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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을 시작하며
1장 예술과 권력 그리고 서울 ‘부도’의 정체_경복궁/권력과 미술_남대문세무서 터/친일미술가가 만든 조각상_국립4·19민주묘지/정몽주 동상을 세운 이유_양화대교 북단/‘칼레의 시민’과 한국의 동상_플라토미술관/김수근의 명암_옛 공간건축 사옥/한 건축가의 소신_세종문화회관/두 번의 재해석_국립극장/여기 ‘문화 독립운동가’가 있다_간송미술관/‘시민문화유산 제1호’의 탄생_최순우 옛집/‘한국 최초 서양화가’의 옛집이 열리다_고희동 가옥/문학인의 자취_김수영문학관/‘이상의 집’ 그 이면_상촌(서촌)/디자인 그 너머_남산 소월길/우미관과 김두한_종로 피맛길/변사와 남녀유별석의 추억_단성사 터/무성영화를 만나다_한국영상자료원 2장 사라져가는 것들과 다가오는 것들 궁궐을 정원으로 삼은 집?_창덕궁/파헤쳐진 내시 묘지_북한산 중골/‘연신원’ 철거 단상_연세대 신촌캠퍼스/다시 볼 수 없는 한국 최초의 증권거래소_명동/자동차에 밀려난 대한문_덕수궁/역사관으로 재탄생한 을사늑약의 현장_중명전/누구도 몰랐던 경술국치의 현장_남산/‘동척’ 관사가 남아 있다_종로구 통의동/일본군 장교 관사의 운명은?_부엉이 근린공원/서울 한복판의 태평양전쟁 흔적_경희궁 방공호/‘비원’과 ‘후원’ 사이_창덕궁/‘대일본’은 낭설이다_백악산·옛 조선총독부청사·서울도서관/화재감지기 위에 단청?_동묘/철거만이 능사였을까?_조선총독부청사/일제가 끊은 지맥, 다시 잇는다_율곡로/100여 년 만에 드러난 하수관거의 의미_명동성당/서울에도 도자기 가마가 있었다?_북한산 우이천 입구/‘백제 500년’의 역사가 드러나다?_풍납토성/붉은 벽돌집의 정체_딜쿠샤/대한제국 황실의 마지막 안식처_창덕궁 낙선재/600여 년의 풍파를 견뎌온 문화유산_한양도성/한양도성을 축대 삼은 동네_행촌동·장충동·혜화동 3장 그날의 현장을 찾아서 남북 대결 시대의 상흔_북한산 우이령길/최후의 바리케이드_유진상가/붕괴, 그 후 20년_삼풍백화점 터/‘사직동팀’은 추억일 뿐?_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여우사냥’과 사라진 비석_경복궁 건청궁/누구도 말해주지 않는 역사의 내막_러시아공사관 첨탑/‘독립’의 또다른 의미_독립문/‘절반의 역사’만을 기억하는 역사관_서대문형무소/이리저리 떠도는 ‘반민특위’ 표석_명동 입구/그는 그곳에 폭탄을 던진 적이 없다_종각사거리/최초의 신식무기 공장_번사창/비운의 노래 [대한제국 애국가]_탑골공원/1919년 3월 1일 그곳에서는…_인사동 태화빌딩/3·1독립만세운동의 아지트_승동교회/그 뜨거운 역사의 현장_서울역/그곳만 볼 게 아니다_운현궁/최후의 독립운동 현장 ‘부민관’_서울시의회청사/다시 돌아온 ‘마지막 임시정부청사’_경교장/절대 권력자의 집을 찾아_이화장/이름 뒤에 숨어 있는 역사_4·19혁명기념도서관 4장 함께 사는 서울을 꿈꾸며 서울역 앞 쪽방촌의 여름 그리고 겨울_동자동·갈월동/‘넝마공동체’ 사람들이 갈 곳은 어디?개포동 영동 5교/겨울이면 더 바빠지는 사람들_구세군중앙회관/그때의 터줏대감은 지금 어디에…_황학동 도깨비시장/“내가 어떻게 소멸해가는지 봐두게”_청계천 공구상가/“잠깐 참으라”는 팻말보다 필요한 것은…_마포대교/노동자의 생활을 ‘체험’한다?_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사람이 꽃보다 먼저다_덕수궁 대한문 앞/판화가의 동분서주가 반갑지만은 않은 까닭_광화문광장/차들이 사라진 거리를 걸으며_홍대 앞 주차장 골목과 연세로/‘거리의 지뢰’ 볼라드_국립서울맹학교/‘황연대성취상’ 그 너머_정립회관/128년 만의 재개국_우정총국/만인을 위한 의료기관을 꿈꾸다_제중원 터/“마마야 물렀거라, 지석영 대감 행차시다”_대한의원 의학박물관/‘세계 제2의 피폭국가’ 한국_‘합천 평화의 집’ 서울사무국/미국대사관 직원 숙소 터의 운명은?_종로구 송현동/지금은 사라진 ‘여인들만의 밤’_보신각 5장 변화의 기로 위에서 미스코리아대회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_명동예술극장/‘멸종 위기’에 처한 서점들_신림동 고시촌/부대찌개의 추억_용산 미군기지/127년 만에 사라지는 백열구_경복궁 향원지/자연지세가 사라져가는 서울_화동 고갯길/복원 논란을 넘기자 이번엔…_부암동 백석동천/〈몽유도원도〉 속을 거닐다_부암동 무계동계곡/왜 굳이 그 자리에 그 돈을 들여서…_동대문디자인플라자/거리예술 창작센터로 변신한 취수장_옛 구의취수장/‘서울 유일’ 석유비축기지의 미래_매봉산/‘찾아가는 시민발언대’의 이면_서울시민청/한옥 게스트하우스의 미래_북촌/‘조선철도호텔’ 이후 100년_웨스틴조선호텔/역사의 옷을 입은 백화점_신세계백화점 본점/국내 첫 고가차도여, 안녕!_아현고가도로/남겨둔 청계고가 교각의 의미_청계천/튼튼해서 혁신적이었던 아파트_회현 제2시범아파트/인권 감수성을 가늠하는 잣대_서울유스호스텔 사진 및 기사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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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예술과 권력 그리고 서울
한 건축가의 소신_세종문화회관 서울시민은 물론이거니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직접이든 대중매체에서든 최소한 한 번쯤 보았을 세종문화회관. 기념비적 건물을 지으라는 박정희 정권의 요구에 따라 1978년 완공된 공연·전시·회의 시설로, 수도 서울의 중심 도로라 할 수 있는 세종로 한복판에 있어 만만치 않은 입지를 자랑한다. 한옥에서 차용한 세종문화회관 구조는 여느 건물과 다른 느낌을 준다. 마치 한옥의 안채와 별채처럼 본관과 별관을 배치하고 둘을 이어주는 회랑을 조성했다. 줄지어 선 튼실한 돌기둥에 두꺼운 추녀, 완자문양을 가미한 벽장식은 고건축과 현대건축 간의 조화를 이뤄내려는 듯 다채롭다. 그런데 세종문화회관은 하마터면 지금보다 더 육중하고 위압적인 모습으로 들어설 뻔했다. 건립 당시 청와대가 최소한 5,000명이 들어가는 대회의실을 갖출 것과 기와지붕을 얹어달라고 요구해왔기 때문이다. 평양의 인민문화궁전이나 만수대예술극장 같은 거대한 ‘민족전통주의’ 건축물들을 의식한 탓이다. 유신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시대, 권력의 주문을 뿌리치기 쉽지 않았을 테지만 세종문화회관은 끝내 그렇게 설계되지 않았다. 건축가가 “그것은 평양의 특징일 뿐 우리는 우리대로 만들어갈 문화가 있다”라며 거절해 지금 우리가 보는 선에서 일단락 되었다. 건축가는 “건축은 시대의 상징이자 변이이다. 건축 기술이 발달해서 기와를 씌우지 않고도 우리 정서가 들어가는 전통을 살릴 수 있다. 건축가에게 맡겨달라”라고 했다. 전통 기와를 얹고 서까래를 올린다고 해서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 아닐뿐더러, 자칫 규모에만 집중할 경우 덩치만 큰 관제 건축물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건축가는 바로 지난 2012년 향년 93세로 타계한 엄덕문이다. 한국 현대건축가 1세대에 속하는 엄덕문은 1962년 완공한 국내 첫 대단지 아파트인 서울 마포아파트와 경기도 과천 종합정부청사 설계자이기도 하다. 서울의 롯데호텔과 롯데백화점, 리틀엔젤스 예술학교도 그의 손을 거쳤다. 개인 주택도 그렇지만 대형 공공건축물을 지을 때도 건축주와 건축가가 갈등할 수 있다. 건축물의 세세한 부분만이 아니라 그것이 지니는 상징성과 의미, 그리고 정치적인 목적 등에서 견해 차이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고 있는 공공건축물들에서는 시대정신을 담기 위한 고민의 흔적을 별로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흔하디흔한, 한창 유행인 유리-철골 구조의 색깔 없는 건축물들 일색이다._42~45쪽 2장 사라져가는 것들과 다가오는 것들 궁궐을 정원으로 삼은 집?_창덕궁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창덕궁은 일 년 내내 수많은 여행자들이 찾는 곳이다. 그 위상에 걸맞게 궁궐 내부가 잘 정비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 뒤쪽에 자리 잡은 후원 역시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조선의 전통 조경 양식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창덕궁 바깥으로 시선을 옮기면 사정이 달라진다. 돈화문에서 창덕궁 왼쪽 담장을 따라 북촌 쪽으로 걷다 보면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2층짜리 주택 한 채가 궁궐 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문화재 보호 의식이 희박하던 1960년대에 창덕궁 관리소장 관사로 들어선 건물이다. 이후 1980년대 초 민간인에게 팔리면서 지금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 형국이다.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사무소 측은 “민가를 매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소유자와의 의견 차이로 매입 계획이 순탄치만은 않다”라고 말한다. 그 건물을 지나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아예 대놓고 창덕궁 담장을 훼손하는 건물들을 확인할 수 있다. 창덕궁 담장을 개인 주택의 담장으로 활용하거나 아예 창덕궁 담장을 벽으로 삼아 그 위에 지붕을 얹어 방이나 창고로 쓰는 경우마저 있다. 개인 주택에 가까운 창덕궁 돌담 중에는 궁궐 바깥쪽으로 흙이 무너져내려 붕괴 위험이 엿보이는 곳도 여러 군데다. 쓰레기나 폐건축자재를 방치해둔 것 정도는 도드라져 보이지도 않을 정도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같은 혼돈의 시기를 거치면서 개인들이 마음대로 공간을 침범하거나 셋방을 하나라도 더 만들기 위해 각축을 벌이고 또 관련 공무원들이 불법으로 몰래 팔아버린 결과다. 문화재는 지속적인 관심을 갖지 않으면 훼손될 수밖에 없다. 이미 개인 사유지로 변한 곳은 손쓸 방도가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방치해두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조선왕릉의 경관 또한 주변의 건축물이나 축사 때문에 훼손되어가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창덕궁의 제모습 찾기가 어느 때보다 절실해 보인다. 여행자들이 찾는 창덕궁 내부만 가꾸고 정비할 것이 아니라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구석까지 정성 어린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일이다._90~95쪽 3장 그날의 현장을 찾아서 최후의 바리케이드_유진상가 서대문구와 은평구 사이의 홍은동네거리에 가면 세운상가를 닮은 상가형 아파트를 만날 수 있다. 1970년 들어선 ‘유진상가’다. 동서 방향 길이가 200미터 남짓, 폭은 50미터 정도로 얼핏 봐도 상당히 육중한 모양새인데, 1층 전체와 2층 일부는 상가로 쓰이고 나머지는 주거용으로 이용되는 초기형 주상복합아파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특이한 점이 눈에 띤다. 1층의 남북쪽 면에는 그저 기둥만 세워져 있을 뿐 하나같이 비어 있다. 나중에 비워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한 것이다. 군사적인 목적 때문이다. 유진상가가 들어선 홍은동사거리 일대는 만약 북한군이 구파발을 돌파해 남하할 경우 서울의 마지막 방어선에 속한다. 거기가 뚫리면 무악재 너머로 바로 청와대를 비롯한 서울 한복판에 다다를 수 있다. 당국으로서는 북한군 전차에 대응할 수 있도록 튼튼한 진지를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유진상가는 유사시 탱크 진지로 활용하기 위해 1층의 바깥부분을 모두 비워두었다. 북한군의 곡사화기로부터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기둥 사이의 폭과 높이를 탱크 한 대가 쏙 들어갈 만한 규모로 설계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당시 서울 시내의 다른 어떤 건축물보다 단위면적당 많은 콘크리트와 철근을 넣어 튼튼하게 지었다. 만에 하나 후퇴해야 할 경우 한쪽 기둥만 폭파하면 건물 전체를 동서 방향으로 길게 쓰러뜨릴 수 있는 치밀한 설계도 잊지 않았다. 건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바리케이드이자 참호, 대전차 장애물이었던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유진상가가 지어지기 직전 한국은 한마디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우이령길을 닫게 한 1968년 1·21사태에 이어 그해 말에는 울진과 삼척 지역에 북한 무장공작원들이 침투하기까지 했다. 박정희 정권이 유사시 수십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피소로 활용하기 위해 남산 1~2호 터널을 파고 청와대 방어를 위해 북악스카이웨이를 뚫는 등 이른바 ‘서울 요새화 사업’을 벌인 이유다. 오늘날 유진상가나 남산터널, 북악스카이웨이를 두고 지난 시대의 남북 대결을 떠올리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남북의 대치 상황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지만 말이다. 서울 곳곳을 걸으며 지나간 시대, 그러나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과제가 산적한 이 땅의 현실을 생각해본다._196~199쪽 4장 함께 사는 서울을 꿈꾸며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 터의 운명은?_종로구 송현동 광화문에서 인사동 입구 쪽으로 걷다 보면 왼쪽으로 높다란 담장이 나온다. 성인 키의 두세 배를 훌쩍 뛰어넘는 높이라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쪽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 힘들다. 이곳에는 얼마 전까지 주한미국대사관 직원 숙소가 있었다. 3만 7000여 제곱미터에 달하는 이 땅을 두고 2008년 이래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부지를 사들인 대한항공이 자칭 ‘7성급 호텔’을 짓겠다고 나선 탓이다. 정부도 관광진흥법 개정을 추진하는 등 맞장구를 쳤다. 서울 옛 도심의 중심, 특히 경복궁과 가까운 곳에 고급호텔이 들어서면 고용 창출에 기여할 수 있고 관광산업 경쟁력도 높일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러나 참교육학부모회 등 시민단체들의 생각은 다르다. 부지 바로 옆에 덕성여중고와 풍문여고가 있어 학생들의 학습권이 침해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지금까지는 그런 주장이 먹혀들었다. 2010년 대한항공이 서울중부교육청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냈지만 대법원까지 올라가 결국 기각당했다. 현행 학교보건법상 학교 정문이나 후문에서 직선거리로 50미터 이내의 절대정화구역에는 호텔이나 모텔, 여관과 같은 숙박시설을 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조금만 들여다봐도 7성급 호텔이 고용을 창출하는 등 사회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정부 주장은 논리부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4년 6월 경실련이 서울시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자료를 활용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호텔 건립으로 늘어나는 일자리라고 해봐야 저임금의 임시·일용직 일자리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호텔 등 숙박업계의 월별 노동시간은 전체 업종 대비 14시간이 더 많은 190.3시간에 달하지만 정작 임금은 75.1퍼센트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임시·일용직 비율이 79.2퍼센트에 달하며 100만 원 미만의 저임금 노동자 비율 또한 33퍼센트나 돼 숙박업계의 노동조건이 다른 업종에 비해 매우 열악한 것으로 조사됐다. 경실련이 “정부는 호텔 건립을 통한 일자리 창출을 언급하기 전에 현 호텔업의 근로조건부터 개선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는 근거다. 그리고 관광산업 경쟁력은 호텔 숫자가 아니라 잘 보존된 역사문화 경관이 보장해준다. 이는 해외 사례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문제의 땅은 구한말 이래 늘 ‘손님’의 땅이었다. 1920년경 들어선 조선식산은행 직원 숙소가 그 시초다. 조선식산은행은 지금의 산업은행처럼 산업금융을 담당했지만 실상은 조선총독부의 외곽 기구에 가까웠다. 해방 뒤에도 굴곡진 운명은 이어졌다. 미군정 시설을 거쳐 2000년대 초반까지 주한미국대사관 직원 숙소로 쓰인 것이다. 만약 거기에 고급 호텔까지 들어서면 소수의 이용객을 제외한 일반 시민의 접근은 앞으로 더더욱 힘들어질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공공의 이익보다 사유재산권을 우선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제3자가 남의 땅을 두고 이래라저래라 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기에 정부는 관련법 개정에 나서는 등 자본의 요구에 앞장설 것이 아니라 기업과 시민 사이의 중재자가 되어 얽힌 실타래를 풀어야 하지 않을까. 예부터 송현동 일대는 동서로는 경복궁과 창덕궁을 잇고 남북으로는 인사동과 북촌을 이어주는 역사와 문화의 징검다리 역할을 해왔다. 그러던 곳이 일제강점기와 개발시대를 지나오는 동안 낱낱이 훼손되어 민비가 어린 시절을 보낸 감고당이나 세종 때 처음 지어진 안동별궁의 흔적은 아스라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는 그 터마저 자본의 논리에 밀려 바람 앞 등불 신세가 되어버렸다._342~347쪽 5장 변화의 기로 위에서 ‘조선철도호텔’ 이후 100년_웨스틴조선호텔 지금은 사라진 인천 제물포의 대불호텔을 시작으로 한국에서 근대적인 호텔업이 시작된 이래 개업 100주년을 맞은 호텔이 있다.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이다. 이 호텔의 처음 이름은 ‘조선철도호텔’로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 문을 열었다.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기 시작한 지 5년이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른바 ‘시정始政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열면서 귀빈들의 숙박을 위해 지은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주관이 되어 지은 데다 당시 철도는 정시 운행과 기계 동력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성의 상징과도 같았기에 호텔 이름에 굳이 ‘철도’라는 말을 넣은 대목이다. 조선인에게 조선은 낡고 후진적인 데 반해 일본은 근대화된 국가라는 인식을 갖게 하고, 일본 덕에 조선의 근대성이 배가되고 있다는 정치 선전을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용도와 이름이 바뀐 건 해방 뒤였다. 미군정청은 조선철도호텔에 사령부를 설치했고, 이후에는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이 집무실을 두었다. 그리고 정부 수립 이후에는 배일정책의 일환으로 호텔 이름을 ‘조선호텔’로 바꾸었다. 1958년 8월 화재가 난 이후 1970년 들어서는 20층 규모의 현대식 호텔로 재탄생했고, 1981년 미국의 웨스틴호텔즈와 제휴하면서 ‘웨스틴조선호텔’이라는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 이런 길고도 파란만장한 역사를 보유한 웨스틴조선호텔이 2013년 7월 ‘더 메모리 오브 1914’라는 이름의 행사를 열었다. 1914년 10월 10일 개업한 것을 기념해 ‘100년 전으로 가는 100일간의 미각여행’ 같은 다채로운 100주년 기념행사들이 연이어 열렸다. 그 행사들을 지켜보며 한편으로는 이 땅의 역사가 참으로 애처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웨스틴조선호텔 레스토랑에서 내다보이는 정원이 평범한 호텔 정원이 아니라 조선이 황제국이 되었음을 선포한, 즉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위해 만든 환구단 터였기 때문이다. 비록 반향 없는 일방적 외침에 불과하긴 했지만…. 일제는 조선철도호텔을 만들며 조선 그리고 대한제국의 권위를 무너뜨리기 위해 극히 소수의 건물만 남긴 채 환구단 시설을 거의 헐어버렸다. 그나마 남은 것이 황궁우와 석고(돌북) 정도인데, 웨스틴조선호텔은 그 공간을 그저 정원 정도로만 이용하고 있는 듯하다. 개업 100년이라는, 국내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랜 호텔의 역사를 맛으로 기억하는 것을 넘어 그 안에 서려 있는 더 깊은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기대한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아니었나 싶다._404~407쪽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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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두고도 알지 못했던 서울의 역사와 문화 95장면!
외국에서 또는 다른 도시에서 살고 있는 친구가 서울에 놀러 와 명동이나 남대문시장, 북촌이나 가로수길 말고 가볼 만한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어떨까? 꽤나 당황스러울지 모른다. 누구나 찾는 유명 관광지가 아닌, 그 이상의 장소를 생각해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서울은 조선이 개국하면서 수도로 정한 이후 600여 년이 넘도록 그 지위를 이어오고 있다. 아니 한성백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2,000여 년 이상 수도로서 기능해온 셈이다. 이처럼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긴 역사를 자랑하는 고도임에도 오늘날 서울의 역사나 문화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것은 아마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군사독재라는 커다란 단절을 경험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게다가 경제성장기에는 먹고사는 문제가 무엇보다 중요했기에 서울이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관심을 가질 만한 여유가 없었다. 서울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크고 작은 역사사건의 현장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으며, 예술적 향취가 그윽한 공간이 숨어 있고, 다른 누구보다 특별한 삶을 살다간 이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도시다. 그중에서도 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근현대에 이르는 100여 년 동안의 흔적들은 다른 어느 시대보다 더욱 오롯하다. 이렇듯 다양한 이야기를 간직한 서울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2008년 일어났던 숭례문 방화사건 때부터였다. 이 사건은 10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메트로폴리스 서울에 큰 충격을 안겼는데, 이를 계기로 서울의 문화유적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다큐멘터리 방송이나 광고를 비롯해 서울 관련 도서도 이때 여럿 출간되었다. 그러나 ‘소비의 공간’ ‘의도된 관광지’로서의 서울을 넘어 그 내면을 비춰주는, 서울의 역사적?사회적?문화적 맥락을 밀도 있게 짚어내고 보여주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권기봉 작가의 전작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2008)와 《다시, 서울을 걷다》(2012)는 우리 삶의 현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있게 조명했다는 점에서 꽤 의미 있는 평가를 받았다. 박제된 공간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도시 서울을 만나다 이번 신작 《권기봉의 도시산책》은 그 연장선상에서 특별히 ‘서울의 일상’이라는 키워드에 초점을 맞춰 범위를 더 넓힌다. 서울이라는 도시의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다채로운 모습들을 95꼭지에 담아낸 것이다. 이 글들을 읽다 보면 서울이 얼마나 깊이 있고 역동적이며 매력적인 도시인지 새삼 깨닫는다. 중요한 것은 95꼭지에서 담아낸 장소들이 단지 지나간 공간으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책을 통해 만나는 곳들은 지금의 우리가 존재하게 된 배경을 설명해주거나, 좋든 싫든 이 시대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거나, 또 앞으로 한국 사회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한다. 《권기봉의 도시산책》은 서울이 과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단편적인 정보만 나열하고 있는 박제된 공간이 아니라 생생히 ‘살아 있는’ 공간임을 새삼 재발견하게 만든다. 서울의 일상과 역사를 돌아보며 새로운 서울을 그리다 이 책은 다섯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예술과 권력 그리고 서울’에서는 경복궁에 남아 있는 불교 유물인 부도, 세종문화회관, 공간건축 사옥과 김수근 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면서 왜 예술과 권력이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교묘하게 얽혀 있을 수밖에 없었는지 그 뒷이야기를 들려준다. 2장 ‘사라져가는 것들과 다가오는 것들’에서는 사라질 운명에 처했거나 이미 사라져버린 소중한 역사 현장과 뒤늦게라도 원형복원에 나서고 있는 여러 장소를 집중적으로 다룸으로써 문화재 보전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민낯을 보여준다. 3장 ‘그날의 현장을 찾아서’에서는 을사늑약의 현장인 중명전, 삼풍백화점 터, 마지막 임시정부청사인 경교장같이 중요한 역사사건이 벌어졌던 곳을 둘러보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히고 있는 장소의 의미를 되새긴다. 4장 ‘함께 사는 서울을 꿈꾸며’에서는 서울역 앞 쪽방촌, 황학동 도깨비시장, 청계천 공구상가처럼 화려함 뒤에 가려진 서울의 이면을 들춰내고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들은 어디인지 짚어낸다. 마지막으로 5장 ‘변화의 기로 위에서’에서는 상암동 석유비축기지, 옛 구의취수장, 명동예술극장 등 과거의 역할을 내려놓고 시민들과 함께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장소나 건물들을 찬찬히 톺아본다. 지은이 권기봉은 “도시를 걷는, 그리고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고 미래를 가늠하는 산책에 이 책이 작지만 충실한 지침서가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감히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이 책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 그리고 이웃의 삶을 ‘좀더 가까운 거리’에서 찬찬히 대면할 수 있도록, 그럼으로써 곳곳에서 또다른 서울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이끈다. 정치인 노회찬의 서평처럼 “저자의 부지런한 발걸음을 따라 산책하다 보면 우리는 머리와 가슴이 일치하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