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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3
6·25 전쟁에서 4·19 혁명 전야까지 개정증보판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25.10.17.
베스트
역사와 문화 교양서 top100 4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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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제1부 1956년: ‘동원 대중’과 ‘피해 대중’

제1장 : 김창룡을 알면 이승만과 1950년대가 보인다
최초의 국군장으로 치러진 김창룡의 장례 · 19 김창룡의 ‘반공 노이로제’ · 21 이승만은 이론, 김창룡은 실천 · 23 김창룡의 정치공작 · 25 함경도파·평안도파·이남파의 군내 파벌 싸움 · 28 정일권은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는가? · 30 “파벌주의와 부패는 쌍둥이” · 31

제2장 : 이승만과 자유당: ‘우의마의 정치’
“국민이 원하면 자살도 할 수 있다” · 33 대한노총: 우의마의 돌격대 · 35 이승만 재출마를 요구하는 관제 시위 홍수 · 36 혈서 전문가들의 출현 · 38 이승만은 ‘민족의 태양’ · 39

제3장 : 신익희와 민주당: ‘비 내리는 호남선’
“못살겠다 갈아보자” vs “갈아봤자 소용없다” · 41 30만 인파가 몰린 한강 백사장 연설 · 43 호남선 열차에서 뇌일혈로 사망한 신익희 · 45 이승만 52%, 조봉암 23.8%, 신익희 추모표 20.5% · 48 “이승만은 하늘에서 낸 사람” · 49

제4장 : 조봉암과 진보당: ‘피해 대중’을 위하여
진보당 창당준비위원회 출범 · 51 조봉암의 ‘피해 대중론’ · 53 조봉암의 ‘평화통일론’ · 55 이승만을 지지한 민주당 · 58 216만 표에 기반한 진보당 창당 · 59 왜 진보세력은 분열했을까? · 60

제5장 : 자유당의 ‘민주당 죽이기’
야당 후보자들의 등록 방해 공작 · 63 헌정 사상 초유의 국회의원 시위 · 64 여촌야도 현상 · 66 신·구파 갈등과 장면 저격 사건 · 68 이기붕·이익흥·김종원이 배후 · 70

제6장 : 미국의 잉여농산물과 여촌야도
미국산 잉여농산물과 짜장면의 대중화 · 72 대책 없는 이농 현상 · 73 밀가루·설탕·면화, 삼백산업의 횡포 · 75 농촌을 희생으로 한 자본주의 발전 · 77 여촌야도의 수수께끼 · 79

제7장 : 북한: ‘주체 이론’과 ‘8월 종파사건’
김일성의 좌수우수론 · 82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 83 개인숭배 논란과 ‘8월 종파사건’ · 86 김일성의 위기 탈출 · 88 천리마 운동 추진 · 90

역사 산책 1 북한의 도식주의 논쟁 · 92

제8장 :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권력과의 유착’과 ‘양적 팽창’ · 95 “예수도 돈 있어야 믿겠습니다” · 97 함석헌은 왜 기독교를 비판했는가? · 98 대통령 장로 이승만, 부통령 권사 이기붕 · 99 개신교와 천주교의 ‘행복한 전쟁’ · 101

제9장 : 22세 논객 이어령의 ‘우상의 파괴’
‘문단의 무서운 테러리스트’ · 103 『한국일보』의 ‘상업적 진보성’ · 104 호흡의 문제와 세대의 문제 · 107 세대·속도에 쫓기는 이승만의 ‘우상 정치’ · 109

제10장 : 『동아일보』·HLKZ-TV·AFKN-TV
한국엔 언론자유가 없다? · 111 신문 배포 방해와 독자 협박 · 113 반공 기념일과 이승만 생일 경축 행사 · 115 HLKZ-TV의 개국 · 118 창업자 황태영의 집념 · 120 경영난으로 무너진 HLKZ-TV · 122 AFKN-TV와 DBC-TV · 123

제11장 : 김시스터스·「자유부인」·수세식 화장실
‘미8군 쇼’는 ‘한국 대중문화의 모태’ · 126 영화 「자유부인」과 ‘고무신 관객’ · 129 ‘영화 암표상’이라는 신종 직업의 등장 · 131 유료 화장실과 아파트 수세식 화장실의 등장 · 132

제2부 1957년: ‘장길산’과 ‘홍길동’을 기다린 세상

제1장 : 국민반, 장충단공원 폭력 사태, 선거법 개정 논란
총선에 대비한 국민반 조직 · 139 장충단공원 폭력 사태 · 141 조병옥·이기붕 밀약설 · 143

제2장 : 세상을 조롱한 가짜 이강석 사건
이승만의 양자가 된 이강석 · 146 이승만의 혈통에 대한 집착 · 147 제3인자로 통한 ‘귀하신 몸’의 출현 · 148 장길산과 홍길동의 출현을 기다리다 · 151 ‘고바우 영감’ 필화 사건 · 152

제3장 : 북진통일·병역 기피·맥아더·유엔군 사령부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 · 155 군대 내 폭력과 병역 기피 부정 · 156 ‘구국의 은인’ 맥아더 동상의 제막 · 159 유엔군 사령부의 서울 이전 · 162

제4장 : 1957년은 ‘소년소녀 사냥의 해’?
“얌생이 몬다”는 말이 생겨난 이유 · 163 미군과 합작한 “양주 열차 강도 사건” · 164 주한미군 범죄의 급증 · 166 한국인들에 대한 린치 사건 · 168

제5장 : “그래도 남한은 이렇게 자유스럽지 않아요?”
결식아동 70만 명과 부정부패 · 170 식모와 ‘에레나가 된 순희’ · 172 오상원의 ‘황선지대’의 비극 · 173 이범선의 「오발탄」의 비극 · 175 자유당의 ‘자유’는 무엇인가? · 176 선우휘의 「불꽃」 · 178

역사 산책 2 “이밥(쌀밥)에 고깃국”의 꿈 · 180

제6장 : 관훈클럽·언론 부패·만화잡지·앰프촌
관훈클럽과 ‘신문의 날’ 탄생 · 183 말세를 향해 달리는 부패 잔치 · 184 ‘낙양의 지가’를 올린 『사상계』 · 185 류근일 필화 사건 · 187 『만화세계』와 만화잡지의 인기 · 187 라디오 수신을 위한 앰프촌 조성 · 188 땐스홀과 카바레의 차이가 무엇인가? · 190 ‘기타부기’와 ‘미스코리아’ · 191

제3부 1958년: ‘생각하는 백성’과 ‘인의 장막’

제1장 : ‘인의 장막’에 갇힌 이승만
83세인 이승만은 1875년생 · 197 이승만의 자기중심주의 · 199 부인 프란체스카의 영향력 · 202 ‘인의 장막’은 야당의 정치선전? · 205 어린아이 같은 이승만 · 208

역사 산책 3 “이승만은 법 관념이 결여된 사람” · 212

제2장 : 이승만의 ‘세계 4대 강국론’
국군 병력은 세계 4위 · 215 ‘반공 독재’는 형용 모순 · 217 한국은 ‘일본 경제 부흥을 위한 뒷마당’ · 218 이승만의 슬픈 허세 · 220

제3장 : ‘진보당 죽이기’와 제4대 총선거
미국의 매카시는 죽었건만 · 221 진보당 등록 취소 사건 · 223 제4대 민의원 총선거 · 226 “친공 판사 유병진을 타도하라!” · 228

역사 산책 4 이기붕과 이정재 · 231

제4장 :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사상계』와 함석헌 필화 사건 · 233 언론의 적극적인 지원 사격 · 234 『사상계』와 장준하의 친미·반공 · 236 이승만의 ‘병든 민족주의’ 비판 · 238

제5장 : 국가보안법과 내각제 개헌 파동
자유당의 국가보안법 개악 정략 · 240 야당 의원 감금 후 날치기 통과 · 242 이기붕과 조병옥의 밀담 · 244 이승만을 반대하면 공산주의자인가? · 246

역사 산책 5 1958년 ‘개띠 해’는 산부인과 전성시대 · 248

제4부 1959년: 파국을 향한 질주

제1장 : 대한반공청년단·반공예술인단·대한노총
전국 89개 단부를 거느린 최대 관변단체 · 253 “민주당이 집권하면 나라가 망한다” · 256 임화수의 반공예술인단 · 257 임화수를 위한 변명 · 259 임화수도 못 건드린 문단 파워 · 261 대한노총도 이승만의 친위부대 · 262

제2장 : 재일교포 북송 반대 시위
북한은 노동력, 일본은 골칫거리 해결 · 265 21일간 4,312회 736만 명 참가 · 267 이승만 정권의 무능력·무책임성 · 271 이승만의 “권력 강화용 동원정책” · 273

제3장 : 조봉암 사형: 216만 표는 어디로 갔는가?
조봉암 사형 집행 · 275 23.8%, 216만 3,808표의 행방 · 278 양명산은 ‘이승만 정권의 공작원’ · 280 미국은 왜 침묵했는가? · 282 민주당과 언론도 공유한 ‘반공 히스테리’ · 283

제4장 : 『경향신문』 폐간 사건
자유당 정권과 『경향신문』의 갈등 · 285 정략적 보복에 눈이 먼 자유당 · 287 신문의 정론성과 상업성 · 289 광고 수입 의존도 30%의 의미 · 290

제5장 : 재벌의 형성: 정경유착의 게임
귀속업체 불하 특혜 · 292 원조 경제와 수입 대체 특혜 · 294 은행 민영화 특혜 · 296 1950년대 한국 경제 다시 보기 · 298 「콜론 보고서」의 예견 · 301

역사 산책 6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 · 302
역사 산책 7 드럼통 자동차와 피마자 기름 · 305

제6장 : 김동리·이어령 논쟁: 실존주의와 서구적 교양주의
문단의 실존주의 열풍 · 308 서구 지식 이용의 검증 경쟁 · 310 ‘서구적 교양주의의 탄생’ · 311 카뮈는 ‘우리들의 정신적 동지’ · 313

제7장 : 라디오, 아나운서, 멜로영화 전성시대
최초의 국산 라디오 생산 · 316 라디오의 국산화·대중화 · 318 ‘오빠 부대’를 거느린 아나운서의 인기 · 319 멜로영화의 전성시대 · 321 교외 지도교사와 풍기 문란 단속 · 323 베스트셀러와 책의 월부 판매 · 325

제8장 : 조병옥 사망: 청천벽력·망연자실
민주당 신파와 구파의 이전투구 · 328 대통령 후보 조병옥, 부통령 후보 장면 · 330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떠난 조병옥의 사망 · 331 민주당의 ‘한심한 작태’ · 334

제9장 : “지식을 팔아 영달을 꿈꾸는 지식인들이여”
이승만·이기붕 출마 환영 예술인 대회 · 336 이기붕을 따르는 ‘만송족’ 동원 · 337 이승만 신격화 ‘충성 경쟁’ · 340 장준하의 지식인 비판 · 342

제10장 : 3·15 선거에서 4·19 전야까지
자유당의 화려한 상상력 · 344 2·28 대구 학생 시위 · 347 자유당의 유세 방해 공작 · 350 자유당의 ‘9할 5분 득표 전략’ · 352 3·15 마산 시위 · 353 자유당의 선거 장난질 · 355 김주열의 시체 발견 · 357 4·19 혁명의 진실 · 360

역사 산책 8 개신교와 천주교의 싸움 · 362

맺는말 : ‘소용돌이 문화’의 명암
‘분단의 역설’ 또는 ‘전쟁의 역설’ · 365 한국의 ‘소용돌이 문화’ · 367 ‘소용돌이 문화’의 양면성 · 369 과연 이데올로기가 문제였는가? · 371 골육상쟁의 근본주의 · 373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 375 대중의 ‘과잉 순응’ 전략 · 376 이승만의 최대 업적 · 378 학벌주의와 숭미주의 · 380 “점증하는 좌절의 혁명” · 382 여촌야도의 정치학 · 383 “공적 소극성, 사적 적극성” · 385 이제는 골로 가지 말자 · 386

주 · 389

저자 소개 1

康俊晩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인 강준만은 탁월한 인물 비평과 정교한 한국학 연구로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반향을 일으켜온 대한민국 대표 지식인이다. 전공인 커뮤니케이션학을 토대로 정치, 사회, 언론, 역사, 문화 등 분야와 경계를 뛰어넘는 전방위적인 저술 활동을 해왔으며, 사회를 꿰뚫어보는 안목과 통찰을 바탕으로 숱한 의제를 공론화해왔다. 2005년에 제4회 송건호언론상을 수상하고, 2011년에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국의 저자 300인’, 2014년에 『경향신문』 ‘올해의 저자’에 선정되었다. 저널룩 『인물과사상』(전33권)이 2007년 『한국일보』 ‘우리 시대의 명저 50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인 강준만은 탁월한 인물 비평과 정교한 한국학 연구로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반향을 일으켜온 대한민국 대표 지식인이다. 전공인 커뮤니케이션학을 토대로 정치, 사회, 언론, 역사, 문화 등 분야와 경계를 뛰어넘는 전방위적인 저술 활동을 해왔으며, 사회를 꿰뚫어보는 안목과 통찰을 바탕으로 숱한 의제를 공론화해왔다.
2005년에 제4회 송건호언론상을 수상하고, 2011년에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국의 저자 300인’, 2014년에 『경향신문』 ‘올해의 저자’에 선정되었다. 저널룩 『인물과사상』(전33권)이 2007년 『한국일보』 ‘우리 시대의 명저 50권’에 선정되었고, 『미국사 산책』(전17권)이 2012년 한국출판인회의 ‘백책백강(百冊百講)’ 도서에 선정되었다.
그동안 쓴 책으로는 『문해력을 위한 교양국어사전』, 『권력과 복종』, 『법조 공화국』, 『인문학과 손잡은 영어 공부』(전3권), 『정치적 올바름』, 『한류의 역사』, 『미디어 법과 윤리』, 『한국 근대사 산책』(전10권), 『한국 현대사 산책』(전28권)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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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5년 10월 17일
쪽수, 무게, 크기
428쪽 | 152*225*30mm
ISBN13
9788959068142

책 속으로

대통령 선거를 열흘 앞둔 바로 그날 신익희가 죽을 줄 누가 알았으랴. 신익희는 5월 5일 새벽 5시경, 부통령 후보 장면과 함께 호남선 열차를 타고 전북 이리(현재 익산)로 향하던 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졸도했다. 수행원들이 인공호흡을 시도하며 기차 내에 의사를 찾았지만 의사는 한 사람도 없었다. 신익희가 졸도한 후 45분 만에 열차는 이리역에 도착했다. 장면의 경호책임자인 시라소니 일행은 신익희를 업고 역에서 가까운 호남병원으로 달렸지만 신익희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신익희의 운구가 그날 오후 4시 서울역에 도착하자 운집한 군중들이 그의 유해를 경무대 쪽으로 끌고 가려 하여 경찰과 충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의 발포로 10여 명의 사상자가 났고 700여 명이 피검되었다. 신익희의 죽음 이후 〈비 내리는 호남선〉이라는 노래의 음반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 p.46-47 「제1부 제3장 신익희와 민주당: ‘비 내리는 호남선’」 중에서

이어령은 1956년 5월 6일자 『한국일보』에 쓴 「우상의 파괴」 중에서에서 문단의 중진들을 비판한 뒤 자신을 다음과 같이 ‘천재적인 악동’으로 묘사했다. “내가 이 순간 우상들의 분노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또한 이 거룩한 우상들에 의하여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모진 형벌을 받을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소학교 시절부터 수신(修身) 점수에 59점의 낙제점을 받은 천재적인 악동이며 겸양의 동양 미덕을 모르는 배덕아다. 그러니 그만한 정도의 것은 이미 각오한 지 오래다.” 이어령 자신은 훗날 「우상의 파괴」 중에서를 비롯한 일련의 글들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렸던가? “그 글들은 결함에 가득 찬 글들이지만 그 글이 갖는 시대적 의미는 양보할 수 없다. 그때 기성문단을 공격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나는 그때 나 자신이 길들여져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커다란 슬픔의 힘으로 그 자살 공격을 감행할 수 있었다.”
--- p.104 「제1부 제9장 22세 논객 이어령의 ‘우상의 파괴’」 중에서

5월 25일 국민주권옹호투쟁위원회가 장충단공원에서 개최한 시국 강연회엔 20만여 명의 시민이 몰려들었다. 첫 연사인 전진한의 연설이 끝나고 조병옥의 연설이 시작된 지 불과 5분도 안 되어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나타나 폭력으로 강연을 방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괴한들은 마이크 앰프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지르고 기물을 파괴했으며, 연단 위로 돌과 유리병, 의자 등을 던졌다. 그리고 이 광경을 촬영하던 사진기자들에게도 돌이 날아들었다. 현장에 배치된 경찰관은 그런 폭력 사태를 뒷짐지고 구경만 하다가 폭도들이 사라진 후에야 진압하는 척하면서 오히려 앰프의 불을 끄던 홍익대 학생 이영수를 비롯한 몇 명의 청년을 연행해갔다. 소란이 조금 진정된 후 장택상은 “여러분이 보신 이러한 사실이 바로 독재국가의 형태”라고 말했고, 조병옥은 “민주주의를 저버리는 날 이 나라는 세계에서 고립되고 말 것”이라고 외쳤다.
--- p.141-142 「제2부 제1장 국민반, 장충단공원 폭력 사태, 선거법 개정 논란」 중에서

함석헌을 구속한 경찰은 이 글에서 대한민국을 ‘꼭두각시’라 한 것은 국체(國體)를 부인한 것이고, 북한 괴뢰와 대한민국을 동일시한 것이며, 또 “군의 전투 의욕을 감퇴시키고 비상시기에 놓인 사회의 사상 질서를 문란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경찰은 발행인 장준하와 주간 안병욱도 연행해 조사했으나 구속하지는 않았다. 함석헌은 구속 중 경찰에게 뺨을 맞고 몸이 밧줄에 묶인 채 거꾸로 매달려 매를 맞는 고문을 당했다. 물론 ‘빨갱이’로 만들기 위한 작업이었다. 언론의 적극적인 지원 사격이 없었더라면 고문으로 조작된 새로운 빨갱이가 만들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주일 전인 8월 1일 『코리아타임스』 편집국장 장수영과 『동아일보』 국방부 출입기자 최원각이 다른 필화 사건으로 구속된 바 있기에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빈발하는 필화 사건에 대해 내무부 장관 민병기에게 언론인의 인신구속에 신중을 기하라는 항의문을 전달했다.
--- p.234-235 「제3부 제4장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중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된 건 2월 4일자 ‘여적’이었다. 이 글의 필자는 비상임 논설위원 주요한이었다. 문제의 칼럼은 『경향신문』이 2월 2일자부터 연재하고 있던 미국 노터데임대학 정치학 교수인 페르디난트 허멘스(Ferdinand Hermens, 1906~1998)의 논문 「다수결의 원칙과 윤리」 중에서에 대한 단평이었다. 만일에 공정선거가 시행되지 못하면 폭력에 의한 혁명도 있을 수 있으니 한국의 현실을 이러한 견지에서 관찰해야 한다는 것이 그 요지였다. 당국은 이 단평을 “혁명에 의해서라도 진정한 다수의 의사가 반영되어야 한다고 역설함으로써 폭력을 선동하였다”며 헌법에 규정한 선거 제도를 부정하고 폭동을 선동했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웠다. 당국은 필자인 주요한과 사장 한창우를 구속했다가 2월 19일 이들을 내란선동 혐의로 불구속 송치했다. 그러나 『경향신문』의 정부 비판은 계속되었다. 당국은 4월 4일 기자 어임영과 정달선을 간첩 관계 기사로 구속했다. 4월 15일자 석간 1면에 “이 대통령이 국가보안법 개정을 반대라고 했다”는 이승만의 기자회견 기사가 보도되자, 정부는 이것이 사실무근이라며 4월 30일에 폐간 조치라는 마지막 칼을 빼들고야 말았다.
--- p.286-287 「제4부 제4장 『경향신문』 폐간 사건」 중에서

1950년대 말 한국 영화계는 여전히 ‘고무신 관객’의 사랑에 힘입어 멜로영화의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1959년에 제작된 111편의 영화 가운데 멜로영화는 86편이나 되었다(수입된 외화는 203편). 1960년엔 87편의 영화 가운데 멜로영화는 64편이었다. 한국인은 1956년 1인당 1년에 평균 0.97회 극장에 갔지만, 1960년엔 1인당 연평균 1.8회로 늘었다. 1957년 미스코리아 대회가 시작되더니 영화 쪽에서도 미인관이 점차 변모해 1950년대 말엔 섹시한 육체파 여배우들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수영복을 입은 여배우들이 등장하는 해수욕 장면이 자주 나와 관객의 눈길을 끈 것도 이때부터였다. 1957년 17세의 나이에 데뷔한 김지미는 서구적 미모로 “한국 남성들의 메마른 가슴에 정염의 불꽃을 피웠다”. 관객 증가엔 치열한 마케팅 공세도 한몫 거들었다. 1950년대 말 신문광고의 가장 큰 광고주는 영화업계였다. 영화 광고는 1958년 전체 광고의 34.7%, 1959년 37.0%를 차지했다.

--- p.321-322 「제4부 제7장 라디오, 아나운서, 멜로영화 전성시대」 중에서

출판사 리뷰

지난 10년 한국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그 모든 것은 어떻게 달려왔는가?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평가의 문화를 정착시키다”


우리가 살아왔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현대사는 역사의 출발점이자 결승점이다. 끊임없는 선택 속에 지금 내가 살아가야 하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사는 역사학계에서 찬밥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민감한 주제들이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논란이 되는 부분은 다양한 입장을 소개하면서도 그 나름의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참여의 마당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독보적이다. 지금의 ‘나’를 이룬,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한국인의 ‘보물창고’와 같다.

1945년 8월 15일 정오부터 봉준호의 「기생충」까지 75년의 역사를 촘촘히 담아낸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정치·경제·사회는 물론 대중문화·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현대 한국인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삶과 역사의 무대를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이를 위해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방대한 주석에 당시의 현장을 포착한 사진, ‘역사 산책’ 코너 등을 통해 입체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恨)과 욕망의 폭발’(1940년대), ‘극단의 시대’(1950년대), ‘기회주의 공화국의 탄생’(1960년대), ‘수출의 국가종교화’(1970년대),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1980년대), ‘분열은 우리의 운명, 연대는 나의 운명’(1990년대), ‘노무현 시대의 명암’(2000년대), ‘증오와 혐오의 시대’(2010년대) 등 각 시대를 지배했던 정서와 구조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 속에서 수많은 사건과 주제를 집요하게 파헤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진보’의 이름으로 새로운 가치를 선점할 수 있듯이 극단과 궁핍의 시대를 살아남아야 했던 과거 세대의 ‘아픔’도 함께 껴안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강준만은 한국 현대사가 ‘인간’을 배제했던 역사라고 간파하며 ‘인간’의 복원,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이념과 세대의 새로운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평가의 문화를 정착시킨 한국 최초의 단행본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끝나지 않은 전쟁, 민간인 학살

6·25 전쟁은 ‘이원(二元) 전쟁’이었다. 군인들끼리 싸운 전쟁이 그 하나라면 또 하나의 전쟁은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민간인 학살은 군과 경찰에 의해 저질러졌을 뿐만 아니라 민간인들 사이에서도 저질러졌기 때문에 더욱 비극적이었다. 민간인 학살은 한국의 일그러지고 뒤틀린 근·현대사의 역사적 모순과 질곡의 표현이자 결과이기도 했다. 램지 클라크는 “미국에서 한국전쟁은 ‘잃어버린 전쟁’으로 불린다”며 “당시 3천만 인구 가운데 10%가 넘는 민간인이 몰살당한 전쟁을 국제사회가 잊어버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비극”이라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6·25 전쟁은 ‘잊혀진 전쟁’일 뿐만 아니라 ‘끝나지 않은 전쟁’이기도 하다. 1999년 9월 AP통신이 미군에 의한 노근리 학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이후 전쟁 중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있었던 사실을 있었던 그대로 밝히는 것도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그 전쟁은 6·25 전쟁 이후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수행되어왔다. 북진통일 궐기대회가 판치는 이승만 정권하에서는 오직 빨갱이에 의해 죽었을 때에만 그 진상규명이 허용되고 장려되었다. 그렇지 않은 경우의 진상규명은 반역이었다. 역사학자 서중석은 “신문사를 습격하건, 법원에 난입하건, 공공집회를 무법천지로 만들건, 정치인을 백주에 테러하건, ‘반공용사’들이 했다고 하면 붙잡지 않았”고, “어떤 사람이건, 어떤 행위건 ‘나는 반공을 하는 사람이다’라는 말만 하면 그것에 저항하기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4·19 직후, 6·25 전쟁을 전후로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 진상규명에 나선 ‘전국 피학살자 유족회’는 유족들의 신고를 바탕으로 114만 명이 국군의 손에 의해 학살당했다는 보고서를 냈는데, 이들은 빨갱이로 몰려야 했다. 이후 이들은 입을 닫아야 했고, 4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기독교의 반공, 친미, 기복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 신앙이라는 ‘반공의 보증수표’가 부도날 염려가 없을 정도로 반공의 전선에 앞장섰다. 예컨대, 전쟁이 발발한 다음 날인 6월 26일 서울에서는 교파를 초월한 개신교 단체인 ‘대한기독교구제회’가 조직되었고 7월 3일 대전에서 목사 한경직이 앞장서서 ‘대한기독교구국회’를 만들었다. 이들은 남한 지역 30개 도시에 지부를 설치하고 국방부·사회부와 협력해 선무와 구호, 방송, 의용대 모집 등 반공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이들은 ‘선무공작대’를 조직해 남한 전역에서 활동했으며 ‘기독교 의용대’라는 단기 군사훈련을 거쳐 전선에 배치되기도 했다. 기독교 지도자와 신자들은 단순한 참전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을 합리화하며 정당성을 부여했다. 물론 그 논리는 종교적인 것이었다. 특히 한경직은 인천상륙작전 당시에 대한기독교구국회 회장으로서 군복을 입고 참여하는 등 맹활약을 했다.

반공은 곧 친미를 의미하고 친미는 곧 친기독교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6·25 전쟁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렇다면 기복은 이에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전쟁 중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도 복이었겠지만, 죽을 염려는 피한 전후의 잿더미에서는 좀더 현실적인, 즉 물질적인 복을 구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수단은 여의치 않았다. 기복 신앙은 전후의 잿더미와 비교되어 엄청난 풍요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는 미국을 닮고 자본주의 정신에 투철해지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미국에 대한 동경과 숭배, 물질에 대한 한의 종교적 표현이 바로 기복 신앙이었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기복 신앙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성격마저 갖게 되었다.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특별한 한국의 기복 신앙은 마찬가지로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특별했던 한국의 역사적 상황이 낳은 산물이었다.

『한국일보』 창간과 기독교방송 개국

1954년 6월 9일 공식적으로 상업주의를 표방한 『한국일보』가 창간되었다. 이 신문은 창간호 사설에서 ”‘리얼리즘’에 입각한 상업신문의 길을 개척하여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일보』의 사주는 은행가 출신으로서 2년 동안 『조선일보』 사장을 지냈던 장기영이었다. 그는 탁월한 경영 능력을 발휘해 그가 『조선일보』를 맡은 후 1년 동안 발행 부수는 350%가 늘어났고, 지대 수입은 640%, 광고 수입은 518%가 늘어났지만, 그의 개성이 강한 운영 방식과 독자적인 영향력 구축이 방씨 일가와 갈등을 빚어 임기의 반도 지나지 않고 중도 퇴임했다. 장기영은 『조선일보』를 그만둔 지 2개월도 안 된 시점에서 경영난을 겪고 있던 『태양일보』를 인수해 『한국일보』를 창간했다. 장기영은 국내 최초로 1954년 8월 1일 기자 제1기 6명을 공채한 이후 정기적으로 기자를 공개 채용해 다른 신문사에 이러한 관행을 퍼뜨렸다.

1954년 12월 15일에 첫 전파를 발사한 기독교방송은 한국 최초의 민영방송이 되었다. 원래 기독교방송은 1949년에 정식으로 방송국 설립 승인을 받았으나 전쟁으로 설립이 중단되었다가 1954년에 다시 설립 허가를 받아 개국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방송의 국장은 미국인 선교사 감의도였다. 기독교방송의 탄생은 감의도가 미국 선교 본부에서 5킬로와트 송신기와 부속 일체를 발주 받고 방송국의 운영에 소요되었던 모든 자금은 미국 뉴욕에 있는 기독교단체 ‘라디오, 시각 교육 및 대중 커뮤니케이션 위원회’의 원조를 받아 이루어진 것이었다. 정순일은 “기독교방송이 청취자의 환영을 받은 것은 우선 그 깨끗한 음질이었다. 국영 KBS가 쥐꼬리만 한 예산으로는 구할 수 없던 LP판을 미국에서 기증 받아와서 틀어제끼니 당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전쟁 미망인의 타락을 막아라

1957년 10월 말 현재 55만 5,000여 명으로 추산되는 ‘전쟁 미망인’에 대한 세간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의 피해자였지만, ‘미망인’이라는 단어의 부정적인 의미가 시사하듯이 그들의 타락 가능성만을 염려하는 사회적 담론이 무성하게 일었다. ‘과부의 재가 허용’은 1894년 갑오개혁에 의해 제도적으로 보장되었지만 1950년대까지도 이른바 ‘미풍양속’에 어긋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정충량은 월간 『여성계』 1955년 9월호에 쓴 글에서 “동족 사이의 난륜은 더 큰 사회 범죄의 온상”이며 “정욕을 참지 못하려면 차라리 개가하는 편이 훨씬 떳떳하고 명랑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전쟁 미망인의 위험한 성을 재혼을 통해 안정시키자고 주장했다. 정충량은 성공 사례를 거론하면서 자녀가 있더라도 전쟁 미망인의 재혼이 가능함을 역설했다.

1955년 12월 10일 서울 중앙극장에서 한국 최초의 여자 감독 박남옥의 「미망인」이 개봉되었다. 이 영화는 미망인이 거센 세파를 헤치고 살아간다는 내용이지만, 역설적으로 미망인이 수절하며 거센 세파를 헤쳐나가는 게 매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소설가 장덕조는 월간 『여원』 1956년 3월호에 쓴 글에서 ‘자녀를 가지지 않은 미망인’은 연애를 하거나 재혼을 할 것을 인정하거나 권장하자고 주장하면서도 ‘자녀가 있는 미망인’은 연애나 재혼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모성의 보호와 모권 확립의 문제, 즉 자녀가 받게 될 심리적 충격과 가정교육 등을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전후 사회가 ‘전쟁 미망인의 타락을 막아라’고 외쳐대는 선전·선동으로 얻고자 했던 것은 결국 ‘강한 어머니’의 탄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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