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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또 하나의 작은 서문 1. 표현주의자들 이런 작업은 이성이 어지럽히는 일이 없도록 충분히 주의하면서 해야 한다. 흰색 | 시인들 | 이미지 수업 | 당황 | 번역 | 필명 | 키보드와 펜 | 애완시대 | 옷걸이 | 정체성 | 나무 | 안개 | 시라는 논리 2. 거울을 의심하는 사람 에세이를 쓰는 것은 꽁지를 까딱거리는 새의 발밑에 밑줄을 그어 주는 일 같다. 우아 | 인용문 | 배려 | 느낌 | 소설 | 얼굴 | 에세이 | 0 | 환상통 | 춤 | 환승 음악 | 오키프의 꽃 | 곡물 | 수련 | 단어들 | 내 친구 왕룽 | 가장 정교한 울음 | 사모 | 이해 | 사랑 3. 대화용 식탁 두부는 아무 소용없을 것 같은 모서리를 보여주었다. 두부의 흰빛 | 두부형 인간 | 두부의 할 말 | 두부 때문에 | 옥수수범벅 이야기-하나 | 옥수수범벅 이야기-둘 | 옥수수범벅 이야기-셋 | 옥수수범벅 이야기-넷 | 옥수수범벅 이야기-다섯 | 오이의 맛 | 오이향 | 오이꽃 | 오이장아찌 | 부추전 | 단무지 | 무조림 | 만두 | 하리보 | 김밥 | 배추 | 귤 | 달다 | 나박나박 | 밥 | 달걀 | 요섹남 | 자두 | 숟가락 | 사과 4. 사물중독자 장미는 이미 빨강이라는 함정에 빠진 것 같다. 물 | 쇠 | 돌 | 흙 | 불 | 칼 | 컵 | 유리 | 거울 | 모래 | 이불 | 침대 | 피아노 | 반지 | 장미 | 서리 | 연못 | 바다 5. 현실을 여행하는 생활자 먼지는 작은 기침에도 예민하게 날아올랐다. 하늘 | 망했다! | 눈사람 | 냉장고 | 형식 | 먼지 | 조깅 | 욕망의 추 | 잠 | 추앙 | 산책 | 이모티콘 | 여행 | 수와 시 | 요가 | 지금 | 숨 | 관계 | 잘 | 밀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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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색은 공개적인가 하면 비공개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흰색으로 된 사물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쩌다 보니 벽도 옷장도 심지어 그 위에 놓아둔 항아리도 이 방을 나설 수 있는 문조차도 모두 흰색으로 되어 있다. 나는 지금 흰색에 갇혀있다. 흰색은 무표정하면서도 예리한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오늘 하루에 대해서 무어라고 하고 있다. 나는 알아들을 수 없다. 흰색의 말, 흰색의 생각, 흰색이 지향하는 방향. 이 방에 들어설 때마다 흰색은 내게 강력한 요청을 하고 나는 회피한다. 흰색은 백지를 앞에 둔 작가들처럼 무엇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가. 흰색은 모든 의미들을 수용할 것 같지만 결국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으려는 듯 고집을 피우며 오염되는 걸 두려워한다. 보이지 않는 얼룩을 불안해한다. 흰색은 강자이면서 약자의 감정에 시달린다. 언젠가 흰색에게 이런 말을 들은 것도 같다. 흰색은 자신의 괴로움과 고독함과 얼굴을 붉힐 수 없는 자신의 차가운 피에 대해서 늘 피로를 느낀다고. 흰색은 흰색이라는 정의와 순수에 대해서 뼈가 저린 표정을 짓곤 한다. 어쩐지 흰색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 같다.
--- p.12 키보드는 감정을 즉설하게 만들지만 펜은 종이 위에서 감정을 유예시킨다. 키보드로 글을 쓰고 있지만 펜에 대한 애착은 따로 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으로 시작하는 글쓰기는 책이라는 실체가 만들어짐으로써 끝이 난다. 하지만 책을 건네줄 때만은 꼭 친필로 누구누구 선생님께 아무개 드림이라고 쓴다. 이렇게 쓰는 작가의 사인은 증정이라는 의미보다는 “이제 이 글쓰기가 마무리되었습니다”라는 정중한 아룀의 표시에 가깝다. 사인을 할 때마다 오랫동안 부재했던 감각이 손끝에서 되살아나는 느낌을 받는다. 자판을 두들기던 동안 잊어버렸던 기억이 살아난다. 누군가의 이름을 적고 있는 동안 그 사람에게서 받았던 인상과 이미지가 미세하게 글씨의 모양에 관여한다. 펜은 그들에게 느꼈던 소소한 경험이나 감상조차 조형적인 것으로 표현해 주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키보드의 스피드가 캐치할 수 없는 것이다. --- p.26 온몸으로 빛과 바람을 더듬는 나무들의 세계는 감각적이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이해된다. 이해는 예술의 전제가 될 수 없다. 감각만이 예술을 선험하는 형식이다. 프랑시스 퐁주의 말처럼 나무가 쏟아내는 것은 녹색의 구토에 가깝지만 나무들이 견디는 울렁거림이 좋다. 견딤과 울렁거림 사이에 생기는 리듬, 그것이 아니라면 포로처럼 붙박여 있는 나무들을 입체적이라고 이해할 순 없을 것이다. 바람의 형편을 세세하게 표현하고 빛의 불가사의를 고스란히 기록하는 나무의 몸짓은 성실한 예술가를 닮았다. 햇빛이 강한 날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빛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다. 나무가 팽창하고 있다. 나뭇잎이 분열하고 있다. 굉음과 함께 폭발하는 꽃이 있을 것 같다. 나무 앞에 눈을 감고 서 있으면 빛을 다투는 나뭇잎들의 사정을 이해할 것 같다. 갈래갈래 갈라지는 가지들의 마음을 알 것 같다. 나무의 꿈이 숲인가. 흉내 낼 수 없는 감각의 제국에 그늘이 내린다. 나무를 이해해보려는 마음을 버린다. --- p.35 인용하는 문장이 마음에 들 때 글쓰기의 보폭은 더욱 씩씩해진다. 인용은 머뭇거리는 말을 견인하거나 뒷받침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게 지지를 받은 문장은 힘을 가지게 된다. 끌어온 문장이 꾸어온 달걀처럼 굴 때 작가에 대한 신뢰는 의심받게 된다. 스스로 껍질을 깨지 못한 채 타인의 문장에 기대어 순항하는 글은 재미가 없다. 인용한 문장과의 길항이 없으면 잔잔하기만 한 바다를 감상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첫눈에 반할 만큼 사랑에 빠질 수 있는 문장은 많고 우러러보이는 텍스트라고 해도 자신의 살과 피로 지어지지 않은 문장은 금방 상투적으로 전락하고 만다. 글쓰기에서 인용문은 조명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어둠 속에서 혼자 걸어가다가 문득 누군가 쏘아 올린 불빛을 발견하는 것 하지만 잠시 반짝이다가 사라지는 불빛에 기대어 끝까지 걸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황량한 겨울 들판에 느닷없이 밀려오는 봄바람 같은 환기, 어디서 날아온지 모를 종달새의 지저귐처럼 가슴이 뛰는 발돋움과 활력 그거면 충분한 것일지도 모른다. --- p.47 누군가 얼굴을 찍어주기 위해 셔터를 누르면 피하고 싶어서 손을 휘젓는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이 말과 글이 가지지 않는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에 거짓말, 즉 꾸미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언어는 조작할 수 있지만 사진은 텍스트 그 자체만을 허락한다는 점에서 때로는 피사체에게 냉정하다. 나이테가 새겨진 얼굴을 볼 때마다 에두르거나 미화할 수 있는 언어의 관용적 태도가 고맙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유서프 카쉬의 사진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앞에서는 그런 마음들이 사라진다. 화가 나거나 주름이 지거나 고집불통으로 보이는 얼굴들이 텍스트가 가진 고유성, 즉 그것이 원본의 아름다움이라는 걸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서울로 가는 기차 안에서 유서프 카쉬가 찍은 사진들이 실린 잡지를 본 적이 있다. 터널을 지날 때마다 흑백으로 찍힌 사진 속의 얼굴들이 빛과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사진 속의 얼굴들과 잠잠한 승객들의 얼굴이 터널을 통과할 때마다 같은 렌즈 안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카메라 속에 그 어떤 모습이 담기든 그것은 시간의 진실이며 냉정한 사실이 된다. --- p.56 왜 그런지 에세이라고 말하면 새가 날아와서 나란히 앉는 기분이 든다. 여러 종류의 글 가운데 특히 에세이를 쓰는 것은 꽁지를 까딱거리는 새의 발밑에 다정하게 밑줄을 그어 주는 일 같다. 에세이를 쓰다가 백지 위에 찍힌 글자들을 보면 새의 발자국을 닮았다. 언제 날아왔는지도 모를 새들의 지저귐, 그런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글을 쓴다. 톡, 톡, 톡 새들을 부르기 위해 자판을 두드리면 새들은 자신이 얼마나 높고 멀리까지 날 수 있는지도 모른 채 활자가 되어 얌전히 앉아 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기회가 되면 아무 연고도 없는 타인의 마음속까지 날아가 깃들곤 한다. 새들은 허공이라는 아름다운 백지를 가졌지만 종횡무진하는 데 주저함이 없고 지지배배 지지배배 썼다가 지워도 더럽혀지지 않는 목소리를 가졌으니, 부럽다. 에세이는 만만한 글쓰기가 아니다. 새를 불러 모으는 여정에서 새를 멀리 날려 보내는 과정까지 사뭇 남다른 조심스러움이 있다. 언어의 미끄러짐과 새들의 활강은 닮았다. --- p.58 조지아 오키프가 그린 크고 화려한 꽃들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꽃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꽃이 가진 색채와 에너지 속으로 기꺼이 휘말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캔버스 가득 클로즈업되어 있는 꽃잎은 꽃이라는 대상마저도 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접사하듯 그려진 꽃잎은 꽃이라는 관념적 대상이 아니라 무궁하게 열린 하나의 세계로 다가온다. 꽃을 통해서 꽃을 잊게 하는 꽃의 세계, 오키프의 꽃은 꽃 속의 또 다른 문으로 들어가는 내부의 길을 허락해 놓은 것 같다. 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유! 그것은 현실의 꽃이 아니라 예술가들이 허락하는 꽃이다. 꽃은 예술가들에게 비교적 흔하고 상투적인 소재다. 그럼에도 꽃이라는 존재 그 자체가 클리세한 것이 아니듯 오키프의 꽃은 단지 관상용으로 감상되길 거부한다. 문득 시부사와 다쓰히코의 글에서 읽은 ‘화요花妖’라는 말이 떠오른다. 꽃이 사라져도 꽃의 존재감을 드러내도록 안내해주는 요정이 정말로 있을지 모르겠다. --- p.68 다시 한유의 글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의 글들은 지금도 여전히 명확한 글쓰기의 길잡이 같다. 한유의 문장들을 두고 명나라 때 모곤은 달마가 서쪽에서 와서 홀로 선종을 연 것에 비유할 수 있다고 극찬했다. 심지어 그가 쓴 묘지명이나 제문 등 비교적 상식적이고 논증적인 글들에도 수작이 존재한다는 것은 특별하다. 청탁을 넣는 편지조차도 뛰어난 문장을 과시해서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도 했다는 것은 그의 글들이 실용적인 부분에서도 문학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장이란 반드시 마음속에 무엇인가 차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마음이 순정하면 기운이 조화롭고, 성품이 밝은 자는 글에 애매한 부분이 없다.’는 말에서 한 유가 변려문에서 되돌려놓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왜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을 하다 보면 한유의 글 「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에서 정곡을 찌르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글의 중요한 키워드는 울음(鳴)인데 한유는 불평즉명不平則鳴, 즉 평정을 얻지 못할 때 울 수 있는 방법으로 글쓰기를 제시한다. 문장은 가장 정교하게 불평을 해소할 수 있는 울음이자 울림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새가 소리 내어 봄을 울고, 우레가 소리 내 여름을 울고, 벌레가 소리 내어 가을을 우는’ 사물의 이치와 같다고 한다. 글쓰기가 그 대표적인 울음이자 울림이라는 것이다. --- p.80 두부는 미움받을 구석이 별로 없다. 어느 음식에 끼어들어도 대체로 환영을 받는다. 그렇다고 두부가 남의 자리를 꿰어찰 만큼 경쟁심이 많은 상품도 성품도 아니다. 빈약한 자리를 채워줄 뿐 제 분수나 도리를 넘어서지 않는다. 예를 들면 그냥 김치찌개라 해도 두부가 낄 자리가 있고 두부김치찌개라고 해도 두부가 주인공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두부에게는 적당히 어울릴 만큼의 사교성이 있을 뿐 빌런의 느낌이 없다. 약간의 고소함을 빼면 두부의 맛은 소박하다. 튀는 느낌은 없지만 눈여겨보게 되는 사람처럼 두부를 닮은 듯 무심하면서도 미더운 성격을 가진 이들이 있다. 두부같이 넙데데하고 멀건 얼굴로 어느 자리에서나 빙긋이 웃고 있는 두부형 인간, 그런 사람이 내 주위에 아직도 있다는 건 삶의 영양가가 조금은 남아 있다는 말 같아서 좋다. 쿡쿡 옆구리를 찔러도 잘 받아주는 두부에게 연말이 가기 전에 연락이나 할까. 백반에 찌개 어떠냐고. --- p.95 호박범벅 쑥범벅 고구마범벅 등 죽보다 되게 쑨 음식을 보통 범벅이라고 한다. 범벅이라는 말은 사물이 뒤섞여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 쓰는 말이기도 하지만 음식에 쓰게 되면 혼돈이 아니라 어울림이 된다. 범벅은 최소한 하나 이상의 조합일 때 가능한 말이다. 옥수수범벅에는 옥수수와 함께 팥이 함께 들어간다. 옥수수는 풍부한 전분을 가지고 있어 범벅이 될 수 있는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범벅이라는 음식은 서로 다른 재료들을 섞어놓았을 때 겉돌지 않아야 한다. 그러려면 팥과 옥수수는 뭉근한 불의 기운을 견디며 너그러워져야 한다. 바닥이 두꺼운 냄비에 물을 충분히 넣고 불려둔 옥수수와 팥을 센 불에 끓이다가 단짠단짠한 맛이 살짝 돌도록 설탕과 소금을 넣고 간을 한다. 그다음부터는 낮은 불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뜸을 들이듯이 오래 끓이면 요리랄 것도 없는 요리는 끝이 난다. 눋지 않도록 틈틈이 관심을 가지다 보면 옥수수와 팥이 안갯속에 있는 것처럼 느끄름하게 어두워질 때가 온다. 냄비 속이 연자줏빛 노을처럼 그윽해지면 범벅이 완성되었다는 신호다. --- p.108 채를 썬 오이가 고명으로 살짝 얹힌 음식은 언제나 반갑다. 희미하지만 깔끔한 맛과 향을 선사하는 오이는 자신의 최선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디까지인지 아는 것 같다. 오이는 향수처럼 자신의 향을 주장하지 않는다. 지나가는 소식처럼 스치듯이 다가왔다가 공기 중으로 사라져버린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향은 조금 아쉽고 조금 섭섭할 뿐이다. 향을 포로로 잡아두려는 조향사의 입장에서 보면 마땅치 않겠지만 오이향은 깨끗하고 맑은 술처럼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숙취가 없다. 오이비누 오이샴푸 오이소주 곳곳에서 러브콜이 쏟아졌지만 모두 오래 판매되지는 않았다. 오이의 산뜻한 향을 팔아보겠다는 의욕은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오이는 향이라는 말 자체를 마음에 두지 않는다. 오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뒤끝이 없을 것 같고, 금방 사라지거나 금방 잊힌다는 것도 꽤 근사한 말 같다. --- p.115 만두는 개봉하지 않은 편지 같다. 내용이 뭐가 되었든 일단 만두는 반갑다. 냉동식품 코너에 가면 만두들이 벌이는 백가쟁명이 들린다. 바야흐로 다양한 만두의 춘추전국시대 그 현장이 오늘날의 만두 시장일까. 잔뜩 집어넣은 내용물을 자랑하는 만두는 속을 열어보기도 전에 스포일러를 당해 버린 것 같다. 대구에는 나름 유명한 만두가 있다. 일명 납작만두. 전쟁통에 만들어진 보잘것없는 음식이라지만 그렇다고만 할 수는 없다. 반달 모양의 만두피에 고작 얼비치듯 흩뿌려놓은 부추가 전부라서 풋사랑처럼 어설프고 아쉽다. 하지만 이 속없는 만두는 새빨간 떡볶이 국물과 만나면 세상없이 나긋한 만두가 된다. 납작만두는 만두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마도! 내 대답은 그렇다. 가장 단순한 것이 궁극의 미식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이제 딤섬 정도는 시시하다. 하가우, 샤오롱바오 등등 분식이라기보다 요리 이름 같은 만두들도 즐비하지만 잊을 수 없는 것은 늘 따로 있다. 김이 우렁차게 나던 만둣가게에는 편의점이 생겼다. --- p.128 쪽두툼하게 썬 것은 나박이 아니다. 모양 없이 마음 가는 대로 썬 것도 나박이 아니다. 나박은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도마 위를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같이 들린다. 급하지도 느긋하지도 않은 발걸음이 일정한 간격과 리듬을 유지하며 반듯한 모양을 가지는 소리. 나박이라는 말은 시각적이면서도 한껏 청각적이다. 나박으로 썰기에는 어떤 야채보다 무가 잘 어울린다. 나박나박하게 잘 썰어놓은 무를 보면 잘 다린 교복의 깃처럼 규칙을 준수하는 순전한 아름다움이 있다. 가끔 온 집안에 울려 퍼지던 엄마의 도마소리가 그립다. 명랑하면서도 엄한 소리, 잠을 깨우던 부엌은 사라졌고 나의 주방에서는 윙윙 커트기나 분쇄기 돌아가는 소리가 더 자주 난다. 과정을 단축하기에 급급한 요리가 음식에 대한 조급증을 키운다. --- p.141 숟가락은 어쩐지 엄마를 닮았다. 모성의 이미지가 아른댄다. 사물의 모습에서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할 때가 있다. 젓가락이나 가로등을 보면 아빠의 모습이 연상되는 것처럼. 처음으로 숟가락을 손에 쥐여준 사람은 엄마, 젓가락질을 독려한 사람은 아빠였을 것이다. 숟가락과 젓가락이 나란히 놓여 있는 모습은 언제나 보기 좋다. 완성된 느낌, 다정한 안도감에 다가가 앉고 싶어진다. 수저를 앞에 놓고 있으면 이렇게 긴 건 내가 집을게요. 이렇게 찰랑거리는 건 내가 뜰게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날 것 같다. 결혼할 때 엄마가 사준 숟가락과 젓가락이 아직도 포장된 채 식기장에 들어 있다. 숟가락 속에 거북이가 그려진 이상하고 투박한 모양을 탓하며 한 번도 사용해보지 않았다. 예쁘고 날렵한 스푼과 나이프와 포크에 취해서 구닥다리 취급하는 동안 엄마도 아빠도 사라졌다. 살아 있는 동안 수저만큼 곁에 두고 열심히 애용하는 물건이 또 있을까. --- p.151 무조건적인 신뢰를 요구하는 것처럼 거울은 일방적이다. 그리고 침묵한다. 줄기차게 보여주기만 함으로써 모든 이견이나 사설을 잠재울 수 있다는 오만함이 거울에는 있다. ‘자, 네 눈으로 똑똑히 봐. 네가 누군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지만 나는 내 눈으로 나를 직접 바라본 적이 없다. 열 살쯤 되었을 때 마루 끝에 앉아서 거울을 보고 있었다. 거울 속의 아이가 정말 나일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내 눈으로는 직접 내 얼굴을 볼 수 없다니! 그때 내 눈으로 내 손과 팔다리를 볼 수 있지만 얼굴만은, 얼굴만은 거울이나 다른 사람의 눈을 빌리지 않고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순간이 온 것이다. 사람들은 왜 거리낌 없이 거울을 믿는 걸까. 답답해서 데굴데굴 구르고 싶었던 그 순간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이 상식이라는 것과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내가 아닌 타자의 눈을 통해서 내 모습을 알 수 있다는 거울의 전언, 그 사실이 못마땅해서 지금도 사각지대 어딘가에 진짜 내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 p.173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무한을 느끼게 된다. 시간도 공간도 소용없는 미지, 하늘은 움켜쥐고 있던 마음을 스르르 놓아버리게 한다. 하늘의 무한함은 원인과 결과를 추궁하는 인간의 루틴을 세속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무한은 체험의 영역이지 설명하기 곤란한 개념이다. 수학에서는 무한이 가장 큰 난제였으므로 독일의 천재 수학자 가우스는 무한을 정면으로 보지 말라고 했다. 수학자이기를 포기하고 신학자가 된 칸토어 역시 무한 그 자체를 신이라고 보았다. 오직 신만이 그런 절대적 무한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은 인간에 대한 한계와 초라함을 상기시켜 준다. 인간은 무한의 비밀을 알 수 없고 그 불가해함의 영역을 신비나 숭고함으로 받아들일 뿐이지만 인간에게는 그런 무한마저 내면으로 사유私有할 수 있는 정신이 있다. 인간이라는 비좁은 땅에 경작할 수 있는 정신의 끝없음, 그 속에 하늘의 무궁함이 있다면 무한은 우리를 유한에서 구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p.1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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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가 아니더라도 책은 분명 우리에게 하나의 장소다. 책을 읽는 사람은 장소를 대여하려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문명이 준 최고의 복지시설이 아닐까. 그곳에서 무엇을 누리고 무엇을 보고 듣건 어떤 군주도 간섭할 수 없다. 나름 그런 장소를 찾아가기 위한 흔적들로 집안 곳곳에 책이 펼쳐져 있다. 날개를 펼치고 이륙하거나 착륙한 장소가 어디였더라. 그곳은 아주 먼 곳이었다가 마음속 한 구석진 곳이기도 하다. 책은 언제나 떠날 수 있는 티켓을 끊어놓고 기다려 준다. 언젠가부터 여러 권의 책을 동시다발적으로 읽는 것이 좋다.
책은 매 순간 장소를 제공하고 장소는 다시 확장된 공간을 마련해 준다. 내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곳이 한껏 사교적이면서 개별적인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주라는 거대한 공간 속에서 한 점 점처럼 앉아서 무엇인가를 틈틈이 읽고 있을 지구인들, 나의 동료들에게 이곳이 허술하지만 마음에 남는 장소이기를. 그리고 또다시 훌쩍 다른 장소를 찾아서 떠나길. - 서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