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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향토문화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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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발간사/ 오해균ㆍ5

정책연구:
무안의 지역정체성과 인문 연구 방향에 대한 고찰ㆍ14
_ 이용식 (무안문화원 사무국장)

제1부 시대변화를 주도한 무안 인물들

무안 초대현감 나자강과 후손의 입향순속(入鄕循俗)을 통한 입향정신 고찰ㆍ48
_ 나천수 (호남지방문헌연구소)
곤재 정개청 학문과 계승 양상ㆍ96
_ 나상필 (한국학호남진흥원)
실학자 노촌 임상덕의 학문과 사상ㆍ116
_ 박석무 (다산학자, 우석대 석좌교수)
초의 장의순의 문화예술과 사상ㆍ131
_ 박관서 (무안학연구소)
김응문 형제의 구국운동과 제2차 동학농민혁명ㆍ185
_ 김봉곤 (전 원광대)

제2부 19세기 문집을 통해 본 무안 근대 인물들

경당집 문집을 통해 본 노일상의 사상ㆍ176
_ 노기욱 (전남대 문화유산연구소)
민재 박임상의 삶과 한시 고찰ㆍ176
_ 나상필 (한국학호남진흥원)
만성 정규병의 학문태도와 역사 인식ㆍ176
_ 박해현 (초당대)
서발턴의 시학, 삼사재 김재걸의 문학 읽기ㆍ176
_ 박관서 (무안학연구소)

저자약력ㆍ368

품목정보

발행일
2025년 12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370쪽 | 620g | 150*225*19mm
ISBN13
9788997482818

책 속으로

머리말: 지역 현실과 문제 해결에 대한 인식

흔히 절대빈곤이 해결된 이후에야 문화나 예술을 찾게 된다고 말한다. 언뜻 생각하면 그럴듯하다. 우선 먹고살아야 문화든 뭐든 즐길 여유가 생길 게 아닌가? 개인적으로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마찬가지다. 사회나 국가도 경제적 형편이 어느 정도 궤도에 이른 뒤에야 문화와 예술에 관심을 쏟을 수 있지 않겠는가? 보통 이런 사고를 상식으로 여긴다. 그런데 과연 실제로 그럴까? 여기에서 나는 아우슈비츠 수용자들의 참혹한 사례에서 그 답을 찾고자 한다.
참혹한 수용소에서도 ‘티타임’의 관습은 있었다고 한다. 몇 번이나 우려낸 묽은 찻물이었지만 수용자들에게 하루 한 번씩 차가 배급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 묽은 차라도 그 자리에서 허겁지겁 마셔버리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절반은 마시고 나머지는 얼굴이나 손발을 씻는 사람이 있었다는 점이다. 물이 그만큼 귀했던 탓이다. 전자가 동물적 본능에 충실한 사람이라면 후자는 문화적 본능을 따른 사람이다. 그렇다면 누가 살아남을 확률이 높았을까?

놀랍게도 생존율은 후자가 높았다. 극한 상황에서 동물적으로 행동한 사람이 더 생존했을 것 같지만, 실은 최소한의 인간적 체모를 지키려 애쓴 사람이 결과적으로 더 많이 생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 수용자들의 동물적 생존 본능이 실패한 원인은 뭘까? 다 마셔버리기에도 부족한 차를 반만 마시고 나머지 반은 수용소의 극한 상황에서 나름의 자신의 문화적 행동에 투자한 사람들이 더 많이 생존한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문화적 행동이 생존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생물학적 인간과 문화적 인간을 구분하기는 어려워도 문화는 그저 장식용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개인과 사회의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다. 사회의 진화와 발전을 단계적으로 구분하였을 때 문화를 진화의 상위 단계에 올라간 뒤에야 필요한 요소로 보는 견해는 문화가 사회적 생존과 발전의 부산물이나 부속물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사고다.

무안 지역은 오래전부터 “지역발전”이란 말이 정치인, 행정가들의 끊임없는 고민과 지역의 오래된 해결 과제였다.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실천적 접근은 항상 정치적이며 경제적 방식에서 진행되어왔으며 현재까지도 지역발전을 위한 확실한 방안이라고 생각되어 왔다. 이러다 보니 항상 성공한 사례를 찾게 되고 현실에 적용하다 보니, 전국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비슷한 모형들이 많이 실행되고 있다. 모두 지역발전을 생각한다는 사람들이 정치적 환경에 맞추어 가시적 성과를 위한 경제적인 모형 속에 빠져 있다.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모형이란 것은 한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획일적으로 어느 곳에나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고, 실제 그렇게 진행되어왔다. 그 결과는 무안에서 자랑하는 관광지인 “황토갯벌랜드”, “회산백련지” 등에서도 볼 수 있다. 갯벌과 연꽃이라는 테마로 축제를 개최하고 캠핑지로 개방하여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6월~9월 성수기 때만 볼 수 있는 광경일 뿐, 비어 있는 시간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이는 전국 유명 관광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탐방로를 만들고, 예측 가능한 전시물과 축제 진행 시에만 보이는 체험 행사 등 전국 어디에서나 흔히 접할 수 있는 콘텐츠들이다. 그러나 지역이란 것은 본시 대구가 다르고, 광주가 다르며, 나주가 다르다. 그 다른 것을 하나의 성공 모델로 해보자고 덤벼들었으니, 잘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지역은 생태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다. 지역마다 그 장소와 지역성을 기반으로 각기 다른 문화적 특성이 있다. 따라서 지역발전을 생각하는 출발점은 ‘다양성’을 전제로 하여 ‘지역적 장소성’을 바탕으로 생태적 환경과 지역이 품은 내면적이자 창의적인 내용을 파악하고 이를 기초로 한 다양한 모형을 구성하여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무안’도 서남해안의 ‘무안’이 있고, 영산강의 ‘무안’이 있다. 해안이 중심인 망운, 해제, 현경과 영산강이 중심이 되는 몽탄, 일로의 생태적·문화적 환경은 서로 다르다. 이런 생태 환경을 통해 달라지는 속 깊은 ‘내면적 창발성’을 중심으로 지역을 바라보고 오랜 역사와 문화를 통해 형성된 정체성을 파악한 후, 그 정체성에서 발현된 지역의 특성을 실행계획에 반영해야 한다. 또한 오랜 기간 지역민들의 삶 속에 깊게 채화된 문화적 콘텐츠를 현대적 트렌드로 가공함으로써, 다른 지역과 차별화된 무안만의 독특한 콘텐츠를 발굴·활용하여 다른 곳에서도 부러워할 수 있는 무안만의 ‘지역발전 모델’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이런 문제의식에 따라 본고에서는 생태적·지리적 환경에 따른 지역의 인문적, 역사적 환경을 고찰하고, 그 속에서 형성된 무안만의 문화적 특질 등을 살펴보고 우리가 지금 살고있는 곳의 지역 정체성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기회를 가져보고자 한다. 또한 이러한 지역성을 바탕으로 향후 인문적 연구가 어떠한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하는지 모색함으로, 인문 연구가 지역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지역의 브랜드를 만들어냄으로써, ‘무안’의 미래 비전을 수립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와같이 지역의 역사·문화적 현장을 되돌아보고 미래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과정은 지역의 어려운 문제를 ‘오랜 과거의 흔적’ 속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시도라 할 수 있다.

--- 「머리말」 중에서

출판사 리뷰

Ⅱ. 무안의 역사적 정체성에 대한 모색

한반도 지도에서 서남해 지역에 있는 무안 반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삼면이 물길로 둘러싸인 한반도와 비슷하게 반도 모양의 지형을 갖추고 있다. 또한 백두대간이 한반도의 허리를 이루며 흘러내려 주로 산악지형을 이루듯이 무안 반도 또한 승달산맥이 좌우로 뻗어 내리면서 한쪽으로는 내륙을 타고 유유히 영산강이 흘러 내려오고 있으며 다른 한쪽은 서남해의 바다가 중국과 연결하여 뻗쳐 있는 물길이 있어 오래전부터 산악 지형을 타야 하는 육지보다 오히려 물길을 이용한 해로와 수로가 발달한 지역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무안 반도의 모양이나 역사적·문화적 위상이 한반도의 지형과 비슷하며, 지명유래에 있어서도 ‘물 아래’라는 뜻에서 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무안 반도를 물과 관련짓는 일, 실제로는 바닷물과 관련짓는 일이 생각보다 의미심장하다. 반도라는 절반의 땅을 강물 혹은 바닷물이라는 절반의 바다로 고쳐 읽는 정도의 의미를 넘어선다.

무안은 오래전부터 서남해안 지역의 해상 중심지로서 역사적 기록에 다양하게 나타난다. 무안이라는 지명은 『고려사』 권57 전라도 나주목 무안군조에 보면, “무안군본백제물아혜군(務安郡本百濟勿阿兮郡), 신라경덕왕(新羅景德王), 경금명(更今名), 혜종원년(惠宗元年), 개물량군(改勿良郡), 성종십년(成宗十年), 복칭금명(復稱今名), 내속(來屬), 명종이년(明宗二年), 치감무(置監務), 공양왕삼년(恭讓王三年), 겸성산극포권농방어사(兼城山極浦勸農防禦使)”이라는 기록이 있다. 『한국지명총람』에서 해석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본래 백제 때에는 물아혜(勿阿兮) 또는 물나혜(勿奈兮), 수입(水入)이라 하였다. 신라 제35대 경덕왕이 무안으로 고치고, 고려 제2대 혜종 원년(944)에 물량으로 고쳤다가 제6대 성종 10년(991)에 다시 무안으로 고쳐서 나주에 붙였다.(이하 생략)”
여기서 말하는 물아혜나 물나혜는 우리말 발음을 한자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를 ‘물 아래’ 혹은 ‘물 안에’ 등으로 해석한다. 한자로 표현한 수입(水入)도 물이 들어오는 곳이라는 의미이니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의 영산강 물이 흘러나가는 곳이고, 또 서남해 바닷물이 흘러 들어온다는 뜻이다. 영산강과 서남해안의 물이 흐르는 곳이 ‘무안’이라는 뜻이다. 이렇듯 무안이라는 지명유래를 살펴본 것과 같이 물의 안쪽에 위치한 물과 뭍의 경계라 할 수 있다.

1. 고대와 중세의 무안
지역적 정체성과 더불어 역사적인 환경 또한 뭍과 물의 경계에서 나오는 다양한 사건들이 펼쳐졌던 곳이라 할 수 있다. 고대 무안은 요서(만주) 지역에서 이주민들이 들어왔을 수도 있고, 해상에서 도래한 외부의 발달 된 문명을 바탕으로 유입될 수도 있지만 현재 학계 연구를 통하여 무안 지역 최초 정주 집단에 대한 답을 구하기는 어렵다. 이후 고대 국가 형성에 있어 마한제국의 신미국, 혹은 임소반국이라는 의견이 있으며, 서남해안 지역과 영산강 유역 등에 흩어져 출토되고 있는 선사시대 유물로 보아 나주 반남의 옹관묘 매장 세력과 함께 무안 지역도 6세기 중엽까지 영산강 유역의 정치세력으로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최근 역사학계의 연구를 통하여 그간 고대와 중세에 이르도록 무안 반도는 마한이나 백제 같은 국가체제에 속한 변방 지역이었다는 학설에서 벗어나, 고대로부터 중세 초· 중기까지도 힘을 지닌 정치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는 무안 지역에는 선사시대의 지석묘, 패총 등 발굴되는 선사 유적들과 함께 거주 유적 등이 출토되고 있어 이 지역에 고대부터 많은 사람이 생활하고 있었음을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알 수 있다. 특히 무안 지역에서 발견된 297기의 지석묘는 주로 해제, 현경, 운남 지역과 몽탄, 일로, 삼향 등 무안 지역 전체에서 폭넓게 발견되고 있고, 옹관묘 등의 수많은 고고학적 유물을 통해서 살펴보면, 기존 백제 지역과는 상당히 성격이 다른 정치집단이 6세기 중반까지 영산강 유역의 정치적 실체를 이루고 있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이 이 지역을 근거지로 오랜 기간 생활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치 세력들은 이후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장보고와 연대 및 해체를 통하여 해상 세력으로 성장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후 견훤과 왕건의 몽탄강 전투에서 왕건의 나주 탈환에 공을 세우는 세력으로 다시 나타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장보고 세력의 해체 이후 나주를 중심으로 하는 서남해안의 해상 세력들이 육상 세력인 견훤의 지배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던 사건이 왕건의 ‘나주 점령’의 결과로 나타났다. 즉 무안 지역도 나주를 점령한 왕건에게 협력한 세력들과 뜻을 같이한 통일신라시대 때의 해상 세력으로서 장보고 이후를 계승한 또 다른 축을 다투던 강력한 해양 정치세력으로 볼 수 있다. 무안이 해상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세력이 있었다는 것에 대한 증거는 최근 봉대산성 발굴과 출토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무안군이 2024년도 봉대산성 발굴에서 발견된 중국제 도자기류와 함께 발굴된 청동 인장 등을 분석한 ‘최인선’은 봉대산성이 후백제 시대의 성곽으로서 당시 이 지역을 관장하던 호족 세력에 의해 축조되었던 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

특히 “청동 인장”에 새겨진 “현산호력인(賢山扈力印)”의 발견은 이곳이 지배 체계를 갖춘 호씨 성의 세력 근거지였음을 알 수 있다. 봉대산성은 서남해안의 중요한 해안 지역 방어 및 문물 교류 거점을 지키는 행정적 배후지로서의 기능을 지니고 있었으며, 산성 앞에 있는 임치(臨淄)의 경우도 중국 제나라의 수도 이름과 동일한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중국과 문물을 교류하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과 근거를 통해 보았을 때 서남 지역의 해안과 몽탄 유역의 영산강 지역을 통치하고 지배하던 호족 세력, 즉 해상을 기반으로 하는 강력한 정치집단이 봉대산성을 중심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려 말·조선 초의 해상 세력과 왜구들의 어지러운 역사적 환경은 조선시대 공도화 정책에 의해 서남해안 지역 해상 세력들이 급격히 쇠퇴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아무튼 무안 지역은 상당히 오랜 기간 고대부터 중세까지의 영산강 유역과 서남해안 지역의 해상을 기반으로 한 세력들이 이 지역을 지배했을 것으로 보인다.

2. 조선시대의 무안
비교적 역사적 기록이 잘 남겨져 있는 조선시대에 들어서면 무안은 기존 고려 시대에서부터 자리 잡았던 무안박씨와 더불어 여러 성씨는 중요한 격변기의 시기에 많은 부침을 겪게 된다. 초기에는 나자강을 중심으로 나주나씨가 들어올 수 있었으며, 조선 초기 사육신과 관련된 대구배씨 등이 입향하였다.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하여 나주정씨 일가들이 무안 지역에 자리 잡았으며, 조선 후기에는 본격적으로 다양한 성씨들이 무안에 들어왔다. 이는 간척과 관련된 경제적 기반 조성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16세기~18세기) 서해안은 간척으로 경제적 기반을 쌓은 가문이 등장(예: 해남윤씨)하였으며, 주로 지방 사족들의 경제적 기반 형성과 연관되어 무안 지역에도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성씨 입향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조선시대 역사적 변화의 중요한 시기에 ‘무안’은 여러 인물을 배출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본격적 지방 행정 체계의 마련을 위해 나자강(羅自康)이 현감으로 파견되었는데, 이는 기존에 귀족이 지방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치소를 중심으로 중앙 행정조직의 통제를 받는 중앙집권적 통치 체계가 마련되었음을 보여준다.

조선 중기로 넘어오면서 각종 사화의 갈등 속에서도 서경덕의 문인인 정개청(鄭介淸, 1529~1590)을 중심으로 지역 학맥이 형성되었고, 자산서원을 거점으로 지역 선비들의 학문공동체를 구성하였다. 또한 왜란(倭亂)과 호란(胡亂) 시기에는 수많은 지역 인물들이 의병 활동을 통해 분연히 떨쳐 일어났으며, 전쟁 이후 사회적 변화에 대해 응답하여 임상덕(林象德, 1683~1719)은 ‘실학(實學)’을 기초로 역사서인 『동사회강(東史會綱)』을 저술하며 새로운 역사 인식을 정립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시·서·화에 능통했던 초의(艸衣) 장의순이 차(茶) 문화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예술세계의 큰 획을 그었으며, 19세기 일제의 국권침탈기에 대구배씨 배상옥, 나주김씨 김응문형제, 해주최씨의 삼의사 등은 의기(意氣)를 바탕으로 동학(東學)사상을 수용하고 항일 투쟁에 나섰다. 이후 항일 의병 투쟁과 광주학생독립운동, 독립운동 후원 활동 등을 통해 무안 지역 선비들은 지속적으로 저항의 정신을 이어갔다. 이처럼 무안은 기존 역사서에서 기록된 ‘변방 지역’이 아닌 고대에서 중세까지에 해상 세력의 중심지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역사의 변곡점마다 지역 정체성을 바탕으로 주도적 역량을 보여준 지역이다. 그간 무안에 대한 인문연구가 활성화되지 못해 학술 성과가 부족하여 밝혀지지 않은 사실들이 있을 뿐, 결코 지역의 역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3. 지역 정체성의 현대적 의의
오늘날 지역 정체성을 강조하며 자산을 활용해 지역문화를 활성화하려는 흐름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전북 고창은 ‘한반도의 첫 수도’, 안동은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진도는 ‘예향의 본향’을 내세우며 지역의 역사·문화적 특성을 브랜드화하고 있다. 이는 곧 무안 또한 고유한 역사적 자산을 발굴하고, 이를 시대적·보편적 가치로 확장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다만 지역의 특수성과 변별성을 강조하되, 그것이 보편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점은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역 이기주의로 흐를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안 지역 또한 다양성과 융합적 시각을 바탕으로 한 역사·문화 연구를 통해 지역 정체성을 확립해야 될 시점이다. 이제 우리는 오랜 기간 축적된 지역의 역사·문화적 역량을 다시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무엇인가를 도모해야 한다.

Ⅲ. ‘전이지대’로서 무안의 문화적 정체성 모색

영국의 사회인류학자인 에드몬드 리치(Edmund Leach, 1910~1989)는 버마 ‘카잔족’의 의식과 의례를 분석·설명하기 위한 이론적 도구로 다음 〈그림 4〉와 같은 ‘전이지대(Liminal Zone)’의 모형을 적용하여 카잔족의 통과의례와 축제 등의 문화 형태를 해석하였다. 무안의 경우에도 지리적 특성을 바탕으로 하여 형성된 다양한 문화적 현상과 집단적으로 창작된 콘텐츠를 이 모형에 적용함으로써, 무안 문화에 대한 정체성과 특성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무안 반도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해석, 나아가 새로운 가치 발굴을 위해 고려해야 할 점은 이곳이 지리적으로 바다와 육지의 중간에 위치하여 해상 문화와 육상 문화가 교차하며 변화와 전이의 임계 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지리적인 환경은 오랫동안 삶을 영위해 온 주민들의 문화적 행태를 규정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곧 무안은 육지와 바다의 경계에 놓여 있음으로써, 다른 지역과 달리 무안만의 내재적 창발성을 발휘하여 문화를 새로운 형태로 전이시키는 특성을 보인다. 이러한 특성은 생태적 다양성과 같은 문화적 다양성으로 연결된다. 즉, 무안은 경계 지역으로서 축적된 개방성을 바탕으로 육지와 바다라는 서로 이질적인 문화들을 새로운 형질로 변환·재창조해 온 ‘문화적 전이지대’이다. 바다와 육지의 다양한 문화를 받아 새로운 형질로 변이하는 ‘임계지점’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리치’가 버마의 소수민족을 분석하기 위해 만든 모형은, 무안 지역의 문화적 특성을 새롭게 설명할 수 있는 유효한 분석 틀로 작용한다. 이틀에 따르면, 무안은 ‘리치’가 말하는 ‘전이지대’로 이해할 수 있다.

1. 생태적 전이지대와 문화적 전이지대
해수와 담수의 경계지대인 ‘기수역’은 자연 생태적 전이지대라 할 수 있다. 기수역은 생태계의 ‘종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해수와 담수가 교차하는 환경은 다양한 생물들의 성장을 가능케하며, 그 다양성에 기초하여 여러 종이 분포한다. 따라서 기수역은 단일 생태계를 넘어서는 독특한 생태적 특성을 지니게 된다. 이와같이 생태적 전이지대가 종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듯, 문화적 ‘전이지대’ 역시 ‘문화 다양성’을 가장 중요한 속성으로 한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바다와 육지를 아우르며 새로운 문화로 재창조되는 공간이 ‘무안’이며, 이러한 ‘다양성’과 문화를 폭넓게 수용하는 ‘탄력성’을 지닌 지역이라고 ‘무안’을 정의할 수 있다. ‘무안’은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 고유한 문화들이 서로 역동적으로 교류하며 창조되는 공간이다. ‘다른 것’과 ‘같은 것’들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여 새로운 문화와 예술들을 만들어내는 ‘매개 공간’이 ‘무안’이다. 이는 당대적 패러다임을 전환하며 변화를 이끄는 큰 흐름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더 나아가 이러한 창조적 흐름은 무안에만 머물지 않고 주변 서남해안과 영산강 지역으로 확산되며, 나아가 남도만·동중국해 등 주변의 해양 문화권으로까지 확장되어 새로운 시대정신과 공유하고 발전하게 된다.

2. ‘무안’ 전이지대 문화의 특성과 가치
이런 ‘다양성’과 ‘탄력성’에 기반한 문화적 환경은 정신을 고양시키고 기분을 북돋우는 ‘고양(高揚)적 문화’로 형성되며, 가장 아래쪽으로 나를 내려놓고 무아(無我)적 관조를 통해 고통과 번뇌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신을 찾는 ‘하방(下方)적 문화’로 구현된다. 나아가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는 ‘중도(中道)적 지향’을 통해 균형 있는 문화적 가치를 형성하고,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어 다양한 형식의 ‘교류적 문화’로 재창조된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과정은 존재의 가치를 기반으로 서로 상생하는 평화의 길을 찾는 ‘생명의 문화’로 귀결된다. ‘무안’의 ‘전이지대 문화’는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성격을 지니며, ‘무안’의 지리적 생태적 특성에 기반한 다양성, 탄력성, 개방성을 품은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는 곧 ‘무안’만의 정체성과 가치 있는 문화적 자산임을 알 수 있다. 아래 그림은 문화 전이지대 산물을 표현한 것이다.

3. ‘무안’ 전이지대의 문화적 산물
무안 문화는 ‘전이지대의 산물’로서 물 안과 물 아래에서 고양의 길을 걷다가 하방의 길로 내려가고, 때로는 중도의 길로 향하며, 생명의 궁극을 아우르는 균형 있는 문화를 생산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초의선사의 다도와 시·서·화의 예술세계가 탄생했으며, 오늘날 웰니스산업과 결합하여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자원으로 확장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초의선사 탄생지와 인근 지역의 문화자산들과 연계하여 한국적 특성을 살린 ‘전통차 산업 관광특구’로 발전시킬 가치가 있다. 또한 ‘하방’의 차원에서 본디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존중함으로써 화합과 평화를 유지하는 ‘낮아짐의 미학’이 구현된다. ‘각설이·품바’는 자발적 낮춤을 통해 세상을 다시 바라보는 겸손과 존중의 문화를 보여주며, 이는 무안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확인되는 문화현상이다. 나아가 유럽의 집시, 인도의 바울 등 세계적 하방 문화와도 연결될 수 있어, 무안의 대표적 문화 콘텐츠로서 축제나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

‘무안’이 지닌 또 하나의 궁극적 지향은 ‘생명’이다. ‘무안’은 본디 ‘생명’을 지탱하는 터전이자 ‘생명의 흙’을 품은 땅이다. 대륙과 해양의 상호작용으로 형성된 ‘황토’는 오랫동안 생명을 영위하는 건강한 식량을 생산해 왔고, 우리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바다 ‘갯벌’은 풍부한 해양생물을 길러내어 인간의 삶을 지탱하였다. 낙지, 감태, 김 등은 그 대표적인 자원으로 ‘무안’은 ‘생명의 보고(寶庫)’로서, ‘생명의 흙’으로 존재가치를 발현하였다. 무안은 이러한 생명의 흙을 활용하여 ‘무안분청사기’를 제작하였다. 일본의 ‘야마다만키치로(山田萬吉郞, 1902~1992)’는 『미시마하케매(三島刷毛目)』에서 ‘무안분청사기’가 중국 거록 지역의 ‘자주요’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일본 규슈 지역에까지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무안에 30여 년간 거주하며 귀얄문 계통 도자 출토품을 수집·조사하였고, 이를 통해 ‘무안’과 ‘강진’을 중심으로 분청사기 변천 과정을 기록하였다. 특히 ‘무안’은 반덤벙 귀얄문에 특화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과도 부합하며 관급자기를 제작하는 중급 도자소 2곳이 기록되었던바, ‘무안’이 분청사기의 주요 산지였음을 알 수 있다. 기록에서 자기소로 기록된 주동(周洞)은 현재까지 비정할 만한 지역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도기소로 기록된 청천동(淸川洞)은 현 무안군 청계면 청수리 청수동 마을로 생각된다.

‘무안’은 ‘전이지대’로서의 문화적 다양성과 생명성을 바탕으로, 이 땅에서 살아오는 사람들의 ‘속살 같은 이야기’를 균형 있게 중도(中道)로 엮어, 지역만의 특화된 문화를 형성해 왔다. 조선 후기 이 지역에 전승된 ‘판소리’는 무안 출신 강용환(姜龍煥)이 협률사 활동을 통해 ‘창극’으로 재창조하였으며, 농민들의 삶을 반영한 ‘무안 농악’은 호남우도농악의 전승체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상동 들노래’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경계를 넘어서며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계승되고 있다.

Ⅳ. ‘전이지대’ 무안의 인문 연구 방향

우리는 그동안 ‘내륙적 시각’에서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고 연구해 왔다. 내륙 중심의 지도에서 서남 지역과 무안을 바라보면, 이 지역은 대체로 ‘변방’으로 인식된다. 이는 한국 역사교육이 지닌 균형감 없는 ‘과오’라고 할 수 있다. 문자로 기록된 사료 중심의 실증적 연구 방법이 가져온 한계로 인해, 내륙적 시각에서의 역사 인식은 우리 지역을 마치 활용할 수 있는 역사·문화자원이 없는 곳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역 인문 자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우리가 ‘알아내지 못한 것’일 뿐이다. 기존의 시각은 ‘반도적 사관’에 기반한 ‘내륙 중심’, ‘왕권 중심’의 역사적 사관에 치중되어 있었다. 이제는 이를 넘어서, 보다 ‘다면적인 시각’으로 역사와 문화를 해석할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특히 내륙 시점만이 아닌 해양에 대한 시각으로의 관점의 확산이 필요하다. 기존 내륙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 해양에서 내륙을 보는 폭 넓은 관점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이런 시각은 지금까지 풀리지 않았던 ‘역사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연구 방법이 될 것이다. 먼저 해양이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과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에 대한 해석과 가치 탐구가 선행되어야 하며, 이런 바탕 위에서 해양 연구로 확산되어진다면, 그동안 밝혀내지 못했던 서남해안의 역사적 실체를 확인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특히 호남지역에서는 기존 역사관으로는 파악하지 못했던 다양한 역사적 사실들이 밝혀지고, 해양과 강변에서 이룬 여러 문명적 현상들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윤선’은 바다 해류를 통한 ‘물골론’을 주장하며, 이는 단순히 내륙 사관을 뒤집는 일시적인 공염불이 아니라 강과 바다를 하나의 ‘틀거리’로 인식하는 이른바 ‘갱번론’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쿠로시오의 해류를 통해 흘러드는 지류와 갱번의 흐름 속에서 ‘대륙론’과 대립되는 ‘해륙론’의 담론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논의는 영산강을 새롭게 인식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영산강은 본래 나주 영산포에 국한된 명칭이었으며, 그 외의 넓은 영역은 사실상 광대한 바다였다. 영산포, 구진포, 영암 남포 등은 수많은 지류를 가진 바다였음을 뜻한다. 우리 선조들이 영산강을 ‘강’이 아니라 ‘바다’로 인식했던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하천이 아니라 서해를 관통하는 문명의 소통로이자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남도의 문화 역량을 모아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중간 지점이자 교류·융합·창조의 임계점, 즉 ‘전이지대’가 바로 ‘무안’이었다. 크게는 전라남도, 좁게는 무안만을 서로 연결하는 교통과 교류의 공간으로, 서남해안과 영산강의 해양을 통해 내륙을 넘어가는 ‘문명적 통로 기능’을 담당했던 것이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하였듯, 기존의 내륙에서 해양을 바라보는 시각을 넘어, 해양에서 내륙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러한 시각이 있을 때만 전라남도, 서남해안, 무안 등지에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다양한 문명사적 산물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쿠로시오 해류를 중심으로 흐르는 해양에서 내륙으로 스며드는 기점을 문화권의 설정지로 삼았다. 서남해안과 영산강을 중심으로 사람들은 다양한 문화를 생산하고 소비하며 살아왔다. 내륙과 해양을 잇는 경계 지점을 물과 뭍을 연결하는 소통의 길로 해석할 때, 비로소 지금까지 인식하지 못했던 역사적 큰 흐름과 변화의 물결을 읽을 수 있다. 나아가 오늘날 도래한 ‘해양의 시대’에 대응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도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가 당나라로 들어갈 때는 배가 모두 영암군 바다에서 떠났다. 하루를 타고 가면 흑산도에 이르고, 이 섬에서 하루를 타고 가면 홍의도에 이르며, 또 하루를 타고 가면 가계도에 이르고, 여기서 북동풍으로 사흘을 타고 가면 곧 태주령파부 정해현에 이르고, 만약 순풍이면 하루에 이른다. 남송이 고려와 통하는 데도 또한 정해현 해상에서 배를 출발시켜 7일에 고려 국경에 상륙하였는데, 그곳이 곧 영암군이다. 당나라 때 신라인이 배를 타고 당에 들어갔을 때도 강나루를 통한 중요한 나루와 탁이 선박의 왕래가 계속되었다.

이중환의 『택리지』 중 위 대목을 인용한 무안향토문화총서(무안문화원 간) 제10호 『무안의 길』(박관서, 조기석 편저)은 무안반도의 지형적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무안방언사전』(무안문화원 간)을 쓴 오홍일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우리 고장 무안의 땅 모양은 영락없이 한반도 중부 이남의 지형을 축소해 놓은 듯, 이를 방불케 하는 반도이다. 이 반도의 중심 부분은 이것도 한반도의 지세를 닮아 산들이 동쪽으로 치우쳐 있고 그 산들이 남북으로 연달아 이어져서 마치 반도의 등뼈 구실을 하는 점도 한반도와 닮았다. 거기에 서북쪽으로 뻗어 나간 땅은 이 역시 작은 반도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다시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하나는 남쪽으로 고개를 돌려 망운 반도가 있고 다른 하나가 가느다랗게 이어지다 힘을 불끈 쥔 주목처럼 서북쪽으로 뻗쳐나간 것이 임치 반도이다. 그러다 보니 산은 예로부터 삼남의 명혈의 하나가 있다고 알려진 승달산이 한 가운데에 버티고 서서 여러 산들을 거느리며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국이 좁다 보니 반도 안에는 강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큰 하천이 없는 형편이다. 그래도 한반도 중부 이남의 4대강 중 하나로 여러 고을에 걸쳐 흐르는 영산강은 그 마지막에는 무안반도의 등허리를 따라 흐르면서 우리의 삶에 크게 영향을 주고 있으니, 무안의 강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영산강을 ‘무안의 강’이라 제언하고 있다. 또한 ‘임치진’을 반도라 하였다. 제나라의 수도 임치(臨淄)와 동일한 한자를 사용하는 무안의 임치(臨淄)는 서로 어떤 관계가 있었던 것일까? 중국을 횡단하는 “남쪽 바닷길”과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승달산으로 향한 500명의 중국 승려들의 경로와 정명 스님의 법천사를 창건하기 위한 경로, 근대에 있어 강정리 ‘코쟁이 언덕’에 들어왔던 ‘이양선의 경로’ 등은 모두 해양 교통로와 관련한 다양한 의문을 품게한다. 무안의 지명유래인 ‘물아혜’는 ‘물의 안쪽’이든 ‘물의 아래’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땅이라는 의미를 담는다. 이는 곧 무안이 반도의 지형을 지녔음을 뜻한다. ‘물아래’라는 본래 의미는 무안 반도의 위쪽이 바다라는 뜻으로, 실제로 과거에는 영암 남포, 나주 영산포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며 조수간만의 차가 뚜렷했던 곳이다. ‘물아래’라는 지명은 그러한 생태적 사실에 근거한다. 이는 곧 무안 인문 연구의 방향이 왜 해양에서 내륙을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해양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인문 연구가 ‘거시적’ 접근이라면,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심화하기 위해서는 ‘미시적’ 관점에서의 탐구가 필요하다. 그 출발점은 지역에서 살아온 인물들에 대한 연구이다. 인물 연구를 통해 우리는 그들이 추구했던 ‘사유’와 ‘인식’의 태도를 ‘앎’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그들이 삶을 어떻게 인식하고 실천했는지를 ‘삶’의 차원에서 성찰할 수 있다. 또한 당대의 역사·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그들이 보여준 ‘놂(놀다)’의 의미를 탐색함으로써, 지역의 ‘정체성’을 인문학적으로 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 인물이 지닌 ‘사상’과 ‘지혜’를 면밀히 살피고 학습해야 한다. 이러한 지역 인물 연구는 개별 인물의 사유와 실천을 통해 우리 지역에 오랫동안 축적되어 온 ‘삶(살다, 사회)’, ‘앎(알다, 지식)’, ‘놂(놀다, 문화)’의 총체를 파악하게 한다. 더 나아가 지역이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실현해 온 내재적 가치, 곧 ‘지역 정체성’의 본질을 밝히는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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