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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길
국란 때마다 충의를 다한 안방준 의병장 이야기
정찬주
여백 2024.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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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작가의 말/ 차꽃 향기 같은 안방준 의병장

아버지와 아들
서당 공부
우계정 가는 길
왕자사부 박광전
첫 만남
승마와 활쏘기 연습
효심
지산정사
이대원전(李大源傳)
향시 포기
차례
순천에서 온 아내
세 번째 스승 성혼
스승의 편지
왜군 침입
비보와 낭보
전라좌의병
2차 진주성전투
편지와 누비솜옷
왜왕의 야욕
보성향교 전소
채정해 형제
독성산성전투
행주산성전투
바람재마을 충의
공분(公憤)
의(義)와 자비
왜장의 앞잡이, 순왜(順倭)
동복적벽전투
동행
우산전사(牛山田舍)
정묘호란
의병군 해산
고용후 구명운동
매화정
병자호란
안방준 의병군
누가 의리를 다시 펼까
환향녀
마지막 집필을 위해
은봉정사에서 붓을 놓다

저자 소개 1

무염(無染), 벽록檗綠

자기만의 꽃을 피워낸 역사적 인물과 수행자들의 정신세계를 탐구해온 작가 정찬주는 1983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작가가 된 이래, 자신의 고유한 작품세계를 변함없이 천착하고 있다. 호는 벽록檗綠. 1953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고, 국어교사로 잠시 교단에 섰다가 십수 년간 샘터사 편집자로 법정스님 책들을 만들면서 스님의 각별한 재가제자가 되었다. 법정스님에게서 ‘세속에 있되 물들지 말라’는 무염無染이란 법명을 받았다. 전남 화순 계당산 산자락에 산방 이불재耳佛齋를 지어 2002년부터 텃밭을 일구며 집필에만 전념 중이다. 대표작으로 대하소설 인간
자기만의 꽃을 피워낸 역사적 인물과 수행자들의 정신세계를 탐구해온 작가 정찬주는 1983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작가가 된 이래, 자신의 고유한 작품세계를 변함없이 천착하고 있다. 호는 벽록檗綠.

1953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고, 국어교사로 잠시 교단에 섰다가 십수 년간 샘터사 편집자로 법정스님 책들을 만들면서 스님의 각별한 재가제자가 되었다. 법정스님에게서 ‘세속에 있되 물들지 말라’는 무염無染이란 법명을 받았다. 전남 화순 계당산 산자락에 산방 이불재耳佛齋를 지어 2002년부터 텃밭을 일구며 집필에만 전념 중이다. 대표작으로 대하소설 인간 이순신을 그린 《이순신의 7년》(전7권) 법정스님 일대기 장편소설《소설 무소유》 성철스님 일대기 장편소설 《산은 산 물은 물》(전2권), 4백여 곳의 암자를 직접 답사하며 쓴 산문집 《암자로 가는 길》(전3권)을 발간했다.

장편소설로 《광주아리랑》(전2권) 《다산의 사랑》 《천강에 비친 달》 《칼과 술》 《못다 부른 명량의 노래》 《천년 후 돌아가리-茶佛》 《가야산 정진불》(전2권) 《나는 조선의 선비다》(전3권)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행복한 무소유》 《법정스님 인생응원가》 《법정스님의 뒷모습》 《불국기행》 《그대만의 꽃을 피워라》 《자기를 속이지 말라》 《선방 가는 길》 《정찬주의 茶人기행》 등이 있다. 동화 《마음을 담는 그릇》 《바보 동자》를 발간했다. 행원문학상, 동국문학상, 화쟁문화대상, 류주현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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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12월 12일
쪽수, 무게, 크기
412쪽 | 716g | 150*220*30mm
ISBN13
9791190946353

책 속으로

박광전은 안방준이 ‘우계정 하나부지’라고 하지 않고 ‘선상님’이라고 부르자 입맛을 쩝쩝 다셨다. 배우겠다는 의지가 단단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주자가 말했다. 《소학》은 집을 지을 때 터를 닦고 재목을 준비허는 일이며, 《대학》은 그 터에 재목으로 집을 짓는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소학》이 사람의 길로 가는 데 첫걸음이 된다는 뜻이 아니겄느냐?”
“명심허겄습니다요.”
“그라믄 하나 물어보겄다. 《소학》 내용 중에 ‘예의가 아닌 것은 보지 말라(非禮勿視)’는 것이 있다. 그 구절을 한 번 외와보그라.”
안방준은 조금도 더듬거리지 않고 또박또박 외워 바쳤다.
공자가 말했다.
“예가 아닌 것은 보지 말며, 예가 아닌 것은 듣지 말며, 예가 아닌 것은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닌 것은 행동하지 말라.”
(孔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박광전은 안방준이 외우는 첫 네 구절에서 말을 자르고 또 당부했다.
“옳거니, 방금 니가 외운 네 가지를 ‘사물잠(四勿箴)’이라고 허는디, 이 네 가지 ‘물(勿)’만 지키믄 선비의 수신과 처세에 문제가 읎을 것이니라. 근디 어찌 군자 되는 길이 어렵다고만 할 것이냐. 이어서 계속 외와보그라.”
--- pp.58-59

과장에는 향시 응시생들로 북적북적했다. 먼저 와서 자리를 차지한 응시생들이 많았다. 안방준은 그늘진 구석자리를 겨우 찾아가 앉았다.
보성에서 함께 올라온 향교교생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소란스러운 과장은 경시관(京試官)이 등장하자마자 조용해졌다. 응시생들이 작은 소리로 수군거렸다.
“이조에서 파견 나온 저 대감이 시험 출제도 허고 채점도 헌다그만.”
“대감이라믄 3품인디 높은 베슬이그만잉.”
“근디 대감이 어젯밤에 인척인 응시생을 몰래 만났다는 소문이 도는구만.”
“어허! 쩌 자리 쪼깜 보소. 서너 명이 맨 앞줄 가운데 응시생 옆으로 갈라고 난리가 났네.”
“아이고메, 쩌그 응시생이 대감 인척이여!”
경시관이 잠시 물러나자 과장은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경시관을 보좌하는 참시관(參試官) 2명이 주의를 주었지만 소용없었다. 안방준은 과장의 어지럽고 시끄러운 모습을 보고서는 몹시 부끄러워했다.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고 바늘방석에 앉은 듯 불편했다. 이윽고 안방준은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과장 밖으로 나와 버렸다. 눈에 비친 모습들이 상상밖이어서 견딜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웠던 것이다. 안방준은 과장에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고 작심했다.
‘선비라고 이름을 내세우는 자덜이 저러허니 어찌 개탄허지 않으리요.’
향시를 포기한 안방준은 전주성 남문을 나와 정읍을 향해 다박다박 걸었다.
--- p.110

열선루에 모인 사람들이 침입한 왜군의 규모에 놀란 채 김득광의 입을 주시했다. 김득광은 지휘봉 대신에 든 날창을 흔들며 말했다.
“정해년에 왜구들이 남해를 침입하더니 임진년에는 기어코 왜적들이 뭍으로 올라왔소. 부산진성과 동래성이 중과부적으로 함락당하는 등 조선군이 곤경에 처해 있소. 다만 다대진에서 윤흥신 첨사가 분투해서 왜적을 물리쳤소. 동래성에서는 관군, 성민, 노비 등 모두가 합심해 왜적에 대항했소. 비록 성을 내주었으나 조선인들의 혼은 꺾이지 않았소. 왜장 소서행장이 감동하여 송상현 동래부사를 가매장한 뒤 고개 숙이고 ‘조선충신 송공의 묘’라는 팻말을 꽂아주었다고 하오.”
--- pp.144-145

안방준의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이여송의 명군은 진주성으로 오지 않고 슬그머니 물러가버렸다. 천군이 지원군으로 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김천일과 최경회는 낙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주성을 지키는 군사가 6만 명이라고는 하지만 대부분 무기를 다룰 줄 모르는 성민들이었다. 관군과 의병은 1만여 명에 불과했다. 반면에 왜군은 전투경험이 많은 10만 명의 대군이었다. 왜군은 진주성 밖의 해자를 흙과 돌로 메우면서 성벽 가까이 공격해 왔다.
겁이 많은 진주목사 서예원은 관군과 성민들을 하나로 묶지 못했다. 의병장들은 그를 믿지 않고 독자적으로 판단하며 수성전을 폈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성 안을 돌며 싸우던 순성장 황진이 먼저 왜군의 조총을 맞고 쓰러졌다.
--- p.180

조선 양민들을 포로로 붙잡아 왜국으로 보낸다는 소문이 돌자, 전라도 출신의 의병지도자급 선비들 가족은 뿔뿔이 피신을 했다. 왜군들의 표적이 돼 있기 때문이었다. 박광전, 임계영, 문위세 등의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우계정에서 온 박광전은 아내를 급히 피신시켰다. 부인 남평 문씨를 장남 박근효와 함께 모후산으로 보냈으며, 조양 집은 차남 박근제와 머슴들이 지키게 했고, 자신은 이전과 같이 대원사 초입의 우계정으로 다시 돌아가 때를 기다리려고 했다. 박근제가 사랑방으로 들어오자 박광전이 말했다.
“삼도공 문병을 갔다가 우계정으로 돌아갈라고 헌다. 집안일을 니가 잘 처리허기를 바란다.”
“별채 창고 쌀은 해마다 의병 모의곡으로 다 내보내불고, 보리쌀 멫 가마니허고 초여름에 캔 감자는 모다 대숲 땅굴에 옮겨놔부렀그만요.”
마을 사람 중에 부자들은 왜군들의 노략질에 대비해서 집 뒤 대숲이나 산자락에 동굴을 파고 추수한 곡식을 옮겼는데, 박광전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쟁에다 숭년이라서 마실에 굶는 사람덜이 있을 것이다. 보리쌀이라도 꺼내서 나눠주그라. 끼니 때 덜 묵으믄 된다.”
“모후산으로 가신 엄니가 늘 머심을 시켜 갖다주고 그랬어라우.”
--- pp.195-196

그 순간 왜군이 쏜 총알이 이번에는 채종해의 배를 관통했다. 채종해의 입에서 붉은 피가 꾸룩꾸룩 흘러나왔다. 채종해가 함덕립에게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저 소리가 무신 소린가?”
행주산성 산정 지휘소에서 장수와 군사들이 외치는 함성소리였다. 권율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충청수사 정걸과 경기수사 이빈이 화살을 가득 선적한 배를 조강 나루터에 막 정박시켰다는 소식과 창의사 김천일이 군사 3천여 명을 거느리고 행주산성 후방에 와 있다는 소식이 전령을 통해 전해졌던 것이다.
왜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해가 지고 땅거미가 깔리자 왜군은 네 곳에 시체를 모아 불태우고는 한양으로 퇴각했다. 다음날, 장수들이 권율에게 전과를 보고했다.
조선군의 완벽한 대승이었다. 왜군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를 비롯해서 키카와 히로이에, 이시다 미쓰나리, 마에노 나가야스 등 4명의 왜장이 중상을 입었고, 왜군 사상자는 무려 1만여 명이나 되었던 것이다.
--- pp.242-243

매화정에 의병청을 설치한 뒤 안방준은 즉시 닳은 벼루에 먹을 갈았다. 인근 고을에 보낼 격문을 쓰기 위해서였다. 안방준이 붓에 먹을 묻히자 묵향이 방안에 번졌다. 격문은 유생에서 노비에 이르기까지 누구라도 마음을 격동케 했다.
〈국운이 불행하여 오랑캐가 돌진해오니 임금은 피난했으나 남한산성의 한 모퉁이가 포위를 당함에 이르니,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통분을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이는 참으로 군주가 욕을 당함에 신하가 죽어야 할 때이로다. 우리 강토에 사는 혈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누군들 의리로 떨쳐 일어나 국난에 임할 뜻이 없으리오. 이에 장차 의병을 일으켜 명성과 위세에 만의 하나라도 돕고자 하니, 힘쓸지어다! 뜻을 같이 하는 선비들은 줄곧 협력하여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해 죽는다면 매우 다행이겠노라.(하략)〉
--- p.362

청군이 할퀴고 간 상처는 참혹했다. 한양의 집들은 대부분 불탔고, 양민의 시체가 길거리마다 널려 있었다. 청 태종 홍타이지가 먼저 떠났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청 사신 도르곤[多爾袞]을 따라 심양으로 갔다, 조선 백성은 청군에게 붙잡힌 포로 말고도 심양의 노예시장에서 60만 명 이상이 팔려갔다.
척화파 중에 강경론자인 삼학사 홍익한, 윤집, 오달제는 청군에게 잡혀가 참형을 당했고, 김상헌은 뒤에 잡혀가 오랫동안 감옥에 갇혔다. 또 양민 아녀자와 대신들의 자녀가 청의 사신 잉굴다이[龍骨大]에게 끌려갔는데, 그 수가 197명이었다.
--- p.374

안방준이 《사우감계》를 집필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조헌을 변론하기 위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사우감계》의 마지막 문단처럼 나라의 화평한 기상과 장구한 국운을 위해서였다. 이는 당시 조정이 서인, 남인, 북인 등으로 당쟁이 심했던 것을 방증했다.
청군의 침공에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해 있는 동안이나, 세자와 대군이 심양에 인질로 끌려갔음에도 불구하고 당쟁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안방준은 당쟁을 일삼는 사대부를 용렬하고 추악한 비부라고 통렬하게 비판했던 것이다.
--- p.377

안방준은 가을걷이 농사일이 끝나갈 무렵 11월에 매화정으로 왔다. 새로 지은 강학당 이름은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지었다. 안방준이 말했다.
“자네덜 생각을 말해보게. 이 정사 이름을 뭣이라고 허믄 쓰겄는가?”
“어치께 지덜이 짓겄습니까요. 선상님께서 생각해두셨던 것으로 정허시믄 으쩔게라우?”
“아버님, 지 생각도 그라그만요.”
안익지가 양주남 말에 동감을 보탰다.
“내가 늘 염두에 둔 생각이 있기는 허제. 충효와 절의를 생각헐 때 나는 두 분을 사모했은께 말이여. 포은 정몽주 선생과 중봉 조헌 선생이제.”
“지는 선상님 맘을 알겄그만요. 두 분의 호에서 한 자씩 가져온다는 말씸이지라우?”

--- p.405

출판사 리뷰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의병군이 있었다

선조25년(1592), 왜군이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함락하고 빠른 속도로 북진하자 안방준은 노스승 박광전을 따라 전라좌의병 임계영 의병장 산하의 종사관으로 전쟁에 뛰어든다. 상주전투에서 이일 순변사가 패하고 충주의 신립 장수마저 무너지고 말았다. 왜군이 기세를 몰아 한양으로 북진하자 4월 30일 선조는 궁궐을 버리고 파천을 단행했다. 다행히 이순신 좌수사는 5월 7일 옥포해전에서 왜선 26척을 격침함으로써 남해의 제해권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조선군은 육지에서의 전투에서 연신 패전하자 선조는 급기야 대동강을 건너 의주를 향했다.

나주 출신 김천일 의병장은 임금을 호위하겠다는 목적으로 조선 최초의 근왕의병을 일으켜 한양으로 출병했다. 하지만 근왕의병은 용인 광교산전투에서 패배하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8월 15일, 임계영의 전라좌의병은 최경회의 전라우의병과 합세하여 금산과 무주에 있는 왜적에게 타격을 가하여 영동으로 도주하게 만들었다. 전라좌우의병군의 첫 승리였다. 호남을 장악하려던 왜적들을 물리치고 반격의 교두보를 지키게 되는 값진 승리였던 것이다.

병자호란에 안방준 의병장으로 호남 선비들 규합

정묘호란이 발발한 지 9년 만인 인조14년(1636) 12월 8일, 10만이 넘는 군사를 앞세운 청군이 다시 침입했다. 12월 14일, 강화도로 몽진하려던 인조는 닷새 만에 한양까지 다다른 청군에 막혀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12월 19일, 근왕병을 모집해 청군을 물리치라는 인조의 교서를 받아본 안방준은 눈물을 흘렸다. 64세의 노쇠한 처지가 된 그였으나 능주 매화정에 의병청을 꾸리고 호남의 선비와 유생, 농부와 노비들을 모집하는 동시에 군량미와 창칼 등을 마련해 출정을 서둘렀다. 보성과 화순, 나주, 장흥, 강진, 함평 등지에서 의병들이 모여들었다.

이듬해 정월, 안방준 의병군이 매화정에서 출병해 금구(김제)를 거쳐 여산에 막 도착했을 때 남한산성의 비보가 전해졌다. 1월 21일 강화도를 먼저 공격한 청군은 1월 22일 강화산성을 함락하고 세자빈과 봉림대군을 인질로 붙잡았다. 이 소식을 들은 인조는 1월 25일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예가 아닌 것은 말하지 말며 행동하지 말라!

왕자(광해군) 사부를 지낸 박광전 문하로 들어간 안방준은 첫 가르침으로 ‘사물잠(四勿箴)’을 받는다. 선비로서 수신과 처세에 흠이 없도록 경계해야 할 네 가지 잠언이다. 즉 “예가 아닌 것은 보지 말며, 예가 아닌 것은 듣지 말며, 예가 아닌 것은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닌 것은 행동하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라는 가르침이다.

이것이 바로 선비의 길이고 군자의 길이며 사람의 길인 것으로서 안방준의 인생을 관통하는 선비정신의 핵심이다.

정약용 못지않은 많은 역사 서책 저술, 편찬

그는 젊은날 임금이 내리는 관직을 모두 사양한 채 학문과 저술에 심혈을 기울였다. 불행하게도 그의 생애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등등 변란이 계속되어 붓을 놓았던 시기가 많았으나 역사인물과 역사적 사건을 재평가하는 서책의 권수가 정약용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많다. 정해왜변 당시 녹도만호 이대원의 분투를 그린 《이대원전》, 제2차 진주성전투를 기록한 《진주서사》, 조헌의 상소문을 모은 《항의신편》, 절의를 위해 죽은 16인의 호남 선비를 다룬 《호남의록》, 동래부사 송상현 등 8명의 기록인 《임정충절사적》, 김덕령과 김응회, 김대인 의병장을 추모해 기린 《삼원기사》, 조헌의 《동환봉사》와 당쟁 자료를 모은 《혼정편록》, 기묘사화의 전말을 기록한 《기묘유적》, 조헌의 고결한 뜻을 문답 형식으로 지은 《사우감계록》 등등 많은 서책을 편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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