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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수명은 길지 않죠 7
작가의 말 2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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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별난 인연도 많다. 나는 우선 인연을 얘기하려고 한다. 하찮은 것처럼 보이던 어떤 작은 인연 하나로부터 모든 일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인연이라는 측면에서만 보자면 우리가 사는 세계는 인연을 모아 쌓아놓은 무질서한 탑이다. 그런 생각이 든다. 탑을 이루는 벽돌이 천태만상이라서 세상도 어지럽고 혼란스럽다. 이를테면 깨진 거울 조각 여러 개가 만화경萬華鏡을 만든다. 아마도 만화경을 처음 발명한 사람은 이런 인연의 속성을 알고 난 뒤 그걸 작은 상자 안에 재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늘 짐작하기가 만만찮은 세상을. --- p.12 - 계약서에 사인하기만 해도 우리는 먼저 5천을 입금해 드려요. 수정란 착상이 확인되면 또 5천, 15주 후에 다시 5천, 그리고 출산과 더불어 나머지 5천을 지급하죠. 지금까지 그 수혜자가 천칠백이 넘었어요. 일차 목표는 만 명인데…. - 아, 대단하네요. - 그거 다 합치면 2억인데, 지자체에서도 1억을 지급하는 곳이 많잖아요? 거기다가 정부에서는 2억 5천까지 저리로 대출을 해주고요. 그러니 다 합치면 최소 5억이 되죠. 그런데도 연서 씨는 관심 없는 일인가요? --- pp.21-22 친정엄마는 사위 치료비를 대기 위해 명성이 자자하던 국도변 상추밭을 팔았다. 문전옥답이라는 표현도 모자라 생전에 아버지는 그 밭을 노다지 밭이라고 불렀었다. 시아버지는 군대를 명퇴하면서까지 남편 치료비를 보탰다. 시골로 낙향했다던 아이 부모도 멀리까지 찾아와 봉투를 내밀고 갔다. 그들은 내 모교 선배였다. 그래도 남편의 의식은 깨어나지 않았다. 나는 죄스러울 만큼 혼자 멀쩡했다. 내 배 속에 들어앉아 자라던 아이가 충격으로 탯줄이 끊어지면서 멀리,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떨어져 나갔을 뿐. --- pp.28-29 병원에 다시 들러서 수정란 착상이 성공적으로 이뤄졌다는 통보를 받은 날, 내 통장에는 한유지 명의로 입금된 금액이 찍혔다. 정확하게 5천만 원이었다. 그리고 내 핸드폰에도 그녀의 문자가 날아왔다. 축하해, 연서 씨^^ 인터넷 서점을 통해 우선 시조집 한 권과 두 권의 시집을 구했다. 김소월과 윤동주 시집이다. 두 사람은 학창 시절에 맨 먼저 우리 가슴을 시로 적셔주고 두드렸던 시인들이기도 하다. 적어도 그 두 사람은 내 몸을 관통해서 흐르는 물줄기를 조금이라도 더 정화해 보자는 의지를 꺾을 것 같지는 않았다. --- pp.103-104 살아생전에 친정아버지는 꽃 가꾸기를 즐기셨다. 꽃을 좋아하는 엄마를 위한 특별한 배려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진심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엄마가 잘 알고 계셨다. 한번은 엄마가 말씀하신 적이 있다. 저 양반이 아직도 나를 사랑하는갑다…. 어떻게 알아요, 엄마? 결혼 초에 나한테 실토하더라. 나는 마음속에 담아둔 말을 내뱉지도 못하는 사람이라오. 그렇다고 비위가 약해서 꿀꺽 삼키지도 못하오. 무슨 말이냐면, 내가 당신을 사랑하면서도 정작 사랑한다고는 말할 수 없는 반편이란 말이외다. 그 대신 꽃을 좋아하는 당신을 위해 내 평생 당신 보는 데서 꽃을 심고 가꾸리다. 그러니 내가 꽃을 심고 있거든 당신은 내가 차마 발설하지 못하는 심중의 말을 놓치지 말고 실컷, 질리도록 새겨들으시오. 알았소? --- p.123 젊은이에게는 핸디캡까지 하나 더 있다. 노인에게 먼저 양보해야 한다는, 참 갸륵하고도 아름다운 전통 말이다.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는 유교의 가르침은 그 태동의 중심지인 중국보다는 변방인 한국에서 더 철저하게 따라야 하는 덕목이 됐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다. 부지런히 연금을 부어 넣고 있을 뿐이다. 아이를 어서 낳아야지 하는 생각조차 해볼 겨를도 없이…. 다른 뜻이 아니다. 미래가 온통 캄캄한 암흑천지일 뿐이니 당연히 아이 낳을 엄두를 내지 못하지 않겠느냐고 얘기하는 것이다. --- p.244 그나저나 세상에는 그냥이라는 게 없다고? 그런데 왜 그냥이라는 단어는 세상 사람들 입속에 물고기처럼 팔팔하게 살아있지? 그는 어쩌면 내가 단순히 그냥 한 말은 아닐 거라고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냥 한 말은 아니었다. 그건 사실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냥 하는 일, 그냥 해보는 일은 없다. 나도 이 모든 일을 그냥 저지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시인 역시, 만약 내 추측이 맞는다면, 그냥 한 일은 아닐 것이다. --- pp.2602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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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품으면 무게가 되고, 무게를 품으면 생명이 된다!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간호하며 살아가는 한 여성, 이미 두 번이나 아이를 잃은 그녀 앞에 어느 날 거대한 기업이 거액의 출산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건강하고 뛰어난 남성들의 정자를 선별하여 여성에게 제공하고 금전적 보상을 제공하는’ 이 프로젝트는 또 하나의 생명을 얻고자 하는 절박한 기회로 다가온다. 정자의 주인은 밝혀지지 않는다. 소설의 후반부, 여자는 우연히 만난 시인과 대화하는 순간, 자신의 아이가 혹시 그의 혈육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 시인은 자신의 새 시집 『시인의 수명은 길지 않죠』가 곧 출간된다고 말하며, 그녀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혹시 자신이 받은 정자의 주인이 바로 이 시인은 아닐까, 여자의 막연한 추측은, 생명의 신비와 운명의 아이러니를 되새기게 만든다. 『시인의 수명은 길지 않죠』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인 ‘생명’에 대한 갈망과 이를 둘러싼 윤리적 고민, 모성의 깊은 심리와 현실적 고통을 섬세하게 풀어낸 작품이다. 출산을 사회적 시스템과 개인적 욕망이 교차하는 문제로 바라보며, 생명 탄생의 경이로움과 그 이면의 그림자를 함께 응시하게 한다. 명확한 답을 피한 채 열어 둔 결말은 오히려 더욱 강한 울림을 준다. 1. 출산율 세계 최하위, 초저출생 시대의 대한민국! 『시인의 수명은 길지 않죠』는 ‘아이를 낳을 권리’가 아닌, ‘아이를 낳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현대 사회의 모순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출산율 저조 국가라는 냉혹한 통계 너머, 한 인간의 존재와 선택을 깊이 있게 묻는다. 2. 아이 낳는 것조차 선택이 아닌 생존이 되어버린 사회 주인공은 첫 아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남편이 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후에는 두 번째 아이를 사산한다. 깊은 절망 속에서도 그녀는 다시 아이를 품기로 결심한다. 정자은행과 기업의 출산지원금에 의존해 새로운 생명을 가지려 하지만, 그것은 모성애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선택 아닌 선택이다. 3. 운명이 던진 질문, 그 대답은 생명으로 남는다 『시인의 수명은 길지 않죠』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가장 개인적인 고통이 어떻게 가장 사회적인 문제와 연결되는지를 보여주는 통찰력 있는 작품이다. 아이를 갖는 일이 선택이 아닌 생존이 되는 시대, 그 끝에서 우리는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감당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4. 숫자가 된 출산율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인간의 희망 이병천 작가는 이번 작품을 통해 “생명의 탄생이 축복이 아닌 투쟁이 되어버린 시대, 그 안에서 여성들이 감당해야 하는 삶의 무게를 진지하게 묻고 싶었다”고 밝혔다. 《도서출판 바람꽃》 측은 “『시인의 수명은 길지 않죠』는 출산과 생명, 인간 존재의 모순을 사유하게 하는 중요한 작품”이라며 “초저출생과 인구 위기라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내밀한 서사를 통해 독자적으로 풀어낸 점이 인상 깊다”고 전했다. 내가 남편을 살해했다고? 세상에! 검은 백조라니, 말 자체도 어불성설이지만 그건 세상에 없는 새다. 그래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경우를 블랙스완이라고 부른다. 우리 부부에게 난데없이 검은 백조가 날아든 걸까? 자, 블랙스완은 이미 날아들었다. 쫓아낼 수도 없고 회피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 불길한 흉조 한 마리가 날아오는 순간 남편은 식물인간이 되어 침대라는 이상한 땅에 묶여버렸다. 세상의 동물들은 이따금 식물이나 돼버리자는 꿈을 꾸지는 않을까? 사자나 표범 정도는 아니고, 그렇다고 우는 토끼나 마못보다는 더 큰 초식동물 하나가 숲 가운데 서있다. 산양을 닮은 듯하고, 수사슴 같기도 하다. 하여튼 그냥 사슴이라고 해두자. 녀석은 몹시 지쳐있고 또 우울하게 보인다. 서있긴 해도 제 앞의 나뭇가지처럼 몸 전체가 힘없이 흔들린다. 그런 녀석이 자꾸 무겁게 땅으로 떨어지려는 고개를 겨우 지탱하면서 나무를 향해 하소연한다. 나랑 몸을 바꾸지 않을래요? - 「시인의 수명은 길지 않죠」, 본문 중에서 작가의 말 중에서 옛적에 내 태를 묻었다는 고향 마을에 돌아와 가만 보니 인걸도 오간 데 없는데 산천 역시 의구하지 않다. 고속도로가 마을 앞으로 놓이고, 귀농을 택한 이들이 저마다 번듯한 집을 지어 놓아서 옛 풍경을 떠올리기 어렵게 만들었다. 낯익은 고샅길에 나가보면 내 어린 시절을 불러내는 아이들의 왁자한 목소리가 기억 속의 귓전을 때리기는 해도 정작 눈에 띄는 아이들은 찾아볼 수 없다. 때마침 아이를 낳지 않는 시대, 우리 한국은 머지않아 지구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소문만 휑한 바람처럼 내가 사는 마을 안길로 휩쓸려 다닐 뿐이다. 이 소설은 그런 불온한 시골살이에서 창작됐다. 본문에 등장하는 용진龍進이라는 지명은 실제로 내가 거주하고 있는 땅이다. 옛집으로 귀향했으니 이참에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자! 나는 그렇게 나 자신을 다독였다. 이 동네 어느 고샅길에서 그 시절의 나는 커서 어떤 직장인이 되고 싶다는 꿈을 발설한 적이 있었다. 아주 소박한 꿈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 소문은 의외로 빠르게 퍼져나갔고, 나처럼 고만고만한 아이들 몇이 나를 몰아붙였다. ‘늬가 무슨, 뭘로?’ 돌이켜보면 내가 그만큼 가진 게 없던 날들이었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무엇이든 다시 시작하려고 작정했다. 너무 늦어버린 감이 없지 않지만 젊어서 밀쳐두었던 분야의 책들을 다시 꺼내든 이유가 그 때문이다. 뒤 울안 텃밭에 무와 배추를 좀 심었더니 꽃보다 더 어여쁘기 그지없으나 벌레가 들끓어 사람을 여간 불러대는 게 아니다. 서둘러 나가봐야겠다. 땅 기운을 받아 속이 꽉 찬 배추 한 포기라도 얻어먹으려면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다급해도 소설가 김양호 선생을 빼놓고 얘기를 마무리할 수는 없을 듯하다. 내가 키우는 무, 배추가 내 소설이라면 진딧물과 배추벌레를 꼼꼼히 잡아주신 농부가 바로 양호 형님이었다. 덕분에 내 텃밭 농사가 알차고 즐거웠다. 수확이 끝나는 대로 무 다발을 찾아들고 찾아뵐 생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