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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스쿨 러브 11
꽃과 비닐 87 도로시는 말할 수 있는가? 143 콤비네이션 205 작가의 말 2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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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서서 뭘 하지는 않는데 시키면 못하는 게 없는 애. 경이는 그런 아이였다. 잠재력을 가늠할 수 없는 미지의 캐릭터. 아이들은 경이를 좋아하면서도 어려워했다.
사실은 얼간이인데. --- p.15 경이와 희주, 나와 지현은 더블데이트를 몇 번 했다. 더블데이트. 곱씹을수록 이상한 말이었다. 그걸 왜 더블로 할까. 아니 그보다도 나랑 지현이 어떻게 데이트를 해. 하지만 신이 난 경이의 흥을 깰 수가 없어서 그냥 했다. 경이와 노는 것의 확장판이나 번외편 정도로 생각하면 못할 일도 아니었다. --- pp.39-40 사람들은 서로의 공간에 함부로 들어가지 않았다. 경이와 나는 우리가 편하게 느끼는 만큼 떨어져 달렸다. 바짝 붙기도 했고 열 발짝, 스무 발짝씩 떨어지기도 했다. 달리면서 보았다. 햇빛을 받는 경이의 공간, 달빛을 담는 경이의 공간, 그리고 나에게도 공평하게 내려오는 빛. 그걸 머리에 이고 달렸다. --- p.82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를 거는 데 한 달을 망설이는 마음은 대체 뭘까. 할 거면 빨리 하고 안 할 거면 영원히 하지 말 것이지. 내게는 계속 전화가 오지 않았다. 학교를 파한 뒤의 나는 줄곧 집에만 있었다. 애들은 서로 말이라도 맞춘 것처럼 하루 걸러 이틀 걸러 내게 전화를 했다. 착한 마음들이었지만 고맙지는 않았다. --- p.108 나는 그래서 정말 외로웠다. 일주일 동안 희재와 만나지도 않았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렇게 했다. 희재가 나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길 바랐다. 조금이라도 슬퍼하길, 외로워하길. 하지만 나는 희재의 슬픔과 외로움은 알 수 없었다. 내가 가늠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내 몫의 슬픔과 외로움뿐이었다. 그것은 낯설고 불편한 감정이었다. --- p.126 잘 갔어? 묻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멀지 않은 미래에 다시 만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묻지 못할 것이다. 도로시는 내가 있는 쪽으로 조금도 기울지 않았으므로. 좋아하는 것을 말하는 일을 망설이고 많은 말들을 참아내기도 하는, 그런 도로시는 여기에 오지 않았으니까. 이 세카이에 그런 도로시는 없으니까. 아마도 영원히 없을 테니까. 그리고 나는 걷는 동안 예감했던 것을 떠올리겠지. 이제 내 인생에 축제는 없을 거야. 그러므로 도로시와 나는 오늘이 마지막. 그것은 정해진 미래. --- p.201 정원이 사랑하는 사람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애였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나는 두 번 놀랐다. 첫 번째 이유는 정원이 서슴없이 ‘사랑한다’는 말을 해서였고, 두 번째 이유는 정원이 남학교에 다니고 있어서였다. 그리고 나는 이내 슬퍼졌다. 필사적이었겠구나, 너도. 콜라를 한 모금 마셨으나 입맛이 썼다. --- p.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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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감내해야 했던 관계 속에서
고스란히 지켜낸 나의 사랑에 대하여 소설은 함께 잠을 자는 것이 비밀인 사이, 중학교 졸업을 앞둔 두 남자 중학생의 이야기 「올드 스쿨 러브」로 시작된다. 화물트럭을 운전하는 경이의 아버지가 졸음운전 사고를 겪자 경이의 어머니는 야간 주행에 따라나선다. 그때부터 경이는 나의 집에서 일주일에 세 번씩 잠을 잔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일상을 공유하고 같이 밥을 먹고 아침에 함께 눈을 뜨는”(p. 16) 흡사 부부 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 그저 친한 친구네 집에서 이틀에 한 번 꼴로 지내게 된 것이지만, ‘비밀 유지 동맹’을 맺을 정도로 두 사람은 밖에서 늘 조심하며 지낸다. “우리가 한 이불을 덮고 잔다는 것 자체를 숨기고 싶었던”(p. 17) 나와 달리, 경이는 IMF 사태 이후 어려워진 집안 사정을 숨기고 싶어한다. 같은 생활을 하면서도 서로 다른 부끄러움을 껴안은 것이다. 그렇게 ‘나’는 빠른 속도로 자라는 경이의 변화를 체감해간다. “어깨에 각이 생기고 종아리에 하트를 뒤집어 놓은 것 같은 근육”(p. 17)이 붙는 경이의 몸을 보며 어색함을 느끼고, 이성 관계에 눈을 뜬 경이가 “좀 논다 하는 애들”과 여자 이야기로 떠드는 것을 보며 나는 “경이가 훼손되는 것” 같은 불안함을 느낀다(p. 23~24). 이 감정은 친구 사이에 일어날 법한 흔한 질투처럼 보이지만, 언젠가 내가 마주해야 할 상실이자 “경이는 모르는 나의 복잡함. 말할 수 없는 예감”(p. 86)이 된다. 「올드 스쿨 러브」는 ‘나’와 경이의 서사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각 챕터의 주인공들이 예고처럼 등장하기도 한다. 나와 “연결”되었던 지현(「꽃과 비닐」p. 87), 경이의 여자친구 희주와 내가 베껴 그린 만화 그림을 좋아해주던 희준(「도로시는 말할 수 있는가?」p. 143) 그리고 나의 동생 유리(「콤비네이션」p. 205)까지. 한 단편으로부터 연결되는 이야기를 통해 강석희는 우리가 분명 마주한 적 있었던 한 시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들키지 않으려 애쓴 마음이 그때의 우리를 자라게 했다 우리가 십대 후반의 시기를 청춘이라 부를 수 있는 건 성장 아래 지독하게 앓았던 마음을 선연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올드 스쿨 러브」의 ‘나’는 거짓말처럼 녹던 눈이 아침까지 남아 있는 겨울을 지나 중학교를 졸업한다. 그리고 경이의 부모님이 함바집을 차리기 시작하면서 경이와 함께 했던 생활도 끝이 난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시절인 만큼, 나는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임신 소식을 듣고 “네가 잘해줘야 한다”라는 아버지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조금 부푼 어머니의 배를” 보는, “불안과 외로움을 홀로 껴안아야 하는 열일곱”(p. 75)이 된다. 「꽃과 비닐」에서는 네 명의 여성 청소년들의 거침없고 솔직한 연애 이야기가 ‘지현’의 시점으로 펼쳐진다. 지현은 읍면 지역에 사는 청소년이자 배려와 침묵에 익숙해진 장녀이다. 소설에서는 혼자 참고 앓아야 했던 지현의 상황이 습도가 느껴질 만큼 생생하게 펼쳐진다. 친구끼리 나누는 솔직한 연애담은 유대감을 더욱 깊이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뒤늦게 연애에 빠진 지현이 마주한 건 “연애를 시작한 순서대로 이별을 맞고”(p. 130) 있는 친구들이었다. 지현은 슬픔에 빠진 친구를 걱정하면서도 나의 이야기를 하지 못해 소외감을 느낀다. 집안에서는 이혼한 사실을 동생이 모르게 하라는 엄마의 말에, 지현은 “그럼 나한테도 말하지 말 것이지”라며 속상해하면서도 “결코 짧지 않았을 시간 동안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지 걱정한다(p. 100~101). 이렇듯 지현의 한 시절은 상실과 외로움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2장의 말미에서 “망가진 라켓”을 들고 “완벽한 스트로크”를 해내는 지현의 모습을 마주할 때, 잠시 느꼈던 연민이 무색해질 만큼 씩씩하게 살아갈 지현의 미래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여운을 남긴다. 어긋남 속에서 한 뼘 성장한 우리의 이야기 책 속에서 이성 간의 우정을 그리는 에피소드도 흥미롭다. 「도로시는 말할 수 있는가?」에서는 함께 다닌다는 이유만으로도 커플로 오해받기 쉬웠던 이십 대 초반의 대학 시절, 서로를 "성애의 대상"(p. 159)으로 보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도로시(희주)와 희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두 사람은 동향에다가 같은 대학 신입생으로 만나 서로 다른 취향을 지지하며 우정을 쌓는다. 하지만 각자의 삶을 쫓아가기 바쁜 시기를 지나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버스를 같이 타고 내려가자 해도”(p. 200) 서로 다른 버스를 타는 사이가 된다. 누군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어느새 한 시절이 스르르 지나가 버리는 그런 관계. 그럼에도 도로시는 희준과 먼저 만나자고 연락을 하고 헤어진 뒤에는 "잘 들어갔어?"라고 메시지를 보낸다. 그 장면 속에서 우리는 "웃는 얼굴에 눈물 흘리는 이모티콘"처럼 한때 잃어버린 기쁨과 “능동적으로”(p. 192) 망친 관계들을 곱씹게 보게 될 것이다. 「콤비네이션」은 퀴어 청소년들의 고백 작전을 그린다. 좋아서 미칠 것 같지만 현실에서는 그 마음을 드러낼 수 없는 두 아이의 진솔한 모습을 담았다. 각자 짝사랑하는 대상이 있는 유리와 정원은 “어긋남으로써 빗나감으로써 이루어지는 고백의 시간”(p. 252)을 준비한다. 그건 금방 끝나버릴 폭죽을 기다리는 마음과 같다. 그럼에도 서로의 사랑을 위해 함께 최선을 다하는 두 친구의 우정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 않을 것 같다. 강석희는 사회가 들여다본 적 없는, 그러나 실제로 존재하는 아이들의 사랑을 “간직해도 괜찮은 눈빛과 마음”(p. 260)으로 비춘다. 《내 마음 들키지 않게》는 속절없이 들이닥치는 감정의 파도를 그대로 받으며 한없이 못난 얼굴이 되었던 한 시절의 우리를 기억하게 하는 소설이다. 혼자 몰래 울어야 했던 밤, 실망을 숨기기 위해 구겨진 웃음을 짓던 날들을 지나 한 뼘 자란 우리가 되었다. 그러니 우리는 모든 사랑의 결과물이라 해도 되지 않을까. 올여름, 강석희가 꺼낸 한 시절의 기쁨을 통해 우리가 놓쳤던 마음을 다시 간직해 보길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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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어떤 시기는 축제처럼 환해서 이때의 기억만큼은 빛이 바래지 않을 것 같다. 응당 선명해야 할 그 시간이 어느새 아득해졌을 때, 강석희는 놀랍도록 고이 간직해 둔 생애 최초의 순간들을 건네준다. ‘네 덕분에 여기서 괴물이 되지 않았다’라고 되뇌던 때를 지나 너는 ‘내가 있는 쪽으로 조금도 기울지 않았으므로’라고 단념하는 마음 또한 놓치지 않는다. 섬세하게 구현된 설렘과 상실의 조각들은 한데 모여 이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설령 축제가 막을 내린다 해도 우리가 연결되었던 시간은 훼손되지 않는다고.” - 은모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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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호감을 느끼는 한 사람과 이런 대화를 나눴다. “내 마음이 보여요?” “당신 마음은 내 마음속에 있어서 잘 보여요.” 마음속에 있어서 잘 보이는 마음이 있다면, 마음속에 있어서 잘 보지 못하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내 마음 나도 몰라. 말하기도 하는 우리가 아닌가. 《내 마음 들키지 않게》에는 마음이 보이냐고 묻는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당신 마음이 내 마음속에 있다고 답하는 사람 역시 없다. 그러나 소설집을 읽으며 “심장이 계속 뛰잖아. 너무 뛰어 진짜.” 되뇐 끝에 나는 마침내 한 사람에게 뒤늦은 답장을 전할 수 있었다. “지금은 네 마음이 보여.” 눈사람이 녹은 자리에 남은 단추를 주머니에 넣어 간직하는 사람. 그게 내가 아끼는 석희이고 내가 좋아하는 강석희 소설 속 사람들이며 또한 내가 상상하는 그의 소설을 읽는 독자의 모습이다. 이 호주머니(소설집)에 담긴 형형색색의 단추 중에서 당신이 손에 꼭 쥐게 될 것. 그것에 기대어 한때 혹은 지금 당신의 마음을 열게 되길 바란다.” - 김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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