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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 발간사
들어가는 글 추천사: 나의 할아버지를 찾아서_수지 왕 01 출생과 성장, 상해로 망명 가다 부산 한약방집 아들 아버지 ‘서석주’, 부산에서 유명했던 한의사 작은 거인의 3ㆍ1 독립운동 참여 상해로 망명, ‘임정의 막내’가 되다 02 혁명가의 도시 파리에서의 고단한 유학생활 프랑스 유학, 고난의 여정 상해 출발, 파리 도착 스케치 혁명과 망명가의 도시, 파리 03 임시정부 주불특파위원 외교로 항일투쟁하다 대학진학과 독립운동의 시작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 전개 고려통신사 설립 한국인이 쓴 최초의 불어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의 주변』 한국 민담집 『거울, 불행의 원인』 본격적인 대유럽 독립운동의 전개 서영해의 멘토, 인권운동가 세브린 여사 04 유럽의 격동기에도 독립운동을 이어가다 이승만과 서영해, 가깝고도 먼 사이 오스트리아 여인과의 결혼과 이별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 참여 서영해의 언론활동 평가 05 해방 후 통일된 정부수립을 외치다 해방 이후 좌우이념 대립과 서영해 귀국 후 서울에서의 생활 한국 여인 황순조와의 결혼, 짧은 만남 긴 이별 국내정치에 대한 환멸과 프랑스로의 재출국 상해 인성학교와 서영해 06 서영해가 남긴 사랑, 사람, 사상 황순조의 사부곡 서영해의 오스트리아 손녀, 수지의 한국 뿌리 찾기 국립중앙도서관의 ‘영해문고’ 김구 선생과 남목청 사건 서영해 자료, 국가등록문화유산 지정 서영해의 이념과 사상 나오는 글 부록1 「해외에서 지낸 십오성상(十五星霜)을 돌아다보며」-자필 유고 부록2 서영해 프랑스 언론 기고문과 관련 자료 부록3 서영해 연보(年譜) 도판출처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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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해의 활동범위는 파리에 한정되지 않고 벨기에, 제네바, 스페인 등 유럽전역과 때로는 중동의 이집트,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까지 광범위하였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서 ‘파리의 독립운동가’라기보다는 ‘유럽의 독립운동가’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 p.12 서영해가 다른 일반 유학생과 구별되는 점은 그가 단순히 유학만한 것이 아니라 임시정부의 주불대표로서 활동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프랑스에 있는 유학생들과 임시정부 간의 공식적인 연결통로였다. 주불유학생들은 서영해를 통해 임정의 소식을 듣고, 그는 유학생들의 유학현황을 임정에 보고하고 그들을 결집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 p.54 만약 서영해가 시류에 편승하여 권력의 편에 섰더라면 안락한 생활이 보장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타협을 모르고 오직 한 길, 조국광복이라는 대의를 위해 유럽에서 혈혈단신으로 고군분투하며 국제사회에 한국이라는 나라와 한국인이라는 존재를 알리기 위해 그의 청춘을, 그의 인생을 다 바친 사람이었다. --- p.120 이번에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유는 “일제강점기 유럽에서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서영해가 프랑스 파리에 고려통신사를 설립(1929년)하고 고려통신사를 중심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교 특파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유럽 각국에 일제의 침략상을 국제 사회에 고발하는 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일원으로 한국 독립을 위해 외교 활동을 수행하였고, 관련 유품이 해외에서의 독립 운동의 역사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기 때문”이었다. --- p.208 그는 오직 한평생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염원했던 순수한 민족주의자였으며, 공산주의에 반대한 민주주의자, 약탈적 자본주의를 싫어했던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회주의자였다. --- p.216 이제 모든 걱정, 근심 내려놓고 그의 두꺼운 안경 너머로, 그리고 역사의 망각 뒤에서 평화로이 잠들기를 기원한다. 자랑스러운 후손들이 그의 뜻을 기리고, 그의 위업을 언젠가 완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 p.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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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의 공식적인 유럽 외교관이면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언론인이자 소설가 서영해는 1902년 부산에서 태어나 17세의 나이로 3·1 독립운동에 참가했고 수배 대상자가 된다. 중국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막내로 활동하다 임시정부의 권유로 1920년 12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임시정부에 유창한 외국어 실력을 가진 인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부친이 부쳐준 생활비로 근근이 공부할 수 있었지만 나중에는 이마저도 끊겨 재정적 지원 없이 어렵게 유학생활을 마친다. 이후 1929년 임시정부 외무부의 지시로 프랑스 파리에 고려통신사(Agence Korea)를 설립하고 통신사를 통해 일본의 한반도 침략상을 유럽 전역과 이집트, 아프리카에까지 알렸다. 일본에 의해 왜곡된 한국 이미지를 바로잡고 참모습을 보여주는 데 주력하며 우리나라의 독립을 향한 열망을 보여주었다. 불어로 장편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의 주변』과 민담집 『거울, 불행의 원인』 등도 집필하여 한국의 역사와 문화 또한 유럽에 알리려고 노력하였다. 『어느 한국인의 삶의 주변』은 프랑스 언론의 높은 관심으로 1년 만에 5쇄를 인쇄할 만큼 주목을 받았다. 서영해의 글로 독립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그려본다 서영해는 오랜 기간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국내 활동기록이 적다. 또한 해방 후 정치적으로 승자였던 이승만을 따르지 않고 김구를 추종하였다. 서영해는 타국에서 외롭게 조선독립을 위해 투쟁했지만 해방 이후 조국으로부터 환대도 받지 못했고 오히려 김구를 추종했다는 이유로 국내에서는 설자리를 잃었다. 아쉽게도 서영해는 말년의 행적이 불확실하다. 저자는 책을 내기 직전까지도 서영해의 마지막을 수소문했지만 정확하게 어디서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서영해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그릴 수 있는 글이 남아 있다. 광복 80주년과 서영해 자료의 국가등록문화유산 지정이라는 뜻깊은 해를 맞아 출간된 이번 개정판을 통해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정신이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지기를 기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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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나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그리고 서영해가 프랑스에 망명해서 벌였던 활동의 중요성에 대해서 전혀 몰랐었다. 나의 아버지 스테판은 오랜 병마의 고통 끝에 2013년 1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내가 추도사를 읽어야 했기에, 나는 할아버지에 대해 새로 발견한 내용들을 추가하였고, 아버지가 가시는 마지막 길에 그의 아버지(서영해)의 삶에 대해 알려드렸다. 나는 선친이 처음으로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했을지 여전히 궁금하다. 아마 그는 깊은 감동을 받았을 것이고, 그의 아버지에게서 그 자신의 성격과 유사성이 매우 많았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흐르는 물에 과감히 역행해서 헤엄치는, 그리고 지칠 줄 모르고 열심히 일하는 대단한 이상주의자였고, 평화수호자였으며, 반파시스트이자 섬세한 예술적 감각을 지닌 애국자였을 것이다. - 수지 왕 (서영해의 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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