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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들어가는 글
6 축시 | 비누 4 _ 조현민 8 포토 에세이 | 하늘에서 엄마가 보내온 편지 제1부 하늘아, 하늘아 16 감자 혹은 감재, 우화羽化를 꿈꾸다 20 뜨개질 조끼 22 깍두기 세상 26 라면 먹을 때면 29 학교 신문 [영서] 33 시장, 꽃. 사춘기 38 이소離巢 45 연천 51 낡은 리어카 57 네, 이병 이만수 63 푸른마을 2단지 66 꽃상여 71 나의 소중한 첫 직장 74 ‘하늘이’에게서 수필을 배운다 82 『시』 너에게 2 - 곁에 선 사랑 제2부 너덜겅에 흩뿌린 씨앗처럼 86 드레드레 94 봄 뻐꾸기와 쑥버무리 98 낙엽 위에 서다 102 초가을 단상 105 언어言語 캐기 112 일월의 어떤 종種 117 올공조공 서천별곡舒川別曲 122 비긋는 어느 여름 날 127 오래된 현재의 사랑을 위하여 134 『시』 너에게 10 - 사랑의 끝은 꽃, 처음 그랬던 것처럼 제3부 발맘발맘 따라붙고 138 오감산행五感山行 144 쇠똥구리 철학 148 죽방멸치의 유혹 153 남해, 해를 품다 161 떵긋떵긋 군산별곡群山別曲 167 『시』 봉선지 물버들길 제4부 진한 소묘로 나를 남겨두고 172 꽃 175 태좌 180 기다림의 미학 183 性에 대하여 188 수필, 나를 데생하다 192 『시』 살아 보니 8 - 어데 살만하더이까 제5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하나 196 특강(1) : 수필 이론(작가를 위한 수필 작법) 196 제1강. ‘수필隨筆’이란? 198 제2강. ‘잘 쓴 수필’과 ‘좋은 수필’ 202 제3강. ‘좋은 수필’의 요건 10가지 - “정답노트” 204 제4강. 수필 쓰기 4단계 절차 206 제5강. 수필의 구성 210 제6강. 수필의 분류 - 서술 방식에 따라 212 제7강. 수필 쓸 때 하지 말아야 할 것 10가지 - “오답노트” 214 제8강. 수필의 주제, 첫 문장, 제목, 소재 217 제9강. 자전적 수필(기록 수필) 219 제10강. 기행 수필 221 제11강. 묘사의 기술 10가지 223 제12강. 최근 신춘문예 수필의 특징 225 제13강. 주석 - 좋은 말 (순수 한글) 뜻풀이 231 특강(2) : 수필 이론(독자를 위한 수필 감상) 233 특강(3) : 한국 수필가와 주요 작품 소개 237 특강(4) : ‘K-수필(한국 수필)’의 특징 238 『시』 가을엔 240 『낭송시』 어느 시골 교회와 한 소녀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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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혹은 감재, 우화羽化를 꿈꾸다
살짝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눌러보니 손끝이 쑥하고 빨려 들어간다. 매끈했던 표면이 쭈글쭈글한 화성 표면처럼 돋을새김이 되어 있다. 먹을 수는 없을 것 같고, 그렇다고 그냥 버리기는 좀 아깝다. 얼토당토않는 일이었다. 못난 것이 듬성듬성 뿔이 나와 있었다. 스멀스멀 고약한 냄새까지 나는 듯했다. 아껴둔다는 것이 도리어 못 쓰게 된 꼴이라니, 며칠간 나의 무관심과 돌봄 부족을 탓해 무엇 할까.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잠시 망설였다. 어릴 적 전라도 위쪽 마을에서는 ‘감자’를 ‘감재 혹은 하지마’라고 불렀다. 하지만 나는 붉은 흙냄새 풀풀 나는 그 토속적인 말 대신에 한사코 또박또박 잘게 끊어지는 ‘감. 자’라는 서울말을 사용했다. ‘감자 혹은 감재’ 친구들 사이에서 볼품없고 별반 존재감 없는 녀석을 그렇게 놀렸다. 그랬다. 층층이 물려받아 낡을 대로 낡은 옷에 제조원 없는 싸구려 운동화, 동글동글 조막만 한 얼굴에 울퉁불퉁 고르지 못한 피부, 어느 것 하나 부르주아(유산계급有産階級 티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고만고만한 아이였다. 성깔은 또 어떤가. 달다 쓰다 도드라져 유별나지 않고, 맵다 짜다 무섭게 성화 한번 낼 줄 모르는 본디 유하고 슴슴한 감자 같은 맛에 동네 친구들로부터 무시로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제풀에 토라진 날이 있었다. 감자에 제대로 뿔이 난 꼴이라니! 쌩하니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잔약한 성격에 무슨 용기로 그리했는지 무슨 까닭에 그리했는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오래전 일이지만, 그날 남겨진 친구들은 골키퍼 없이 흐지부지 축구를 끝냈을 것이고, 술래 없는 술래잡기 놀이를 해름참도 되기 전에 이례적으로 일찌감치 갈무리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계집아이라면 몰라도, 사내는 모름지기 다부져야 한다.’며 툭툭!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형제들은, 형과 누나들은 그런 모습을 뜯어진 창호지 틈 사이로 훔쳐보면서 마치 일기장에 꾹! 일제히 빨간 도장 남발하는 초등 선생님처럼 ‘참 잘했어요!’ 하고는 자기들끼리 희희낙락喜喜樂樂 한바탕 웃어넘겼을 것이다. 감자는 추운 겨울 벼룩잠에 구공탄 구멍 맞추느라 눈물 꽤나 흘렸을 지극히 서민적인 작물이 아닐 수 없다. 어머니는 재래시장이 파할 때쯤, 으레 깨어지고 싹 난 감자가 소쿠리에 남아있기를 기다려 은근슬쩍 떨이로 사 오시곤 했다. 애옥살림에 깔밋하고 반듯한 것은 그마저도 지위가 높아 함부로 바라보기 버거운 시절이었다. 양은 냄비에 삶아 서너 개 주워 먹으면 한 끼 군입정 거리가 되었다. 두껍게 잘라 기름에 바삭하게 튀기면 휴일 요깃거리가 되기도 했다. 가늘게 채를 썰어 밀가루에 얇게 부치면 명절날 친척들 술안주가 되었고, 조금 특별한 날에는 하다못해 밑반찬으로라도 손색이 없었다. 참감자라고 하는 고구마처럼 정열적으로 달지 않은 터수에 쓰임새 하나만큼은 그나마 많아, 시렁 위 소쿠리에 고봉밥처럼 수북하게 담겨 시끌벅적 살았다. 알이 크고 작은 감자 닮은 여덟 형제들로 늘 왁자지껄한 소쿠리였다. 대나무 살 삐져나와 금방이라도 뚝! 하고 부러질 것만 같은 낡은 집. 하지만 그곳은 겨울 철새, 검은 옷 덕지덕지 걸쳐 입은 가마우지 한 무리가 한 시절 머물다 떠난 둥지처럼 담양 했고, 성근 나뭇가지 사이로 빗물 들고 찬바람 새어 들어올 만큼 엉성할망정 아늑하였고, 그래서 시린 그리움으로 남았다. 토라지지 않을 만큼 티격태격 작은 싸움을 하기도 했다. 부스럭부스럭 과자봉지 주둥이에 손톱 끝 까맣게 때 낀 손 서로 먼저 욱여넣으면서 까르르 웃기도 했다. 가끔은 둥지 밖 세상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 한 발 살짝 내딛는다는 것이 그만 시렁 아래로 떨어지기라도 할라치면, 어느새 알아챈 어머니가 세상 가장 크고 부드러운 손을 쭉 내어뻗어 제자리로 올려놓기도 했다. 그렇게 누나와 여동생, 형 그리고 나의 어릴 적 한때는 지나갔다. 뿔난 감자를 통으로 땅에 묻는다. 물컹물컹 고약한 냄새가 나건 말건 그냥 그 채로 흙 속에 파묻는다. 땅이, 대지가, 자연이 스스로 치유하고 키워내는 생명의 힘을 생각한다. 번데기가 우화羽化해 나비로 다시 태어나듯, 제아무리 우유부단한 사람일망정 뿔이 나면 힘껏 내지르는 한목소리는 있다. 제 스스로 썩은 흠결을 도려내고,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뿔 같은 싹을 어루만지고 거두어들여 신선한 눈엽嫩葉으로 새롭게 탈바꿈할 만큼의 잡도리는 저도 나도 가지고 있다. 나는 믿는다, 내 안에 존재하는 감자 혹은 감재의 지극히 작고 못난 그러면서도 세상 가장 위대한 생존의 힘을. 뜨개질 조끼 코바늘에 뜨개용 실을 감고 떠줄 코의 머리에 바늘을 넣는다. 일명 ‘한길 긴뜨기’를 하는 손놀림이 제법 빠르다. 손끝이 맵다고 해야 할지, 눈썰미가 좋다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실과 시간 나이 지긋한 선생님의 간단한 시범을 솜씨 좋게 따라 하는 Y의 뒷모습이 내 누나를 닮아있다. 웅숭깊은 성격만큼이나 넓은 등판이 나이 어린 동생들을 두남두는 착한 누나의 그것처럼 무척이나 따듯하게 느껴진다. 70년대 6학년 초등 교실 풍경은 그랬다. 사내아이들은 장도리로 나무에 못을 박았다 빼거나, 얇은 합판을 톱으로 자르는 등 그 당시 실생활에 필요한 거칠고 강한 일을 배운 반면에, 계집아이들은 형형색색 고운 실로 비교적 간단한 목도리 같은 것을 짰다. 대체로 손방인 아이들은 그 정도에서 멈췄지만, Y처럼 잔재비가 있는 아이들은 조끼 같은 난도 높은 것을 만들기도 했다. 남녀의 구별된 역할이 교실 안팎에서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던 시절에, ‘남녀 평등’같은 어려운 말 자체가 생경한 사춘기를 보낸 우리는 교정 한쪽 양지바른 곳에 다소곳하게 핀 키 작은 채송화처럼, 그저 그렇게 순박하고 아름다웠다. 4등분으로 접힌 회색 조끼가 두툼하다. 내민 손등이 우유 빛이다. ‘곧 닥칠 추위에 요긴하겠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스스럽게 내민 Y의 손끝의 작은 떨림이 보였다. 발그레한 얼굴, 여짓거리는 입술에 살짝 내비치는 미소가 열적다. 집에서 막둥이로 자란 내 작은 체격을 걸리버 여행기 동화 속 거인국 어린이의 그것쯤으로 본 것인지, 아니면 정성껏 만든 것이니 소중하게 두고두고 오래 잘 입으라는 당부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X-large 사이즈쯤 되는 커다란 그 조끼를 졸업 후 중학교 3년 내내 입고도 남아 고등학교 1~2학년 때까지 계속 입었으니, 변변한 옷가지 하나 없던 시절에 다소 귀꿈맞을망정 요긴하게 쓰인 셈이었다. 하지만, 무던히도 긴 세월 나를 따듯하게 감싸준 뭉근한 우정이 아닐 수 없다. 결코 척척한 사이는 아니라고 여겼었는데, 어쩌면 그 뜨개질 조끼가 Y에게 있어서 만큼은 특별한 무엇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지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행방불명이 된 그 조끼의 안위가 궁금하다. 걱실걱실하지 못해 슴벅슴벅하기만 하면서 그때 미처 해주지 못한 오사바사한 말을 지금이라도 해줘야겠다. “얘, 발라맞춰 하는 말은 아닌데, 그 조끼 듬쑥하니 맨드리가 잘 나더라. 잘 입었어. 고마워” 깍두기 세상 우리들 중 공을 제일 못 차는 친구가 늘 골키퍼 장갑을 꼈다. 발재간 없고, 발도 느리고, 머리까지 쓸 줄 모르는, 무엇보다 11명 축구 규칙을 준수해야 하는 까닭에 어쩔 수 없이 끼워 넣을 수밖에 없는 깍두기. 그랬다 골키퍼는 늘 깍두기이었다. 나는 비니시우스 주니오르, 이강인만큼은 아니지만 발재간도 제법 있었고, 박지성, 양민혁 만큼은 아니지만 발도 빠른 편에 속했고, 머리는 비어호프 클로제, 최순호 아니면 김민재…… 어쨌거나 날아오는 공에 이마를 맞추기는 했으니, 골키퍼 아니 깍두기는 면할 수 있을 정도의 선수(?) 이었다. 친구들은 나를 주로 레프트 윙에 세웠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내가 친구들 중 달리기를 제일 잘해서라기보다는 센터링을 적시에 올려줄 줄 아는 축구 센스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어디로 날아가 떨어지던 보내긴 보낸다!’는 배달의 민족정신. 그리고 오른발잡이라는 점도 한몫(!)을 했다. 그 이야기는 친구들 대부분이 고만고만한 빠르기였고, 내가 왼발로는 슈팅을 전혀 날릴 줄 모르는 잼뱅이라는 씁쓸한 뜻이기도 하다. 손흥민 선수가 EPL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순간 스피드가 빠르고 특히 ‘양발잡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나에게 레프트 윙이라는 주전 자리도 감지덕지한 보직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날 느닷없이 깍두기 신세가 되고 말았다. 늘 골키퍼 역할을 도맡아 하던 친구가 엄마 심부름으로 급하게 호출을 받아 집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누군가는 그 역할을 대신해야 했는데, 모두가 하나같이 깍두기는 하기 싫어하는 눈치였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를 대비하여 조상들이 만들어 놓은 편리하고 강력한 해결책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가위바위보다. 결국 내가 골키퍼 장갑을 집어 들게 되었다. ‘왼발만 잼뱅이가 아니라 그것마저도 잼뱅이이었다니!’ 축구에서 공격수 자리 중 하나인 레프트 윙은 무엇보다 빠르기가 생명이다. 그런 내가 바라보는 운동장과 흘근거리는 느림보 거북이, 한낱 깍두기에 불과한 골키퍼가 바라보는 그것은 전혀 다른 세상임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레프트 윙인 나는 늘 바빴고, 90분이 모자랐다. 복닥거리는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친구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에, 한시라도 빨리 그들 중 최선의 누군가를 선택해야 했고 정확하게 패스를 해 주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늘 마음을 급하게 만들었다. 수묵화 속 한쪽 여백처럼 넓게 탁 트인 빈 공간을 쳐다볼 여유를 조금도 가질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이 패스를 해야 할 타이밍인지, 아니면 호기롭게 공을 몰고 적진 안으로 파고 들어가야 할 골 찬스인지 제대로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골대 앞은 우리 편 공격수와 상대편 수비수가 늘 한데 엉켜 바글대기 마련이다. 머릿속으로는 그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정작 공을 잡으면 그런 아수라 세상 속 가장 깊숙한 곳으로만 파고들고, 허우적허우적 빈손짓만 연거푸 일삼다 제풀에 꼬꾸라져 빼앗기기를 밥 먹듯이 했다. 애당초 느긋한 마음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그나마 조금 생길라치면 ‘여기, 여기!’하는 친구의 말 한마디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기 일쑤였다. 서둘러 처리한 공이 데굴데굴 굴러가 상대편 발밑에 안착하고 만다.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아 헛발질을 한 탓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돌아서 고작 내뱉는 말이 ‘우리 팀은 수비가 약해서 내가 공격을 제대로 할 수가 없어, 뒤가 불안하니 공격이 제대로 되겠어!’이었으니…… 하지만, 골키퍼가 바라보는 운동장은 달랐다. 내 편이 우르르 상대편 진영에 모여 한창 공격을 주도하고 있을 때에는 눈앞에 텅빈 운동장이 마치 드넓게 펼쳐진 모래사장처럼 한가로워 보였다. 여유롭게 골대에 살짝 몸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불난 집 불구경하듯 바라볼 수도 있어 좋았다. 레프트 윙의 삶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호사가 아니던가? ‘나는 90분 내내 뛰어다니기 바빴는데, 그동안 이렇게 놀면서 거저먹기 식으로 경기를 했다니!’ 억울한 생각도 잠시뿐 한눈에 운동장이, 단박에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 발 물러서 바라보면, 나를 제외한 21명 모두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적나라하게 알아챌 수 있다. 지금 어디가 빈 공간인지, 어디로 공을 보내주어야 골 찬스가 생길 수 있는지, 누가 오늘 컨디션이 좋은지 혹은 나쁜지, 하다못해 운동장 바닥면이 어디가 고른지 혹은 튀어나와 울퉁불퉁한 상태인지까지 훤히 파악할 수 있다. ‘역시 바둑이든 축구든 훈수가 고수야!’라고 코웃음을 치면서…… 가끔은 골키퍼 노릇을 해 보는 것도 필요한 것 같다. 아니 자청해서라도 골키퍼가 되어보는 것도, 얼렁수를 부려 가위바위보에 스스로 져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비록 늘 뛰댕기기 바쁜 레프트 윙 같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지만,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 호기롭게 골포스트에 몸을 기댄 채 세상을 관망할 수 있는 깍두기가 한 번쯤 되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특강(1) : 수필 이론 (작가를 위한 수필 작법) 제1강. ‘수필隨筆’이란? (1) 정의: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인생, 자연 또는 일상생활에서 나 자신의 느낌이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붓 가는 대로) 쓴 산문 형식의 글. [개념] * 수필은 사실 문학이다. - 진솔한 삶을 담아라. * 수필은 사유 문학이다. - 성숙된 사유를 바탕으로 하라. * 수필은 사색 문학이다. - 삶(경험)을 의미화 해라. [참조] 운문 對 산문 - 운문 : 시, 시조, 동시, 디카시 等 - 산문 : 수필, 에세이, 수기, 일기, 감상문, 기행문, 소설, 희곡, 포토에세이 等 [특징] ‘붓 가는 대로’의 함정 수필에도 구성이 있다. 하지만 그 치밀한 짜임새가 너무 자연스러워 독자가 느낄 수 없기 때문에 ‘붓 가는 대로 쓴’것처럼 보일 뿐이지, 절대로 구성이 없는 글(붓 가는 대로 쓴 글)이 아니다. (2) 종류 : 중수필, 경수필 - 내용(소재, 주제)에 따라 가. 중수필: 사회적 수필 - 에세이essay - 개념: 주로 무거운 내용을 담고 있는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수필 - 특징: 사회적, 비개성적, 비평적, 논리적, 과학적 / 평론적, 철학적 나. 경수필: 개인적 수필 - 개념: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을 소재로 가볍게 쓴 수필 - 특징: 감성적, 주관적, 개인적, 정서적 / 문학적 (3) 경수필의 분류: 기록 수필(자전적 수필), 기행 수필, 수상 수필 가. 기록 수필: 개인적 소소한 일상의 경험을 기록하듯 쓴 수필 = 자전적 수필 cf.수기手記: 자신이 직접 겪은 생활이나 체험을 솔직하게 쓴 글. 나. 수상 수필: 개인적 경험과 사물에서 얻은 삶의 철학적 의미를 진솔하게 쓴 수필 다. 기행 수필: 여행을 통해서 얻은 어떤 감정이나 교훈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수필 (4) 수필이 갖추어야 할 2 가지 필수 요소 : 철학성, 문학성 가. 철학성: 생각, 성찰, 깨달음 ― 비중 약10~20% 나. 문학성: 시적이고 소설적인 표현 ― 비중 약80~90% 제2강. ‘잘 쓴 수필’과 ‘좋은 수필’ *‘잘 쓴 수필’이라고 해서 반드시 ‘좋은 수필’이 되는 것은 아니다. (1) ‘잘 쓴 수필’이란? 잘생긴 사람과 같다. → [형식미]를 잘 갖춘 수필이다. 즉, 장인적인 기교(문장력, 신선한 비유, 좋은 구성)가 돋보이는 수필이다. (2) ‘좋은 수필’이란? 정감 있고 인품 좋은 사람과 같다. → [내용미](품격: 내용의 질)를 잘 갖춘 수필이다. 즉, 감동을 주고, 여운을 남기는 수필이다. (3) ‘좋은 수필’의 사례 가. 시적 수필詩的隨筆: 생활과 자연에 대하여 논하면서 주정적이거나 주관적인 표현을 통하여 문학적 감각을 가중시킨 수필. 즉, 은유와 운율이 살아있는 수필 예 : 유안진 [지란지교를 꿈꾸며], 이효석 [낙엽을태우면서] 유용주 [아름다운 것은 독한 벱이여], 공지영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신달자 [나를 아프게 하는 봄], 민태원 [청춘예찬] 김만년 [노을을 읽다], 안희옥 [그 골목의 필경사들] 이만수 [시장, 꽃. 사춘기], [초가을 단상], [태좌], [낙엽 위에 서다], [봄 뻐꾸기와 쑥버무리], [가을 읽기], [꽃]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 유안진 [지란지교를 꿈꾸며] 낙엽 타는 냄새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갓 볶아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잘 익은 개암 냄새가 난다. (중략) 어두컴컴한 부엌에 웅크리고 앉아서 새빨갛게 피어오르는 불꽃을 어린아이의 감동을 가지고 바라본다. - 이효석 [낙엽을 태우면서] 봄이다. 아스팔트를 밟아도 그 아래 생명이 아파할 것 같아 조심스런 발길을 그러나 지치도록 걸으며 밤에는 편지라도 쓰고 싶다. - 신달자 [나를 아프게 하는 봄] 저녁노을은 해를 배웅하는 이별의 손짓이다. 해가 저물면 지상의 모든 사물들은 어둠 속으로 돌아간다. (중략) 그래서 저녁노을은 서천으로 흐른다. 하루해를 끌고 오느라 발뒤꿈치가 온통 피멍으로 붉다. - 김만년 [노을을 읽다] 봄 꽃잎이 지고 없는 교정은 뜨거운 열대우림을 향하여 달음박질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조금은 숨이 막힌다. (중략) 잡풀 우거진 묵정밭에서 꽃나무 한 그루가 온전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잔가지 끝에 날카로운 가시 하나쯤 달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을까? 쓸어내린 어린 나의 가슴 어딘가에서 질긴 환삼덩굴 한 줄기가 옹골차게 잡히곤 했다. -이만수 [시장, 꽃. 사춘기] 불에 달군 맷돌 같은 태양이 가뭇없이 빛을 잃을 때쯤, 부지런한 농부가 흘린 땀방울이 논틀길을 타고 넘어 호숫가 깊은 곳에 가닿을 때쯤, 가을은 그제야 자울자울 자욱했던 안개를 걷어내고 앙증맞은 벼 이삭 위에 누런 쌀알 꽃 몇 알을 내비친다. - 이만수 [초가을 단상] ‘ㅏ’와 ’ㄹ’의 절묘한 화음 때문일까? 가을, 참 양지바르고 리듬감 넘치는 계절이다. (중략) 자발없이 연달아 발밑에 몸을 낮추는 나만의 낙엽이 허허롭다는 생각조차 억지로라도 버리려 한다. - 이만수 [낙엽 위에 서다] 꽃을 본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라는 나태주(1945~현재) 시인의 시구와 달리, 이른 아침 눈 비비며 마주하는 이슬 머금은 꽃은 한눈에 보아도 아름답다. - 이만수 [꽃] 나. 위트 있는 수필: “위트 → 변주” * 위트: 독자를 즐겁게 하기 위해 고안된 문학의 요소(역설, 비유, 문체) * 변주變奏: 어떤 주제를 바탕으로, 소재, 형태, 방식을 변형하여 표현하는 것 예: 최원현 [햇빛 마시기] 이만수 [태좌], [언어 캐기], [性에 대하여] “마셔보세요!” 다시 독촉을 해왔다. “오전에 제가 한 번 마셨으니 가득 차 있지 않을 지도 몰라요.” 컵을 입으로 가져가 ‘훅’하고 들이마셔 봤다.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도 같았다. “햇빛이에요.” 그녀의 설명이었다. - 최원현 [햇빛 마시기] 태좌가 있는 식물은 겉과 속이 다르다. 겉만 봐서는 그 속을 알 수 없다. 어쩌면 사람도 그런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성글고 그래서 도려내야만 할 것 같은 단점 투성이인 누군가에게도, 그만의 특별한 장점이 하나 둘쯤 내면에 숨겨져 있다. (중략) 어쩌면 겉과 속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좀 더 인간적인 모습에 가까운 것이라면, 나는 주저 없이 태좌를 닮고 싶다. - 이만수 [태좌] 오늘도 나는 캐고 있다. ‘캔다.’라고 하기보다는 그냥 ‘얻는다. 혹은 주워 담는다.’ 라고 하는 말이 좀 더 솔직하고 적확한 표현인 것 같다. (중략) 김주옥 작가의 장편소설 [천 개의 바람이 되어]에서 ‘해지, 너테, 표조, 또바기’ 같은 비교적 짧은 말들과 ‘주억거리다, 아리잠직하다, 핍진하다’ 같은 긴 말들을 캐내어 바구니에 담는다. - 이만수 [언어 캐기] 나라는 사람은 대놓고 아침 댓바람부터 다른 성性을 말하기엔 지나치게 생뚱맞거나 적어도 되바라지지는 않았다. (중략) 문제는 ‘만’이다. ‘민’과 혼동된다는 시각적인 단점도 있지만, 지극히 촌스럽고 반지빠른 글자가 아닐 수 없다. - 이만수 [性에 대하여]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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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너에게 사랑은 뭐니? 나는 ‘가을’이라는 두 글자를 생각할 때마다 억지로라도‘쓸쓸함, 외로움’이라는 궁핍한 뜻은 윗목으로 밀어내고,‘풍요로움, 감사함’이라는 넉넉한 의미를 끌어당겨 따뜻한 곳에 가져다 놓으려 애쓰곤 한다. (중략) 기왕지사 피할 수 없다면, 구질구질하게 굴지 않고 당당하게 마주 하고픈 의지일 테다. ― 수필 [낙엽 위에 서다] ‘아름답다’라는 표현보다 ‘예쁘다’라는 말이 나는 좋다. 왠지 가식 없고 솔직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모두 다’라는 말보다 ‘죄다’라는 말이 좋다. (중략) 촌스러움이 나의 언어에도 적나라하게 스며있는 것일까? 나는 겨우 61kg 작은 몸에 애타게 축적된 나만의 원시적인 언어의 들꽃 같은 느낌을 사랑한다. 마당보다는 ‘뜰’이, 친구보다는 ‘벗’이, 새벽 무렵보다는 ‘새벽녘’이, 가을바람보다는 ‘갈바람’이 그리고 어머니보다 ‘엄마’가 더 쓰기 편한 것도 아마 그런 까닭이 아닐까 싶다. ― 수필 [언어 캐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