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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ㆍ5
제1부 시(詩)의 맑은 물 결 고운 사랑이 말하는 것ㆍ12 ─ 나태주의 첫 동시집 『외할머니』의 시세계 제2부 선험(先驗)에서 의미 찾기 홀로 있기, 혹은 존재하기ㆍ28 ─ 이은자 시집 『인간의 사막』의 시세계 삶의 길과 그 사유(思惟)의 길ㆍ46 ─ 김재천 시집 『그대, 어디 있는가』의 시세계 풍자(諷刺; Satire)와 기지(機智; Wit) 사이ㆍ69 ─ 김순일 시집 『우울한 햇빛』의 시세계 차이(差異)에서 만난 동일화(同一化)의 정조(情操)ㆍ88 ─ 정명순 시집 『한 개 차이』의 시세계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현실의 존재ㆍ107 ─ 정덕채 시집 『백수의 새벽 밥상』의 시세계 제3부 삶의 진성(眞性)과 그 발견(發見) 시(詩)가 가지는 역사(歷史)의 진정한 의미ㆍ128 ─ 진명희 시집 『여정(旅情)』의 시세계 포말(泡沫)의 시학(詩學), 그 생성(生成)과 소멸(消滅)의 기억들ㆍ161 ─ 유금숙 시집 『해변의 식사』의 시세계 빈 자리를 위한 시학(詩學)ㆍ180 ─ 최명규 시집 『빈 새장의 문을 열어놓다』의 시세계 새로운 의미찾기로의 시학(詩學)ㆍ201 ─ 이희영 시집 『숨어사는 그리움』의 시세계 무언(無言)·묵언(?言)으로의 대화(對話)ㆍ214 ─ 강석화 시집 『개망초 영농기』의 시세계 제4부 변용(變容)과 극복(克服) 의지 자아(自我)발현(發現)에서 만난 충돌(衝突)의 시학(詩學)ㆍ234 ─ 김명수 시집 『바람에 묻다』의 시세계 ‘그리움’의 방향성과 삶의 정체성ㆍ256 ─ 박보현 시집 『구름에 그리움을 조각한다』의 시세계 현실적 삶의 극복 의지로서의 시ㆍ273 ─ 박여람 시집 『나의 숲이 시가 될 때』의 시세계 체험(體驗)으로부터의 살가운 삶의 추구(追求)ㆍ291 ─ 이영희 시집 『소리가 뜨겁다』의 시세계』 견고(堅固)한 삶, 최선(最善)의 실현(實現)ㆍ312 ─ 정중화 시집 『냉장고를 사야하는 이유』의 시세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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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는 마음(정)의 뿌리에서 돋아나는 고운 싹’이라고 말 한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백락천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는 말(언어)들을 매우 적절하게 집어넣어서 한 편의 시를 지을 때마다 이웃 할머니들에게 들려주고, 이웃 할머니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는 어려운 부분은 다시 고쳐 썼다고 합니다. 이것은 시는 누구나 읽어서 읽는 이의 마음에 따라 시가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아올라 시 자체가 가진 아름다움 이상으로 새로운 아름다움을 나타나게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시는 누구에게나 쉽게 감동을 줄 수 있도록 쓰여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에게나 감동을 줄 수 있는 시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누가 부르기 시작한 지도 모르는 전래동요를 자주 부르게 됩니다. 그 전래동요 속에 무슨 뜻이 담겨 있고, 무슨 이유로 불리게 되었는지 모르면서 부르게 되는데도 우리는 마냥 흥겹기만 하고 저절로 어깨춤이 으쓱해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전래동요 속에 숨어있는 우리만의 가락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 조상 대대로부터 마음과 마음으로 이어지는 깊은 정이 알게 모르게 부르는 사람의 가슴에서 꿈틀거리게 하는 뜨거운 사랑 때문입니다. 이러한 뜨거운 사랑이 담겨 있는 시는 누구에게나 쉽게 감동을 일으키게 합니다. 우리의 둘레에서 흔히 만나는 모든 사물이나 일들, 그리고 우리의 생활 속에서 흔히 나누는 말(언어)을 가까이하는 데에서 우리는 따스한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을 그대로 시로써 나타냈을 때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게 되고 그 움직임에 따라 우리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태주 시인의 시는 우리에게 뜨거운 마음의 움직임을 자아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시에서 우리는 우리가 평소에 만나는 사물과 일들이 깊은 사랑의 눈으로 살펴진 데에서 얻은 말(언어)을 사실 그대로 옮겨진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래서 우리에게 더욱 가깝게 느끼게 되는 것이요, 우리에게 쉽게 맞닥뜨릴 수 있는 마음의 움직임을 얻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태주 시인의 시가 우리의 조상 대대로 마음과 마음으로 이어진 뜨거운 정을 가지고 있음이며, 우리의 가슴속에 파고드는 가락까지도 함께 함으로써 즐겨 읊을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의 시는 결코 시를 억지로 만들어 낸 시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로봇을 만들듯 수많은 회로에 따라 나사를 조이는 식의 시가 아닙니다. 저절로 쓰여진 시, 즉 그 자신조차 알게 모르게 어떠한 사물이나 일에 마주한 다음 말(언어)을 빌어 산속의 옹달샘에서 솟아오르는 맑은 물처럼 시의 맑은 물이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으로써의 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깨를 으쓱하며 즐겨 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나태주 시인의 시를 직접 맛보면서 같이 생각하고 같이 즐거움을 찾아보기로 합니다. 2. 제1부 「누가 버렸을까」에 나타난 시들은 모두 18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먼저 ‘누가 버렸을까’라는 말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버린 것은 버린 자들의 관심밖에 밀려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버린 자들이 버린 것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버린 것이 아닙니다. 관심이 없으므로, 필요가 없기 때문에 버린 것입니다. 흔히 소외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버려진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버려진 것에서는 따뜻한 사랑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을 누가 버리고 전혀 생각조차 해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얼마나 슬프고 쓸쓸하게 될까요? 쏟아지는 가을 햇빛을 견디다 못해 익어버린 시골집 돌담장에 감알 두어점. 어깨 움츠려드는 풀섶에 달빛, 그리고 풀벌레 울음 두어점. 누가 버렸을까 시든 풀줄기 끝에 입을 옥물고 고개 든 채 말라가는 아기 꽃망울 두어점. 빠른 물쌀 개울물에 건너는 사람 없는 징검다리 혹은 두어점. ─ 「누가 버렸을까」 전문 한여름의 무성함이 거짓말처럼 모두 사라진 가을 녘은 쓸쓸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만큼 버려진 것들이 많게 됩니다. 깊은 가을 속에 햇살이 쏟아지는데 외롭게 시골 돌담장에 몸을 지탱하고 있는 ‘감알 두어점’이나 달빛 차가운 속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울음 두어점’이나 우리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 십상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쓸쓸한 가을 속에서 배배 꼬이며 말라가는 풀포기에서 마지막 힘을 내어 피워보려는 ‘아기 꽃망울 두어점’은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시인의 눈은 이런 것들을 보게 됩니다. 그저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사랑을 쏟기까지 합니다. 얼마나 눈물겨운 일입니까? 그러나 시인의 눈에 비친 것은 그것뿐이 아닙니다. 버려진 것과 그것을 바라보는 거리, 그 사이에 놓인 ‘징검다리 두어점’까지도 볼 수 있습니다. 마땅히 우리가 지켜주어야 하고, 마땅히 우리가 생각해 주어야 할 모든 버려진 것들이 사라져가는 이 쓸쓸한 가을 어느 날에 마주한 이 모든 것들은 시인의 눈에 ‘징검다리’ 같은, 마땅히 건너야 할 길을 느끼게 하며, 마침내는 그 길이 보여짐으로써 이 시를 읊는 사람으로 하여금 따스한 사랑을 느끼게 하는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봄부터 이듬해 봄까지의 사물을 대상으로 하여 그려 낸 제1부의 시편들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버려진 것들에 대한 시인의 간절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옷 벗은 개나리꽃 춥겠다 찬 봄비에 젖으니 감기 들겠다. 오슬오슬 비 맞고 추운 개나리꽃. 담요를 가져다 싸안아 줬으면…… ─ 「개나리·3」 전문 목련꽃은 훨훨 날아보지도 못하고 하나씩 깃을 땅에 떨어뜨리며 죽어갔습니다. 아, 봄비가 밉다. ─ 「봄비·1」 중에서 때묻은 시골 꼬마들 서넛 나와 서서 지나가는 차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차 안에 있는 누구도 손을 흔들지 않습니다. 차 안에 타고 있는 어른들에겐 길가의 아름다운 코스모스꽃들이 보이지 않듯이 손을 흔들고 있는 귀여운 꼬마들도 보이지 않는가 봅니다. 아름답고 착한 아이들의 세상과는 달리 어른들의 세상은 착하고 아름다운 세상만은 아닌가 봅니다. ─ 「가을길」 중에서 위의 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어느 것 하나 활기차고 즐겁고 신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잊고 살아가는 데에서 한번쯤은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할 외로운 것들입니다. 그것을 놓치지 아니하고 생각한다는 것을 우리는 깊은 사랑의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바로 시로 쓸 수 있다는 것은 깊은 사랑으로부터 솟아오르는 그 어떤 것이라는 겁니다. 아름다운 마음의 세계가 갖는 사랑의 깊은 뜻이야말로 시를 바르게 알 수 있는 지름길이며, 시인의 마음이 곧 그것이요, 시 자체가 바로 그것으로부터 태어난 하나의 즐거움입니다. 3. 제2부 「아기를 위하여」에는 20편의 시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평화스럽고 자랑스러운 대상으로부터 빚어낸 또 다른 사랑의 의미를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더욱 사랑스럽게, 즐거움을 더욱 즐거웁게 나타내는 뜻이야말로 또 다른 마음의 뜨거움인 것입니다. 아기가 자라면 엄마는 늙고 엄마는 늙어도 아기는 자라야 하고 엄마의 소원은 아기가 잘 자라는 것뿐…… ─ 「엄마의 소원」 전문 어느 구차한 설명이 완전히 사라진 채로 엄마의 깊은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기가 자라는 사이에 늙어가는 엄마는 분명 슬픈 일이지마는 엄마는 그 슬픔을 모르고 늙어갑니다. 「엄마의 소원」이야말로 아기가 오직 ‘잘 자라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희생이 자라는 아기의 모습에서 고귀하리만큼 잘 나타난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엄마로서의 깊은 사랑이 이보다 더 뜨거울 수 있을까요? 시의 세계가 가장 고귀한 사랑으로부터 태어난 것이라면 이러한 「엄마의 소원」은 이미 그 자체가 한 편의 시가 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일입니다. 따라서 엄마의 모든 마음은 곧 아기의 자람에서 더욱 즐거운 싹으로써 자라나고, 아기의 자람에서는 엄마의 늙음조차 기쁨으로 피어오른다는 것을 이 시로부터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한 편의 시 속에서 마음속에 떠오르는 느낌이 뜨겁게 살아올 때,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더욱 아름다워지고 참으로 깨끗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랑의 의미는 「제비」」에서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지지배배 지지배배 윤이는 오빠 민애는 동생 윤이네 집에 집을 짓자 민애네 집에 집을 짓자 ─ 「제비」 전문 한 마리의 제비가 날아와 처마끝에 집을 짓는 것을 보고 아마 시인의 마음속에는 또 다른 한 채의 작은 집이 지어집니다. 어린 남매의 집이 이미 마련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엄마의 소원」과 같은 부모님의 따스한 사랑은 더욱 뜨겁게 살아올라 한 마리의 제비가 집을 짓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것은 곧 시의 마음이요 사랑의 마음이 분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제비」라는 시에서 부모의 가슴속에 간직된 고귀한 사랑의 그 바탕이 ‘제비’라는 대상을 통하여 더욱 진하게 살아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랑은 제2부 「아기를 위하여」 곳곳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기를 재우려고 엄마가 아기를 끼고 누우면/ 아기의 숨소리가 너무 고와서/ 아기의 숨결이 너무 향기로와서/ 엄마는 그만 아가보다 먼저 잠이 들고’ 말았다는 「아기를 재우려다」나 ‘아기를 재워놓고/ 기저귀 빨래하려고/ 들샘에 나가서는/ 빨래를 하면서도/ 아기 혼자 깨어 우는 소리/ 귀에 쟁쟁 못이 박혀서/ 갖추갖추 빨래감 행궈 가지고/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오듯/ 바쁘게 돌아옵니다’하고 맘조리는 「지구 한 바퀴」의 엄마의 모습에서도 아기 사랑의 모습은 진하게 피어오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시인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 앞에서도 자못 놀라움을 느끼기도 하는지 모릅니다. 아기 하나 세상에 나옴으로 세 사람이 세상에 함께 태어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아기, 한 사람은 엄마, 또 한 사람은 아빠. 참으로 놀랍고 놀라운 발견입니다. 참으로 감사하고 감사한 탄생입니다. 어찌 엄마가 아기 없이 혼자서 엄마가 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아빠가 아기 없이 혼자서 아빠가 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아기가 엄마 아빠 없이 혼자서 아기가 될 수 있겠습니까? ─ 「아기를 위하여·5」 전문 한 아기의 탄생에서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는 것에 대한 ‘놀라운 발견’이나 ‘감사하고 감사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사랑이 더욱 깊어지는 시인 자신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와 같은 시를 낳게 한 것임은 당연한 것이기도 합니다. 4. 제3부 「풀꽃이 들려준 이야기」 속의 20편의 시에서 맛볼 수 있는 것은 위에서 살펴본 사랑의 마음이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새로운 세계로 펼쳐지면서 아름다운 꿈속으로 우리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시에서 말하는 상상의 결과에서 나온 사랑의 세계인 것입니다. 시인만이 가질 수 있는 그 사랑의 세계는 과연 어떻게 우리 앞에 펼쳐지는 것일까요? 비 오는 날에 흰 부라우스 차림 가늘어 부끄러운 목을 가리려다가 그만 성큼한 눈썹 아래 샘물이 고여 흙내 나는 담장 안에 어쩌면 나를 보고 웃고 있는가, 돌아서면 쓸쓸해 보이던 누나, 하얀 모가지를 목련 한 송이 ─ 「목련」 전문 비 오는 날 빗물에 젖고 있는 목련을 보고 그린 시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목련은 곧 누나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흰 부라우스 차림’의 누나는 곧 목련입니다. 자못 부끄러운 듯 눈썹 밑에 눈물을 흘리는 누나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면서도 시인 자신은 따스한 눈웃음을 지으며 웃는 듯한 ‘목련 한 송이’를 그립니다. 물론 우리가 여기에서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시인 자신만이 가지는 누이와의 마음이 상상을 통하여 한 송이의 하이얀 목련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리고 애당초 목련보다는 누나의 맑은 웃음과 쓸쓸해 보이던 누나의 모습이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상상의 세계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결국 목련과 누나가 어느덧 하나로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곧 시에서 말하는 동일성, 즉 같은 것으로 머릿속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이와 같은 동일성은 아름다운 꿈속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또 시인의 상상력에서만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마침내 시인의 가슴속에 가라앉은 대상에 대한 사랑이 시로써 세상에 태어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의 이러한 사랑은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도 상상으로 이루어지도록 합니다. 달 뜨는 밤마다 왕자님은 떠나셨습니다. 아지 못할 먼먼 나라로 한사코 말을 타고 떠나셨습니다. 선뜻 따라나서지도 못하는 공주님만 입에 울음을 물고 오오, 안스러운 안스러운 노오란 달맞이 공주님. 꿈결 같은 달빛만 골짝 가득 강물되어 또 몇만 리 흘렀습니다. ─ 「달맞이꽃」 전문 우리가 꿈꾸는 왕자님은 어디론가 멀리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차마 ‘선뜻 따라나서지 못하는 공주님만’ 우리의 눈앞에 비취일 뿐입니다. 그 공주님은 「달맞이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공주님은 떠나버린 왕자님이 그립다고 울고불고하는 그런 공주님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보기에도 안쓰럽도록 온갖 서러움을 ‘입에 울음을 물고’ 묵묵히 참고 견디어 낼 줄 아는 슬기로운 공주님, 아름다운 공주님인 것입니다. 어린이 TV 프로에서 초능력을 가진 만화 영화의 주인공이 그 초능력으로 온갖 고생을 무찌르고 왕자님을 찾아가는 그런 식의 이야기가 숨어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조용히 왕자님을 그리며 왕자님의 자취인 ‘꿈결 같은 달빛만’이 비치는 ‘골짝 가득 강물이 되어’ 흐르는 눈물을 안고 ‘또 몇만 리’ 흘러내리는 그리움을 안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TV의 만화 영화를 보고 난 뒤 쉽사리 그 주인공을 잊어버리듯 「달맞이꽃」 공주님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생각과 생각이 이어져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그 감동이 살아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꿈을 자아내게 하고, 또 다른 상상의 세계를 펼치게 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결국 시인의 사랑을 통한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상상의 세계에까지 닿아 이어진 결과이며 또한 시인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상상 속의 사랑의 힘은 ‘손자들이/ 오나오나 해서/ 흰옷 입고 흰버선 신고// 조마조마/ 고목나무 아래/ 오두막집에서// 손자들이 오면 주려고/ 물렁감도 따다 놓으시고/ 상수리묵도 쑤어 두시고’ 애타게 기다리시는 「외할머니」를 생각할 수 있도록 하며, ‘참새들이 마당 구석에 내려와/ 진흙탕물처럼 고인 두터운 햇살에/ 목욕하고 있었다’는 것까지도 「실눈을 뜨고 보는 겨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시인의 상상 속에 가라앉은 사랑의 눈이 밝혀질 때 새로운 세계는 끝없이 열리고 우리의 두터운 마음을 열리게 하는 힘이 시속에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5. 지금까지 우리는 나태주 시인의 첫 동시집 『외할머니』를 통하여 결 고운 사랑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어느 것 하나 일부러 시를 만들려 하지 않고 우리의 생활 속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말(언어)을 그대로 사용한 채로 저절로 우러나온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많은 시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의 관심밖에 버려진 것에 귀를 열고 눈을 뜨는 일이요, 관심 안에 자리한 것에 더욱 마음을 더하는 일이며, 머리로는 끝없는 상상의 문을 열도록 해주는 것이 곧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태주 시인의 시로부터 느낄 수 있는 것은 어느 한 가지 허술한 데가 없이 우리의 가슴에 맞닿아 사랑을 느끼게 해주고, 우리의 가깝고 먼 곳에 굳이 나누지 않는 눈과 귀를 열어줌으로써 불러일으키게 해주는 아름다운 세계를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시 자체이며, 결 고운 사랑이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 「제1부 시(詩)의 맑은 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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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재기의 평론집 『시의 언덕에서 길을 찾다』는 한국 현대시의 형성과정, 정서 구조, 존재론적 기반, 그리고 시적 언어의 작동 방식에 관한 장기적 관찰과 비평적 사유를 집대성한 결과물이다. 본 평론집은 20여 년 이상의 비평 활동을 통해 축적된 저자의 내면적 사유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이를 작품 분석이라는 구체적 장면 속에서 증명해내는 작업이다. 본 서평은 평론집에 내재된 비평 이론의 구조적 특징, 각 장에서 전개되는 시적 언어에 대한 해석의 방식, 문학적 개념의 재정의, 사회문화적 맥락 속의 시 읽기의 가능성을 다층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본 평론집이 오늘의 한국 문학계, 특히 시 연구 분야에서 가지는 의의와 확장 가능성을 보다 학술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1. 서론: 시적 사유의 구조를 분석하는 비평의 모범 『시의 언덕에서 길을 찾다』는 단순한 작품 해설집이 아니다. 이 평론집은 시를 둘러싼 상징 체계, 존재의 구조, 사물의 인식 방식, 감정의 발생 메커니즘, 그리고 시와 삶의 상호작용을 분석하는 철학적 텍스트에 가깝다. 시를 단지 미적 언어의 집합으로 접근하지 않고, “세계와 정신을 연결하는 사유적 매개물”로 규정하는 관점이 책 전반을 관통한다. 저자 구재기는 시를 “마음의 뿌리에서 돋아나는 고운 싹”이라고 정의하는데, 이는 시적 언어에서 ‘자연성’ ‘직관성’ ‘정서의 직접성’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는 그의 비평 철학을 압축한다. 시인은 언어를 통해 세계를 재현하는 자가 아니라, 언어를 통해 세계를 다시 구성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자는 시인이 자신의 내면적 경험과 세계 인식을 언어의 층위로 상승시키는 과정을 ‘징검돌’의 메타포로 설명한다. 한 편의 시가 구성되기 위해서는 감각적 경험 → 정서적 반응 → 언어적 선택 → 상징적 구성 → 의미적 확장의 단계가 필요하며, 저자는 이를 언어학·현상학·심리학적 요소와 결합하여 체계적으로 분석한다. 따라서 본 평론집은 시학(詩學) 연구에 있어 경험적 접근과 철학적 접근을 통합하는 일종의 “통합적 비평 모델”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2. 제1부: 동시(童詩)의 구조 속에서 발견되는 순수 정서의 층위 제1부에서는 나태주의 동시집 『외할머니』에 대한 광범위한 분석이 이루어진다. 저자는 동시를 ‘아동 문학’이라는 제한된 문학적 범주로 보지 않고, 가장 원초적인 정서의 언어, 즉 인간 내면의 순정(純情)적 감각이 가장 직접적으로 구현되는 문학 장르로 규정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시가 어린이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외형적 특징이 아니라, ‘정서의 심층 구조’를 드러내는 그 본질적 기능이다. 저자는 동시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버려진 것들”?감알 두어 점, 말라가는 꽃망울, 개나리꽃, 길가의 어린아이들?에 주목하며, 이는 곧 시인이 지닌 ‘존재론적 감수성’의 표현이라고 분석한다. 버려진 사물은 사회적 기능을 상실한 대상이지만, 시인의 눈을 통해 다시 세계 속의 의미로 복귀한다. 이 과정은 시적 언어가 사물을 ‘재명명(re-naming)’하는 행위임을 보여주며, 시가 현실을 변화시키는 미학적 힘을 가진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동시는 감정의 단순한 표출이 아니라, ‘단순함 속에 정제된 구조’를 가진 언어 예술이다. 저자는 이러한 단순함이야말로 시적 언어의 근원적 힘이라고 주장한다. 동시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시학적 관점은 “정서의 본질성, 언어의 자연성, 사물의 생명성”이라는 세 가지 축으로 정리될 수 있다. 3. 제2부: 선험에서 의미 찾기_존재론적 시학의 정교화 2부의 핵심은 “홀로 있기와 존재하기”의 구분이다. 이는 단순한 언어적 구분이 아니라, 시적 사유의 구조를 설명하는 철학적 개념이다. 홀로 있기란 사물이 단독으로 존재하는 물리적 상태이며, 존재하기란 사물이 의미 관계 속에서 자리를 획득하는 상징적 상태를 말한다. 저자는 이은자의 시를 분석하면서, 시적 언어는 ‘홀로 있는 사물’을 ‘존재하는 사물’로 변환하는 과정이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변환은 감각적 자극 → 인식의 형성 → 정서의 발현 → 의미의 생성 → 상징의 구축이라는 다층적 단계를 거친다. 특히 저자가 제시하는 “행위 → 지각 → 구체적 제시 → 감정의 움직임 → 이성적 재구성”이라는 5단계 구조는 시의 탄생 과정에 대한 탁월한 분석 모델이다. 이는 문학 텍스트 분석을 넘어, 시인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을 해부하는 일종의 인지 시학(cognitive poetics)의 접근이라고 볼 수 있다. 예컨대 「내 마음의 지옥」 분석에서, 벌레라는 사소한 사물은 단순한 물리적 존재가 아니라, 화자의 심리적 상태를 투사하는 상징적 장치로 전환된다. 이 과정은 사물의 존재론적 지위가 분명히 변화하는 사건이며, 바로 이러한 변화의 순간에서 시는 탄생한다. 저자는 시인의 사유 과정이 “습관 → 영감 → 이성”의 순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며, 이는 칸트의 선험 철학이나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사유와도 일정하게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철학적 확장 가능성을 가진다. 4. 제3부: 삶의 진성(眞性)과 발견의 시학 3부는 시가 어떻게 인간 존재의 근원에 접근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장이다. 저자는 시가 단순히 정서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적 경험을 구조화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진명희, 유금숙, 최명규 등 다양한 시인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시가 ‘경험의 진성’을 드러내는 방식을 탐구한다. 특히 저자가 제시하는 “포말(泡沫)의 시학”은 중요한 비평 개념이다. 포말은 생겨나자마자 사라지는 일시적 존재이며, 이는 인간의 감정과 기억의 구조를 비유하는 데 매우 적합한 상징이다. 시는 이러한 사라짐의 순간을 붙잡아 의미화한다. 저자는 이를 두고 “시적 언어의 시간성”이라고 부른다. 또한 “빈 자리의 시학” 분석에서는, 시가 말하지 않은 것?침묵, 결핍, 공백?이 오히려 더 큰 의미를 생성할 수 있는 언어적 역설 구조를 설명한다. 현대시에서 생략과 압축, 공백의 활용이 의미 확장의 핵심 전략이라는 점을 밝히며, 이는 미학적 해석의 중요한 지점을 제공한다. 5. 제4부: 변용과 극복_ 인간 내면의 윤리적 갱신을 이끄는 시 4부에서는 시를 ‘변용(transformation)의 언어’로 규정한다. 인간은 상처와 결핍을 통해 변화하고, 시는 이 변화를 언어적·상징적으로 재현한다. 김명수, 박보현, 박여람, 이영희, 정중화 등의 작품을 통해 저자는 시가 어떻게 상처의 심리적 구조를 재편하고, 극복 가능성을 제시하는지를 설명한다. 정중화 『냉장고를 사야하는 이유』에 대한 분석은 특히 인상적이다. 냉장고라는 일상적 사물은 인간의 생존 감각, 소비 문화, 기억의 저장, 정서적 온기 등 다양한 의미의 층위를 가진다. 사물은 시인의 인식 속에서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존재를 비추는 ‘거울’로 변환된다. 저자는 일상의 사물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전략을 “구체적 사물론적 시학”이라 부를 만한 지적 장치로 발전시킨다. 이는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 이론과도 연결될 수 있는 부분이며, 현대시 연구에서 중요한 분석 축이 될 수 있다. 6. 평론집의 이론적 특징 본 평론집의 비평 방법론은 크게 네 가지 축으로 요약할 수 있다. (1)존재론적 접근: 사물과 정서의 구조를 단순한 감각 차원이 아니라 존재 차원에서 해석한다. (2)인지 시학적 접근: 시인의 인식 과정과 감정 발생 기제를 단계적으로 분석한다. (3)현상학적 접근: 대상과의 만남, 감각의 진동, 의미의 현전(現前)을 중요한 분석 지점으로 삼는다. (4) 언어 철학적 접근: 시적 언어를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는 상징 체계로 본다. 이 네 가지 접근은 한국 현대시 비평이 한층 더 철학적·학술적 깊이를 갖추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할 것이다. 7. 결론: 시의 언덕을 건너는 지적 여정 『시의 언덕에서 길을 찾다』는 시를 단지 텍스트가 아닌 ‘사유의 장’으로 확장하는 작업이다. 저자는 시를 통해 세계를 읽고, 시를 통해 존재를 묻고, 시를 통해 인간을 본다. 이 책은 한국 시 연구의 중요한 전환점을 상징하며, 시를 사랑하는 독자뿐 아니라 현대시 연구자와 문학 비평가에게도 새로운 분석 모델을 제시한다. 본 평론집의 가치는 단순한 해설을 넘어, 시를 둘러싼 복합적 층위를 통합적으로 분석하는 데 있다. 언어적·철학적·심리적·미학적 관점을 모두 아우르며, 시가 여전히 세계를 사유하는 중요한 도구임을 증명한다. 이 책은 결국 “시적 사유의 지도를 그리는 작업”이다. 그리고 그 지도는 독자가 시의 언덕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돕는 하나의 지식적 나침반이 된다. 책을 덮는 순간, 독자는 저자가 건네는 다음의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시는 언어가 아니라 세계를 건너는 길이다.” 책머리에 시는 스스로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아무 데에서도 찾지 못한다. 징검돌 사이로 막힘없는 흐름을 가지기 때문이다. 맑은 흐름을 징검돌로 하여금 건너게 함으로써 새로운 세계, 즉 이제까지 전혀 만나지도 못한, 만나지도 않은 새로운 ‘시의 언덕’을 발견해내는 일을 찾아 나서기로 한다. 시를 쓰고 있는 한 시인으로서 다른 시인들의 시를 찾아 나선다는 것은 분명 맑은 흐름 사이를 징검돌로 건너 가치 있는 삶을 엿보기 위해 마침내 ‘시의 언덕’에 이르는 일이 될 것이다. 시는 언제나 징검돌을 건너 맑음으로 흐른다. 흐르는 동안 귀밑으로 돌돌돌 소리하기도 하며, 상큼한 느낌을 휘돌려주기도 하며, 새로운 흐름의 앞길을 씻겨주기도 한다. 흐름의 가락으로 노래를 부르며, 햇살의 감미로운 반짝임으로 불러줄 ‘시의 언덕’을 향하여 징검돌 하나하나 하나씩 내딛기로 한다. 2025년 마지막 달력 한 장을 징검돌로 건너며 산애재(蒜艾齋)에서 구재기(丘在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