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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걷다
보수적 자유주의자의 여정
이상돈
에디터 2021.06.03.
베스트
정치/외교 top100 9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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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머리말· 9

제1장. 1951~1969년: 부산 피난둥이에서 청년으로
제2장. 1970~1979년: 법과 정치를 공부하다
제3장. 1979~1982년: 미국 유학 생활
제4장. 1983~2002년: 교수 그리고 논설위원
제5장. 2003~2007년: 정치 평론의 시간
제6장. 2008~2010년: 4대강 사업 반대
제7장. 2011~2012년: 새누리당 비대위·총선
제8장.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제9장. 2013~2015년: 자유의 시간
제10장. 2016~2017년: 국민의당·박근혜 탄핵
제11장. 2017~2020년 2017: 대선·제3당의 몰락
제12장. 2016~2019년: 환경노동위원회 활동
에필로그?421

저자 소개 1

李相敦

1951년 12월, 6·25전쟁 피난 중 부산에서 태어났다. 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돌아와서 수송초등학교, 경기중·고등학교, 서울대 법대를 다녔다. 4·19와 5·16에서 1972년 유신에 이르는 격동의 세월 속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군 복무 후 미국 유학을 떠나서 툴레인대학과 마이애미대학에서 공부했다. 1980년 툴레인대학에서 법학석사 학위를 받았고, 1981년 마이애미대학에서 비교법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다시 툴레인대학으로 돌아와서 1983년에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부터 30년 동안 중앙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환경법, 헌법 등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199
1951년 12월, 6·25전쟁 피난 중 부산에서 태어났다. 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돌아와서 수송초등학교, 경기중·고등학교, 서울대 법대를 다녔다. 4·19와 5·16에서 1972년 유신에 이르는 격동의 세월 속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군 복무 후 미국 유학을 떠나서 툴레인대학과 마이애미대학에서 공부했다. 1980년 툴레인대학에서 법학석사 학위를 받았고, 1981년 마이애미대학에서 비교법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다시 툴레인대학으로 돌아와서 1983년에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부터 30년 동안 중앙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환경법, 헌법 등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1995년부터 2003년까지 조선일보 비상임논설위원으로 환경, 사법제도 등에 관한 사설·칼럼 450여 편을 집필했다. 조지타운대학에서 풀브라이트 교환 학자, 로욜라대학에서 방문 교수를 지냈다. 새누리당 비대위원 및 정치쇄신위원으로 2012년 총선 및 대선 과정에 참여했다. 2013년 중앙대를 퇴직했으며, 2016년 20대 국회에 국민의당 비례대표 의원이 되어 4년간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일했다. 지금도 여러 매체에 칼럼과 서평을 기고하고 있다. 개인 블로그는 www.leesangdon.co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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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6월 03일
쪽수, 무게, 크기
432쪽 | 566g | 140*215*30mm
ISBN13
9788967442330

책 속으로

교수가 된 후에는 강의와 연구 외에도 신문 잡지에 기고를 활발히 했다. 메이저 신문에서 8년 동안 비상임 논설위원을 지내면서 그 매체의 힘을 빌려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시각에서 우리 정치와 사회를 지켜보았고, 결국에는 정치 일선에 서기도 했다.
---p.11

서울에서 민간방송을 하고자 하던 김지태(金智泰: 1908~1982)가 방송 허가를 인수해서 문화방송이 탄생한 것이다. 김지태는 당시 민주당 정권 시절이니까 명망가이자 장면 총리와 친분이 있는 외조부를 회장으로 모시고, 본인은 사장으로 실제로 방송사를 운영했다. 나의 아버지는 투자금 상당액을 회수해서 후에 다른 사업을 시작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방송국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일을 벌여서 중도에 그만두고 말았다고 하셨다. 여하튼 이런 연유로 문화방송 초대 회장은 외조부로 기록이 남아 있다.
---p.29

돌이켜보면 외조부는 일제 식민 통치를 싫어했고, 북한 공산주의와 이승만 독재정치에 반대했다. 그런 점에서 4·19 후 1년간은 외조부가 평생 희망하고 추구했던 세월이었다. 이런 경험으로 인해 나는 어떻게 해서 이승만 정권이 독재의 길을 갔고, 어떻게 해서 4·19가 일어났고 또 5·16이 일어났는가에 대해 일찍부터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p.32

내가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도 〈타임〉을 통해서였다. 타임을 구독하기 시작한 1970년은 미국에 있어서 환경 원년(元年)과 같았다. 1970년에 환경보호처(EPA)가 발족했고, 대기정화법(The Clean Air Act)이 의회를 통과했기 때문이다. 민간운동으로 ‘지구의 날(Earth Day)’ 행사가 시작된 해도 1970년이었다. 〈타임〉에 나온 환경과 생태에 관한 기사를 통해 나는 환경문제에 대해 눈을 떴다.
---p.50

대학 시절에 나는 빈곤퇴치를 위한 강력한 복지대책을 촉구했던 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Karl Gunnar Myrdal: 1898~1987)이 옳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인구의 절반이 흑인이던 뉴올리언스에서 공부하던 중 그런 생각은 사라지고 말았다.
---p.98

미국의 어느 도시나 루스벨트의 뉴딜과 존슨의 ‘위대한 사회’ 정책으로 건설된 낡은 공공주택은 심각한 도시문제가 되어 있다. 나는 그때부터 정부가 임대주택을 건설하기보다는 개인이 아파트를 살 수 있도록 주택청약예금과 주택부금 제도를 도입한 박정희 대통령이 현명했다고 생각하게 됐다.
---pp.100,101

내가 정말 말하고자 했던 바는, “사외이사를 하는 교수나 변호사가 기업에 관한 중요한 정책 결정을 하는 정부 위원회의 위원을 겸한다면 심각한 이해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는 한 문장이었다. 다음 날 다른 신문들은 환경운동의 도덕성이니 뭐니 하는 사설을 썼는데, 바다에 배 지나가듯 아무 영향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집어넣은 한 문장 때문에 총리실과 청와대가 발칵 뒤집혔다.
---p.158

2006년이 저물어 가면서 이명박 세력은 이미 관료와 재계, 그리고 언론을 장악해 나가서 오픈 프라이머리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한나라당에서 해 오던 당원과 대의원 중심의 경선으로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면 박근혜 전 대표가 후보가 될 것이기 때문에 이명박 측에선 실현 가능성이 없는 오픈 프라이머리를 내세우고 언론 플레이를 했던 것이다.
---p.181

오히려 로스쿨 도입으로 변호사들의 수준이 저하되는 부작용이 생겨났다. 사법시험이 있었을 때 사법연수원 교육은 매우 강력한 것이었는데, 그게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면 서울대와 고려대의 법조계 패권은 없어졌나 하면, 그것도 아니다. 사법시험 시절에는 법대가 뒤처져 있던 연세대가 로스쿨을 하면서 올라서더니, 서울대, 고대, 연대 로스쿨 졸업생이 판검사, 로펌을 장악하는 ‘SKY 로스쿨 세상’이 되고 말았다
---p.183

박 전 대표가 종합일간지와 단독 인터뷰를 한 것은 2007년 대선 이후 4년 만이었다. 박 전 대표가 다시 일선에 나설 것으로 예상되어서 많은 언론사가 인터뷰 신청을 넣어 놓은 상태였는데, 박 전 대표가 경향신문에 연락해서 이상돈·김호기 교수와 하는 ‘대화’로 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이 대담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기사가 나가자 다른 신문들이 항의하는 등 난리가 났다.
---p.231

어느 날 무슨 일로 캠프 총괄본부장인 최경환 의원을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안종범 의원과 수행비서를 하던 안봉근이 함께 있었다. 그런데 안봉근과 최경환이 서로 말을 놓는 투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래서 홍사덕 전 의원한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깜짝 놀라고 기막혀했다.
---p.263

수소문을 해서 최고회의 총무수석으로 박정희 의장을 수행하고 독도를 다녀온 최영섭 예비역 대령을 만나 뵈었다. 당시 88세로 일산의 큰아드님 댁에 살고 계시던 최영섭 예비역 대령은 박 의장이 탄 함정은 독도 부근은 가지 않았지만 “독도를 박정희 대통령만큼 생각한 대통령은 없다”면서 문재인 의원의 주장이 말도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영섭 예비역 대령은 최재형 감사원장의 부친이다.
---pp.269,270

내가 이렇게 박근혜 전 대표의 의중을 암시하는 발언을 의도적으로 한 이유는 새누리당 의원들에게도 메시지를 전달하고 또한 속사정을 잘 모르는 MBC 노조원들에게 암묵적 신호를 보내기 위함이었다.
6월 22일 복지관 발언으로 박근혜 전 대표의 생각이 확인되자, 박성호 기자는 박지원 원내대표를 만나서 MBC 파업 국정조사 요구를 철회해 달라고 했다. MBC 파업에 대한 야당의 국정조사 요구가 사라짐에 따라 개원 협상은 급물살을 탔고, 6월 29일에 타결이 됐다.
---p.286

2013년 여름과 가을을 거치면서 나는 박근혜 정부가 4대강 사업과 MBC 문제에 대해 전향적인 변화를 전혀 보이지 않는 데 대해 깊이 실망하게 됐다. 사실 이명박 정권이 남긴 가장 부정적인 영향은 4대강 사업과 MBC 문제였고, 나는 박근혜 대통령이 4대강 사업과 MBC 문제에 대해 이명박과 다르다고 생각해서 한 해 동안 정치적 행로를 같이했던 것이다.
---p.307

돌이켜보면, 박 의원이 문재인 의원의 말을 너무 믿은 것이 잘못이었다. 문재인 의원은 처음에는 동의했다가 주변과 지지 세력이 반대하니까 물러나고 만 것인데, 그나마 내가 그 부분을 커버해 주어서 파동이 더 이상 커지지 않았다. 아마도 친노를 계승한 친문 세력은 안철수-김한길 공동대표 체제에 이어서 박영선-이상돈 공동 체제로 이어지면 자신들의 당내 입지가 약화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p.315

2016년 총선에서 제3당을 표방한 국민의당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호남에서 너무 큰 지지를 받은 것이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고 생각한다. 호남에서 의석을 잃더라도 김한길, 김영환, 문병호 의원이 원내에 들어와 주고, 수도권에서 한두 명이라도 초선을 당선시켰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p.335

김병준 총리 기용에 제일 당황한 사람은 그를 비대위원장으로 끌고 오려던 안철수였는데, 안철수는 그것을 박근혜 하야 요구로 돌파했다. 안철수가 당 대표급 중에서 박근혜 사퇴와 탄핵을 제일 먼저 들고 나간 데는 김병준 때문에 당내에서 처한 곤란한 지경을 돌파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야당과 대화를 하겠다고 김병준을 총리로 지명한 박근혜 대통령은 야당으로 하여금 탄핵을 추진하도록 스스로 무덤을 판 것이다.
---p.362

바른미래당은 처음부터 안철수가 서울시장 선거를 나가기 위해 만들었던 ‘1회용 플랫폼’이었다. 국민의당은 호남당 색깔이 진하니까 바른미래당 후보로 나가면 당선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고, 서울시장에 당선되면 4년 후 대선에 나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과는 예상대로 또 3위였으나 득표율은 15%를 넘겨서 선거비용을 전액 보전받았다. 국민 세금을 선거 보조금으로 받고, 또 되지도 않을 선거에 나간 선거비용을 국민 세금으로 보전받았다. 그러니까 바른미래당은 국민 세금을 빼먹기 위해 만든 1회용 정당이었다.
---pp.383,384

비례대표 의원을 제명하지 않는 이유는 순전히 돈 때문이다. 비례대표 의원을 제명해서 교섭단체가 무너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정당에 주어지는 보조금이 소속의원 숫자에 비례해서 지급되기 때문에 비례대표 의원을 제명하면 그만큼 정당 보조금이 줄어들게 된다. 그래서 한사코 제명하지 않았던 것이다.
---pp.385,386

환경노동위원회에서 4대강 사업의 폐해, 내성천과 영주댐 문제, 풍력발전으로 인한 자연파괴, 석포제련소 문제, 흑산공항 문제 등의 환경 사안, 그리고 MBC 노조 탄압, 비정규직 방송 작가와 아나운서의 노동인권 문제 등을 다루었다. 나는 고용노동부 산하에 있는 한국폴리텍대학이 4차 산업 교육 훈련 기관으로 탈바꿈하도록 성원했고, 장애인 고용이란 어려운 일을 담당하고 있는 한국장애인고용공단에도 힘을 실어 주었다

---p.429

출판사 리뷰

각 장의 구성

1장. 1951~1969년 부산 피난둥이에서 청년으로
6·25전쟁 통에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의 한국 정치사회의 주요한 일들을 저자가 경험한 대로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다. 특히 집안의 어른이자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이며 민주주의를 염원했던 외조부 춘곡(春谷) 고희동과의 일화는 외조부가 저자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 알게 해준다.

2장. 1970~1979년 법과 정치를 공부하다
서울법대 입학과 동시에 〈TIME〉 정기구독을 통해 외부 세상에 눈뜨기 시작한다. 10월 유신 등 복잡한 정치 상황에서도 석사학위 논문 ‘미국 대법원과 사법 적극주의’를 발표했다. 서울법대 대학원 시절에는 국내 정치뿐만 아니라 해외 정치에도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

3장. 1979~1982년: 미국 유학 생활
미국 유학 생활은 오늘날의 저자를 있게 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로널드 레이건과 함께 꽃피운 미국 보수주의 전성시대를 경험하고, 진보주의의 허상을 보게 되면서 1970대 서울에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염원했던 저자는 ‘보수적 자유주의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4장. 1983~2002년: 교수 그리고 논설위원
교수 생활을 하면서 헌법, 환경법, 한미 통상법, 국제환경법 등 지식을 바탕으로 활발한 학술 활동을 하는 한편 정부의 자문 역할을 했다. 그 연장선에서 조선일보 비상임 논설위원으로 환경문제와 사법제도 등에 관한 사설과 칼럼을 썼고, 조선일보 지면을 빌려서 외국 신간을 소개하는 글을 기고하는 등 지적 지평을 넓히는 데도 한몫을 했다.

5장. 2003~2007년: 정치 평론의 시간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이념적 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많이 썼다. 노무현 대통령 취임과 더불어 나타난 우리 사회의 심각한 쏠림 현상을 우려했고, 이명박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상황을 매우 힘들게 지켜봤다. 그러면서 부패한 보수 정권에 소신 있는 보수의 목소리를 내면서 적극적으로 사회와 마주했던 시기이다.

6장. 2008~2010년: 4대강 사업 반대
운명처럼 다가온 저자의 4대강 사업 반대. 저자는 미국 유학 시절 환경법, 수리권 등 4대강 사업과 관련된 법을 공부한, 4대강 사업을 반대할 수 있는 준비된 비판자였다. 대정부 투쟁의 최전선에서 4대강 소송에 나섰고, 국민 참여도 이끌어냈다. 덕분에 조직적인 악플 공세와 국정원 사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7장. 2011~2012년: 새누리당 비대위·총선
진보 정권하에서 야당을 이끌었고 부패한 보수 정권의 여당 내 야당이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과의 특별한 인연, 한나라당 비대위에 발탁되기까지의 이야기, 정치적 동반자로서 성공적으로 치른 2012년 총선 과정을 소상히 소개하고 있다.

8장.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2012년 총선 후 치러진 대선. 출발부터 이해하기 힘들었던 박근혜 캠프 이야기에서부터 박근혜 후보의 한계점, 처음 공개하는 MBC 파업 해결 과정, 2012년 대선과 잘못 키워진 첫 단추 이야기 등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9장. 2013~2015년: 자유의 시간
정신없이 달려왔던 2012년 정치의 시간을 뒤로하고 30년을 몸담았던 대학을 자발적으로 떠났다. 외국 서적들도 보고 그간 블로그에 올린 글들을 모아 책도 출간하고, 방송에 출연하고 전국구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는 등 정치 일선에서 떨어져 여유로운 행보를 그렸다.

10장. 2016~2017년: 국민의당·박근혜 탄핵
국민의당 공동선대위원장으로 현실정치에 복귀, 2016년 총선에서의 국민의당 성공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한때 뜻을 같이하고 함께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과의 결별, 스스로 무너진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미스터리까지 성공하지 못한 한국 정치사의 한 장도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다.

11장. 2017~2020년: 2017 대선·제3당의 몰락
2017 대선 과정과 성공적으로 탄생한 제3당이 몰락하는 과정을 지켜본 저자의 증언이다. ‘제3당 정치혁명’을 알리면서 화려하게 출발했던 국민의당이 불과 2년 만에 어떻게 몰락해 가는지, 창당에서 해산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보면서 느꼈던 점들을 정리했다.

12장. 2016~2019년: 환경노동위원회 활동
마지막으로 20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저자가 했던 활동을 중심으로 4년 동안 있었던 일을 정리해서 기록했다. 국회 역사상 환경 사안을 가장 전향적으로 다루었던 시기로 기록될 20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의 활약은 저자가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노력이자 결실이다.


저자 서문

1년 전인 2020년 3월, 나는 20대 국회 4년 임기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총선을 앞두고 국회 의원회관은 적막할 정도로 조용했고, 코로나바이러스 덕분에 세상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았다. 드디어 내가 ‘은퇴’를 앞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푸른 꿈을 갖고 대학에 입학한 해가 1970년이니 반세기가 훌쩍 흘렀고, 70세를 지칭하는 고희(古稀)가 나에게 성큼 다가온 것이다. 1951년에 태어나서 1970년에 대학에 들어간 내가 이제 고희를 맞게 되었으니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돌이켜보면 10년 동안 대학에서 공부했고, 30년 동안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했다. 마지막 10년은 격변하는 정치적 소용돌이를 일선에서 마주했다. 그동안 책도 여러 권 펴냈고, 신문과 잡지에 글도 많이 썼다. 아카데미와 저널리즘, 그리고 현실정치를 함께 경험하면서 달려오다 보니 고희를 맞게 된 셈이다.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 우여곡절과 희로애락을 겪으면서 살아가게 된다. 모든 사람의 삶이 가치 있듯이, 내가 살아온 세월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의미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보통 사람들, 보통 교수들이 경험하기 어려운 일들을 겪으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최근 10년 동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뉴스의 대상이 되면서 지냈던 시간이 특히 그러하다. 30년 동안 교수를 했지만 뚜렷한 학술적 업적은 내지 못했다. 그보다는 시대가 요구하는 지식을 폭넓게 탐구해서 전달하고 그것을 현실에 적용해 보려고 했다. 그런 결과로 저널리즘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끝내는 현실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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