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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자라지 않는다 … 007
라디오 스타가 사라진 다음에는 … 055 차라리 잠든 밤 … 109 내일의 집 … 161 뱀이 쫓아온다 … 229 안개가 시작된다 … 277 숙희의 미래 … 323 해설 | 전승민(문학평론가) 비장소(atopos)의 사랑 … 377 작가의 말 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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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어떤 관계는 무언가 종결되어야만, 누군가 분리되어야만 존속될 수 있는 것 같았다.
--- p.24 「슬픔은 자라지 않는다」 중에서 “우리, 완전 잃어버린 세대다.” 그 바람에 아이들이 책상에 엎어지며 속절없이 웃어댔고, 교실 분위기는 선생님이 출석부를 교탁에 내리칠 때까지 한동안 진정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우리 학년은 로스트 제너레이션이 되었다. 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확실히 우리 세대에는 인재가 부족했다. “인재? 인간 재앙이라는 뜻인가?” 소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를 통칭할 만한 말이 생긴다는 건 기분좋은 일이었다. 99년은 세기말이라는 이유로 본새가 나고, 2000년은 새천년의 시대인데 - “난 아직도 21세기에 사람이 태어난다는 거 안 믿어.” 소리는 때때로 그런 장난을 치곤 했다 - 96년은 뭔가 어중이떠중이스런 느낌이 있었다. 밀레니얼 세대로 묶기엔 너무 어리고, 이후에 태어난 애들한테는 애매하게 꼰대 같은. --- p.63 「라디오 스타가 사라진 다음에는」 중에서 기억이라는 건 생각보다 명확하지 못해서, 나는 그런 식으로 사는 동안 들었던 [슬램덩크]의 목소리를 한데 섞어서 기억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혼합되고 편집된 [슬램덩크]만을 감상할 수밖에 없는 거다. --- p.133 「차라리 잠든 밤」 중에서 지금도 이따금 그 말이 떠오른다. 곧 익숙해질 것이고,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는 말. 그 말은 주문처럼 나를 따라다니지만, 나는 한 번도 익숙해진 적이 없고 괜찮아진 적이 없다. --- p.165 「내일의 집」 중에서 나는 이 감각, 불편하고 어딘가 해소되지 않은 것 같은 손님의 감각이 이 집에 있는 동안 계속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 p.191 「내일의 집」 중에서 식사가 시작되고, 식탁을 둘러보고서야 깨달았다. 아무도 죽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모두 무사했다. 뱀술은 늘 있던 자리, 거실 진열장에 놓여 있었다. 사라진 적 없다는 듯이. 엄마는 누구도 죽이지 않았고, 여느 날과 다름없는 하루가 흘러갔다. 나는 누구에게도 죽임당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 p.269 「뱀이 쫓아온다」 중에서 거리가 가까워지고 가까워져서, 이제는 한 걸음만 남겨둔 상태였다. 그러나 오빠는 아직도 안개 너머에 있는 것 같았다. 이만큼 가까이 왔는데도 여전히 멀게 보였다. 나는 마지막 걸음을 떼며, 오빠라고 믿고 싶은 이를 향해 가만하게 손을 흔들었다. --- p.322 「안개가 시작된다」 중에서 숙희는 그보다 더 먼 훗날 그 문장을 떠올렸다. 충분히 일어날 수도 있었으나 단지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영 일어나지 않은, 확률 제로의 상황이 되어버린 삶의 여러 국면을. --- p.333 「숙희의 미래」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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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완전 잃어버린 세대다”
잡음 섞인 라디오, 찢어진 만화 중고책, 낡은 도서 대출 카드… 아날로그의 향수와 디지털의 속도 사이에서 아무도 모르게 지워진 가족, 친구, 그리고 나의 이야기 소설집의 문을 여는 「슬픔은 자라지 않는다」는 대학생 선주가 동기와 함께 삼 대 삼 미팅을 하는 장면에서 시작해, 미팅에 함께하기로 약속한 소위 ‘퀸카’ 대신 자신을 ‘폭탄’이라 칭하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의외의 재미를 안긴다. 이십대 시절 교분을 나누었으나 십수 년의 시간이 지나고 점차 관계가 시들해진 선주와 친구들의 모습을 통해 나이든다는 것과 어른이 된다는 것의 과정을 찬찬히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한편, 선주가 오래도록 잊고 있던 ‘폭탄’이라는 존재의 흔적을 맞닥뜨리는 중반부를 통해 시간의 흐름에도 ‘자라지 않는’ 것은 존재한다는 사실, 과거의 슬픔은 극복하기보다는 그저 “보존 서고”(29쪽)처럼 간직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바로 성장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라디오 스타가 사라진 다음에는」은 방송국 구성작가로 일하는 화자 ‘나’가 어릴 적에는 어렴풋이만 알고 있었던 삼촌과 관련된 비극적인 가족사를 들려주는 작품이다. 한때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내 귀에 도청장치’ 난입 사건을 일으킨 사람을 둘째 삼촌으로 두었다는 허구의 상상력에 그 시절 횡행한 독재정권의 국가 폭력 문제를 결합해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개인의 아픔을 생생하게 재구성해낸 감동적인 소설이다.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전승민은 김본의 소설에는 “‘이야기’나 ‘기록’과 관련된 직업을 지닌 이들이 주요하게 등장”(399쪽)한다고 말한다. 「슬픔은 자라지 않는다」의 선주가 도서관 서고를 관리하는 사서, 「라디오 스타가 사라진 다음에는」의 주인공 ‘나’가 방송국 구성작가라면, 「차라리 잠든 밤」의 ‘나’는 방송국 PD이다. ‘나’가 전속 계약 종료를 앞둔 동료 성우 재하의 더빙 오디션을 돕는 이야기인 「차라리 잠든 밤」은 두 사람이 각자 지닌 남모를 상처를 서로를 통해 치유해나가는 모습을 아름답게 그린다. 한때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텔레비전 판인 만화 [슬램덩크]가 재하의 더빙 오디션의 대상 작품으로 등장하는데, 여러 판본이 존재하는 만화 속 작중 인물은 성우에 따라 목소리가 달라서 시청자는 늘 “혼합되고 편집된 [슬램덩크]만을 감상할 수밖에 없”(133쪽)다는 설정은 흥미를 유발한다. 이는 ‘나’가 재하와 함께하는 더빙 연습, 그 ‘목소리들의 겹침’과도 연결되면서 ‘나’가 과거 트라우마로 남은 엄마와의 어떤 사건을 수용할 수 있는 기억으로 변화시켜나가는 과정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살아온 세월이 담긴 사람의 얼굴, 그 얼굴을 닮은 가족들의 다채로운 모습들 「슬픔은 자라지 않는다」 「라디오 스타가 사라진 다음에는」 「차라리 잠든 밤」이 김본 소설의 복고적인 매력을 엿보게 한다면, 「내일의 집」 「뱀이 쫓아온다」 「안개가 시작된다」는 가족을 키워드로 하는 김본 소설의 또하나의 특징을 살피게 한다. 「내일의 집」은 어린 시절 엄마를 따라 미국을 세 번 방문했던 ‘나’의 이야기이다. 소책자 『라디오 스타가 사라진 다음에는』 뉴페이스북에서 작가가 편집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밝힌바 「내일의 집」에는 어린 시절 엄마를 따라 다녀온 미국 여행의 기억을 되살려낸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이 담겨 있다. 아메리칸드림이 번번이 좌절되고 끝내 ‘자기만의 집’을 갖지 못하는 엄마의 실패기를 어린 ‘나’의 시선에서 그려낸 이 소설은 한국문학의 한 지류인 강렬한 여성 성장소설의 계보를 잇는 것처럼 보인다. 「내일의 집」이 고모할머니와 엄마, 엄마의 친구, 자식 세대인 ‘나’와 동생의 모습을 낯선 타국을 배경으로 보여준다면 「뱀이 쫓아온다」는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와 삼촌, 그리고 부모 삼대의 이야기를 한국을 배경으로 펼친다. 할아버지의 집에 보관된 오래된 뱀술로 인해 가족에게 “액운”(273쪽)이 닥쳤다고 믿는 ‘나’는 실제로 가족 안에 도사린 죽음과 불행을 겪으며 성인이 된다. 그런 ‘나’가 그 미신을 떨쳐버리며 비로소 ‘가족’이라는 혈육 공동체에서 벗어나는 결말부는 커다란 울림을 전한다. 「안개가 시작된다」는 어릴 적 이혼한 부모 양측이 모두 양육권을 포기하는 바람에 이모네 집에서 길러진 ‘나’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른 나이에 명을 달리한 사촌언니를 떠나보낸 ‘나’는 남겨진 사촌언니의 배우자 원규 오빠와 딸 슬기에게 복잡 미묘한 감정을 느낀다. 그런 ‘나’의 내면은 사회가 규정한 소위 ‘정상 가족’이라는 틀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으로, 그것을 무엇으로 불러야 할지를 안개와 같은 여백으로 독자에게 남긴 채 가족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매혹적인 작품이다. 새로운 이름으로 살 수 있다면 무엇을 택할 수 있을까? 소설집의 대미를 장식하는 「숙희의 미래」는 전(前)세대인 ‘미래’와 후(後)세대인 ‘숙희’ 두 여성의 이야기를 교차하며 “새로운 이름으로 살 수 있다면 무엇을 택할 수 있을까?”(360쪽)라는 질문 아래 이름이 주는 운명에서 벗어나려는 여성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직장을 관두고 어머니를 돌보게 된 미래, 무명 가수로 살고 있는 숙희의 이야기는 각각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 절묘하게 포개지는데, 전승민은 해설에서 “우리는 과거를 일방적으로 상속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과거를 다시 새로 고침하며 당시에는 조명되지 못한 진실을 드러내고 새롭게 긍정”(408~409쪽)하게 된다고 해석한다. “삶이 우리를 더 나쁜 쪽으로 데리고 갈 거야”(354쪽)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마다 선대 여성의 삶을 떠올리며 자신의 현재를 다잡는 숙희는 기억할 만한 또하나의 여성 인물일 것이다. 나와 가장 가깝게 여겨지는 가족의 삶을 실은 타인의 그것보다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자각이 들 때, 그래서 가족의 삶을 다시 한번 깊이 들여다봄으로써 가족과 그 역사뿐 아니라 그 사회의 모습을, 무엇보다 나 자신을 조망하게 하는 김본의 소설은 ‘기록’과 ‘보존’이라는 문학의 한 역할을 수행하는 동시에 우리가 잊고 있던 주위 소중한 사람들의 손을 잡고 싶게 하는 애틋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