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검색을 사용해 보세요
검색창 이전화면 이전화면
최근 검색어
인기 검색어

소득공제 청년패스
프랑스를 만든 나날, 역사와 기억 Ⅱ
현대 프랑스의 파노라마
푸른역사 2025.05.19.
베스트
서양사/서양문화 top100 8주
가격
33,000
10 29,700
YES포인트?
1,650원 (5%)
5만원 이상 구매 시 2천원 추가 적립
결제혜택
카드/간편결제 혜택을 확인하세요

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해외배송 가능?
  •  문화비소득공제 가능

이 상품의 시리즈 2

이 상품의 시리즈 알림신청
뷰타입 변경

이 상품의 태그

책소개

목차

책머리에

1부 혁명과 제국의 서사시

1장 1789년 7월: 바스티유 습격, 혁명의 깃발을 올리다!
2장 1792년 8월: 왕정의 몰락, 혁명의 일탈인가 도약인가
3장 1794년 7월: 테르미도르 9일 정변과 로베스피에르의 실각
4장 1799년 11월: 브뤼메르 18일 정변과 나폴레옹의 등장
5장 1815년 6월: 워털루 전투, 나폴레옹제국의 황혼 서사시

2부 낭만주의의 물결, 혁명과 반동의 세월

6장 1830년 2월: 빅토르 위고의 〈에르나니〉, 낭만주의의 승리
7장 1830년 7월: ‘영광의 3일’, 혁명이 부활하다
8장 1848년 2월: 2월혁명과 두 개의 공화국
9장 1851년 12월: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 역사의 희비극

3부 공화국 프랑스의 진통, ‘벨 에포크’를 향하여

10장 1871년 3월: 파리코뮌 봉기, 코뮌 신화의 탄생
11장 1874년 4월: 〈인상, 해돋이〉, 클로드 모네와 인상파 예술의 탄생
12장 1894년 9월: 드레퓌스 사건, 프랑스의 분열과 통합
13장 1905년 12월: 정교분리법과 그 현대적 유산

4부 극단의 시대, 전쟁과 평화

14장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의 시작_346
15장 1936년 5월: 인민전선, 사회주의적 공화주의의 정치 실험
16장 1940년 6월: 드골과 ‘자유 프랑스’, 레지스탕스 역사를 열다
17장 1942년 7월: 벨디브 사건, 독일강점기 프랑스 최악의 대독 협력

5부 의혹의 시대, 새천년의 명암

18장 1954년 5월: 디엔비엔푸의 함락과 프랑스 식민제국의 해체
19장 1954년 11월: 알제리 전쟁, 식민통치의 기억과 화해의 수사학
20장 1968년 5월: ‘68운동’ 50년 후의 평가와 유산
21장 1981년 5월: 미테랑의 대선 승리와 프랑스의 사회주의 정치
22장 2015년 1월: 『샤를리 엡도』 사건과 프랑스 내 소수자들


찾아보기

품목정보

발행일
2025년 05월 19일
쪽수, 무게, 크기
572쪽 | 820g | 153*223*30mm
ISBN13
9791156122944

책 속으로

“바스티유의 정복자들”은 대부분 장인, 노동자, 가난뱅이 등 서민이었다. 이들은 “계급적 연대”의 토대 위에 유산자인 선거인들의 지휘 아래 합심, 협력했다.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자생적으로 결성된 민병대가 서로 연대함으로써 바스티유 함락은 “진정으로 국민적 반란의 절정”이 되었다. 1790년 7월 14일 바스티유 함락 1주년에 파리에서 거행된 연맹제가 그 증거다.
--- p.16

7월 14일 함락될 당시 바스티유의 수감자가 7명에 불과했고, 그나마 루이 15세 암살 미수로 30년째 수감 중인 타베르니를 제외하면 가족의 요청으로 수용된 정신병자 2명과 위폐범 4명이 전부였다는 사실, 7월 14일 바로 그날 바스티유로 시민들이 몰려간 것은 자신들을 지키는 데 필요했던 탄환과 화약을 구하기 위함이었고, 시내를 굽어보는 망루의 대포들이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그 상징성을 훼손하지 못하는 듯하다.
--- p.36

1792년 8월 10일, 프랑스 국회(정확히는 입법의회)는 왕권의 중단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1791년 헌법으로 프랑스는 공식적으로 입헌군주제 국가가 되었고, 루이 16세는 집행권력의 수장이 되었지만, 이러한 국회의 선언으로 루이 16세는 불가침이라고 규정된 프랑스인의 세습 대표직을 박탈당했다.
--- p.39

공화력 2년 테르미도르 9일(1794년 7월 27일) 로베스피에르의 실각은 급작스러운 사건이었다. 이날 국민공회 회의의…연단을 차지한 비요바렌은 독재자 로베스피에르를 심판하고 그와 한패인 국민방위대 사령관 앙리오와 혁명재 판소장 뒤마를 체포해야 한다고 외쳤다.…이날 로베스피에르는 동료 산악파 의원들인 생쥐스트, 쿠통, 르바, 동생 오귀스트와 함께 체포되어 이튿날 처형되었다.…이튿날부터 사흘간‘ 로베스피에르의 공범’ 100여 명이 처형되었다.
--- p.61

공화력 3년 헌법은 공화력 1년 헌법이 보장한 사회적 권리인 부조권, 교육권, 봉기권, 행복권을 폐지했을 뿐 아니라 1791년의 재산 제한 선거제로 돌아가되 납세점 이하 시민은 더 이상 ‘수동시민’으로도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헌법의 서문인 ‘인간의 권리와 의무 선언’에서 “인간의 소멸할 수 없는 자연권”에 대한 언급을 지워 버림으로써 1789년의 해방적 보편주의마저 포기했다. 이런 이유로 브뤼넬은 1795년은 총재정부와 제국의 안정화를 준비한 독창적인 정치적 ‘창조물’이며 그저 ‘반동’이 아니라 혁명의 종결이고 심지어 혁명의 부정이었다고 주장했다.
--- p.84

1799년 11월 9일, 공화력 브뤼메르(안개 달) 18일 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은 군사 정변을 일으켰다.…이 사건으로 인해, 프랑스혁명으로 수립된 제1공화국의 두 번째 헌정체제인 공화력 3년 헌법(1795)과 총재정부가 붕괴했으며 현대 프랑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장군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 p.93

1800년에 주로 출판된 정치 책자들은 대개 보나파르트와 새 헌법에 대한 예찬을 담았다. 이 찬가들은 종종 통령정부의 후원을 받아 작성된 시와 산문으로서, 그 수가 적지 않았다.…보나파르트가 유럽에 평화를 가져올 “천재적인 영웅”이라는 것, 그리고 그러한 영웅이 공화력 8년의 “탁월한 헌법”을 국민에게 선사함으로써 내치에서도 “빛나는 업적”을 세웠다는 것, 따라서 이제 혁명은 “진정으로 종결”되었으며 프랑스는 “영광스러운 평화”의 후광 아래서 나날이 발전하리라는 것이었다.
--- p.107

돌아온 복고 왕정은 몰락한 제국보다 인기가 없었다. 국민은 전쟁의 종식과 독재자의 몰락을 반긴 만큼, 구체제로의 회귀를 두려워하고 적성국 영국에의 패배와 약소국으로의 전락을 아쉬워했다. 복고 왕정 극우 왕당파의 득세에 염증을 느낀 대중은 어느새 유배당한 황제를 그리며 지나간 영웅시대를 아쉬워했다.
--- p.134

워털루는 프랑스가 자유와 공화국으로 나아가기 위해 거쳐야만 한 시련이었으며 워털루의 용사들은 프랑스의 ‘순교자’이다. 그것은 승리에 버금가는 패배요 정신상의 승리였다. 이렇게 워털루는 위고의 필치에 힘입어 프랑스인의 자부심 속에 ‘영광스러운 패배’로 거듭났다.
--- p.139

1830년 7월 27~29일 파리를 뒤덮은 바리케이드는 프랑스가 여전히 혁명의 진앙지임을 유럽에 알렸다. ‘영광의 3일’로 일컬어질 이날들은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의 그림〈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 의해 프랑스사의 불멸의 순간이 되었다.…이 혁명의 결과 1814년에 수립된 복고 왕정이 무너졌고 대혁명기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성 투표했던 오를레앙 공작 ‘평등공’ 필리프의 아들 루이 필리프가 왕좌에 올랐을 뿐 아니라 혁명의 물결이 프랑스를 넘어 다시금 유럽 전역을 휩쓸었다.
--- p.167

샤를 10세는…의회를 해산하고 6월 24일과 7월 3일 선거를 치른다고 공포했다.…국내의 반대와 영국과의 외교적 긴장을 무시하고 알제리의 수도 알제 원정을 밀어붙였다. 프랑스군은…7월 5일 맹렬한 포격 끝에 알제를 함락했다. 그러나 이 소식은 선거가 끝난 7월 9일 파리에 전해짐으로써 선거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고 여당 신문과 주교들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과격왕당파는 다시 선거에서 대패했다.
--- p.173

1848년 2월, 프랑스는 1789년 대혁명과 1830년 7월혁명에 이어 세 번째 혁명을 맞았다. 7월 혁명이 부르봉 복고 왕정을 몰아냈다면, 2월혁명은 7월 혁명으로 수립된 루이 필리프 왕의 입헌군주정을 쓰러뜨렸다. 1847년 여름부터 선거권 확대를 요구하는 ‘연회banquet’가 전국적으로 벌어지면서 7월 왕정의 위기에 불을 지폈다.
--- p.195

급진공화파와 사회주의자, 그리고 파리의 다수 노동자에게 공화국 수립은 시작일 뿐이었다. 그들은 임시정부가 혁명을 계속 진행하여 적극적 사회개혁을 실천하는 이른바 “민주적·사회적 공화국”을 실현하기를 원했다. 임시정부가 봉기한 인민의 상징인 바리케이드 위에서 수립되었다는 사실은 새 정부가 가진 정당성의 근원인 동시에 정부의 대표성이 취약함을 뜻하기도 했다.
--- p.207

2월 혁명에서 파리의 바리케이드가 마지막으로 승리한 후 1848년 짧은 “인민의 봄”에 바리케이드는 유럽 전체로 수출되었다. 혁명의 상징으로서 바리케이드는 유럽의 반란자들을 묶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6월 봉기의 패배 역시 유럽 전체에서 되풀이되었다.…바리케이드는 전술적 가치가 줄어든 후에도 혁명 전통의 매개물로서, 인민주권의 도덕적 권위를 가시화하는 기념비로서, 주민들의 참여와 연대를 끌어내는 연결망의 중심으로서 오랫동안 그 의미를 잃지 않았다.
--- p.222

1851년의 쿠데타는 공화파가 기대했던 만큼의 저항을 야기하지 않았고 그해 12월 20~21일의 국민투표에서 프랑스인들은 압도적 표차로 쿠데타를 재가했다. 그러나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는 삼촌의 그것과는 달리 ‘유혈’ 쿠데타였고, 합법성을 훼손하여 권위주의적 독재체제를 수립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삼촌의 쿠데타보다 훨씬 더 선명한, 제국에 찍힌 불명예의 낙인이 되었다.
--- p.227

1851년 12월 20~21일의 국민투표에서 프랑스인들은 압도적 표차로 쿠데타를 승인했다.…1852년 1월 15일에는 대통령에게 막대한 권한을 부여하고 입법권을 극도로 약화시킨 새 헌법이 공포되었고 3월에는 의원 수가 261명으로 쪼그라든 입법의회가 개원했다. 질서가 회복된 것으로 보이자 대통령은 9월과 10월 지방 순회에 나서서 자신의 ‘인기’를 확인한 후 제국의 재건을 천명했다. 1852년 11월 21일 실시된 국민투표는 압도적 다수로 제국을 지지했다.
--- p.250

코뮈나르의 봉기는 노동계급이나 무슨 주의자 같은 어떤 특정 집단이 계획한 것도 의도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1870~1871년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동안 지배 집단이 보여준 무능과 배신에 대한 애국주의적 분노와 그에 이은 군주제적 반동의 위기에 대한 강력한 공화주의적 대응에서 발생했다. 봉기 자체도 격렬한 전투나 거창한 음모 같은 것은 전혀 없고, 정부군의 어설픈 작전 실패와 맞물려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 p.258

코뮌하에서 인민이 인민주권의 원칙을 실제로 수행한 것은 그들이 다양하게 결집한 아쏘시아시옹을 통해서였다. 아쏘시아시옹은…파리 인민이 코뮌 정부를 감시하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통로로서,…폐쇄적인 조직이 아니라 일부 운영진만 있고 특정 장소에서 주기적으로 집회를 열어 주도적 인사들의 강연을 듣거나 중요 사안에 대해 자유로운 토론을 수행하는 결사체였다.
--- p.263

1870~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의 패배는 프랑스가 통일된 민족(정체)성과 민족이 만들어질 수 있는 중요한 계기이자 변곡점이었다.…1894~1906년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의 갈라진 사회의 단면을 잘 드러내는 중요한 역사적 국면이었다. 이 사건은 프랑스 국민을 좌우 대결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은 ‘사건 중의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 p.301

공간적으로 프랑스 문화를, 시간적으로는 드레퓌스 사건을 배경으로 형성된‘ 지식인’이라는 용어는 드레퓌스 사건을 둘러싼 침묵의 벽을 뚫기 위해 쓰였고, 졸라의 청원서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진 10여 년에 걸친 지리멸렬한 공방전 한가운데에서 좌우 지식인들이 사건의 지렛대 역할을 했다. 따라서 드레퓌스 사건을 국가적인 ‘사건’으로 비화시키는 역할을 한 것은 지식인이었다.
--- p.308

1936년 국회의원 선거로 두 개의 서로 다른 프랑스의 정체성이 드러났다. 이것은 표면적으로 사회주의를 지향하거나 그 가치에 동조하는 개혁적 정당들을 한 무리로 하는 집단과 보수주의적 공화주의를 지향하는 자유주의 정치 세력 간의 충돌 양상을 보여주었다. 결과는 인민전선이라고 명명되는 좌파 급진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공산주의 연합의 승리였다.
--- p.371

이른바 ‘6월 18일의 호소’로 불리는 이 연설은 드골 장군이 영국 BBC 라디오에서 행한 첫 번째 연설로 전날 페탱 총리의 라디오 연설에 대한 응답이었다.…이 연설은 휴전을 감행하며 적과 내통한 정부를 구성한 프랑스의 군사 지도자들에 대한 비난과 함께 프랑스는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전쟁에서 패배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프랑스의 자유와 영광을 되찾자는 선언이었다.
--- p.392

1942년은 자유 프랑스가 실질적인 정치 세력으로 자리 잡는 해라는 점에서 프랑스 레지스탕스 역사에서 분기점을 이룬다. 4월에 들어선 라발 정부가 유대인 박해, 노동력의 강제 이주 등 대독 협력의 정책을 취하자 비시정부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었다. ‘나쁜 비시’로의 국면 전환이 이루어지는 1942년에는 자유 프랑스가 초기의 비정치적 운동에서 정치적 운동으로 외연을 확장하면서 드골의 정치적 입지는 공고해졌다.
--- p.401

‘벨디브 사건’은 1942년 1월 20일 나치 독일이 ‘유대인 문제의 최종적 해결’(이후 ‘홀로코스트’로 불리게 될)을 논의한 반제 회의의 결정에 따라 벌어진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1942년 3월부터 1944년 8월까지 총 7만 5,721명의 유대인이 독일 수용소들로 이송되어 대부분 학살당했는데 이 수용소들로 끌려가기 앞서 여러 차례 검거 선풍이 있었고 이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컸던 것이 바로 이 벨디브 사건이었다.
--- p.411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베트남에는 ‘권력의 공백’이 생겼다. 〈프랑스 정부는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할 의사가 없었다.…1946년 초에 이르면 남부의 주요 도시들은 대부분 프랑스 세력이 다시 장악하였다. 그렇지만 프랑스로서도 비엣민이 더 확고한 세력을 확립한 북부에 대해서는 무력 정복에 나서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1946년 3월 6일 호찌민과 협정을 체결하여 베트남민주공화국을 프랑스연합에 속하는 ‘자유 국가’로 인정하였다.
--- p.439

베트남민주공화국은 홍강 하류에 집결하는 프랑스군을 분산시키고자 1953~1954년 동계-춘계작전의 핵심 공격 목표를 베트남 북서부와 라오스 북부 지역으로 결정하였다. 그러자 프랑스군 사령부는 라오스로 가는 길목에 놓인 디엔비엔푸를 장악하여 이곳에서 베트남인 민군의 진격을 차단하기로 하였다.
--- p.448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식민지가 1950년대 이후…잇달아 독립을 얻어 냈으며, 1956년에는 알제리와 인접한 이슬람 국가 모로코와 튀니지가 마침내 독립을 쟁취했다. 이 와중에 알제리 독립운동은 프랑스의 거센 저항과 탄압에 직면해야 했다. 결국 알제리인이…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20세기 최대의 민족해방 전쟁’을 치러야만 했으며 8년간의 교전은 알제리와 프랑스 양측에 씻을 수 없는 앙금을 남겼다.
--- p.460

비타협 무장 투쟁 노선은 곧 1954년 10월에 민족해방전선으로 결집되었다. 민족해방전선이 주도한 11월 1일‘ 붉은 만성절’ 봉기는 1962년 3월에비앙 협정을 거쳐 그해 7월에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 이후 8년간 계속된 알제리 전쟁의 봉화였다.
--- p.461

라탱 지구의 바리케이드와 포석, 거리에 나선 수십만 명의 사람, 크고 작은 시위에 마비된 도시,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총파업 등 68운동이 프랑스 사회에 ‘파열’을 가져왔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 p.483

1981년 5월 10일 저녁 8시 프랑스의 주요 방송들은 대선 결선투표에서 사회당의 미테랑이 승리했음을 알렸다.…미테랑의 대선 승리와 한 달 뒤 사회당의 총선 승리는 프랑스에서 제5공화국이 탄생한 1958년부터 23년을 이어 오던 우파의 집권을 끝내는 정권교체였다.
--- p.503

미테랑은 대선 공약으로 드골의 개인 권력에 맞서 공화국을 민중에게 돌려주기, 개인의 자유 보호, 평화 공존과 유럽 협력, 핵무기 종식, 민주적 경제 계획, 사회 정의, 교육 민주화라는 일곱 개의 커다란 방향성을 제시했으며, 선거운동 내내 좌파연합 후보, 좌파 단일 후보, ‘현대 프랑스를 위한 젊은 대통령’을 강조했다.
--- p.506

미테랑 대통령 임기 초의 국유화는 ‘프랑스적 예외’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가 되었다. 의회 논의가 한창이던 1981년 12월 9일 미테랑 대통령은 자본 축적과 집중이 일정 수준에 도달해 경제의 주요 부문에서 민간 집단이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면, 국가가 통제권을 갖는 것이 필수적이라며 주요 산업체 국유화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 p.517

사회주택 지원 강화로 주택 공급을 확대했고 경제위기에 놓인 임차인의 거주권을 보장하는 1982년 퀴리오법을 제정했다. 1982년과 1983년 지방 분권화 관련 법들은 근대 절대주의 이래 수도에 집중된 각종 권한을 지자체에 배분했으며, 드골 시기 문화정책의 방향성이던 ‘문화 민주화’를 한층 발전시킨 ‘문화 민주주의’ 정책은 고급 문화예술뿐 아니라 일상적 대중적 문화예술의 향유와 창작 지원을 강화했다.

--- p.519

출판사 리뷰

이슈-‘벨디브 사건’과 ‘퀴리오법’을 들어봤나요

역사를 읽는 즐거움 중 하나는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벨디브 사건이 그런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이는 1942년 독일강점기 때 오로지 프랑스 경찰에 의해 8000여 명의 유대인이 동계경륜장(벨디브)에 갇혔다가 강제수용소로 이송된 사건이다. 보불전쟁에서의 패배 이후 나라가 양대 진영으로 쪼개져 10여 년에 걸쳐 공방전을 벌였던 드레퓌스 사건은 잘 알려져 있다. 한데 친드레퓌스 진영의 작가 에밀 졸라의 청원서에서 ‘지식인’이란 용어가 처음 등장했다는 사실 역시 처음 접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1981년 23년간의 우파 집권을 끝내고 등장했던 미테랑 사회주의 정부가, 경제위기에 처한 주택 임차인의 거주권을 보호하기 위해 내놓은 ‘퀴리오법’ 역시 낯설 터다.

사건-‘자유 프랑스’의 오점, 알제리 전쟁과 디엔비엔푸 전투

바스티유 습격 사건, 워털루 전투,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 68운동 등 프랑스사의 변곡점을 상술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자유ㆍ평등ㆍ박애의 나라 프랑스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싶은 ‘사건’도 상세히 풀어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으로의 복귀를 꿈꾸던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철수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1954년 10월의 ‘디엔비엔푸 전투’가 그렇고, 1954년 11월 ‘붉은 만성절’ 봉기를 계기로 8년간에 걸쳐 ‘20세기 최대의 민족해방 전쟁’이 벌어져 양측에서 무려 30여만 명의 희생자를 낸 알제리 전쟁은 프랑스사의 큰 오점이라 할 수 있다. 필자들은 전술지도, 영화 포스터 등 다양한 자료까지 동원해가며 당시 상황을 실감나게 전해준다.

문예사조-빅토르 위고의 〈에르나니〉를 둘러싼 ‘전투’

역사는 정치적 사건이나 사회적 이슈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이 책이 낭만주의의 대두와 ‘인상파’의 부상 등 트렌드에도 눈길을 돌린 이유다. 1830년 프랑스 파리의 한 극장에서 공연된 빅토르 위고의 연극 〈에르나니〉를 둘러싼 소동은 가히 ‘에르나니 전투’라 불릴 만했단다. 16세기 스페인의 젊은 귀족 에르나니의 사랑과 비극적 운명을 그린 이 작품을 둘러싼 대립은 단순히 낭만주의와 고전주의 간의 문학적?미학적 충돌이 아니었다. 당시의 복고 왕정 체제에서 자유주의자들과 과격왕당파 간의 갈등이 증폭된 결과였다. 사전 검열 움직임에, 첫 공연 때는 비난의 고성과 박수가 엇갈리다 못해 관객석에서 주먹질이 오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니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예술과 정치의 관계를 숙고하려 할 때 살펴볼 주제라 하겠다.

한국 학자들의 시선이 담긴 ‘프랑스사 평론’

이 책은 한국 프랑스사 학계의 ‘오늘’을 보여주는 공동 ‘작품’이다. 한국 프랑스사학회가 지난 몇 년간 진행해온 ‘프랑스를 만든 나날’이란 학술토론회의 성과를 모은 노작(勞作)이기 때문이다. 평면적인 설명을 넘어 프랑스 학자들은 해당 이슈나 사건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하는 ‘기억’을 담아내면서 전공 필자들이 저마다 개성적인 필치로 해석을 더한 결과 잘 읽히면서도 핵심을 놓치지 않는 빼어난 ‘역사 평론’이라 평가할 만하다.

리뷰/한줄평4

리뷰

10.0 리뷰 총점

한줄평

10.0 한줄평 총점

클린봇이 부적절한 글을 감지 중입니다.

설정
선택한 상품
29,700
1 29,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