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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1장 웰 에이징과 인생 3기 1. 고령화사회와 웰 에이징 2. 늙음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3. 인생 3기와 액티브 에이징 4. 맺는말: 앞으로의 논의 2장 연령차별주의와 장유유서 전통 1. 연령차별주의 2. 연령차별주의의 발생 원인 3. 한국 사회와 연령차별주의 4. 한국 사회와 노인 일자리 5. 장유유서-나이에 의한 위계 6. 맺는말 3장 노인운전과 연령차별주의 1. 배경 및 쟁점 2. 운전 제한은 평등권 침해인가? 3. 노인운전과 집합적 성취 4. 교통약자를 위한 교통체계 5. 맺는말 4장 노년의 일: 정년제 논쟁 1. 들어가는 말 2. 정년제 현황 3. 정년제 찬반 논거 4. 인구구조의 변화와 웰 에이징 5. 정년연장의 선행조건과 고려 사항들 6. 맺는말 5장 연금과 세대 간 윤리 1. 배경 2. 연금과 일자리 3. 제도적·법적 접근 4. 규범적 접근 5. 맺는말 6장 관계재와 행복 1. 이스털린의 역설 2. 이스털린의 역설에 대한 세 가지 설명 3. 관계재의 정책적 함의 4. 관계재에 대한 경제학적 논의 5. 관계재에 대한 철학적 논의 6. 맺는말: 노년의 삶과 인간관계 7장 노년의 성과 사랑 1. 들어가는 말 2. 성과 사랑: 섹슈얼리티 3. 노년의 성과 사랑 4. 연령차별과 성차별을 넘어서 5. 맺는말 8장 황혼 이혼과 졸혼 1. 황혼 이혼 2. 졸혼 3. 낭만적 사랑과 근대적 가족 4. 낭만적 사랑을 넘어서 5. 한국인의 우애적 사랑 6. 맺는말 9장 웰 다잉 1. 죽음관의 변화 2. 현대인의 죽음 3. 죽음의 철학 4. 바람직한 죽음 수록된 글의 출처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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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에 대한 논의는 사회복지학 분야에서 가장 활발해 보인다. 여기에서 중요한 담론이 ‘액티브 에이징(active aging)’이다. 액티브 에이징은 말 그대로 노인이 활기 있고 적극적인 노년을 보내는 것이다. 액티브 에이징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노인들이 적극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노인 친화적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 이상 노인이 골방에 머무르거나 손자 손녀나 돌보는 보조적인 삶을 살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활기찬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노인을 더 이상 사회가 보호해야 할 사회적 부담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활용해야 할 중요한 인적자원으로 보고, 이들이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관심을 둔다.
--- p.16 이른바 제3 연령기(the third age), 즉 인생 3기는 사회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50대 중후반에서 80세에 이르는 시기가 아닌가 싶다. 평균 수명이 짧은 사회에서는 50대 초반에 시작될 수도 있겠고, 반면 평균 수명이 긴 사회에서는 60대에 시작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요즘 이 시기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노인들과는 다르다. 그 전 노인들은 골방에 머무르거나, 기껏해야 아이나 돌보는 보조적인 일을 수행했다. 경제력도 없어 빈곤과 노쇠에 시달렸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영양상태의 개선과 의료 기술의 발달로 인해 수명도 늘어났지만, 노인들의 신체 활력 또한 젊은 사람 못지않게 되었다. 또한 연금제도의 발달로 이들의 경제 능력도 많이 달라졌다. 그들은 더 이상 과거의 노쇠하고 가난한 노인이 아니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여가생활을 즐기고, 사회봉사 활동이나 개인적인 클럽활동도 하는 건강한 노인인 것이다. --- p.34 웰 에이징, 즉 행복한 노년이란 무엇인가? 이를 쉽게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전문가 대부분은 행복한 노년을 보내기 위해서는 1) 건강 2) 경제력 3) 일 4) 인간관계를 핵심 요건으로 지적한다. 노년을 행복하게 보내려면 건강해야 하고, 경제력도 있어야 한다. 몸이 아프고 최소한의 생계비도 확보하지 않은 사람을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있고, 원하는 직장에서 일자리를 갖고 있으면 좋을 것이다. 주위 사람들과 좋은 인간관계도 유지해야 행복할 것이다. 웰 에이징을 가로막는 장벽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연령차별주의이다. 연령차별주의(ageism)라는 개념은, 미국 국립노화연구소 초대 소장이었던 버틀러(Robert Butler)가 1969년에 처음 도입했다. 그는 사람들을 “단지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차별하는 것을 연령차별주의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연령차별주의는 성차별주의(sexism)나 인종차별주의(racism)와 마찬가지로 정당화될 수 없다. 생물학적 성을 근거로, 가령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또 피부 색깔을 근거로, 가령 흑인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생물학적 나이, 즉 연령을 이유로 차별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정당화될 수 없다. 단지 여성이거나 흑인이라는 이유에서 직장에서 배제하는 것이 잘못된 것처럼,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배제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버틀러가 보기에는 연령차별주의는 “단지 몇 년 더 살았다는 이유로 노인을 열등하고 별난 사람으로 보는 신념”이다. --- p.41 제3기 노인들이 웰 에이징 하기 위해서는 일자리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정책적으로 정년 연장을 모색해야 한다. 노인들에게 맞는 일자리의 개발, 적절한 노동시간과 임금체계도 필요할 것이다. 임금피크제나 직무급제, 성과급제 등 생산성에 비례하는 임금체계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이다. 한편 경제성의 관점에서는 다소 부족하더라도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필요한 사회적 일자리를 확충해야 한다. 이것은 앞으로 인구변동, 즉 경제활동인구는 줄어드는데 노인 인구는 증가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반드시 추구되어야 할 방향이 아닌가 싶다. 연금제도 확충 같은 지나치게 무거운 짐을 후속세대에게 지울 수는 없다. 물론 육체적으로 쇠약해 각별한 보호가 요구되는, 80대 이상의 제4 연령기에 해당하는 노인들을 위해서는 또 다른 사회복지정책이 요구될 것이고 이에 대한 착실한 대비가 필요하다. --- p.69 최근 첨단과학이 발전하면서 보정적 접근이 확대될 토대가 조성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ADAS, Advanced Driver Assistant Systems)이다. 이것은 다양한 센서와 카메라 등을 사용해 운전자의 안전성과 편의성을 높여주는 기술 체계이다. 이는 후방 감시, 전방 충돌 회피, 차선이탈 경고, 사각지대 감시 등 다양한 기능을 제공함으로써 시야가 제한되고 거리 감각이 저하된 운전자들의 안전운전을 도와준다. 여기에는 최근 논란이 되는 급발진 사고를 예방하는 기술도 포함된다. 가령 페달 오조작 급발진 억제 장치(PMSA)가 그것이다. 이 장치는 장애물을 인식한 상태에서 운전자가 급격한 페달 조작을 할 경우 모터 토크를 제한하고 전력(연료) 공급을 차단하는 장치이다. 노인들과 장애인들이 이런 보조시스템의 최대 수혜자가 될 것이다. 아마도 장기적으로는 자율 운행 자동차의 개발이 보정적 접근의 마지막 목표가 될 듯싶다. --- p.95 우리는 일반인의 입장에서 사회적으로 효율적인 교통정책을 추진해야 하지만, 동시에 교통약자들도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는 교통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들 교통약자의 처지를 고려해야 할까? 이와 관련해 롤스(J. Rawls)가 『정의론』에서 시도한 방식을 참고해 보자. 롤스의 제안대로 우리가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을 덮어쓴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무지의 베일을 덮어썼기 때문에 우리의 처지를 알지 못한다. 내가 누구인지, 즉 내가 노인인지 장애인이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 라고 가정해 보자. 그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 자신의 처지에 대해 알지 못하는 ‘무지의 베일’을 덮어쓴 상태에서 과연 우리는 규제 중심의 접근, 즉 배제적 접근이 바람직하다고 선택할 것인가? 내 생각에는 배제적 접근을 선택할 것 같지 않다. 장애인 같은 교통 약자의 입장에서도 그렇지만 노인의 입장에서도 특히 그렇다. 노인은 운 나쁘게 중간에 조기 사망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누구나 겪어야 할 인간의 숙명이다. 자기 자신도 언젠가는 노인이 되리라는 점을 의식한다면, 미래의 자신에게 불리한 배제적 접근방식을 선택할 것 같지는 않다. 늙었다고 운전도 못하게 하는 사회, 우리는 과연 그런 사회를 원할까?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배제적 접근방식은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정의롭지도 않다. 어려운 상황에 빠진 약자를 도와주기는커녕 무시하고 배제하기 때문이다. --- p.97 몇몇 연구보고서는 노년 일자리가 증가한다고 해서 청년 일자리가 감소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가령 한국노동연구원이 발간한 보고서는 고령자 고용의 증가가 청년층 고용을 감소시킨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에 따르면, 노인세대와 청년세대 간 고용대체 가설은 성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양자 간에는 보완관계가 존재한다. 이 입장에 따르면, 일자리의 총량을 주어진 것으로 보는 것은 ‘노동총량 불변의 오류(Lump of labour fallacy)’이다. 노동의 총량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변한다. 그래서 노인 노동자들이 증가해도, 새로운 노동 수요가 발생해 젊은이들의 고용 또한 증가할 수 있다고 본다. 이들은 자동화와 인공지능(AI)으로 인해 노동 수요가 감소하리라는 예측은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기술혁신으로 생산성이 향상하면 잉여가 발생하여 인간의 새로운 욕망이 나타나고 이를 충족시키는 새로운 직업이 창출된다고 본다. 실제로 농업에서의 기계화 영농으로 인해 80%였던 농업인구는 2%로 줄었으나, 78%가 실업자가 된 것이 아니다. 이들은 제조업과 서비스업으로 새로운 일자리를 찾게 된다. 이런 사실을 지난 수백 년 간의 산업혁명의 역사가 잘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 p.28 연금은 세대 간 계약의 전형이다. 노령층의 사회적 부양을 약속한 세대 간 계약인데 세대 간의 직접적인 계약이 아니라 국가가 매개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때 계약의 단서는 1) 노인 세대를 부양하기 위한 성인 세대의 부담이 과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2) 미래세대의 규모가 급격하게 줄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노령층의 사회적 부양은 매우 중요한 가치이다. 하지만 그 부담을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감수해야지 무작정 미래세대에게 전가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즉 노령층의 사회적 부양도 필요하지만, 사회의 지속가능성과 세대 간 공정성도 중요한 가치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렇듯 연금에 대한 논의는 인구구조의 변화, 경제적 환경변화, 국민복지 등을 아우르는 대단히 폭넓은 접근을 필요로 한다. --- p.141 실제로 소득 이외에도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은 많다. 그 한 예가 실업이다. 실업은 삶의 만족도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해, 단순한 소득 상실 이상을 의미한다. 가령 유럽에서 1975년부터 1992년 기간 실업수당이 많이 늘어나면서 실직자의 경제적 어려움은 사라졌다. 그런데도 실업자들과 일자리를 가진 사람들 사이의 행복 격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실업은 경제적인 빈곤 이외에 불안과 우울을 낳고, 자존감과 개인의 통제 능력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즉 실업은 인간에게는 경제적 빈곤 이상의 의미가 있다. 아울러 가족, 우정, 사회적 연대감, 정치제도 같은 요소들도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정치제도, 특히 참여민주주의의 장치를 통해 보통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삶의 만족 수준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 p.182 노년에서 중요한 인간관계는 무엇일까? 배우자, 자식, 친구, 공동체일 것이다. 특히 배우자와 자식은 노년에서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일 것이다. 배우자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자식으로부터 존경받지 못하는 사람을 우리는 행복하다고 부를 수 없을 것 같다. 또 훌륭한 노년을 보내기 위해서는 친구가 반드시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친구 없는 삶을 그 누구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시민으로서의 삶도 중요할 것 같다. 최근 노인들의 모임이 활성화하고, 노인들의 자원봉사가 증가하는 것도 이를 잘 말해준다. 덧붙여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관조적 행복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행복이 아닌가 싶다. 우주의 이치,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성찰하는 것도 작지 않은 행복이기 때문이다. --- p.200 우리 사회에서 노인의 성에 대한 시선은 여전히 부정적인 것 같다. 많은 노인이 배우자의 사별 또는 이혼으로 성적인 고독 상태에 빠져 있고, 특히 여성 노인의 경우는 손주 돌보느라 여력이 없을 경우도 있다. 또 설사 여력이 있다고 할지라도, 자녀들의 눈치나 사회의 부정적 시선으로 인해 성에 대해 적극적이지 못하다. 이따금 성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면 주책스러운 노망으로 치부되기 일쑤이다. 여성 노인들은 할머니로 지칭되는 헌신적인 보살핌의 주체로만 간주되고 여성성을 상실한 중성적인 존재로 강요받고 있는 셈이다. -217쪽적극적이고 활기찬 노년의 삶에서 성은 필수적이다. 성적 욕구는 인간의 기본 욕구이다. 매슬로의 욕구 단계이론으로 보자면, 기본 욕구를 충족시킨 후에야 다른 고차적 욕구 실현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성적인 것에 관한 관심을 표현하는 노인을, ‘주책 많고’ ‘밝힌다’라고 비난하는 것은 일종의 연령차별(ageism)에 해당할 것이다. 일정 나이가 되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실제 능력과 무관하게 강제로 직장에서 그만두게 하는 것도 연령차별이지만, 나이가 많다고 해서 그 사람의 성적 관심을 부정하고 비난하는 것도 연령차별이다. -220쪽키케로처럼 성적 욕망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에 나오는 잭 니콜슨처럼 비아그라 섹스를 통한 젊음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일본의 학자 쓰지 신이치처럼 슬로 섹스같이 제3의 길을 추구할 것인가? 어떤 것이 정답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오로지 당사자의 선택사항일 것 같다. 분명한 것은 섹슈얼리티의 의미는 성은 고정불변의 자연적 사실이 아니라, 사회 문화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정해진 바가 없으니 내가 상황에 맞게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 p.231 행복한 노년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질병에 시달리지 않고 건강을 유지하면서, 적극적으로 생산 활동에 참여할 수 있으면 더 좋고 직업이 없더라도 어느 정도는 소일거리가 있는 삶일 것이다. 그리고 행복한 노년에서 인간관계는 중요하다.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 일상생활에서도 윤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성생활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노인정책에서 여성 노인의 삶은 매우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 여성이 남성보다 평균 수명이 높아서 노인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 평균 수명이 50세가 채 안 되었던 시절, 여성들은 평생 출산과 육아만 하다 인생을 마감했다. 이제 수명 연장으로 인해 여성들은 대략 45세부터 출산과 육아 부담으로부터 해방되어 거의 90세 전후까지 기나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여성 노인에게서 성생활은 중요하다. 임신의 부담과 공포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성을 향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폐경은 단지 자녀를 낳을 수 없다는 신호에 불과하지, 성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p.231 실제로 한국의 부부관계는 서양의 근대적 부부관계와 다르다. 한국에서 배우자는 낭만적 사랑의 파트너이기도 하지만, 전통적인 가족주의에 기초한 삶의 동반자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자녀 양육이 부부관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기러기 아빠’는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현상이다. 물론 기러기 아빠 현상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점은 부부관계를 희생하면서까지 자녀 교육에 관심을 둔다는 것이다. 황혼 이혼도 자녀의 대학입시가 끝난 후 발생하는 경향이 있다. 황혼 이혼 대신 졸혼을 고려하는 것도 가족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낭만적 사랑과 우애적 사랑 사이에서 한국인들은 갈등하고 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전(前)근대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이행기에 발생하는 현상일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낭만적 사랑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낭만적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연애결혼을 전제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연애결혼의 역사는 일천하다. 일제 시절 를 부른 가수 윤심덕처럼 낭만적 사랑을 갈구한 신여성들도 있었지만, 연애결혼이 지배적인 현상이 된 것은 1970년대 이후가 아닌가 싶다. --- p.267 현대인들은 고독한 가운데 죽는다. 죽어가는 과정에서 그들은 가족과 친지, 공동체로부터 분리되어 외로이 죽어간다. 인간은 고독한 존재라는 관념은 서양 근대의 기본 흐름이다. 근대 이후로 개인은 사고와 행위의 주체이다. 칸트의 계몽주의에서 잘 드러나듯, 근대에서 개인은 인식의 주체이고, 삶의 주체이다. 개인은 고대와 중세를 지배했던 왕과 신, 전통으로부터 해방된 자아이다. 삶의 주체가 개인이라는 사실은 결국 죽음의 주체도 개인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종교와 전통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은 살아가는 순간 그것들이 주는 질곡과 모순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죽음이라는 삶의 유한성에서 발생하는 고통을 다소나마 위로해 주었던 원천들의 상실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는 죽음을 두고 종교와 전통의 도움 없이 자기 스스로 해결해야만 한다. 개인이 지니는 유한성과의 외로운 투쟁은 개인화에 따라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인 셈이다. --- p.277 우리는 스스로 자기 삶을 살아야 하는 삶의 주체이고, 죽음을 감당해야 하는 죽음의 주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이 곧 죽음을 고독하게 쓸쓸히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은 아니며, 더욱이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면서 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죽음 및 죽어가는 과정과 관련해 가족과 공동체의 역할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 물론 현재 의사가 하는 일을 가족이나 마을 사람들이 대신할 수도 없고, 장의사가 하는 일을 전적으로 마을 공동체가 해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현대사회가 분업사회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데도 병원에서 의사가 모든 것을 관장하고 환자와 환자 가족은 객체로 전락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장례의 주체가 전이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방인인 장례대행업체가 장례의 주체가 되고, 상을 당한 사람들은 오히려 장례의 주변인으로 전락하는 주체와 객체의 역전 현상은 가족과 친지, 공동체를 소외시키고, 환자와 죽어가는 자를 소외시킨다. --- p.29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