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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교양의 실패와 여자들의 공부론
김영민
글항아리 2025.11.17.
원제
戀愛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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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강 식당의 인문학: 거래와 환대의 윤리를 위하여
2강 해석하는 인간: 행지行知와 해석학의 실용적 전환
3강 ‘잔인하지-않기’에서 신뢰까지: 사회 윤리의 새 지평
4강 누적적 계기론: 방법, 방편, 계기, 자득, 구제
5강 개념으로 길을 열고 시로써 누리다
6강 ‘윤석열 현상’과 한국적 교양의 실패
7강 여자들의 공부론
8강 글쓰기의 인문학
9강 사상이란 무엇인가: 빚진 정신의 감사와 마음의 길

저자 소개 1

金永敏

철학자. 『서양철학사의 구조와 과학』(1991), 『동무론』(2010~) 3부작, 『집중과 영혼』(2017) 등을 썼다. 천안과 서울 등지에서 인문학 학교 ‘장숙藏孰’(http://jehhs.co.kr/)을 열어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첫 시집 『옆방의 부처』를 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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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5년 11월 17일
쪽수, 무게, 크기
256쪽 | 352g | 135*200*16mm
ISBN13
9791169094450

책 속으로

신뢰는 약속의 긴 실천에 따른 눈에 띄지 않는 열매이며, 특히 자기 명령의 체계를 지며리 지켜나가는 일관성의 실효다. 신뢰는 심리적 내용의 잡박雜駁을 넘어서려는 형식적 의지의 표상이고, 제 나름의 실력이 쌓여 있다는 기별이며, 안팎으로 비용을 줄이고 생활의 편리를 도모하는 가장 효율적인 삶의 양식이다.
--- p.25

가령 식당의 우상이라고 할 수 있는 맛집이야말로 이 비윤리의 첨병 노릇을 한다. ‘맛집’이라는 성공의 메시지 자체가 축재와 허세를 위한 반전통의 공간이며, 인문학적 감성을 거칠게 배제하고, 맛이라는 질質을 돈이라는 양量으로 환치하는 혼동이다. 인식에는 이미 평가가 스며 있고, 평가에는 이미 개입이 들어갔으며, 각자의 개입에는 수많은 인연의 묵힘과 겹침이 담겨 있는 것이다.
--- p.30

행함과 앎은 분리될 수 없으나 그 관계는 인과를 이루지 않는다. 그 관계의 진실이란 게 기술적 실효성을 보증할 수는 없는 상관성일 뿐이므로 싯다르타는 아이러니스트의 태도에서 고행을 부정했지만, 어쨌든 그가 매양 수행과 정진을 강조한 것은, 다시 인과의 보장이 없는 공부길에서 그나마 유효한 상관성의 존재를 인정한 것일 테다.
--- p.37

앎은 앎과 행함을 포함하는 삶의 흐름 속에서 수많은 상호작용과 변증법적 변용을 통해 진행되는 과정일 뿐이지만, 우리는 지각의 한계와 적용의 편의성을 위해 그 흐름의 단면을 지식으로 안정화시킨다. (…) 하나의 문장으로 고정시킨 진리가 가능하지 않을 때 이른바 ‘재서술’의 방식이 유효하듯이, 삶生의 행行에 의해 쉼 없이 끄달리거나 변용될 수밖에 없는 지知는 이미 운명적으로 (재)해석의 생산성에 열려 있다. 해석이라는 지식의 한계가 외려 그것의 생산성을 재촉하고 있는 셈이다.
--- p.38

생활은 실용으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으로 풀고 뚫어나가는 게 요령이다.
--- p.49

잔인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마땅한 출발점입니다. 4.3 앞의 이승만처럼, 5.18 앞의 전두환처럼, 세월호 앞의 박근혜처럼, 혹은 이태원 앞의 윤석열처럼 (잔인)해선 안 된다는 말이지요. 남을 돕는 것에는 지혜와 수완이 필요하지만, 잔인하지-‘말기’에는 동그란 마음 하나만 있으면 족하므로 사회적 윤리의 하한을 이룹니다.
--- p.55

그러므로 모든 관계는 최소주의적으로 접근하는 게 현명하고 지속 가능하다. 이 최소한의 요건 중 가장 보편적으로 적용하면서도 구체적인 게 바로 ‘잔인하지-않기’다. 그것은 사랑의 윤리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랑과 쾌락의 관계는 조화나 절제로써 운용하는 게 쉽지 않아 마치 내리닫는 눈사태처럼 낭패와 불행을 향해 미끄러지면서 즐거워하는 법이다.
--- p.65

처음을 되짚고 그 기억의 단계와 계기에서마다 조심하려는 태도는, 행위의 실수나 선입견의 오류 따위에 대처하려는 점에서 재부팅과 유사하긴 하다. 그러나 사람의 정신은 컴퓨터가 아니고 생각은 계산이 아니므로 이러한 조심 역시 재조심, 재재조심……하는 식으로 어느 불가능한 영점을 향해 소급해간다. 그렇더라도 사람 자신이 복잡, 치열한 과정의 개입들이므로 염결무오한 신독愼獨의 자리를 얻을 도리는 없다.
--- p.129

교양은 우선 과거와의 대화다.
--- p.163

어떤 경우에도 팔리지 않는, 강요되지 않는, 떼 지어 몰려다니지 않는 정신의 힘에 의한 작은 연대들 속에서 누림과 나눔의 새 가능성을 읽어내고 실천하는 일이다.
--- p.172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공부를 한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필경 다다미 위에서 하는 수영 연습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부길이 길어지면 당연히 자득自得이 관건이고 동인이며, 화두이자 목적이 된다. 자득이란 곧 생명체의 혈류와도 같다. 자득이 자유를 키우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 p.194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나요?’와 같은 물음을 훨씬 넘어 글은, 글쓰기는 인간론의 정수精髓를 치는 활동이며, 인간 그 자체를 초과하려는 가없는 애씀입니다. 그리고 이 애씀의 동력이 쉼 없이 엮어내는 우회, 대리, 보충, 일탈의 세속적 순례이기도 합니다.

--- p.199~200

출판사 리뷰

정신과 말의 존재인 인간은 해석의 방에서 산다
철학은 체계로의 수렴이 아닌 확산을


2강 ‘해석하는 인간’은 해석학을 가다머나 니체가 논한 학술적 맥락에서 다루지 않는다. 정신적 존재인 인간은 모든 일에 이미 해석하며 개입하고 있다. 되돌아보면 파멸로 치닫는 결정이나 문명의 정점에 올라섰던 경험들은 해석의 한 끗 차이로 인한 결과다. 텍스트는 어떤 것이든 불완전하고 애매하며, 따라서 그에 대한 해석 역시 문제적일 수밖에 없다. 해석에 임하는 가장 현명한 자세는 늘 조심하는 것인데, 저자의 이러한 해석학 역시 실용적 관점을 따른다. 해석은 인식이나 이해의 차원만이 아니라 행함과 결부되는 복합적인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행지行知’가 사태의 진상을 압축한다고 말한다. 행함行이 앎知과 이처럼 얽혀 있다면, 앎이 재서술에 의해 끊임없이 변용되듯이 해석 역시 끊임없이 다시 이루어질 수 있어 자신의 생산성을 재촉하고 있는 셈이다.

인간은 무엇보다 정신과 말로 된 옷을 존재에 걸치다시피 하며 해석의 방에서 기거하는 존재다. 하지만 편견은 덫처럼 삶에 드리워져 있고, 미망迷妄은 호흡하는 공기처럼 대기에 퍼져 있으며, 그 와중에 각 개인은 자신이 취한 이데올로기를 일방향으로 몰고 나간다. 따라서 해석을 실천의 관점에서 보려면 체계로의 수렴에서 끊임없이 벗어나며 앎을 삶으로 투과해 ‘확산’을 이뤄내야 한다. 철학이 체계화되는 순간 수행적 측면은 격하되면서 삶과 분리될 위험이 있다. 인간은 해석 한번 잘못해서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그러니 늘 기억할 것은 해석의 책임이다. 하지만 생활 속에서 대부분의 해석은 책임을 쉽게 회피할 수 있을 만큼 애매한 회색지대에 걸쳐 있다. 해석자와 텍스트, 주객 간의 상호 개입은 정도와 범위와 깊이가 측량 불가능할 만큼 한정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매사 ‘모른다’라는 겸허를 지니고 실용성의 방향으로 말길을 트면서 자기 정화의 발판을 디뎌볼 것을 권한다.

자기를 배려하고 주변을 바꿔내는 여자들의 공부

이 책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대학 바깥에서 밀도 높게 이뤄지는 여자들의 공부를 다루고 있다. 저자가 이끄는 공부 모임에서도 남자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지워나가는 사이 여자들이 들어와 기존 지형에 균열을 일으킬 만큼 존재를 키워왔다. 저자는 여자들과의 공부로 인해 자기 몸이 달라진 경험을 이전 글들에서 몇 번 이야기한 적 있는데, 8강에서는 여자들이 자기계발과 연대와 사회 변화를 향한 리좀적 활동의 가능성에 눈떠가는 모습을 다룬다. 여자들은 긴 세월 정신문화적 지형을 조형하는 자리에서 소외되어온 탓에 오히려 생활세계의 낮은 자리에서 통하는 이치와 감성에 정통해졌고, 기능적 완벽성 대신 의사소통적 타협에 능란해졌다. 여자들은 “생식이라는 진화론의 대전제를 문명 문화적 우회로를 통해 리비도적 분류로, 사랑의 힘으로 승화·번역하”며, 남자들이 전쟁 속에서 모든 것을 무너뜨릴 때조차 새로운 시작을 위한 영도零度를 예비하면서 명랑하게 웃는다.

대학 바깥의 여자들이 하는 공부는 생활과 더불어 생활 너머까지 힘겹게 엿보려는 노동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등에 남편과 아이들을 짊어진 채 몸의 제도와 버릇을 바꿔내려고 애쓰면서 공부하는 주체로 나아가고 있다. 저자는 공부란 워낙 약자들의 것이라고 말한다. 여자들은 남자보다 학습능력에서 뛰어난 면모를 보이는데, 강자-남성들이 일군 기존의 정신 지형을 바꾸려면 무엇보다 공부에 매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실용성은 강조된다. 자기 변화와 자기 구제를 위해 배운다는 것은 무엇보다 실용성의 이치를 꿰뚫는 일이다. 삶의 실용성을 체득한 역사적 존재가 바로 여자들이며, 배움에 있어 필요한 현명한 복종과 지배의 태도 속에는 늘 인문학적 감성이 번득인다. 여자들은 앞서 강조한 ‘모른다-모른다-모른다’를 몸에 체득하고 있으며, 약자적 체험의 침전과 유연성으로 각자의 공부길을 열어나간다.

장숙강 시리즈 1권에서도 몇몇 정치인을 다루었듯 이 책의 6강도 정치인들을 통해서 한국적 교양의 실패를 살펴보고 있다. 최근 종양처럼 드러난 ‘윤석열 현상’은 타자가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 사회 표면으로 떠오른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글쓰기 강의는 매번 이뤄지지만, 그 반복은 더 넓고 깊어지며 글을 쓰지 않는 이들에게 다시 글쓰기로 나아가도록 독려한다. 글쓰기는 매일 수행해야 하는 것으로, 이는 공부를 위한 도구를 넘어 인간이 희망할 수 있는 행위의 깊이를 포괄하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글쓰기에 대한 강의는 ‘사상이란 무엇인가’라는 강의로 이어지면서 공부의 더 깊은 세계를 안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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