제를 서툴게 다루어 핵전쟁을 일으킬 뻔했고, 베트남에 경솔하게 개입해 미국에 크나큰 상처를 남겼다. 베트남 전쟁이라고 하면 흔히 존슨 대통령과 닉슨 대통령을 연상하지만, 베트남에 미군을 개입시킨 장본인은 케네디와 그의 참모들이었다. 존슨은 케네디가 시작한 전쟁을 확대시켰고, 닉슨은 존슨이 무모하게 벌여놓은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전쟁을 했다. 케네디가 평화를 추구했다는 주장은 신화일 뿐이다. --- p.8 노마 진과 계약을 추진한 20세기 폭스의 벤 리언은 이미지 변신을 위해 이름을 바꾸자고 했다. ‘노마 진 도허티’는 스타에 어울리는 이름이 아니라면서 새 이름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벤 리언은 ‘마릴린(Marilyn)’이라는 이름을 제안했고, 노마 진은 아름다운 이름이라면서 그 자리에서 동의했다. 그러면서 성은 자신과 관련되어야 한다면서 어머니 글래디스의 결혼 전 성인 ‘먼로(Monroe)’로 하자고 했다. 이렇게 해서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가 탄생했다. --- p.41 먼로는 할리우드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했다. 할리우드에서 여자가 성공하기 위해선 자신의 몸을 가꾸고 그 몸을 할리우드를 장악하고 있는 남자들에게 아낌없이 던져야 함을 깨달았다. 먼로는 자신의 몸, 특히 봉긋하게 높이 솟아 있는 가슴이 자신의 최고 상품임을 알았다. 먼로는 잠자리에 들 때는 꽉 조여드는 브래지어를 해서 가슴이 솟아오르도록 했고 낮에는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서 남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 p.49 20년 결혼생활을 통해서 장성한 자식들이 있음에도 하이드는 부인과 이혼하고 먼로와 결혼하고자 했다. 자기가 죽어가고 있음을 알고 있는 하이드는 마지막으로 먼로와 함께하고 싶어서 여러 차례 청혼했으나 먼로는 거절했다. 그런데도 하이드는 자기 유산의 1/3을 먼로에게 주도록 유언장을 고치려고 했다. --- p.55~56 톰 켈리가 찍은 먼로의 붉은 벨벳 위의 누드 사진은 새로운 잡지를 출간하려는 젊은 사업가 휴 헤프너에게 500달러에 팔렸다. 휴 헤프너는 〈플레이보이〉 창간호인 1953년 12월 표지를 먼로의 사진으로 하고 센터폴드에 먼로의 누드 사진을 실었다. 〈플레이보이〉 창간호 54만 부는 단숨에 매진되는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 p.65 1953~54년에 나온 4편의 영화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먼로의 대표작이다. 먼로는 스타로 등극한 것은 물론이고 시대의 아이콘이 됐다. 먼로가 출연한 영화는 상업적으로도 대성공을 거두어서 20세기 폭스는 떼돈을 벌었다. 하지만 먼로가 벌어들인 수입은 21세기 폭스가 벌어들인 돈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먼로가 유명하지 않을 때 맺은 계약 때문이었다. --- p.71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먼로는 무대 위에 설 때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몸에 딱 붙는 옷을 입어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안내 장교는 먼로에게 감기가 든다면서 두꺼운 파카나 코트를 입으라고 했으나 먼로는 장병들이 자기의 몸매를 보고 싶어 한다면서 어깨가 훤히 드러나고 몸에 착 달라붙는 얇은 드레스를 고집했다. --- p.77~78 먼로는 부대 막사에서 자고 병사들과 함께 콘셋 식당에서 식사했다. 먼로는 이 공연을 평생토록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먼로는 한국에 4일간 머무르며 인제, 춘천, 의정부, 대구, 포항 등지에서 10회의 공연을 했고, 10만 명이 넘는 군인이 먼로의 공연을 보았다. 그때 우리나라에 주둔한 미군이 23만 명 정도였으니 반 가까운 군인들이 먼로의 공연에 열광한 것이다. --- p.78 디마지오와의 이혼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7년만의 외출〉은 1955년 6월에 개봉해서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었다. 영화 평론가들도 좋은 평을 했고 20세기 폭스는 큰 수입을 올렸다. 결혼 7년 차 신드롬에 시달린 남자 주인공 역할을 잘 해낸 톰 이웰은 골든 글로브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는 먼로가 20세기 폭스의 최고의 상품임을 확인시켜주었으나 스타가 되기 전에 맺은 불리한 계약에 불만을 품고 할리우드를 떠난 후였기 때문에 먼로에게는 큰 소득이 없었다. --- p.83 1955년 1월 맨해튼에서 기자 80여 명을 초청해서 먼로와 함께 칵테일 파티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먼로는 자신과 밀튼 그린이 함께 ‘마릴린 먼로 프로덕션(MMP)’을 발족할 것임을 발표했다. 먼로는 자신이 51%, 그린이 49% 지분을 갖고 참여하며 독자적으로 영화를 제작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배역으로 나올 영화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 p.93 단지 금발을 하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가벼운 배우가 아닌 비중 있는 문화 인사로 인정받기를 원했던 먼로에게 밀러는 매우 이상적인 파트너였다. 더구나 당시 먼로는 할리우드 스튜디오라는 거대한 자본 세력과 싸우고 있었다. 자기를 단지 소모품 정도로 알고 있는 할리우드의 영화산업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먼로로서는 아서 밀러만큼 든든한 배경이 없었다. --- p.107 1955년 12월 31일, 먼로와 20세기 폭스는 새로운 계약에 서명했다. 새 계약은 다음과 같은 혁신적인 조항을 담고 있었다. 첫째, 먼로는 영화 한 편 출연에 10만 달러를 받기로 한다. 둘째, 먼로는 향후 7년 동안 20세기 폭스가 만드는 영화 4편에 출연하기로 하고, 20세기 폭스 외의 다른 스튜디오가 만드는 영화에 매년 한 편 출연할 수 있다. 셋째, 먼로는 20세기 폭스가 만드는 영화에 출연할 때 자기가 원하는 감독을 지정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영화 대본에 대한 동의권을 갖겠다는 먼로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p.107~108 케네디는 유명 배우와 가수가 선거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잘 알았다. 케네디는 시나트라가 할리우드의 유명인들을 움직일 수 있을뿐더러 마피아와도 관계가 있어 마피아가 장악하고 있는 노조원들의 표를 얻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케네디와 시나트라, 케네디와 샘 지안카나, 시나트라와 먼로와 케네디 사이의 복잡한 관계는 결국 먼로의 죽음과 케네디 암살로 이어지게 된다. --- p.179 케네디의 난잡한 여자관계는 FBI의 에드가 후버 국장, CIA의 고위 간부, 합동참모본부의 장성들도 알고 있었다. 케네디에게 유고가 생기면 대통령직을 승계할 린든 존슨 부통령도 잘 알고 있었다. 샘 지안카나 등 마피아 보스들도 물론 잘 알고 있었다. 로버트 케네디 법무부 장관도 형의 여자 문제를 알고 있었다. --- p.184 1961년 한 해 동안 먼로는 영화 한 편도 찍지 않았다. 아서 밀러와 이혼하고 이브 몽땅과의 결합도 이루지 못한 먼로에게 케네디는 희망이고 위안이었다. 먼로는 케네디와 재클린 사이가 파탄이 났다고 생각했다. 그 시기에 먼로를 가까이서 만난 사람들은 먼로가 케네디와 결혼해서 퍼스트레이디가 되는 엉뚱한 꿈을 꾸고 있었다고 전했다. --- p.213 토요일 오후, 피터 로포드는 검은 가발과 선글라스를 쓴 마릴린 먼로와 함께 전세 비행기 편으로 팜 스프링스 공항에 도착했다. 이들은 빙 크로스비 저택으로 향했고, 케네디 역시 저녁 파티에서 빠져나와 빙 크로스비 저택에 도착했다. 그리고 게스트 스위트에서 케네디와 먼로는 밤을 보냈다. --- p.226~227 피터 로포드가 연단에서 먼로를 소개하자 먼로는 입고 있던 흰색 모피 코트를 벗어서 로포드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얇은 피치 핑크빛 드레스가 조명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청중은 벗은 모습 그대로인 먼로의 자태에 탄성을 쏟아냈다. 그리고 먼로는 매우 섹시한 목소리로 케네디를 위해 생일축하 노래를 불렀다. --- p.231 마릴린 먼로가 케네디 대통령의 마흔다섯 생일축하 행사에서 몸매가 드러나는 얇은 옷을 입고 섹시한 축가를 부른 사건은 여파가 컸다. 많은 사람이 대통령과 먼로의 관계가 어떨 것이라고 추측하고 수군거렸다. --- p.238 로포드는 먼로에게 다시는 케네디에게 연락하지 말라면서 “마릴린 너는 케네디의 여러 섹스 상대의 하나일 뿐이야”라고 말하고 끊었다고 전해진다. 이 전화를 받은 먼로는 거의 졸도할 뻔했다. 매디슨 스퀘어가든에서 케네디의 생일 축가를 부르고 나서 열흘이 안 되어 이런 말을 들었으니 청천벽력이었다. --- p.241 8월 1일, 20세기 폭스와 먼로는 새로운 계약을 체결했다. 20세기 폭스는 먼로에게 〈무엇이든 해야〉 출연료 10만 달러 외에도 배상금을 지급하고 다음 영화에 출연할 경우 먼로에게 50만 달러를 지급하며, 10월부터 촬영을 재개하기로 했다. 먼로는 활짝 웃었고, 할리우드 언론은 이것을 ‘먼로의 승리’라고 썼다. 하지만 사흘 후 먼로는 사망했다. --- p.250 1962년 여름, 케네디 형제에게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바로 마릴린 먼로였다. 만일에 먼로가 입을 열기라도 하면 케네디 정부는 무너질 것이며. 케네디 가문 전체가 몰락할 것임은 불 보듯 분명했다. 따라서 로버트 케네디는 ‘먼로 리스크’를 해결해야만 했다. --- p.259 프랭크 시나트라와 피터 로포드는 먼로에게 로버트 케네디를 잊으라고 설득했으나 먼로는 듣지 않았다. 먼로는 로버트 케네디를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8월 4일, 로버트 케네디는 브렌트우드에 있는 먼로의 집을 찾았고, 그날 밤 먼로는 죽었다. --- p.265 클레몬스 경사는 모든 것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먼로가 숨져 있는 침대 옆 테이블에는 빈 약병 여러 개가 놓여 있었지만 물컵은 보이지 않았다. 도무지 어떻게 그 많은 수면제 알약을 삼켰는지 의심스러웠다. --- p.286 외과적 사망원인이 없었기 때문에 사인은 독극물 검사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독극물 분석가인 랠프 애버나시는 먼로의 혈액과 오줌, 위 · 소장 · 간 등 장기 조직을 검사하기 시작했고 몇 시간 후 그 결과가 나왔다. 먼로의 혈액에서는 4.5밀리그램 퍼센트의 펜토바비탈 성분과 8.0밀리그램 퍼센트의 클로랄 하이드레이트가 검출됐고, 간에서는 13밀리그램 퍼센트의 펜토바비탈이 검출되었다. --- p.303 부검을 끝낸 먼로의 시신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얼굴은 시반으로 덮여 있었고, 절개한 후 두개골은 대충 봉합해 놓았으며 그 유명한 봉긋한 유방은 개복한 탓에 주저앉아 있었다. 스나이더는 감정을 억누르며 먼로의 얼굴과 가슴을 생시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복구했다. 할리우드 최고의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처참한 시신이 돼버린 미국 최고의 미인을 원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 p.309 먼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먼로의 집에 급히 도착한 조암스 기자는 먼로의 집에 제임스 해밀튼 경감이 와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에 대해 의문을 품은 조 히암스 기자는 취재를 계속해서 전날 밤 로버트 케네디가 LA에 왔었고, 피터 로포드 집 부근에서 헬기를 타고 LA 공항으로 갔음을 밝혀냈으나 그가 쓴 기사는 끝내 나오지 못했다. --- p.334 먼로가 죽자 슬래처는 먼로의 죽음은 케네디 형제와 관련이 있다고 직감적으로 느꼈다. 먼로가 슬래처에게 보여준 것이 먼로의 ‘레드 다이어리’로, 먼로의 다른 서류들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 p.346 제프리스는 자기가 먼로가 죽을 때 유니스 머레이와 함께 거실에 있었으며, 그날 오후에 로버트 케네디와 피터 로포드가 왔을 때도 거실에 있었고, 밤늦게 앰뷸런스가 올 때도 거실에 있었으며, 먼로의 시신이 별채 침실에서 본채 침실로 옮겨질 때도 거실에 있었다고 고백했다. 또 머레이가 그린슨을 부른 이유는 별채에서 먼로가 코마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30년 동안의 침묵을 깨고 증언했다. --- p.352~353 현업에서 은퇴한 프레드 오타시는 오랜 침묵을 깨고 자기가 먼로와 로포드의 집에 도청장치를 설치했으며, 로포드의 집에서 케네디와 먼로가 침실에서 같이 있는 소리도 녹음했다고 BBC 제작진에게 시인했다. 오타시는 그 후 먼로가 죽던 날 먼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녹음한 테이프도 있다고 인정했다. --- p.361 타블로이드 주간지 〈글로브〉 1982년 11월 23일 자에 ‘나는 마릴린 살해를 보았다’라는 표지 제목 기사가 나온 것이다. 제임스 홀이란 사람이 자기는 앰뷸런스 구급요원이었으며 먼로가 죽던 날 밤 자신의 앰뷸런스가 먼로의 집에 갔었고, 먼로가 죽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인터뷰한 것이다. --- p.370 제임스 홀이 도착해서 벗은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는 먼로를 보았다는 대목도 중요하다. 수면제를 과다하게 삼키면 복통과 구토, 그리고 경련이 일어나서 괴로워하는 상태로 숨을 거두게 되는데, 먼로의 모습은 그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먼로는 수면제를 복용한 것이 아니고 다른 방법으로 수면제 성분이 먼로의 체내로 들어와서 정신을 잃어버렸다고 추정할 수 있다. --- p.378 여러 정황으로 보건대 먼로는 로버트 케네디가 오후 3시경 자기 집을 떠난 후에 케네디 형제와는 끝났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먼로는 로버트 케네디한테 “나는 고깃덩이가 아니라면서 기자회견을 하겠다”고 했고, 저녁에 전화를 걸어온 피터 로포드에게 “나 대신 그에게 안녕이라고 전해줘요”라고 해 케네디에게 선전포고하는 것처럼 들렸을 것이다. --- p.400 노년에 죽음을 앞둔 노먼 제프리스가 1993년에 고백한 바에 의하면, 8월 4일 11시 45분~12시, 앰뷸런스가 떠난 후에 사복 경찰관의 지시에 따라 먼로의 시신을 별채 침실에서 먼로의 침실로 옮겼다. 시신은 침대 위에 엎드린 자세로 해놓고, 수면제 약병 여러 개가 놓여 있던 베드사이드 테이블도 먼로의 침실로 옮겼다. --- p.4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