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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속운행해도 괜찮습니다 | 안지나
뱀이 쫓아온다 | 김본 숲 체험 | 오한기 변성 | 윤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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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원히 달릴 수 있는 버스는 없다. 우리의 삶이 돌이킬 수 없는 순간순간의 총합이듯이, 지금의 한국 사회 역시 그렇다. 많은 이들이 저출생과 고령화를 우려하고, 사회적 돌봄의 필요를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그로 인해 일어나야 할 삶의 구체적인 변화는 상상하고 싶지 않은 듯이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 결과를 목도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제, 누군가는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조금 더 천천히 달려도 괜찮습니다, 라고. _안지나, 「저속운행해도 괜찮습니다」 --- p.12 나는 어린아이처럼 칭얼대며 몸부림치는 할머니를 바라볼 때 엄마의 표정을 알고 있다.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이고, 오물이 묻은 기저귀와 이부자리를 정리할 때의 표정이 어떤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를, 식사하는 가족들을 바라보던 엄마의 얼굴은 떠올릴 수가 없다. _김본, 「뱀이 쫓아온다」 --- p.53 할머니는 죽기 일 년 전 요양원으로 보내졌다. 마지막으로 찾아갔을 때는 나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사실 할머니가 알아볼 수 있을 만한 건 더이상 존재하지 않기도 했다. 할머니는 납작하고 때가 탄 메밀베개를 어디든 안고 다니며 먼지라고 불렀다. 할머니가 마침내 세상을 떠났을 때, 가족 중 누구도 울지 않았다. 때로 너무 오래 살면 죽고 나서 흘려줄 눈물이 고갈된다는 것을 알았다. _김본, 「뱀이 쫓아온다」 --- p.54~55 저기요, 아이를 잠시 부탁드려도 될까요? 여긴 어린이집이 아니라 문구점입니다만…… 한 번 더 묻고 난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답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해서 급하게 CCTV를 켰다. 사십대인 듯한 한 여성이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전화를 하고 있었다. 아이는 이러저리 뛰어다니며 장난감을 구경하느라 바빴고 아이 엄마의 표정은 어딘가 다급해 보였다. 저 보이세요? 아이 엄마가 CCTV 앞에서 손을 휘휘 휘저었다. 네, 보입니다만…… 저 여기 단골인데…… 아이 엄마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CCTV에서 몇 번 본 것처럼 낯이 익었다. 어느 순간 아이 엄마가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린이집에 있는 둘째가 아파서 대학병원에 가야 하는데 첫째를 맡길 데가 마땅치 않다는 내용이었다. 충분히 공감이 됐다. _오한기, 「숲 체험」 --- p.94~95 굶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굶었어. 그는 정종의 뚜껑을 닫고 병을 잡풀이 가득 찬 자루에 던진다. 가까이에서 제초기 소리가 들린다. 고요하다. 까마귀들은 먼 축대에도 앉아 있다. 그의 주머니에서 벨소리가 울린다. 그는 자루를 내려놓고, 오른손의 장갑을 벗고, 전화를 받는다. 그래. 그는 전화를 끊고, 주머니에 전화를 넣고, 왼손의 장갑까지 벗어 뒷주머니에 꽂고, B501 시작점으로 빠르게 걸어간다. 벗어둔 가방을 메고, 제초기를 들고, 비탈을 내려간다. 긴 의자에 앉아 있던 노인이. 등이 굽고, 마르고, 머리를 조금 떠는, 백발의, 검버섯이 얼굴을 덮은, 노인이. 가방에서 비닐을 꺼냈다. 감자인지. 달걀인지. 삶아진 뭔가를 꺼내서 조심스럽게, 주변의 눈치를 한참 살피다가 한 입, 베어물었다. 그리고 다시. 로키가 언제 왔는지 비탈에 서 있다. 비탈 아래 흰 트럭이 보인다. 신입이 트럭 앞에 서 있다. 로키. 로키는 그를 따라 트럭 앞까지 간다. 신입이 주머니에서 간식을 꺼내 로키에게 내민다. 무엇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로키의 혀가 잠깐 신입의 손가락에 닿는다. 간지러워. _윤해서, 「변성」 --- p.130~1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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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타인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직접 알려줄 수는 없지만,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느낄지를 상상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야기가 가지는 공감의 힘일 것입니다. 추상적인 논증은 어느 정도 배경지식을 일러줄 수 있지만, 이야기야말로 오히려 직접적이고 절실하게 핵심을 보여줍니다.
소설잡지 『긋닛』은 그런 이야기의 힘을 믿습니다. 이야기는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세계와, 거기에 분명히 있지만 잘 보이지 않고 보지 않으려 하는 세계를 연결해 보입니다. 『긋닛』은 우리 시대에 간과할 수 없는 특정한 주제와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 편의 주제 에세이와 세 편의 단편소설을 엮어 독자들에게 선보입니다. * 2021년 봄, 이십대의 한 아들이 여드레 동안 오십대의 아버지를 방치해 심한 영양실조 상태에서 폐렴 등으로 끝내 숨지게 한 일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그 전해 9월 심부뇌출혈과 지주막하출혈 증세로 병원에 입원했던 아버지는 칠 개월간 병원 치료를 받았지만, 이후 경제적 부담 등을 이유로 지난 4월 23일 퇴원했습니다. 퇴원한 아버지는 왼쪽 팔다리 마비 증상으로 혼자서 거동할 수 없었던데다가 정상적인 음식 섭취가 불가능했으나 청년 아들은 퇴원 후 아버지에게 처방약을 일절 제공하지 않았고 영양공급을 위해 하루 세 개 섭취가 필요한 치료식은 일주일간 열 개만 제공했습니다. 이후 5월 1일부터 여드레 동안은 치료식과 물 등의 제공마저 중단하고 피해자의 방에 전혀 들어가지 않았고, 결국 청년의 아버지는 심한 영양실조 상태에서 폐렴 등이 발병해 숨졌습니다. 아버지를 굶어 죽게 한 ‘패륜아’ 청년의 사연은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청년은 어머니가 집을 나간 뒤 십여 년간 아버지와 단둘이 살아왔고, 고된 간병노동은 청년이 혼자 감당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이천만원의 수술·병원비를 감당하려다 돈이 떨어져 월세·가스비·전기료·통신비 등 모든 것이 연체되었으며, 쌀을 살 돈이 없어 주변에 이만원을 빌려달라는 메시지까지 보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어떻게든 구직하려 애쓰며, 돈을 아끼기 위해 편의점 내 유통기한이 임박한 ‘폐기’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하기도 했지만 생활고는 계속됐고, 결국 아버지는 아들을 불러 “미안하고, 앞으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라” “그전까지는 방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던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아들이 제 방에서 울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 결국 아버지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 많은 고민을 안겨주었습니다. 극단적인 사례는 그러나 이뿐만이 아닙니다. 치매인 아내를 돌보다가, 지적장애인인 아이를 돌보다가, 남편과 엄마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뉴스도 우리는 보아왔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의 품이 아니라 보모와 유아원 등의 돌봄노동자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고, 각종 돌봄기관에서 생기는 문제들도 적지 않습니다. 『긋닛』 6호는 ‘돌봄사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러 돌봄의 문제가 가족 안의 일이던 시대는 지난 지 오래입니다. 고령화와 노인화, 일인가구의 증가 등과 더불어 각종 돌봄은 이미 사회와 국가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이며, 언젠가는 혹은 곧 나 자신의 문제가 될지도 모릅니다. 『긋닛』 6호는 이미 모든 개인의 문제가 되어버린 ‘돌봄’의 문제를 둘러싼 개성있고 문제적인 이야기 3편을 선보입니다. 오키나와 국제대학에서 비교문화와 비교문학을 가르치며 한일 노년문학에서 나타나는 세대 갈등, 질병과 죽음, 젠더 등의 문제에 주목하고 있는 안지나 준교수는 주제 에세이 「저속운행해도 괜찮습니다」를 통해 초고속으로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드러나는 각종 돌봄의 문제를 지적하고, 일본 느린 버스를 떠올리며 우리 사회의 속도를 조금은 늦출 수 있지 않을까 제시합니다. 개개인뿐 아니라 사회적 국가적 차원에서 도움이 사람들을 위한 돌봄과 배려를 이야기하며 조금 더 천천히 달려도 되지 않겠느냐고, 저자는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김본의 소설 「뱀이 쫓아온다」는 어린 화자가 속한 삼대의 가족 구성원들의 다양한 이야기 속에서 여러 돌봄의 문제를 생각해보게 합니다. 뜻밖의 사고로 돌아가신 아빠와 이후 갑작스레 시댁 식구들과 함께하게 된 엄마, 돌연 치매 진단을 받은 할머니와 여전히 부모님과 살고 있는 삼촌과 고모까지, 저마다의 이야기들은 우리 사회 속 여러 세대의 이야기를 대표하고 있기도 합니다. 어린 ‘나’의 한 시절이 지나고, 조모와 자란 남편을 만난 ‘나’의 이야기는 또다른 시절로 들어갑니다. 윤해서의 소설 「변성」은 특유의 시적인 문체와 독창적인 글쓰기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공원묘지 관리인인 ‘그’의 어느 평범한 일과에 끼어드는 다른 목소리에 따라 독자들은 ‘그’의 현재와 목소리의 어느 시공간 속을 오가며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