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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가을바람에 군마의 울음소리
1장 강희제의 장성(長城) 꿈을 찾아서 목란의 가을 사냥 피서산장의 건설 2장 풍파에 영웅은 사라지고 광풍이 일어나다 피도 눈물도 없는 암투극 안개에 갇힌 사자원 건륭제와 무발 국모의 반목 열하의 반란은 청조의 쇠락을 부추기고 3장 모든 시대의 신화 요원한 절향(絶響) 신비로운 피서산장의 유혹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열하의 황실 장서루-문진각 청대 황제 간표 |
Yuenan,岳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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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는 경성을 떠나 유유히 북쪽 변방을 순수하더니 고북구(古北口) 밖 객라하둔(喀喇河屯)이라는 곳에 한적한 행궁을 짓기 시작했다. 이 행궁은 연산(燕山) 산맥을 따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곳에 위치하였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사람들의 시선이 이곳을 향했다. 물 맑고 산 수려하며 온갖 정령들이 한데 모여 “땅은 요새를 지키며 북방 사막으로 치달리고, 하늘은 쇠 자물쇠를 지닌 채 산해관을 베고 있다”고 불리던 매혹적인 장소-열하에 말이다.
--- <서장: 가을바람에 군마의 울음소리>, 1권 19~2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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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에서 동북으로 가다 보면 뭇 산봉우리들이 에워싸고 있는 맑은 시내가 감돌아 모여드는데, 열하에 이르러 모든 형세가 하나로 융합되니 울울창창 깊고 빼어나다. 옛말에 이르기를 서북 산천은 신비롭고 기이하며 동남 산천은 굽이굽이 그윽하다고 하였는데, 이곳은 실로 양자를 겸비하고 있으니 조물주의 맑고 신령한 기운이 모두 이곳에 모인 듯하다. 황상께서 때때로 이곳을 순행하시어 살피고는 기이하게 여기셨으며 예부터 아무도 살지 않는 이곳에 이궁을 세우시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전답과 살림터를 침해하는 일도 없을뿐더러 경사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여 장주(章奏)를 아침에 보내면 저녁에 도달하니 천하의 온갖 일을 처리할 수 있어 궁중에 있을 때와 다를 바 없었다.
<1장: 강희제의 장성>, 1권 7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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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가 승덕으로 개칭되기는 했지만 청대 사서는 줄곧 열하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열하를 말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피서산장이 떠오르고, 또 피서산장을 말하면 절로 열하가 생각난다. 열하가 이처럼 피서산장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녀 변하지 않고 사람들의 뇌리에 남게 된 것은 피서산장의 대부분의 호수가 열하에서 발원했기 때문이다. 매년 더위가 가시고 산천에 가을 기운이 물들어 서리가 내릴 즈음이면 열하천(熱河泉)은 사방에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안개가 자욱하여, 열하만의 독특하고 기이한 경관을 연출해낸다.
<2장: 풍파에 영웅은 사라지고>, 1권 12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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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산장은 무궁한 번영과 휘황찬란한 역사 속에서 호곡 소리와 더불어 대청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황제의 생사윤회를 맞이하여 흔히 볼 수 없는 성대한 장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경제 붕어 후 40년이 흐른 뒤, 또 한 명의 황제가 바로 이곳 피서산장에서 윤회의 길로 접어들자 똑같은 규모의 황가 장례식이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다만 다른 것은 마지막 장례가 끝난 후 사람들이나 짐승들 모두 흩어지고 열하의 상공에는 불길한 찬바람만 감돌아 산장의 대문도 쇠락하는 왕조를 따라 영원히 닫히고 말았다는 점이다.
--- <2장: 풍파에 영웅은 사라지고>, 1권 21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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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상 가장 걸출한 정치가로 평가받는 강희제는 회유(懷柔)와 귀부(歸附)라는 다스림의 도를 깨닫고 있었기에, 산장 안팎의 지형적 높낮이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시각적으로 서로 다른 느낌을 통해 자신의 거대하고 심오한 정치적 정회를 울울창창하고 호호탕탕한 산수로 전화하였으며, 한 줄기 피어오르는 향기 속에서 정치와 군사, 원림과 사묘(寺廟)를 아무런 흔적도, 소리 소문도 없이 융화할 수 있었다.
--- <3장: 모든 시대의 신화>, 1권 31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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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산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파란만장한 청나라 역사의 기록”
『열하의 피서산장』은 피서산장의 건설 배경에서 출발하여, 피서산장과 외팔묘(外八廟)의 건립, 그리고 피서산장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숨가쁜 청나라 역사를 드라마틱하게 서술하고 있다. 소설의 형식을 빌려 써내려간 이 책은 역사서하면 떠오르는 고정관념의 틀을 깨고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 전개로 당시 중국 대륙을 누빈 만주족의 말발굽 소리를 생생하게 전달하여 독자들의 눈을 끌어들이는 장점이 있다. 또한 피서산장의 진귀한 보물을 수록한 50여 컷의 컬러 화보와 120여 컷의 풍부한 도판은 시각적으로 피서산장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청나라 역사를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피서산장은 하나의 건축군(建築群)이 아니라 청나라를 대변하는 정신적인 장성(長城)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청나라 제2의 정치 중심지이자 황제들의 여름 별궁을 가다 -피서산장과 종교를 통해 소수 민족의 단결이라는 목적을 이룩한 외팔묘 강희·옹정·건륭의 3대 황제를 거쳐 무려 90년 가까운 시간 만에 완공된 피서산장은 원래 북쪽 변방으로 사냥을 떠나면서 잠시 머무르는 행궁(行宮)으로 건설되었다. 소박하고 단아하면서도 자연의 미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여기에 강남의 건축 양식을 도입하여, 현존하는 중국 최대의 고대 제왕의 궁원(宮苑)으로 탄생하였다. 중국 산수원림 예술을 집대성한 피서산장은 전체 면적 564㏊, 담장 길이 10㎞에 이르며, 궁전 지구·호수 지구·평원 지구·산간 지구 등으로 나뉜다. 궁전 지구는 왕이 기거하며 정무를 보던 곳이다. 정문인 여정문(麗正門)을 지나면 바로 정궁에 이르고, 가장 먼저 ‘피서산장’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내오문(內午門)과 마주한다. 내오문을 지나면 ‘담박경성(澹泊敬誠)’이라는 현판이 걸린 정전이 나온다. 담박경성전은 청나라 황제가 외국 사절단을 접견하던 장소로, 『열하일기』의 저자인 연암 박지원 사신 일행이 약소국의 설움을 삭이며 치욕적인 ‘삼궤구고’의 예를 행해야만 했던 곳이다. 궁전 지구의 면적은 그다지 넓지 않으며, 건축물도 웅장하고 화려하기보다는 자연의 미를 살린 단아한 느낌을 준다. 궁전 지구를 벗어나면 강남의 풍광을 그대로 본떠 만든 호수 지구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외팔묘는 피서산장의 동쪽에서 북쪽으로 8개의 절이 피서산장을 품에 안 듯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티베트의 라마사원이 주를 이루는 외팔묘는 종교를 통해 몽고와 변방 지역의 소수 민족을 단결시키려는 전략적 의도에서 건설되었다. 매년 이곳에서 거행된 종교 행사 때,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반선 등 종교 지도자들이 천자를 알현하러 찾아와 청나라의 통치를 공고히 하고 다민족 국가의 건설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했다. 외팔묘는 원래 12개였으나 현재 8개만 남고 나머지는 소실되었다. 이 절들은 강희제가 티베트를 정벌한 후 그들의 종교와 예술을 수용하여 건설하였다. 보녕사에는 세계 최대인 22.23m의 목각 불상이 있으며, 티베트식인 이 불상의 무게는 무려 110t에 달해 몸통 전체를 하나의 나무로 깎아 만들었다. 외팔묘 중 규모가 가장 큰 보타종승지묘는 티베트 라싸의 포탈라궁을 본떠 만들었으며, 이곳에 들어서면 실제 티베트에 와 있는 듯한 이국적인 정취가 강하게 느껴진다. 이 두 곳은 모두 1994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 피서산장의 역사는 곧 청나라의 역사이다! -‘강건성세’의 위용을 자랑한 전성기에서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사라지기까지 청나라 최고의 전성기인 ‘강건성세(康乾盛世)’에 완공된 피서산장은 3대 황제의 위용을 드러내듯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가경제와 함풍제가 이곳 피서산장의 침소인 서난각(西暖閣)에서 붕어했으며, 황위를 둘러싼 암투극이 아주 치열하게 전개되기도 했다. - 천하의 뭇 영웅들이 대청제국에 무릎을 꿇고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며, 새로운 통일 왕국이 된 청나라에게 사방의 여러 나라들이 신하로 복속되기를 청했다. 이제 욱일승천의 성세로 진입하게 된 대청제국은 목란(木蘭)에서 위풍당당한 군사 훈련이 실시되고 변경 요새에 새로운 번(藩)이 건설되는 가운데, 새로운 생명의 찬란한 기운이 사방으로 뻗쳐 나갔다. 이때 우뚝 선 피서산장의 위용은 청 제국의 진정한 방어선이 몽고 내지까지 관통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황태자 윤잉(胤?)이 갑자기 열하에서 폐출되고 영명한 강희제가 진애(塵埃) 속에서 혼미를 거듭하는 가운데, 부귀영화를 누리던 이들이 비밀리에 제위를 잇고 어두운 안개 속에서 의심스러운 사건들이 벌어졌다. 풍류 천자인 건륭제와 무발(無髮) 국모 간의 애증은 얽히고설켜, 결국 새외 열하에 피비린내 나는 참혹한 종지부를 찍고 만다. - 거대한 산하를 거느리고 있는 피서산장은 드높은 기세를 자랑하며 중국 원림 예술에 있어서 전대미문의 최고봉에 우뚝 선다. 산장의 서북부는 치솟은 연봉(連峰)으로 이루어져 있고, 거대한 산하가 하나로 이어진 사이로 여리고 광활한 평원이 자리하고 있다. 몽고 초원의 유려한 풍광 속에 드문드문 너른 호수와 그 안에 있는 섬들이 호광산색(湖光山色)으로 어울려 빛을 발한다. - 청조의 문호 개방이란 사명을 띠고 청나라를 방문한 영국 신사 매카트니에게 건륭제는 ‘삼궤구고(三?九叩: 머리가 세 번 땅에 닿도록 하는 절을 세 번 반복하는 것)’의 예를 요구했다. 피서산장 만수원(萬樹園)에서 건륭제를 접견한 매카트니는 한 쪽 무릎만 꿇는 예를 올렸다가 결국 건륭제의 노여움을 사 쫓겨나다시피 청나라를 떠났다. - 볼가 강 유역에 거주하던 토이호특 몽고 부락은 제정 러시아의 압제에 견디다 못해 결국 고국으로의 이주를 결심했다. 러시아 군대의 추격을 힘겹게 뿌리치고 태양이 이글거리는 죽음의 사막을 가로질러 청나라 영토에 진입한 토이호특 이주민들을 건륭제는 받아들이고, 피서산장의 만수원과 부인사(溥仁寺)에서 접견하고 자주 연회를 베풀어 그들을 위로하였다. - 사자구 북쪽, 무열하 동쪽 기슭에 금빛 찬란한 외팔묘가 마치 북극성을 둘러싼 뭇별처럼 피서산장을 에워싸고 있다. 신비한 문화적 역량의 소환, 불국 세계의 만다라, 황권과 신권의 완벽한 통일은 열하의 금지(禁地)를 더욱 신성하고 장엄하게 만들어주었다. 또한 사찰 곳곳에 세워진 비석에는 중후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 함풍제는 영불 연합군이 북경으로 침공해오자 황급히 피서산장으로 피난을 떠났다. 원명원이 모두 불타버리고 북경이 연합군에게 점령되자 피서산장은 황궁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와중에도 자희태후(서태후)와 대신들 간의 암투극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함풍제가 붕어한 후, 대신들이 모두 제거되고 권력은 한 여인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후 이화원 건설에 몰두한 서태후로 인해 피서산장은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진귀한 보물들은 군벌에게 약탈당하는 비참한 국면을 맞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