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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申絢의 가서家書, 하권
조선후기 한 사대부가의 이야기 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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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제10막 큰형 신진, 부솔(副率)에 임명되어 상경하다ㆍ9
제11막 큰형 신진, 신녕현감(新寧縣監)에 부임하다ㆍ107
제12막 큰형 신진, 신녕현감을 그만두고 귀향하다ㆍ243
제13막 신현, 강화유수에 임명되다ㆍ327
제14막 강화유수 임기를 마치고 사촌으로 돌아오다ㆍ355
제15막 기타 별지(別紙)들ㆍ377

원문ㆍ457

부록
ㆍ신현 연보 ㆍ542
ㆍ신현 가서(家書)에 나오는 인명ㆍ550
ㆍ신현 가서(家書)에 나오는 지명ㆍ585
ㆍ가계도 ㆍ608

지은이ㆍ옮긴이 소개ㆍ610

《상권 목차》
서설
제1막 신현, 서울에 나와 혼례를 치르다
제2막 과거에 급제하고 초계문신이 되어
제3막 순천부사에 부임하다
제4막 다시 경관직(京官職)에 임명되어
제5막 강원도관찰사에 부임하다
제6막 다시 경관직에 임명되어 서울로 오다
제7막 성천부사(成川府使)가 되다
제8막 사촌社村에서 아버지의 영궤(靈几)를 모시며
제9막 탈상(脫喪)하고 다시 일상으로
원문

《해제 목차》
신현 가서의 주요 공간ㆍ상권30 | 신현 집안의 일기들ㆍ상권38 | 신현의 문과 급제ㆍ상권86 | 초계문신ㆍ상권106 | 신현의 걸양ㆍ상권328 | 성천의 가족 모임ㆍ상권424 | 신대우의 유언ㆍ상권438 | 사촌의 가옥 건축ㆍ상권450 | 신택하, 신성, 신대우의 묘비 건립ㆍ상권524 | 사촌 집과 서울 집 사이의 왕래로ㆍ상권568 | 신대우의 초상 제작ㆍ상권596 | 신현 일가의 전장(田莊)ㆍ하권224 | 『완구유집』의 출판ㆍ하권284

저자 소개 4

申絢

조선 정조ㆍ순조 대의 문신. 호는 실재(實齋). 삼경(三經) 공부를 평생의 과업으로 삼아 50년간 매일 독서와 암송을 멈추지 않았다. 1794년 문과 급제 후 초계문신으로 발탁되어 정조의 남다른 총애를 받았다. 정조는 그의 인품을 두고 ‘질실(質實)ㆍ진실(眞實)ㆍ순실(醇實)’하다 평했으며, 그의 독특한 서체와 뛰어난 암송 능력을 높이 샀다. 순천부사, 강원도관찰사, 성천부사, 강화유수 등을 역임하며 합리적이고 빈틈없는 일 처리로 백성의 고충을 해결했다. 아울러 아버지 신대우(申大羽)를 모시고 두 형과 함께 집안을 경영하는 데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큰형 신진(申縉)이 가문의
조선 정조ㆍ순조 대의 문신. 호는 실재(實齋). 삼경(三經) 공부를 평생의 과업으로 삼아 50년간 매일 독서와 암송을 멈추지 않았다. 1794년 문과 급제 후 초계문신으로 발탁되어 정조의 남다른 총애를 받았다. 정조는 그의 인품을 두고 ‘질실(質實)ㆍ진실(眞實)ㆍ순실(醇實)’하다 평했으며, 그의 독특한 서체와 뛰어난 암송 능력을 높이 샀다. 순천부사, 강원도관찰사, 성천부사, 강화유수 등을 역임하며 합리적이고 빈틈없는 일 처리로 백성의 고충을 해결했다.

아울러 아버지 신대우(申大羽)를 모시고 두 형과 함께 집안을 경영하는 데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큰형 신진(申縉)이 가문의 살림과 의례를 도맡아 관리하고 작은형 신작(申綽)이 평생 아버지를 봉양하며 유가 경전을 깊이 연구했던 것에 비해, 자신은 일찍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감으로써 가정의 경제를 지탱하고 가문의 성세를 일구는 데 기여했다.

학문적으로는 경학에 정통하여 의견이 분명하면서도 굳게 실행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가문을 경영하거나 관직에 임하는 삶의 태도는 언제나 소박하고 진실하며 세심하면서도 합리적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충실했던 전형적이고 모범적인 사대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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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縉

삼형제 중 장남으로 가문의 살림과 의례를 도맡아 관리한 집안의 버팀목이었다. 환갑이 넘어 신녕현감에 부임했으며, “편안하고 담박하여 속된 벼슬아치가 아니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번잡한 관직 생활보다는 점잖은 선비로서의 삶을 지향하여 조기에 낙향했고, 80세까지 장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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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綽

신현의 작은형. 아버지 신대우를 평생 봉양하며 유가 경전을 깊이 연구했다. 대표 저서 『시차고(詩次故)』는 훈고학의 정수로 평가받으며, 예서(隷書)에도 뛰어나 아버지의 문집인 『완구유집(宛丘遺集)』의 책판 글씨를 직접 썼다. 1809년 늦은 나이에 과거에 응시하여 회시 장원을 차지했으나, 귀향길에 부친상을 당하여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이후 벼슬을 단념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전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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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를 통하여 조선시대를 연구하는 인문학자. 서강대학교 사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부터 3년간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문을 연수하고, 1989년부터 2006년까지 고서, 고문서, 근현대서적을 소장한 현담문고(구 아단문고)에서 연구실장을 지냈다. 2007년부터 현재까지 가회고문서연구소를 열고 동학들과 고문서를 연구하고 있으며, 2013년부터 2020년까지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부교수로 재직했다. 동학들과 『옛편지 낱말사전』을 편찬하고, 『조성당일기』 『윤이후의 지암일기』 등을 옮겼다. 경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데라우치 문고(일제의 초대 조선총독
고문서를 통하여 조선시대를 연구하는 인문학자. 서강대학교 사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부터 3년간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문을 연수하고, 1989년부터 2006년까지 고서, 고문서, 근현대서적을 소장한 현담문고(구 아단문고)에서 연구실장을 지냈다. 2007년부터 현재까지 가회고문서연구소를 열고 동학들과 고문서를 연구하고 있으며, 2013년부터 2020년까지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부교수로 재직했다.

동학들과 『옛편지 낱말사전』을 편찬하고, 『조성당일기』 『윤이후의 지암일기』 등을 옮겼다. 경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데라우치 문고(일제의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수집한 조선시대 전적)의 서첩 자료를 석문, 번역, 해제한 『한마고전총서』(2~24집)를 완간했고,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소장 『근묵』 등 공공기관에 소장된 조선시대의 편지와 문서들을 많이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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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1월 30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612쪽 | 153*224*35mm
ISBN13
9791155506936

책 속으로

ㆍ차례 때에 예(醴)를 사용하는 것은 끝내 의리(義)가 없습니다. 경서에 오직 제사에만 술을 마시라는 내용이 있고, 예(禮)에 술이 빠진 제사라는 것은 없습니다. 상국(相國)이 흉년을 구휼하기 위해 꺼낸 졸렬한 계책인데, 어찌 민가 제례의 통상적인 법도를 규제할 수 있겠습니까. 서울에도 그 명을 따르지 않는 집이 많은 것 같습니다. 초하루와 중양절에 법대로 술을 빚을 순 없겠지만, 누룩과 차조를 써서 사나흘 만에 빚는 방법으로 하고 꿀을 가져다 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305 금주령을 따르지 않는 집이 서울에도 많습니다’(1814년 8월 23일 서울의 신현이 사촌의 신작에게 보낸 답장」 중에서

ㆍ이곳은 여전합니다. 소(小) 비(婢)가 아픈 것 또한 즉시 무사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백동(柏洞) 며느리(신명호의 처)가 그새 며칠 동안 심하게 앓다가 지금은 조금 나았지만, 아직 평소 같지는 않습니다. 이런 상태이니 한번 진찰하여 임신인지 아닌지 확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任) 의원은, 순업이 오는 길에 들러서 물으니 충주에 갔다고 하므로, 오게 할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김(金) 감찰(監察)은 요즘 혹 서울에 있습니까? 그를 불러올 수 있으면 아주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安) 생(生), 김(金) 순장(巡將), 임(林) 생(生) 중 누구 의술이 나은지 모르겠지만, 미리 약속하여 불러 오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 「‘347 며느리를 진찰할 수 있는 서울의 의원들’(1816년 11월 10일 사촌의 신현이 서울의 신진에게 보낸 답장」 중에서

ㆍ갓난아이(신식(申植))는 며칠 전 가서 보았습니다. 귀가 높게 단단히 붙어 있고 귓바퀴가 또렷하며, 눈은 길고 광채가 번쩍이며, 코는 높고 인중은 넓습니다. 그 기쁨이 직접 보기 전보다 갑절이나 되었습니다. 어제는 동네 여러 공들이 와서 모여 하루 종일 있다가 돌아갔는데, 아침까지도 술기운 때문에 힘듭니다.
--- 「‘355 갓난 손자를 처음 본 기쁨’(1817년 4월 21일 서울의 신현이 사촌의 신작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ㆍ다만 이 시기에 세금 독촉(최과(催科))을 하시느라 전에 없이 심신이 모두 피로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송정(訟庭)에서 일어나는 소란 역시 하나같이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영남 백성이 본래 순박하고(椎朴) 뻣뻣하지만(强項), 오히려 호남 사람의 교활함보다 낫습니다. 이렇게 점점 다듬어 가면, 끝내 관(官)과 민(民)이 서로 친숙하고 편안하여 일변된 풍속을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 「‘376 뻣뻣해도 순박한 영남 백성’(1817년 11월 11일 사촌의 신현이 신녕의 신진에게 보낸 답장」 중에서

ㆍ제수(신명연의 처)가 순산한 것은 기뻐할 만하지만, 딸을 낳은 것이 아들을 낳는 것만 못하여 서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388 순산은 기쁘지만, 딸을 낳아 서운합니다’(1818년 2월 19일 신녕의 신명호가 서울의 신현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ㆍ한(韓) 리(吏)를 결단코 내친(汰去) 것은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차후에 아랫것들이 스스로 믿는 구석이 있다고 여겨 어렵지 않게 죄를 저질러도, 입을 다물고 넘겨야 합니까? 조롱하고 비웃고 나무라고 가르치는 등의 말은 매우 편치 않습니다. 제가 세심하지 못하여 매사를 직선적으로 처리하여 이런 잘못이 있게 되었습니다. 조금 꾸짖는 것이 나았습니다. 대체로 이 고을의 풍속이 지극히 완고하고 억세어 기호(畿湖) 지방과 다릅니다. 관아에서 일단 처결한 문제를, 다른 데 가서 부탁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는 매우 아름다운 풍속입니다. 그런데 유독 이놈은 은연중에 마치 믿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어렵지 않게 죄를 저질렀으니, 어찌 입을 다물고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 「‘389 아전을 다루는 법’(1818년 2월 중하순 신녕의 신진이 보낸 편지의 초본」 중에서

ㆍ저는 이렇게 급히 저물어가는 연말을 만나 이렇다 할 재미있는 일이 하나도 없지만, 최근에 큰형(신진)이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와, 형제가 방바닥에 단란하게 모여 앉은 것이 즐겁고 다행스런 일입니다.

--- 「‘444 세밑에 형제들이 단란하게 모여’(1819년 12월 24일 사촌의 신작이 어느 관찰사에게 쓴 편지 초고」 중에서

출판사 리뷰

정조가 총애한 선비, 신현의 오디세이

이 책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주인공은 단연 신현이다. 정조(正祖) 임금이 “사서삼경을 자기 말처럼 외는 사람은 처음 봤다”라고 감탄하며 “오늘의 복생(伏生, 진나라 분서갱유 때 경전을 지켜낸 인물)”이라 칭송했던 인물이다. 그는 초계문신 시절부터 정조의 남다른 총애를 받았다. 정조는 신현의 수수하고 진실하며 순박한 성품을 사랑하여 곁에 두고 책의 교정과 편집을 맡겼으며, 심지어 그의 독특한 글씨체까지 아껴 그에 대해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눌 정도로 깊은 신뢰를 보였다. 신현은 임금이 내려준 ‘질실(質實)ㆍ진실(眞實)ㆍ순실(醇實)’이라는 평가를 평생 가슴에 품고, 자신의 호를 ‘실재(實齋)’라 지으며 수수하고 진실한 사대부의 모범으로 살았다.
『신현의 가서』에는 그의 화려한 관직 생활 이면의 고뇌가 생생히 담겨 있다. 과거 급제를 위해 매진하던 젊은 시절의 열정에서부터, 암행어사와 지방관(순천부사, 강원도관찰사, 강화유수 등)으로서 백성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분투했던 실무자로서의 면모까지, 조선후기 한 사대부의 인간적 안신입명(安身立命)이 편지 곳곳에 녹아 있다.

이 책의 메인 플롯은 바로 이 신현의 일평생을 따라간다. 아버지를 모시고 강화도에서 글을 읽던 그가 서울에 나와 1782년 4월 22일 혼례를 올리는 무대가 제1막으로, 조선시대 사대부의 일생에 가장 중요한 일이 과거와 벼슬이었듯, 여러 관직을 거치고 거처를 옮길 때마다 새로운 인생사의 무대가 조성된다. 1826년 5월 1일 강화유수에서 체직(遞職)되어 일찍이 아버지가 조상 묘역 가까운 데 마련해둔 일가의 저택이 기다리는 사촌(社村)으로 돌아오는 게 종막이다. 한 인간의 귀환 서사시가 이렇게 편지들로 재구성되었다.

양명학 가풍 속에서 유지된 대가족 공동체의 훈기

이 집안의 뿌리에는 아버지 신대우(申大羽, 1735~1809)가 있다. 그는 19세에 가장이 되어 강화도 이주 후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용안실(容安室, 두 무릎만 들어갈 정도로 좁지만 편안한 방)’이라는 서당을 꾸려 자식들을 교육했다. 자식들에게 공부를 강요하는 대신, 스스로 밤마다 등불도 없이 별빛과 달빛에 의지해 경전을 외우고 솔선수범하며 가문을 일으켰다.

특히 그의 학문은 고답적인 이론에 매몰된 성리학이 아니라 양명학적 실천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양명학자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의 제자 윤순(尹淳)이 스승의 장례를 앞두고 제문(祭文)에 “이 마음을 보존하여 모든 이치에 정통하고, 이 마음을 진실하게 닦아 모든 일에 응한다[存此心而精萬理 實此心而應萬事]”라고 썼는데, 신대우 또한 하곡의 신도비문을 쓰면서 이 구절을 인용했다. 요컨대 이렇게 “천리가 내 양심에 다 갖추어 있어, 그 양심을 닦아 세상사에 응한다”라는 삶의 자세야말로 그의 품성을 잘 대변해준다.
또한 그의 이러한 단순명료한 가르침은 자식들의 글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그래서 이 집안의 편지에는 복잡하고 어려운 현학적인 표현이 없다. 그저 양심에 따라 부끄러움 없이 행동하고, 주어진 현실에 충실하라는 실사구시(實事求是)적 태도가 흐른다. 이는 지방관으로 나간 신현이 백성의 고충을 합리적으로 해결하고, 둘째 형 신작이 평생을 바쳐 경학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이러한 아버지의 밑에서 신대우의 세 아들도 각자 역할을 나누어 가문을 지탱했다. 장남 신진(申縉, 1756~1835)은 대가족의 살림과 제례, 조상의 묘역 조성을 책임지는 집안의 기둥 역할을 수행했다. 차남 신작(申綽, 1760~1828)은 평생 학문에 침잠해 중국 고대 훈고학의 정수만을 모아 엮은 『시차고(詩次故)』라는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 막내 신현은 중앙 정계와 지방관을 오가며 가문의 경제적ㆍ사회적 기반을 닦고 아버지를 봉양했다. 이들은 각자의 일기를 공유하고 편지로 사소한 것까지 의논하며 소통했고, 중대한 결정은 늘 대화로 풀어나가면서 자칫 몰락할 수 있었던 가문을 학문과 인품의 반석 위에 다시 세워놓았다.

고난 속에서 꽃핀 삼형제의 우애

이 책에서 감동적인 대목은 신진, 신작, 신현 삼형제가 보여주는 사려 깊은 우애다. 이들은 네 살 터울로 나란히 태어나 평생을 ‘대가족 공동체’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 지탱했다.

장남으로서 가문의 제례와 살림을 도맡았던 신진은 막내 신현이 벼슬길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집안의 궂은일을 모두 짊어졌다. 60세가 넘어 잠시 고을 현감을 지냈을 때조차 “속된 벼슬아치가 아니다”라는 평을 들을 만큼 점잖았던 그는 동생들의 학업과 사회적 성공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았다. 평생 아버지를 곁에서 모시며 훈고학에 침잠했던 신작은 신현의 정신적 지주였다. 정조가 “신현의 서체가 형 신작과 비슷하다”라고 언급할 정도로 두 형제는 학문과 예술적 취향을 공유했다. 신작이 과거 회시(會試)에서 1등을 하고도 아버지의 위독 소식에 전시(殿試)를 포기하고 밤낮으로 달려가던 그 지극한 마음은 삼형제 전체가 공유하던 가풍이었다.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가문을 실질적으로 일으킨 신현은 형들의 노고를 잊지 않았다. 아버지가 유언으로 “책만 볼 줄 아는 신작의 경제적 형편을 먼저 살펴라”라고 당부하자, 신현은 평생 형의 살림을 보살피며 경제적 안전판 역할을 자처했다. “형제가 한집에 사는 것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라던 아버지 신대우의 소망은 이렇게 이들 삼형제의 우애를 통해 완성된다.

특히 이 가서에는 아버지의 문집 『완구유집(宛丘遺集)』 편찬, 초상화 제작, 산소 조성과 비석 건립, 향제(鄕第) 건축 등의 사연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 사후 세 아들이 정성을 다하여 이 일들을 완성함으로써 아버지의 한평생을 정리하고 마감한 것이다. 그들이 이 일들을 하면서 편지로 세세히 의논한 사연, 예컨대 작업의 과정, 투입된 자재, 들어간 비용 등이 이 가서로 고스란히 남았다. 이를 통해 그들의 학문, 예술, 문화, 나아가 의식까지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별지 등으로 재구성된 조선후기 일상사의 백과사전

『신현의 가서』에서 눈여겨봐지는 또 다른 자료가 본지(本紙)와는 다른 종이에 사연을 써서 동봉한 편지지인 '별지(別紙)'다. 이 책에는 별지가 유달리 많다. 본지에는 가족의 안부를 비롯한 가정사를 썼고, 별지에는 그 밖의 잡다한 사연을 썼다. 예컨대 금전 문제, 농장 관리, 질병, 의약, 노비, 하층민, 탈것, 이동, 음식, 주택, 의복, 가재도구, 소문 등 일상생활의 모든 면을 포괄했다. 불미스러운 일, 신분이 낮은 사람에 관한 언급 등 스토리도 구구했다.

날짜는 따로 적혀 있지 않았다. 그래서 별지가 본지에서 분리되면, 시점 특정은 물론 이야기의 맥락도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신현의 가서에도 본지와 분리된 별지가 다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구체적인 생활상을 담고 있어 그냥 내버려두기에는 아까운 것들이다. 역자들은 이것들을 따로 모아 분류한 뒤 종막 뒤에 함께 실었다. 그 시대 사람들의 삶과 사회의 결을 세심하게 엿볼 수 있는 증거 자료로서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역자들은 각 편지들 틈이 가서 사연들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한 해제를 덧붙여놓았다. 또 신현 가서의 주요 무대들을 한 폭의 지도에 담아 생생한 공간감 속에서 이야기를 읽어 나가도록 도왔다. 하권 말미에 실린 인명과 지명의 목록까지도 세심하고 친절하다.

요컨대 『신현의 가서』는 조선이라는 사회를 주도했던 세력인 사대부가 실제로 어떻게 먹고, 자고, 고민하며, 생활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정직한 기록이다. 역자들을 대표하는 하영휘 교수(가회고문서연구소 소장)의 말처럼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실생활을 이처럼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는 흔치 않다." 사대부가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할 때 이 책은 두고두고 참고할 수 있는 자료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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