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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열쇠는 서예학이다
1장 광개토대왕비 세 번 죽다 상처투성이 비문과의 첫 만남 광개토대왕비 세 번 죽다 일본 제일의 국보 수난의 자취 베일에 싸인 사코본 2장 비문 변조의 증거 변조의 조짐을 느끼던 날 고구려 글씨의 매력 필획에 살아 있는 힘 비문 변조의 새로운 증거 사코본의 허점들 3장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 비문 복원의 결정적 단서 속민과 신민 신묘년 기사의 본뜻 4장 1500년 만의 침묵을 깨다 비문 변조 현장 검증 또 다른 역사 변조의 현장 신묘년 기사의 문단과 문장 분석 왜는 백제.신라의 조공국 기존 해석의 문제점 5장 되돌아본 100년 전쟁 광개토대왕비 100년 전쟁 꼬리를 무는 미스터리 베일 속에 비문을 감추고 석회를 뒤집어쓴 광개토대왕비 비문 변조설에 대한 억지 반박 비문 연구 신 삼국지 나가며 주 광개토대왕비 연구와 논쟁에 관한 연표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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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임서에 한참 몰입해 있는데 비문의 어느 부분에 이르자 갑자기 붓이 멈칫하더니 콱 막히는 거이었다. 일찍이 없던 일이었다. 지금까지 써오던 리듬과는 다른 리듬의 글자를 만나서 잠시 붓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른 것이다. 피아니스트 옆에서 악보를 넘겨주던 사람이 실수로 갑자기 다른 악보를 들이댔을 때 피아니스트가 느끼는 황당함과 비슷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어! 이게 아닌데...’하는 묘한 당혹감에 휩싸였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혹시 내가 순간적으로 방심했나?’ 묘한 기분을 지우려 애쓰면서 정신을 가다듬고 계속 비문을 베껴 써내려갔다. 몇 글자를 써내려가다 보니 어느새 당혹스러움은 사라지고 다시 본래의 리듬을 되찾았다. --- p.78 변조의 조짐을 느끼던 날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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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를 알아야 역사를 지킨다
광개토대왕비가 일본군의 ‘석회칠과 칼금’으로 변조됐다는 것은 상식이다. 고대사의 어디에도 일본이 우리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확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 ‘거짓 위에 선 사실’이 아직도 ‘통설’로 유포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좌시해 왔다. 일제가 비문의 어디를, 어떻게 변조해서 고대사를 날조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일본은 어떤가. 일제시대 치밀하게 변조한 광개토대왕비문을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삼았다. 그뿐인가. 최근 역사교과서 왜곡 사태에서 볼 수 있듯 지금까지 임나일본부를 통한 한반도 지배를 기정사실화 해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광개토대왕비 사진을 자기네 역사교과서에 버젓이 실어 변조된 비문을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근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중국은 슬쩍 광개토대왕비를 비롯한 고구려사 전체를 통째로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는 이른바 ‘동북공정’을 기도하고 있다. 가만히 있다가 광개토대왕비와 고구려가 일본과 중국의 입맛대로 빼앗길 상황이다. 광개토대왕비는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역사적 상징물이다. 광개토대왕비를 역사의 망각과 왜곡의 늪에서 구해내는 것은 단지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 하나를 되찾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우리 역사를 우리 스스로 지킬 수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시금석과도 같다. (본문 31쪽) 우리부터 제대로 알아야 한다. 저자는 이런 현실을 개탄하며 “역사는 아는 자의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광개토대왕비문은 어디가 어떻게 조작되었으며, 그 증거는 무엇인지, 그리고 변조되기 이전의 글자는 무엇인지, 그렇다면 원 비문은 과연 무슨 뜻이었는지 알아봐야 한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에대하여 어떤 비석인가 만주 길림성 집안현 통구에 있다. 414년 장수왕이 2년 전 세상을 떠난 부왕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이 우람한 비석은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며 잊혀졌다가 1880년 개간 작업을 하던 한 농부에 의해 이끼와 덩굴에 뒤덮인 채 ‘재발견’되었다. 비문에 새겨진 정식 묘호(廟號)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능비는 대석(臺石)과 비신(碑身)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개석(蓋石)이 없는데 이러한 형태는 고구려 석비 특유의 형태다. 대석은 화강암을 사각형으로 다듬은 것으로 현재 상당 부분이 깨져 나간 상태고 비신은 높이 6. 39 미터, 무게 37톤의 자연석 하나를 가공하여 만들었다. 비문은 4면에 걸쳐 사잇줄이 쳐진 세로 방향으로 ‘접시만한 크기’의 웅혼한 고구려식 예서체 한자들이 촘촘히 새겨져 있는데, 중국 학자들의 조사에 의하면 글자 수는 총 1,775자이나 141자 정도는 마멸되어 판독할 수 없다. 고대사의 비밀 품은 '돌로 만든 역사책' 비문은 3부분의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는 주몽의 건국신화 및 광개토대왕의 행적과 비의 건립 경위 등이 기술되었다. 제2부는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과 토경 순수 기사가 연대순으로 나와 비문의 핵심을 이루며, 마지막 제3부는 능을 지키는 ‘수묘인연호’의 명단과 수묘인들이 지켜야 할 관리 규정을 담았다. 훈적비(勳籍碑)라는 성격을 넘어 고대 동아시아사의 생생한 현장을 전해주는 '타임캡슐'로서 그 역사적 의의가 자못 크다. 또 삼국시대 정사인 『삼국사기』보다 700년이나 앞서, 그것도 당대인의 눈으로 기록된 ‘돌로 만든 역사서’라는 점에서도 독보적인 의의를 지닌다. 일제에 의해 최초로 탁본 제작 이미 판독이 어려울 정도로 비면이 훼손되어 있었기 때문에 비문 연구는 주로 탁본을 통해 이루어졌다. 특히 광개토대왕비에 대한 논란의 중심에는 『회여록』(1889)에 발표된 최초의 광개토대왕비 탁본이 있다. 사코 카게노부(酒勾景信)라는 일본군 대위가 1883년 경 일본군 참모본부 편찬과로 들곤 간 이 탁본을 가지고 이후 시게노 야스쓰구(重野安繹) 등 일본의 대표적인 한학자와 역사학자들이 5년 동안 비밀리에 비문 해독 작업을 했다. 이 과정에서 서로 다른 15종의 해독본이 작성되었고 최종적으로 사코 카게노부를 불러 확인하게 했다. 이는 사코 카게노부가 광개토대왕비의 쌍구본을 만드는 데 직접 관여했음을 의미한다. ‘사코본’은 엄밀히 말하면 탁본이 아니다. 비면을 직접 탁본한 ‘원석정탁본’이 아니라 갈고리선 모양으로 베껴 그린 후 선 바깥을 먹칠한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므로 실수든, 고의든 글자 자체가 조작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사코본은 중국의 동북공정이 한창이던 작년 ‘중국의 서(書)’라는 표찰 아래 국립도쿄박물관에 ‘특별전시’되기도 했다. 고대사 최대의 미스터리를 파헤친 한 서예학자의 20년 탐사기록! <이 책의 특징> 고대사의 ‘잃어버린 고리’, 광개토대왕비문에서 찾다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는 서예가이자 시?서학(詩書學)을 전공한 학자가 옹근 20년 간 ‘서예학’이라는 새로운 눈을 통해 광개토대왕비문의 변조 사실을 낱낱이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새롭게 찾아낸 변조의 구체적인 물증과 방증을 통해 변조 이전의 비문 내용을 집요하게 추적해간 과정을 소상하게 담았다. 이렇게 되찾은 사라진 비문의 내용이 비문의 문장 구조와 문단 구조, 그리고 역사적 사실과 어떻게 합치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베일에 싸인 고대사의 실체에 한발 다가서는 명쾌한 해석을 내리고 있다. 아울러 이 과정에서 문제의 신묘년 기사뿐만 아니라 기해년 기사 등 다른 부분에서도 정교한 변조로 비문 내용이 일제에 의해 왜곡되었음을 밝히는 성과를 거두었다. 새로운 방법론, 새로운 시야-비문 변조의 전말이 보인다. 이상의 내용은 지금까지 한?중?일 어느 역사학자도 주목하지 못한 새로운 시각이다. 지금까지 고대사 연구자들은 얼마 안 되는 역사적 사료만을 토대로 각기 주관적인 주장과 비문 해석에 그쳤다. 그러나 저자는 ‘비(非) 역사적 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서예학’의 관점에서 변조 사실을 객관적으로 입증하고 비문의 내용을 밝힘으로써 답보 상태에 있는 광개토대왕비문 연구에 획기적인 출구를 마련하고 있다. 당초 그의 주장의 핵심은 저자가 지난 해 ‘한국고대사학회’에서도 발표해 많은 역사학자들에게 신선한 시도로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이 책은 이때 발표한 소략한 논문 내용을 대폭 증보한 것으로서, 독자들이 저자의 20년 탐구 과정에 속속들이 동참할 수 있도록 논지들을 상세히 복기하는 방식으로 구성했다. 명쾌하게 간추린 광개토대왕비와 비문 논쟁의 역사 한편 저자는 우리 역사의 뿌리라 할 만큼 중요한 광개토대왕비에 대해 일반 독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교양서가 전무하다는 점을 안타깝게 여겨 한?중?일 3국 학자들 간에 벌어진 치열한 ‘비문 100년 전쟁’의 핵심을 쉽고 분명하게 정리했다. 따라서 광개토대왕비의 역사와 의의, 그리고 그것의 현재적 의미 등에 관해서도 좋은 가이드북이 된다. <이 책의 내용> ‘이진희 쇼크’, 비문 변조 논쟁의 시작 비문 전쟁의 핵심에는 신묘년 기사가 있다. 비문은 탁본을 뜬답시고 석회칠을 하는 바람에 지금은 원석의 글자를 제대로 확인할 수 없다. 따라서 일제가 제일 먼저 비면 글자를 ‘베껴 그린’(쌍구가묵본) ‘사코본’이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탁본으로 인정된다. 하지만 일제는 19세기 말 비문을 교묘하고 조직적으로 조작해 마치 고대 일본이 고구려와 맞서 한반도 남부를 장악한 것처럼 해놓았다. 이렇게 날조된 일본의 ‘통설’은 1970년대 초 재일 사학자 이진희가 신묘년 기사 중 ‘래도해파(來渡海破)’ 부분이 조작되었다고 주장해 일본을 발칵 뒤집는 치열한 논란에 휩싸인다. 이진희는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이 글자 부분의 비면에 석회를 발랐음을 보이고 후대의 탁본으로 갈수록 사코본의 글자와 다른 글자의 윤곽이 드러난다는 점을 수십 종의 탁본을 비교?분석한 결과로 증명했다. 글씨에 매료되었다가 변조의 조짐을 느끼다 저자는 20년 전 유학 시절 광개토대왕비 탁본을 우연히 접하고 고구려체 글씨의 매력에 빠져 베껴 쓰기(臨書)를 하다가 문제의 신묘년 기사 부분에서 “붓이 콱 막히는”(2장 77쪽)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놀랍게도 붓길이 막혔던 글자가 바로 이진희가 변조된 글자로 주장한 글자와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경험을 계기로 장장 20년에 걸친 비문 변조 추적 작업이 시작된다. (참고로 지금까지 한국 학자들은 비문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다르므로 당연히 일제가 비문을 변조했다는 ‘짐작’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구체적인 증거를 탐구하는 데는 별 성과를 보여주지 못해 왔다. 탁본만으로 비교해서는 새로운 증거를 찾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여러 금석문과 광개토대왕비 탁본을 서예학적 눈으로 분석하고, 한?중?일 3국 학자들의 주장을 비교?검토하며 변조의 증거를 하나하나 제시한다. 신묘년 기사에 섞여 있는 ‘판이한 글씨체’를 발견하다 우선 광개토대왕비에 새겨진 고구려체 글씨체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파악한다. 대부분 정방형이다/ 모든 획이 거의 직선으로 이루어진다/ 나란한 각 획들의 아래 쪽 획이 위 쪽 획보다 길이가 같거나 더 길다/ 점으로 써야 할 부분을 한데 이어 선으로 처리하는 경우는 없다 등 그리고 이를 통해 ‘도해파’ 세 글자의 서체는 비문의 다른 고구려체의 글씨와 다르다는 점을 여러 판본의 사진을 보여주며 자세히 설명한다. 저자의 주장처럼, 우리가 필적을 감정하듯, 글씨 그 자체는 아무리 속이려고 해도 글쓴이의 무의식적 습관이 담기기 마련이다. 渡: 마지막 두획에서 ‘별획(?)’이 구부러져 있고 ‘날획(?)’에는 후대의 해서체적 특징인‘삐침’을 보이고 있다. 이는 중국 명조대에 쓰인 해서체를 (오늘날 한글 워드 프로그램의 명조체에도 흔적이 남아 있는) 인쇄활자로 만든 1880년대 일본의 사정과 관련이 있다. 海: 海자의 母(어미 모) 부분 첫 획인 ‘’과 두 번째 획인 ‘’ 이 모두 탁본의 다른 곳에 나오는 海자들이 정방형인데 비해 오른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다. 또 母부분 가운데에 끼어 있는 세로 획은 유독 신묘년 기사에만 나타날 뿐 다른 곳의 海자들은 모두 두 개의 점으로 처리되어 있다. 破: 破의 왼쪽에 붙어 있는 石의 두 번째 획은 다른 곳의 破자와 달리 중간 부분 오른쪽이 약간 불룩하게 활처럼 굽어 있다. 광개토대왕비체의 공통적인 필법에 따르면 이것 역시 직선으로 처리되었어야 하는 것이다. 또 다른 곳에서는 破자의 왼쪽 石의 첫 가로획과 皮의 두 번째 획의 가로획이 전부 나란한데 신묘년 기사의 破자만이 皮가 石보다 아래에 있다. 이는 오늘날의 명조체 破와 같은 모양으로, 매우 중요한 변조의 흔적이다. 저자는 변조한 사람이 비문의 다른 글자와 비슷하게 만들려고 애썼으나 “고구려식 예서체로 쓴 광개토대왕비의 다른 글자와 달리 고구려보다 후대인 해서체의 자형을 띤”글씨체를 남긴 점을 예리하게 묘파하고 있다.(본문 112쪽) ‘속민’과 ‘신민’, 비문 복원의 결정적 단서 비문 변조를 서예학적으로 확인한 저자의 관심은 당연히 변조되기 이전의 글자는 무엇인가로 모아진다. 저자는 논리적인 추론을 통해 이를 하나하나 파헤쳐 들어간다. 원래 글자는 ‘도해파’로 변조하기 쉬운 글자일 것, 문장 구조와 호응 관계가 맞아 들어가야 하며, 문단의 앞뒤 구조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야 한다는 점 등을 지적한다. 무엇보다도 후대에 남기는 역사서라 할 비문의 내용은 모두 간단명료하게 되어 있는데 유독 이 신묘년 기사만 복잡다단하다는 점도 덧붙인다. 그러나 어디 말처럼 간단하게 복원이 이루어질 것인가. 몇 년 동안이나 궁리를 거듭하던 저자는 우연히 원문을 가늠할 결정적 단서를 발견했다. 수업시간 중 이 부분을 칠판에 쓰다가 ‘속민(屬民)’과 ‘신민(臣民)’을 서로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번쩍 눈을 뜬 것”이다. 곧 그 차이를 가정하고『설문해자』를 비롯한 옛 문헌을 조사한 결과, 신민과 속민은 분명 다른 뜻을 지닌 다른 용어임을 발견해냈다. 신민이 왕에 대한 복종의 의사를 표하거나 예를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사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뜻의 단어라면 속민이라는 단어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에서만 볼 수 있는 말이다. 즉, 고구려만의 용어인 것이다. 이러한 고구려식 언어 운용은 '屬'자가 지니고 있는 본래의 뜻인 '異而同者曰屬(이이동자왈속)', 즉 '좁은 범위로 봐서는 다른 면이 있으면서도 넓은 범위 안에서는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라는 뜻에도 완벽하게 부합한다. 정리하면 고구려식 용어인 '속민(屬民)'은 '비록 현재는 다른 나라로 분리되어 있지만 근본적으로 같은 뿌리의 민족 관계에 있는 나라'를 지칭하는 말이며, 부차적으로는 '직접 조공을 바치는 나라'를 칭하는 말인 것이다.(본문 144쪽) ‘入貢于’로 풀어 밝힌 신묘년 기사의 진상 위의 과정을 통해 비문을 복원할 열쇠를 찾게 됐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도해파(渡海破)’로 변조되기 이전의 글자는 ‘입공우(入貢于)’라고 파악한다. 그러면 원래 비문의 내용은 이렇게 된다.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入貢于百殘□□新羅 以爲臣民 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 그래서 줄곧 조공을 해 왔다. 그런데 왜(일본)가 신묘년 이래로 백제와 □□와 신라에 대해 조공을 들이기 시작했으므로, 고구려는 왜도 고구려의 신민으로 삼았다. 물론 문맥상으로는 여러 가지 말들이 가능하지만 변조가 가능한 ‘서체적 특징’을 가진 글자가 바로 ‘입공우(入貢于)’라는 것이다. 또 사코본의 ‘渡’자가 오른쪽으로, 海자는 왼쪽으로 치우쳐 줄이 틀어져 있는 것도 글자의 구조로 볼 때 원래 글자가 ‘입공우(入貢于)’라는 강력한 증거다. 역사적 사실 검증으로 복원의 타당성을 확인하다 저자는 제4장에서 구체적으로 ‘입공우’ 각 글자가 어떤 식으로 ‘도해파’로 변조되었는지를 변조자의 입장에서 역추적한 결과를 공개했다. 또 저자는 마치 범죄 현장을 검증하듯 흥미롭게 변조 과정을 그래픽으로 재연했다.(159~162쪽) 곧 이어 저자는 복원된 비문의 타당성을 스스로 철저하게 검증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첫 번째로 신묘년 기사의 문단과 문장 구조를 분석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접속사 ‘而’자다. 원래 신묘년 기사는 접속사 ‘而’자를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는 일종의 대구 문장인데 ‘渡海破’라는 엉뚱한 문구가 들어오면서 균형을 잃고 해석상의 혼란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음을 보인다. 두 번째로는 여러 문헌을 통해 ‘조공 관계’ 등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증작업을 벌인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사실도 추가로 밝혀진다. 저자가 신묘년 비문을 복원하다 예상치 않게 다른 곳에서도 유사한 비문 조작의 현장을 찾아낸 것이다. 즉 기해년 기사(왜인이 신라의 국경 안에 가득 찰 정도로 들어와, 신라의 성지를 파괴하고, 신라를 노객이 되게 하여 그들(왜)의 백성으로 삼았다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의 ‘破’자 역시 변조된 것이다.(본문 164쪽) 이는 『삼국사기』등에 나타난 역사적 사실과도 합치한다. 이리하여 저자의 비문 복원이 한층 더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일본 학계의 ‘통설'부터 이형구?박노희, 박진석, 서영수, 임기중, 중국 학자 왕건군 등의 신묘년 기사 해석을 서로 비교하며 그 문제점을 낱낱이 짚고 있다. 핵심적으로는 ‘신민’과 ‘속민’의 차이에 눈뜨지 못한 점을 짚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신묘년 기사에 대한 여러 해석들이 모두 불필요한 말이 들어가거나 복잡하게 꼬이거나 생략되는 등의 문제가 생겨 억지로 끼워 맞춘 해석이란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해석의 단순명쾌함만으로 보더라도 저자의 비문 복원 내용이 설득력이 높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광개토대왕비 부활-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부터” 고구려 청동거울에 우리 자신을 차갑게 비추어 볼 때 저자는 “역사는 아는 자의 몫”이라는 인식하에 광개토대왕비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 『한비자(韓非子)』「안위(安危)」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한 국가의 안위는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는 데 달려 있지 힘이 강하고 약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安危在是非 不在於强弱). 비문을 변조하고도 시치미를 떼면서 침략욕을 부추기는 데 악용하는 일본에 대해 저자는 적개심을 가지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 역사를 알고 당당해지는 것이 순리요, 그것이 이민족을 포용했던 고구려인의 자신감을 갖는 길이라고 저자는 충고한다.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도덕적일 수밖에 없다. 내가 이미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는데 남을 다시 괴롭혀야 할 이유가 없다. 고구려는 그러한 자신감으로 세계를 포용하려 한 나라 였다. 고구려가 ‘넓은 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것이 없고, 땅의 가장자리인 물가 안의 모든 땅에 살고 있는 것으로서 왕의 신하가 아닌 것이 없네(普天之下 莫匪王土 率土之濱 莫匪王臣)’라는 천하관을 가지고 여러 나라를 신민으로 받아주는 넓은 아량을 가진 것은 바로 그런 자신감 때문이다. 고구려의 청동거울에 우리 자신을 차갑게 비추어 볼 때다.(본문 260쪽) <이 책의 출간 의의> 이 책은 광개토대왕비에 대한 제대로 된 최초의 국내 연구서라 할 만하다. 무엇보다도 역사서이면서도 역사적 사료에 매몰되지 않고 ‘서예학’이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비문 변조를 증명하고 비문을 복원하는 데에 이른 점은 역사학계에서도 이미 주목하고 있다. 20년에 걸친 집요한 탐구의 결실을 담은 책은 흔치 않다. 그리고 그 성과를 추리적 기법을동원한 흥미로운 구성으로 독자를 흡인하고 있는 점도 도드라지는 특징이다. 또한 현재 시중에는 광개토대왕비의 실상과 논쟁사를 다룬 책이 전무한 상태다. 저자는 제1장과 제5장에서 지금까지 한중일 사이에 벌어진 ‘비문 100년 전쟁’의 요체를 독자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정리했다. 여기에 흥미로운 내용도 더했다. 일본 군부가 군함을 돌려 광개토대왕비를 빼돌리려 했던 ‘비문반출 사건’이나 ‘『남연서』 위서 사건’ 등 침략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해 광분한 놀라운 이야기들을 통해 ‘시대의 눈(Period Eye)’으로 광개토대왕비의 역사를 재구성해 갈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내용과 함께 비문 변조의 실례를 탁본별로 확인할 수 있도록 <부록>을 삽입하고, ‘광개토대왕비에 관련한 연구와 논쟁사’를 <연표>로 정리하여 대중적 교양서로 손색없도록 구성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