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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의 철둑길에도 피어 있다
꽃들은 이미 와 버린 길을 인간인 나는 스무날을 넘게 걸어 도착했다 남은 열흘을 더 가야 하는데 꽃들은 이미 가서 피어 있으리라 개성이나 평양 아니 신의주까지 가서 이미 꽃 피는 한 세상을 이루고 있으리라 통일이나 화합, 평화 따위로 표현되는 인간의 말이 필요 없는 세상에 꽃들은 이미 하나를 이루고 있으리라 --- p. 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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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으로 라면을 먹고 우리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어찌보면 똑같은 것 같은 철길, 그러나 걸을 때마다 달라지는 길을 걷다보니 숨이 턱을 향해 차올랐다. '소록도 가는 길' 이라는 부제가 붙은 한하운의 <전라도 길>이 떠올랐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룸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물집 든 발로 걷는 자갈길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지만, 어찌 발가락이 잘리는 그 고통에 비할 것인가. 그 고통 앞에서도 서툰 엄살 없이 맑은 서정의 시를 써내었던 그 분 앞에서 나는 시인도 아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그러나 나는 그분의 시를 바꾸어 베끼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가도 가도 타는 자갈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 p.3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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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랑이 돋아나는 황토 언덕에
그 사람 미소만 싱싱하게 살아나고 댓잎에 스치는 바람소리에도 행여 그 사람의 발소리인가 가슴 저리며 한 사람을 기다려 본 적이 있는가 햇살만 내렸다 가는 간이역에서 쑥부쟁이 개망초, 고무줄로 묶은 들꽃다발을 들고 기차는 가고 햇살 뜨거운데 뿌리 없는 꽃처럼 시들어 가며 발만 동동 굴러 본 적이 있는가 구멍난 나뭇잎이 내 마음 같아 커다란 낙엽 위에 그리움을 적으면 편지에는 온통 그 사람의 이름 뿐 몸보다 먼저 마음이 스산해서 지는 해만 한사코 바라본 적이 있는가 곱은 손으로 눈을 뭉쳐 그리운 사람의 얼굴을 만들었다가 몇 번을 부숴 버리고 그래도 다시 눈을 뭉쳐 흘러내린 눈물로 얼음처럼 단단한 눈사람을 만들며 한 사람을 오래도록 기다린 적이 있는가 --- p.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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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은 ‘우리의 소원’이 아니라 본능이다
한국 최초의 철길도보 여행. 그것은 무려 한 달이 걸린 철길 대장정이었다. 목포에서 문산 그리고 임진각까지. 그들은 그들이 갈 수 있는 철길의 최남단에서 출발하여, 최북단까지 걸었다. 여행을 하는 동안 그들의 가슴엔 통일의 염원이 영글어 갔고, 그 여행이 끝날 무렵, 경의선 철도가 복원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덕에 그들은 작은 승리의 기쁨까지 누릴 수 있었다. 철길 대장정을 시작할 때 그들이 내세웠던 구호가 ‘경의선 복원’과 ‘통일’이었기 때문이다. 경의선 복원은 휴전선을 (일부나마) 없애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의 발로 오갈 수 있는 길이 뚫리는 것은 겨레의 숨통이 열리는 것이다. 게다가 경의선 복원은 남북만의 문제가 아니다. 만주로, 러시아로, 유럽으로 뻗어 있는 철길 중 유일하게 끊어져 있는 ‘철의 실크로드’를 잇는 세계적인 사건인 것이다. 철길은 항공기나 선박에 비해 50%쯤 운송비를 절감할 수 있다. 물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의 견해에 의하면 북의 SOC개선 사업에는 72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 비용을 충당하는 데는 다양한 방법이 모색되겠지만 남쪽의 자금이 직접 투자되는 것도 피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남쪽도 힘드는데 왜 북쪽에 투자하느냐고 불평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북쪽에 투자한다는 것은 남한이 북조선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된 우리의 미래에 투자하는 것이다. 통일된 땅에서 남한과 북조선은 이미 우리이기 때문이다. 목포에서 문산까지. 세계지도를 펴놓고 보면 너무나 짧은 거리이다. 하지만 그 길은 유라시아 대륙을 잇는 철의 실크로드의 관문인 셈이다. 그래서 그들의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유라시아를 잇는 그 긴 철길을 가보고자 한다. 영국에서 출발하여 신의주역 너머까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의주에서 개성까지, 아니 복원된 경의선을 따라 신의주에서 문산까지 걸어 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는 경의선 복원과 민족 통일의 염원이 담겨 있다. 통일은 결코 ‘우리의 소원’일 수만은 없다. 통일은 당위이며 본능이다. 애초에 우리는 하나였기 때문이다. 통일은 본래의 우리로 되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거짓 조국, 거짓역사, 거짓애국, 거짓 사랑 모두 버리고 참 조국, 참 역사, 참 애국, 참 사랑을 회복하는 일이다. 철길 도보여행. 사실 그것은 터무니없는 발상이었다. 위험하기 짝이 없을 뿐만 아니라, 민간인이 철길에 들어가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 최초로, 어쩌면 세계 최초로 철길 종단 도보여행을 감행했다. 목포에서 문산까지 레일의 길이로만 무려 469km. 그들이 딛고 간 침목의 갯수만 해도 대략 79만 개. 32일 동안, 두 발이 다 닳도록 그 길을 걸으면서, 시인은 펜을 무기로, 사진작가는 카메라를 무기로 분단을 고착화하려는 세력과 온몸으로 싸웠다. 목포에서 문산까지. 그들은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그 길을 걸었다. 그래서 이 책은 맨발로 쓰여진 것이다. 그렇게 쓰여진 115편의 글과 111장의 사진. 그 시작은 다분히 감상적이다. 그러나 여행이 진행되면서, 그들의 가슴속에 통일의 염원이 여물어 간다. 마침내 그들은 철도 중단점에 도착하여 분단의 마침표를 찍는다. 그리고 통일행 기차가 지나갈 내일로 가는 레일을 놓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