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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대화
두 번째 대화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
George Berke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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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뜨거움과 차가움, 단맛과 쓴맛은 특수한 종류의 쾌락과 고통이 아닌지를 물었네. 그에 대해 나는 단순하게 그것들은 특수한 종류의 쾌락과 고통이라고 대답했네. 그러나 나는 이렇게 구별했어야 했네. 우리에게 지각되는 것으로서의 저 성질들은 쾌락이거나 고통이지만, 외적 대상들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그것들은 그렇지가 않다고 말이네.
그러나 이제는 분명하게 아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자신의 정신 속에 관념들을 형성하는 일뿐임을. 물론 나는 내 자신의 생각들 속에 나무나 집 또는 산의 관념을 떠올릴 수 있네만, 그것이 전부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모든 영적 존재자의 정신 외부에 존재하는 그것들을 표상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네. 서슴없이 말하게나, 사정이 이렇지 않거든 말일세. 즉 맨 처음에는 물질적 실체에 대한 믿음에서부터 출발해, 자네는 직접적인 대상들이 정신과 무관하게 존재한다고 했다가, 다음에는 그것들을 원형들이라고 했다가, 그 다음에는 원인들, 그 다음에는 도구들, 또 그 다음에는 기회들, 마지막에 가서는 어떤 것 일반이라고 했는데, 풀어서 말하면 이것은 무(無)를 의미하는 것이네. 결국 물질은 무라는 결론이 나오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하일라스? 자네가 밟아온 전 과정의 실질적 내용이 이렇지 않은가?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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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대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책 제목이 말하고 있듯이 하일라스와 필로누스가 사흘 동안 나눈 대화의 기록이다. 여기서 ‘하일라스’란 ‘물질’ 또는 ‘질료’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hyle’를 줄기 삼아 만든 이름이고, ‘필로누스’는 ‘누스(지성)를 사랑한다’는 의미의 그리스어 ‘philo-nous’를 음역해 만든 이름이다. ‘하일라스’는 ‘유물론자’의 대명사이고, ‘필로누스’는 버클리를 대변하는 ‘비(非)유물론자’의 은유인 셈이다.
하일라스는 유형(有形)의 세계의 진리성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한편, 유형의 세계에 대한 최근의 과학적 이론과 철학적 이론을 거칠게나마 알고 있을 만큼 충분히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가 주장하는 견해는 지각의 직접적 대상은 주관적 관념이라는 것이다. 주관적 관념이란 무엇인가? 유형적인, 감각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독립적인?예외적으로 신에게는 의존적인?실재들의 인상 또는 심상이 바로 주관적 관념이다. 신에 대한 믿음과 그리스도교적 계시에 대한 믿음은 하일라스와 필로누스가 공유하는 부분이다. 필로누스가 내세우는 견해는 버클리 자신의 견해다. 감관에 직접적으로 지각되는 세계는 유일하게 존재하는 유형의 세계이며, 그것의 전체적 존재 양식은 의식의 대상으로서 임시적으로는 우리의 대상이 되지만, 항구적으로는 신의 의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첫 번째 대화〉에서는 비유물론의 논변이 시작된다. 그에 따르면, 정신과 유리된, 감각의 대상이나 그 비슷한 것은 없다. 유형의 사물은 관념이다. 물질적 실체에 대한 믿음은 감각적 사물의 실재성에 대한 부정을 함축한다. 〈두 번째 대화〉에서는 우리의 관념의 유래가 논의된다. 그에 따르면, 신이 관념의 유일한 원인이다. 물질 또는 물질적 실체는 관념에 대해 불필요하거니와, 그 존재는 불가능하기까지 하다. 이로써 비유물론을 위한 논변이 매듭지어진다. 〈세 번째 대화〉에서는 각양각색의 반론이 논박된다. 앞서의 대화에서와는 달리, 하일라스가 질문자가 되어 반론을 제기하고 필로누스가 그것을 논박하는 식으로 대화가 진행된다. 비유물론을 위한 핵심적인 논변은 〈첫 번째 대화〉와 〈두 번째 대화〉에 전개되어 있어 마지막 〈세 번째 대화〉는 보론(補論)의 성격을 띤다. 그래서 비유물론의 이해를 위해서는 앞의 두 대화만 읽더라도 충분하다. 마지막 대화를 생략하고 앞의 두 대화만 번역한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