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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_ 효(효)에서 충(충)을 꽃피운 모의장군 최대성
초암산 정기 / 돌잔치 / 을묘왜변 / 서당공부 / 대장부의 산 / 우계정 입실 충효당 / 아내 진원 박씨의 죽음 / 활쏘기대회 / 무과급제 / 훈련원 사직 열선루 회동 / 전라좌수영 지원 / 유비무환 1 / 유비무환 2 / 본영 거북선 거북선 화포 시범사격 / 왜군 침략 / 이순신의 장계 / 전선(戰船) 점고 출전 제문 / 경상도 출전 / 폭풍전야 / 옥포해전 / 부모 생각 / 2차 출전 특별휴가 / 사곡마을 가는 길 / 부모 봉양 / 3차 출전 / 연전연승 / 효(孝)와 충(忠) 5차 출전 / 싸움을 피하는 왜적 / 모의장군 / 어명이오! 보성, 흥양의병군 합동전투 / 거차포전투 / 안치혈투 에필로그 |
무염(無染), 벽록檗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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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전에서 판옥선만으로도 승리했은께 2차전에서는 대장 나으리 말씸대로 애껴둔 거북선으로 적덜 사기를 완전히 꺾어부러야겄지라. 하하하.”
1차 출전의 승전으로 자신감을 얻은 장수들이 정운의 큰소리에 모두 따라서 크게 웃었다. 화기애애한 장수 회의였다. 웃지 않은 장수는 옥포해전 중 거제도 산으로 도망치는 왜적을 추격하다가 조총의 탄환에 부상당한 최대성뿐이었다. 이순신이 눈치를 채고 장수 회의가 끝난 뒤 최대성만 동헌방에 남게 했다. “한후장은 근심거리가 있는겨?” “대장 나으리, 지가 고로코름 보이신게라우?” “우덜이 웃고 있는디 한후장만 입을 다물고만 있드라니께. 거제에서 적을 쫓다가 부상당해서 그려? 적을 가볍게 여기구 용맹이 넘치는 것두 위태로울 수 있는겨. 내가 볼 때는 한후장은 참모가 맞아. 다음 출전 때는 참모를 맡길겨.” “사실은 노환 중인 부모님을 걱정허고 있습니다요.” “고충이 있으믄 털어놔야 허는겨. 나두 아산에 겨시는 어머님 소식이 궁금혀. 낼이라두 나장을 보낼겨.” “지는 전시라 움직일 수 읎고, 성 밖 양민에게 부탁해보겠습니다요.” “그려. 얼릉 찾아봐.” 동헌을 나온 최대성은 도롱이를 걸치고 서문 밖으로 나갔다. 이순신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부모를 생각하고 있다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 pp.258-259 「부모 생각」 중에서 조선수군이 퍼붓는 한나절 이상의 화포 공격이었다. 왜선들은 한꺼번에 불타면서 불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조선수군들은 왜선을 버리고 바다로 뛰어드는 왜수군을 보는 족족 활과 갈고리로 사살했다. 한산도 바다는 왜수군들의 핏물로 번졌다. “쩌어기 적선 밑에 숨어 있다. 죽여라!” “층각에 왜놈 수괴가 있다!” 특히 중위장 순천부사 권준은 제 몸을 잊고 돌진하여 왜의 층각대선 1척을 쳐부수어 왜장을 비롯하여 왜수군 열 명의 머리를 베고 우리나라 남자 1명을 산 채로 구했다. 중부장 광양현감 어영담도 돌진하여 왜의 층각대선 1척을 쳐부수고 부상당한 왜장을 대장선으로 데리고 갔는데 말이 통하지 않고 화살을 맞은 것이 중상이므로 즉시 목을 베었으며 12명의 왜수군 머리를 베고 우리나라 남자 1명을 구했다. 뿐만 아니라 우부장 사도첨사 김완은 왜대선 1척을 쳐부수어 4명의 왜수군 머리를 베었고, 또 두 척을 쫓아가서 깨뜨리고 불태웠다. 전부장 방답첨사 이순신 역시 왜대선 1척을 쳐부수어 4명의 왜수군 머리를 베었다. 또, 좌귀선 돌격장 이기남은 왜대선 1척을 쳐부수어 7명의 왜수군 머리를 베었고, 좌별도장 윤사공과 가안책은 층각선 2척을 바다 가운데서 사로잡아 6명의 왜수군 머리를 베었다. 좌부장 낙안군수 신호는 왜대선 1척을 사로잡아 7명의 왜수군 머리를 베었고, 좌척후장 녹도만호 정운은 층각대선 2척을 화포로 당파하여 3명의 왜수군 머리를 베고 우리나라 사람 2명을 산 채로 구출했다. 우척후장 여도권관 김인영은 왜대선 1척을 쳐부수어 3명의 왜수군 머리를 베었고, 유군장 발포만호 황정록은 층각선 1척을 쳐부수어 2명의 왜수군 머리를 베었다. 우별도장 송응민은 2명의 왜수군 머리를 베었고. 흥양통장 최천보는 3명의 왜수군 머리를 베었고, 참퇴장 이응화는 1명의 왜수군 머리를 베었다. 우귀선 돌격장 박이량도 1명의 왜수군 머리를 베었고, 장수 손윤문은 왜소선 2척에 화포를 쏘고 산 위까지 왜수군을 추격했으며, 장수 최도전은 우리나라 소년 3명을 구했다. 나머지 왜대선 20척, 중선 17척, 소선 5척은 좌우도의 여러 장수들이 합심하여 불살라 수장시켰는데, 화살을 맞고 물에 빠져 죽은 왜수군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었다. 그리고 왜선을 버리고 도망친 왜수군은 4백여 명이나 되었다. 이로써 한산해전은 조선수군 연합군의 완벽한 승리였다. 다만 이전의 전술과 달리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접전한 전투였으므로 조선수군의 사상자도 다수 발생했다. 사상자 없는 이전의 싸움과는 확실히 달랐다. --- pp.319-321 「연전연승」 중에서 최대성은 본영에서 아버지 최한손의 부음을 듣자마자 이순신에게 보고했다. 그런 뒤 군마를 타고 사곡마을에 달려왔을 때는 벌써 집안 머슴들이 선산에서 산역(山役)을 하고 있었다. 유택 자리는 최한손이 생전에 풍수를 불러 정해둔 자리였고, 최대성도 두리동 형제와 함께 가본 곳이었다. 나라가 사변 중이므로 장례는 삼일장이었다. 내일이면 상여가 집에서 나가는 날이었다. 최대성 집은 본채, 안채, 별채, 충효당 등등 할 것 없이 친인척 조문객들로 북적거렸다. 가을 하늘은 보성만처럼 푸르렀고, 오후의 햇살은 대숲 깊숙이 스며들었다. 최대성은 사랑방으로 들어가 갑옷을 벗고 갑술이 가지고 온 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조문객들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빨리 갑옷을 벗었다. 노환을 오랫동안 앓다가 숨을 거둔 때문인지 두리동 형제는 생각보다 담담했다. “동상, 너무 상심마소. 날씨가 도와준 덕분에 산역이 순탄허네.” “아버님께서는 사계 중에 가실을 젤로 좋아허셨는디 하늘이 도운 거 같그만.” 인명재천인 데다 이미 예고된 별세였으므로 최대성도 두리동 형제 못지않게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다만 임종을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뼛속 깊이 비통해지는 회한은 없었다. “아버님은 본채에 겨시제?” “본채 큰방에 겨시그만.” 최대성은 본채 큰방으로 갔다. 10폭 병풍 뒤에 최한손은 깊은 잠에 빠진 듯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두리동이 와서 병풍을 한쪽으로 밀쳤다. 최대성은 엎드려 큰절을 두 번 했다. 그런 뒤 아버지 최한손에게 가까이 가서 무릎을 꿇었다. 최대성이 아버지 최한손의 손을 잡았다. 손은 가벼웠고 얼음처럼 차가웠다. 전해오는 차가운 기운이 최대성의 감정을 북받치게 했다. 최대성은 목구멍을 넘어오는 감정을 꾹 눌렀다. 잠시 후 최대성이 혼잣말을 했다. ‘아버님, 대성이가 왔어라우.’ ‘가실 때 뵙지 못해서 죄송해라우.’ 최대성은 최한손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 pp.328-329 「효(孝)와 충(忠)」 중에서 선조 27년 2월. 소상을 치른 최대성은 다섯 달 만에 다시 본영으로 복귀했다. 그런 뒤 이순신 통제사가 삼도 수군을 거느리고 있는 한산진으로 갔다. 이순신은 여전히 상복을 입고 있는 최대성을 대솔군관 겸 정탐군관으로 임명했다. 각 부서의 장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왜적이 싸움을 회피하기만 했으므로 거제도 주변의 섬들을 정탐하면서 일과를 보냈다. 최대성은 주로 진해 앞바다로 나가 정탐했다. 3월이 돼서야 왜선 6척이 당항포에 들어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조선수군의 함대가 달려가 분멸했다. 저도(楮島)에서도 왜선 1척을 화포 사격으로 불살랐다. 그러자 저도의 왜수군들은 두려워서 밤중에 왜선 17척을 버리고 도망쳤다. 이에 조선수군 함대는 17척을 남김없이 깨트리고 불살랐다. 6월에 최대성은 상작(賞爵)을 받아 종5품의 훈련원 판관이 되었다. 8월에는 이순신 통제사 함대 장수들과 춘원포에 출몰한 왜선을 추포하여 분멸시켰고, 사천에 이르러 권율 원수를 만났다. 권율은 일찍이 선거이와 정걸에게 최대성의 무재(武才) 이야기 들었음인지 반갑게 맞아주었다. 9월에 최대성은 이순신 통제사의 허락을 받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대상(大祥)을 지내기 위해서였다. 대상을 치르고 나서도 최대성은 상복을 벗지 않았다. 상복을 입은 채 10월에 장문포에서 충청수사 이계훈, 병사 선거이 및 곽재우, 김덕령과 작전하여 수륙의 왜적을 포획했고 흉도(胸島)를 정탐한 뒤 한산진으로 돌아왔다. 그때 이순신은 최대성을 특별히 격려했다. “상복 입은 최 군관을 보믄 말여, 부모 봉양을 잘혀야겄다는 생각이 들어.” “통제사 나으리맨치 자당님을 잘 모시는 장수가 으디 있겄습니까요? 본영이 가차운 곰천에 겨시는 자당님께서는 복이 많은 분이시지라우.” “작년 5월 말에 정대수 군관이 아산으로 가서 모시구 왔네. 가차이 겨시니께 안부를 자주 살필 수 있어 월마나 안심이 되는지 모르겄네.” “통제사 나으리 효심을 모든 장수덜이 본받아야 헙니다요.” “허허허. 대상을 치렀으니께 인저 집으루 돌아가 상복을 벗게. 상복이 적덜의 표적이 될 수 있는겨.” “아이고메, 지 땜시 옆에 있는 군사가 다칠 수도 있겄습니다요.” 11월에 본영에서 탐후선이 들어오자 최대성은 이순신에게 보고하고 한산진을 떠났다. 최대성의 효심과 전공은 조정에 널리 알려져 병조에서는 승진을 상신했다. 그러자 선조는 을미년(1595) 2월에 정3품의 훈련원정을 제수했다. 그때 최대성은 일선 현장에서 ‘흉적을 물리쳐 없애고 종사(宗社)를 보전해야 한다’고 사직을 청했지만 오히려 선조는 가상히 여겨 금(金)을 주고 검(劒)과 홀(笏)을 하사했다. --- pp.358-359 「모의장군」 중에서 잠시 후 골바람에 누린내가 풍겨왔다. 왜군들이 죽은 동료들의 시체를 모아놓고 태우는 냄새였다. 의병군에게 시신의 머리를 내어주지 않으려고 자신의 동료를 태워버리는 잔인한 짓이었다. 그때 최대성은 왜군들이 의병군에게 밀리면서 안치들을 내어주고 퇴로를 찾고 있다고 판단했다. “나는 시방 안치들에 모의장군 깃발을 꽂을 것이니라.” “대장님, 아직은 위험허요. 적덜은 음흉해서 매복해 있을지 모르요.” “우리가 이긴 것이나 다름읎은께 그렇다고 허드라도 적덜은 독 안에 든 쥐새끼일 뿐이다.” 더구나 황원복이 지휘부로 와서 손에 묻은 피를 닦으면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모의장, 적덜은 도망칠 줄만 알지 싸울 줄은 모른 거 같소. 조총을 갖고도 죽창을 든 우리덜에게 지는 것을 보믄 말이요,” “황 대장, 말씸이 맞소.” 안치들 백병전에서는 조준하면서 쏴야 하는 왜군의 조총보다 의병군의 칼과 죽창이 더 위력적이었을 터였다. 최대성은 오도재를 내려가기 위해 말을 탔다. 두리동 형제와 지휘부 의병들이 최대성을 뒤따랐다. 그런데 오도재 고갯길이 끝나는 산길에서였다. 낙오병인지, 매복병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갑자기 왜군들이 조총을 쏘아대며 나타났다. 최대성은 바로 칼을 휘둘러 눈앞에 보이는 왜군들의 목을 베었다. “무도헌 왜왕의 업보다!” 투구를 쓴 왜장은 오도재 아래로 도망쳤다. 최대성은 말을 타고 왜장을 뒤쫓았다. 그러나 그때 조총 소리가 요란했다. 두리동 형제가 피를 토하듯 외쳤다. “대장님!” 최대성이 적탄을 맞고 말에서 떨어졌다. 그러자 주인 잃은 말을 탈취하려고 왜군 십여 명이 숲속에서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두리동 형제가 고함치며 돌진해 칼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왜군 서너 명이 산길에 붉은 피를 뿌리며 나뒹굴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두리동 형제도 적탄을 맞고 최대성 옆에 쓰러졌다. 그제야 조총 소리를 듣고 의병 1백여 명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의병군의 기세에 질린 왜군들이 두 손을 번쩍 들면서 항복했다. 그러나 대장 최대성을 잃은 지휘부 의병들은 적개심이 솟구친 나머지 번개처럼 달려들어 왜군들의 목을 다 베어버렸다. 그런 뒤에야 대장부 최대성의 시신 앞에서 모두가 통곡했다. --- pp.405-409 「안치혈투」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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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孝)와 충(忠)을 다한 의병장 최대성
모의장군 최대성의 행적을 되살리는 일은 효(孝)에서 충(忠)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고 고향을 지킨 한국인의 정체성을 구체화하는 작업이다. 그리하여 그의 일대기를 영웅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가능한 한 ‘인간 최대성’으로 그려내려 했다고 작가는 말한다.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심, 스승에 대한 순수한 존경심, 병사한 아내를 향한 절절한 슬픔, 전투에서 겪는 인간적인 고뇌와 전우애, 그리고 반상의 경계를 뛰어넘어 집안의 가노와 형제처럼 지내는 인간미 등을 그려내고 있다. 이순신 휘하에서 옥포해전을 필두로 다섯 차례 전투서 승리 최대성(崔大晟)은 보성 사곡마을의 경주 최씨 최한손(崔漢孫)과 광주(廣州) 이씨 슬하의 외아들이다. 죽천 박광전 문하에서 수학한 뒤 보성으로 귀향한 선거이가 손응호 등과 신의계(信義契)를 만들자 이에 참여했다. 서른두 살에 전주감영에서 치른 무과 초시에 합격, 이듬해 한양 훈련원 복시에 나가 활쏘기와 검술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려 무과에 급제했다. 훈련원의 정7품 참군으로 있던 최대성은 선조 18년 2월 왜구들의 침탈이 극심하자 고향을 지키고자 입신양명의 길을 뒤로한 채 귀향을 결심한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자 열선루 회동에 참여하고, 뒤이어 선조 25년(1592) 3월 초 전라좌수영에 들어가 전쟁이 발발하자 첫 전투인 옥포해전에 참전하는 등 다섯 차례의 해전에 나가 승리를 거둔다. 이순신의 명을 받아 귀향해 보성향보의병군 궐기 최대성은 고향 일대에 출몰하는 흉적을 물리치고 종사를 보전하겠다는 뜻으로 임금에게 사직을 청한다. 하지만 선조는 정3품 훈련원정에 제수하며 그 공을 치하한다. 그러나 선조 30년(1597) 2월, 이순신이 참소당해 한양으로 압송되자 최대성은 고향으로 돌아와 보성향보의병군을 조직하고 왜적에 대항한다. 이순신이 28일 만에 의금부에서 풀려나 백의종군하게 되자 최대성은 이순신의 명을 받아 전라좌수군의 배후인 고향을 지키는 임무를 받는다. 1597년 보성향보의병군을 일으킨 최대성은 순천만 거차포전투와 안치전투 등 20여 회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왜적들을 물리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안치전투에서 적탄에 장렬하게 순절한다. 그의 나이 46세였다. 보성향보 의병장으로 순절한 뒤 154년 만에 통정대부 추증 받다 7년 전쟁이 끝난 뒤 최대성의 장남 언립과 삼남 후립은 선무원종 2등 공신에 책록되었으나 정작 최대성은 아무런 예우를 받지 못했다. 최대성의 전공 회복운동은 안방준 이후 최대성의 5대손 최정기가 영조 27년(1751) 예조에 올린 소지(所志, 진정서)에 이르기까지 1백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영조는 최대성의 향리에 충신 정려(旌閭)를 세우라는 명과 함께 증(贈) 통정대부 형조참의 증직교지를 내렸다. 통정대부란 정3품 상계(上階)로서 당상관의 품계였다. 안치전투에서 순절한 지 154년 만에 내린 왕명이었다. 이후 영조 44년(1768) 유림의 발의로 정유재란시 안골포, 가덕도해전에서 전사한 보성군수 안흥국의 정충사에 배향되었다가, 현재는 모의장군의 전적지 죽전들판과 안치들이 가까운 충절사에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바,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에 대장부 최대성 장군의 혼이 불현듯 충절과 효심을 불러일으켜 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