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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서문
서문 서론: 놀이, 힘, 그리고 서구적 사고방식 제1부 놀이와 근현대 철학 담론 제1장 독일 관념론에서의 놀이와 미학적 전환 1.1 임마누엘 칸트: 철학 그리고/혹은 놀이? 1.2 프리드리히 실러: 이성의 놀이 제2장 억압된 것의 귀환: 놀이와 힘 철학 2.1 놀이와 니체의 힘에로의 의지 2.2 니체이후: 마르틴 하이데거와 대존재의놀이 제3장 놀이와 예술-형이상학자들 3.1 오이겐 핑크와 세계의놀이 3.2 놀이와 존재론적 해석학: 한스-게오르그 가다머 3.3 질 들뢰즈: 시뮬라크르의 놀이 3.4 글쓰기와 놀이: 자크 데리다 제2부 놀이와 근현대 과학 담론 제1장 놀이와 인간 진화 1.1 스펜서, 그로스, 그리고 인간의 놀이 1.2 놀이와 정신분석 이론 1.3 피아제, 베이트슨, 그리고 현대 놀이 이론 제2장 놀이와 자연선택 2.1 놀이, 생존 투쟁, 그리고 적자생존 2.2 우연과 필연 2.3 르네 톰과 생물학적 놀이 제3장 현대 과학에서의 놀이와 미학적 전환 3.1 한스 바이힝거의 마치 ~인 것처럼의 철학 3.2 놀이와 신물리학자들 3.3 현대 과학철학에서의 놀이와 무정부주의 인식론 찾아보기 |
Mihai I. Spario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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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에 대한 관심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아울러 그 본질과 기능을 설명하려는 무수한 시도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놀이 개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2,000년 전과 마찬가지로 포착하기 어려운 상태로 남아 있다. 우리 모두 놀이가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그것을 직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지만, 이를 개념화하려 할 때는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다시 말해, 놀이는 독일어에서 ‘das stumme Wissen’(암묵적 지식)이라고 불리는 영역에 속하며, 이는 이성적 사고보다는 직관과 관련된다. 놀이에 대한 정의는 수백 가지에 이르지만, 그 어느 것도 만족스러운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은 특히 과학 분야의 일부 현대 이론가들로 하여금 놀이의 정의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도록 만들거나, 놀이를 하나의 역설로 간주하도록 이끌었다. 한편, 문화이론 및 문화인류학 분야의 일부 학자들은 놀이와 게임을 구별하는 방식을 선호하며, paidia와 ludus를 구분하기도 한다. 이 구분에서는 paidia가 정의될 수 없는 개념으로 남아 있는 반면, ludus는 규칙에 의해 제한된 자유, 즉 제도화된 놀이로 정의된다.
--- p.19 이 책은 철학적 담론과 과학적 담론 속에서 놀이 개념의 역사가 보여주는 내적 운동에 집중한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역사적 역동성이 각 분야에서 서로 다른 경로를 따른다는 점이다. 이는 부분적으로 각 학문 분야가 문화적 권위를 놓고 투쟁을 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놀이 개념들 간의 동일 학문 내 투쟁뿐 아니라, 학문 간 투쟁 또한 반드시 고려해야 함을 알게 될 것이다. 이 투쟁 과정에서, 놀이 개념들은 의도적으로 서로로부터 물러나거나 공격하며, 동맹을 형성하거나 해체하고, 친연성을 주장하거나 거부하는 방식으로 움직인다. 이러한 점에서, 놀이 개념들의 정체성은 차이의 놀이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지, 차이가 정체성 속에서 환원적으로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아곤(투쟁, agon)을 설명할 수 있는 역사적 모델 역시 투쟁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다양한 놀이 개념들 간의 차이를 정체성의 틀 안에서 해석하려는 헤겔적 모델과는 다른 접근법이다. 대신, 그들의 정체성을 기능적 차이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비코적(Viconian) 혹은 니체적 모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 p.57 예술과 마찬가지로, 놀이 또한 낭만주의 형이상학에 유용한 개념이 된다. 낭만주의 형이상학은 이성과 욕망 또는 의지, 즉 정신의 이상 세계와 감각의 물질 세계 사이를 매개하려고 시도한다. 놀이 역시 예술과 마찬가지로 양면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 이러한 매개적 역할에 이상적으로 적합하며, 19세기 관념론 철학 전반에서 이러한 목적을 위해 활용된다. 비록 초기에는 예술과 마찬가지로 놀이 역시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였으며, 그 이유 역시 동일했다. 즉 놀이가 지나치게 분명히 전(前)이성적 혹은 원시적 사고방식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점차 놀이 개념에서 전이성적이고 폭력적이며 임의적인 의미가 제거되며, 철학의 존재론적 및 윤리적 허구를 떠받치는 유용한 도구로 전환된다. 다시 한번, 놀이를 플라톤적 및 신플라톤주의적 형태로서 진지한 철학적 주제로 정립한 인물은 실러였다. 그 이후 놀이의 형이상학적 지위는 빠르게 상승하여, 젊은 헤겔은 심지어 놀이가 가장 가볍게 보이는 순간에도 “가장 고귀하며 유일하게 참된 진지함이다”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 문구는 이후 놀이 이론가들이 끊임없이 인용해 온 말이 되었다. 그러나 칸트와 실러로 대표되는 독일 관념론 철학 속에서 놀이 개념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간단히 살펴보면, 이 개념이 모순과 애매성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곧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모순과 애매성은 놀이 개념이, 서양 사상의 다른 여러 핵심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이성과 전(前)이성 사이에 분열된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 p.69 아름다움은 “생명력의 증진을 동반하며, 따라서 매혹과 상상력의 (좋은) 놀이와 양립 가능하다.” 반면 숭고는 오직 간접적으로만 쾌를 산출하는데, 이는 “생명력의 일시적 억제와 그에 뒤이은 보다 강한 분출을 통해 발생하는 감정” 때문이며, 따라서 숭고는 “놀이(여기서는 자유롭고 무관심적인 활동의 의미가 아니다)가 아니라 상상력의 진지한 작용”으로 간주된다”. 이런 이유로 숭고는 “매혹과 양립 불가능하며”, 숭고의 경험은 긍정적 쾌감이라기보다 오히려 경외나 존경과 같은 부정적 쾌감을 수반한다. 아름다움이 상상력과 이해의 조화에서 발생하는 데 반해, 숭고는 상상력과 이성의 갈등 속에 놓여 있다. 이 갈등은 “우리가 순수하고 자족적인 이성, 혹은 크기를 판단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느끼게 하며, 이 능력의 탁월함은-그 자체로는 무한한 크기들을 제시하는 [상상력]의 불충분함을 통해서만-직관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 따라서 이 갈등 속에서 상상력은 결국 실패해야 하며, 바로 그 실패를 통해 이성의 승리가 확보된다. --- p.84 실러는 표면적으로는 놀이의 자유로움을 근거로 칸트로부터 벗어나 놀이를 노동이나 효용보다 더 우위에 두는 듯 보이지만, 그의 이러한 개념 정의를 더 면밀히 살펴보면, 실러 역시 칸트와 마찬가지로 놀이를 본질적으로 더 높은 차원의 노동이나 효용의 한 형태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놀이를 자유로서 이해하면서도 그것과 효용의 관계를 다루는 문제는, 실러가 물질적 놀이와 초월적 놀이 사이의 간극을 메우려 할 때 비로소 드러난다. 그는 놀이를 정의하면서 칸트의 개념인 목적 없는 합목적성과 사심없음을 그대로 차용한다. 그리고 동물적 및 인간적(물리적) 놀이를 제한된 자유의 형태로 설명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연은 이성이 없는 생물들에게조차 존재에 필요한 최소한 이상의 것을 부여하였으며, 동물의 삶이라는 어둠 속에도 자유의 한 줄기 빛을 비추어 주었다. 사자가 배고픔에 시달리지 않고, 어떤 포식동물의 도발로 전투를 준비하는 상황이 아닐 때, 그 여유로운 힘은 스스로를 위한 대상을 만든다. 그는 메아리치는 사막을 향해 으르렁거리며 자신의 과잉된 활력을 목적 없는 과시 속에서 즐긴다”. 실러에게 있어서 일은 결핍의 외적 강제이며, 물질적 놀이는 넘쳐나는 풍요의 내적 충동이다. 이러한 과잉 에너지가 분출을 요구하는 것이다. --- p.111 음악은 현실처럼 보이거나 현실을 ‘모방’하는 것처럼 나타나지만, 여기서 말하는 현실은 더 이상 플라톤적 의미의 합리적 존재가 아니라 임의적이고 폭력적이며 놀이적 성격을 지닌 의지이다. 이에 반해 서정시는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모방하는데, 이는 서정시가 의지를 직접이 아니라 어떤 매개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비록 서정시가 디오니소스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모방론에서처럼 서정시는 결국 모사의 모사에 해당한다. 다만 니체에게서 그것이 모방하는 원형은 플라톤과는 다른 것이다. 음악은 다른 모든 예술 위에 놓이는데, 그 이유는 “음악이 현상의 모사, 좀 더 정확히는 의지의 적합한 객관성의 모사가 아니라, 의지 자체의 직접적 모사이며, 따라서 세계의 모든 물리적인 것들의 형이상학적 근거를, 곧 모든 현상의 물자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세계를 구현된 음악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구현된 의지라고 부를 수도 있다”. 칸트의 예술 위계에서 음악이 가장 마지막에 놓였던 것은, 음악이 지나치게 합리적 언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며 되기(becoming)의 놀이에 너무 가깝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니체에게서는 바로 그 동일한 이유 때문에 음악이 예술들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 p.138 니체는 진리에 대한 수행적이고 도덕 바깥의 개념에 대해 소피스트들에게 진 빚을 직접적으로 인정하며, 자신의 인식론적 사유의 뿌리를 전(前)이성적 소크라테스 이전 사유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소피스트들은 도덕성에 대한 최초의 비판, 도덕성에 대한 최초의 통찰에 거의 도달했다: 그들은 도덕적 가치 판단들의 다양성(지리적 상대성)을 병치시켰다; 그들은 모든 도덕이 변증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즉 그들은 모든 도덕 정당화 시도들이 필연적으로 궤변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직관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최초의 진리를 전제로 한다: ‘그 자체로서의 도덕(morality-in-itself)’, ‘그 자체로서의 선(good-in-itself)’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 영역에서 ‘진리’를 논하는 것은 사기라는 것이다”. 끝으로, 니체는 플라톤에 대해서조차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자신조차 조건부로도 진실하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을 절대적 진리로 가르치려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란 바로 “영혼의 독립적 실재성과 개별적 불멸성”이다. --- p.163 놀이를 아곤(투쟁, agon)으로 이해하는 개념은 하이데거의 글에서 비교적 늦게 등장하는데, 이는 그가 예술 작품의 본질을 예술의 본질 및 진리, 즉 대존재와의 본질적인 관계 속에서 설명하려는 시도와 관련되어 있다. 그는 예술 작품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들을 검토한 뒤, 예술에 대한 미학주의적 관점과 모방적(모사적 및 재현적) 관점 모두로부터 거리를 둔다. 그 후 하이데거는 예술 작품이 세계와 대지(earth) 사이의 대항놀이가 펼쳐지는 장(場, Spielraum)이라고 제안한다. 예술 작품은 세계를 설정하고, 대지를 제시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세계”란 “역사적 민족의 운명 속에서 단순하고 본질적인 결단들의 넓은 길들이 스스로를 드러내며 열려 있는 상태”를 의미하며, “대지”란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은폐하면서도 자발적으로 출현하는 것, 그리고 그만큼이나 감싸고 숨기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와 대지는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작품의 놀이 장 안에서 아곤에 참여한다. “세계를 설정하고 대지를 제시함에있어, 예술 작품은 이 투쟁을 촉발하는 것이다. 이것은 작품이 동시에 이 갈등을 무미건조한 합의 속에서 해결하거나 종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투쟁이 투쟁으로 남아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투쟁이 친밀함의 단순성 속에서 절정에 도달하기 때문에, 작품의 통일성은 이 싸움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 p.178 비록 하이데거가 이를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그는 대존재에 대한 사유로서의 철학의 우위성을 분명히 암시한다. 이 우위성은 단지 비본질적인 방식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진리가 현존 속으로 드러날 수 있는 모든 본질적인 방식들, 즉 예술 작품 자체를 포함한 모든 것들에 대한 것이다. 오직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만 진리는 처음부터 ‘본질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세울 수 있다. 또한, 대존재에 대한 사유로서의 철학이 인간 활동의 다양한 영역들에서 진리가 어디에,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드러났는지, 혹은 드러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하이데거가 실제로 ‘완전한 열림에 대한 니체의 업적’을 끌어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니체의 사유와 서구 형이상학 전반을 지배하는 힘 지향적 사고방식으로부터 벗어나지는 않는다. 존재자들로부터 대존재 자체로 힘을 이전함으로써, 하이데거는 니체의 힘에로의 의지 개념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고 믿었던 ‘주체의 형이상학’을 극복하는 결정적인 걸음을 내디딘다. 이로써 그는 니체가 복귀시켰던 전(前)이성적이며 고대적인 힘 개념, 즉 인간이 놀이의 주체이자 동시에 장난감이 되는, 폭력적이고 임의적이며 황홀한 세계-놀이의 개념을 공고히 한다. --- p.209 세계의 놀이는 인간의 놀이와 달리 놀이자 없는 놀이라는 점에서 구별된다. 사실, 인간의 놀이가 우주적 은유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놀이자의 주관성에 대한 개념과, 놀이적 세계를 가상의 영역으로 보는 개념을 포기해야만 한다. 세계의 놀이는 어떤 개인적 권능과, 심지어 신의 놀이도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주 전체를 아우르는 힘은 신적 권능마저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세계의 놀이는 인간의 놀이와 달리 어떤 개별자의 놀이가 아니며, 오히려 개별화를 낳는 놀이 자체이다. 이 놀이는 인간과 신들을 포함한 모든 개별적인 사물들, 존재들, 가상들을 자기 안에 포함하고 있다. 나아가, 세계의 놀이는 가상이 아니라 드러남이다. 세계는 시간 공간 연속체 속에서 모든 것을 나타나게 하고 사라지게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계의 놀이는 하이데거가 말한 바와 같이, 현존과 부재의 놀이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놀이 속에서 모든 존재자들은 현존 속으로 등장하고, 잠시 동안 빛을 발하며, 다시 근거 없는 부재의 심연 속으로 사라진다. 즉, 이 부재 역시 세계에 속한다. 모든 존재자들은 우주의 장난감이며, 모든 놀이자들 또한 결국 놀이의 대상이다. 세계의 드러남은 어떤 얼굴도 숨기지 않는 가면이며, 오직 ‘무’ 그 자체만을 감춘다. --- p.221 현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네 명의 예술-형이상학자들(니체의 계보 위에 서 있는 핑크, 가다머, 들뢰즈, 데리다)를 통해 놀이 개념을 간략히 살펴본 결과, 이 사상가들이 이성적 놀이보다는 전(前)이성적 놀이를 명백히 선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채택하는 주요한 전(이성적 놀이의 형태는 이미 니체와 하이데거에게서 기원하며, 다음과 같은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우주의 되기 또는 우주적 힘의 황홀하고 무구하며 폭력적인 운동으로서의 놀이(핑크); 자발적이고 활기찬 자연의 운동이나 활동으로서의 놀이(가다머); 능동적인 물리적 힘들 간의 끊임없는 아곤(투쟁, agon)으로서의 놀이(들뢰즈, 데리다); 모험 또는 위험 감수로서의 놀이(핑크, 가다머, 들뢰즈, 데리다); 절대적 혹은 순수한 우연으로서의 놀이(핑크, 들뢰즈, 데리다); 그리고 중심 없는 구조 또는 무한한 사건의 연쇄 속에서 상호 교환 가능한 요소들이 무작위적으로 배열되는 무한하고 우발적인 조합으로서의 놀이, 그것이 언어적이든 비언어적이든, 기호-사건의 놀이는 ‘차이와 반복의 놀이’ 또는 ‘시뮬라크르의 놀이’로 불릴 수 있다(들뢰즈, 데리다). 동시에, 이들 사상가들은 이성적 놀이 개념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플라톤, 라이프니츠, 칸트, 실러, 피히테, 셸링, 헤겔, 그리고 독일 관념론 전반과 같은 이성적 놀이의 옹호자들과 논쟁을 벌일 뿐만 아니라, 이성적 놀이 개념을 전(前)이성적 놀이 개념에 종속시키려는 시도도 함께 수행한다. 이와 같은 종속화를 실현하는 가장 일반적인 전략 중 하나는, 놀이가 본질적으로 질서 정연하고 이성적인 주관적 의지의 활동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 p.259 지난 한 세기 동안 인간의 놀이는 심리학, 교육학, 인류학, 영장류학, 그리고 생태학 등의 분야에서 연구의 대상이 되어 왔다. 놀이는 한편으로는 진화와,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정서와 연관되어 연구되어 왔다. 이 두 가지 문제는 특히 모방(모방-놀이와 모방-모사의 의미 모두를 포함하여)을 통해 여러 지점에서 상호작용하며, 적어도 앵글로-아메리카 학계에서는 그 기원을 허버트 스펜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현대 놀이 연구의 근간이 되는 놀이 이론들은 흔히 ‘고전적’과 ‘현대적’으로 분류되지만, 이 분야는 아직 너무 새로운 학문이어서 그러한 전통적인 분류가 반드시 필요하거나 유익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놀이 이론은 놀이를 지식과 분리된 개념으로 보는 것에서 벗어나, 놀이를 필수적인 인지 도구로 간주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는 현대 과학에서 놀이 개념의 역사적 발전 과정이자, 현대 철학에서 놀이 개념의 발전과 유사한 흐름을 보여준다. --- p.271 프로이트 이론에서 놀이에 대한 또 다른 새로운 요소는 ‘반복’이다. 이는 더 이상 단순히 인식의 쾌감이나 모방의 쾌감만 연결되지 않고, 불안감을 동반한 퇴행의 강박과도 관련된다. 물론, 놀이에 작용하는 ‘경제적 동기’ 혹은 ‘쾌락의 수익’ 역시 여전히 작용한다. 아이는 어머니의 부재를 보상하기 위해 그녀의 등장과 퇴장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놀이를 벌인다. 그는 어머니를 대신하는 장난감이 다시 나타날 때에 훨씬 더 큰 기쁨을 보인다. 따라서 이러한 행동은 여전히 쾌락 원칙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프로이트가 상기시키듯, 이 원칙은 “궁극적으로 쾌락을 얻고자 하는 의도를 포기하지 않으며, 오히려 만족의 지연과 일시적인 불쾌의 수용을 쾌락으로 가는 과정의 한 단계로 요구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다”. 아이는 어머니를 사라지게 함으로써 그녀를 다시 만나는 쾌락을 지연시키고자 하며, 이 게임의 끝없는 반복은 ‘인식 자체의 쾌감’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는 아이들이 놀이를 통해 어른의 활동을 모방하려는 성향을 설명하기 위해 특별한 모방 본능을 상정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여기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도 반대 입장을 취한다). 왜냐하면 이 역시 놀이를 보상으로 보는 관점을 통해 쾌락 원칙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로이트를 괴롭히는 것은 보상이나 쾌락의 경제와 같은 생의 본능의 보존과는 무관한 반복의 강박이다. 이 강박은 신경증 환자와의 정신분석 세션에서 임상적으로 관찰된다. “전이 상태에서의 행동과 남성과 여성의 삶의 역사에 기반한 … 관찰을 고려할 때, 우리는 쾌락 원칙을 초월하는 반복 강박이 실제로 정신 내에 존재한다고 믿을 용기를 가질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강박을 외상 후 신경증에서 나타나는 꿈이나, 아이들이 놀이에 끌리는 충동과도 연결시키게 될 것이다”. --- p.292 오늘날의 놀이에 대한 학제 간 연구에서 또 하나의 영향력 있는 인물은 브라이언 서튼-스미스(Brian Sutton-Smith)이다. 그는 베이트슨의 상징적 접근을 행동 이론과 결합하면서도, 놀이 현상에 대한 순수한 이성주의적 해석에 대해 강한 회의적 입장을 유지한다. 서튼-스미스는 원래 발달심리학과 교육학을 전공했지만, 그의 작업은 인류학, 민속학, 서사학, 언어학, 커뮤니케이션 이론, 미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넘나든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지난 20여 년간 여러 논문을 통해 전개해 온 피아제의 놀이 이론에 대한 비판이며, 이는 최근 「피아제, 놀이, 인지의 재조명(Piaget, Play and Cognition Revisited)」(1983)에서 종합적으로 제시되었다. 비록 피아제의 놀이 이론에 대한 해석에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서튼-스미스의 비판은 필자의 입장과 유사하며, 세 가지 주요 반론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1) 지능 이론 속에서는 모방과 놀이가 외견상 동일한 잠재력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피아제는 모방이 중심적이고 놀이가 그 파생물에 불과한 불균형한 구조를 설정했다. 2) 이러한 불균형은 피아제가 목표지향적이거나 이성적이거나 수렴적인 인지 작용에 집중한 반면, 비목표 지향적이거나 상상적이거나 확산적인 인지 작용을 간과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3) 또한, 피아제가 놀이를 주로 유아기에 국한된 발달 상태로 전제한 것도 이유인데, 이는 서구 문화의 근면 윤리 이데올로기에서 흔히 나타나는 가정이기도 하다.” --- p.321 도킨스는 적자생존을 “안정적인 생존”으로 해석하며, 다윈의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 이론을 종을 넘어 지구 생명의 기원까지 확장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안정적인 것이란 “이름을 붙일 만큼 충분히 지속적이거나 흔한 원자들의 집합이다”. 최초의 안정적인 유기물질은 이른바 원시 수프(태고 수십억 년 전의 바다) 속에서 물, 이산화탄소, 메탄, 암모니아, 그리고 번개와 같은 강력한 에너지원의 작용으로 형성된 아미노산 분자였을 수 있다(이 과정은 실험실에서 성공적으로 재현된 바 있다). 이러한 유기 분자들 사이에서는 원시적 형태의 자연선택이 작용했으며, 안정적인 분자들은 살아남고 불안정한 분자들은 제거되었다. 그러던 중 순전히 우연에 의해, 자기 자신을 복제할 수 있는 특별한 종류의 분자가 등장했으며, 도킨스는 이를 복제자라고 부른다. 이 복제자들은 현대 DNA 분자의 조상 또는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빠르게 또는 정확하게 복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연선택에 의해 선호되었으며, 점점 더 안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투쟁은 이 과정에서 ‘현대’ 진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원시 수프는 한정된 수의 복제자 분자들만을 지탱할 수 있었고, 생존 투쟁에서 살아남은 복제자들은 도킨스가 ‘생존 기계’라고 부른 것을 자신을 위해 만들어냈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후손이자 현대적 등가물인 유전자들 또한 인간, 동물, 식물, 박테리아, 바이러스 등의 형태로 자기 자신만의 생존 기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 p.336 바이힝거는 과학적 사고방식을 구성하는 이성적 가치들과 쇼펜하우어의 의지 개념에 내재하며, 니체가 공개적으로 긍정했던 전(前)이성적 가치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한다. 그가 만약 일관되게 전(前)이성적 관점을 선택했다면, 그의 논증을 괴롭히는 보다 분명한 논리적 모순들과 이중 기준들을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허구, 가설, 교리 간의 구분이 실제로는 순전히 가치론적 구분이라는 점을 인식했을지도 모른다. 즉, 어떤 특정한 가치 집단이 논리와 인식론을 결정하는 것이지, 논리나 인식론이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랬다면 바이힝거의 ‘허구’는 더 이상 논리적 범주 사이를 넘나드는 모호하고 역설적인 개념으로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 대신, 그의 관념 이동의 법칙은 다음과 같이 주장되었을 것이다: 역사적 과정 속에서 모든 관념적 구성물은 어떤 시점에서든 허구, 교리, 혹은 가설처럼 간주될 수 있다(as if). 즉 그것들은 문화적 권위를 둘러싼 투쟁에서 얼마나 성공적인가에 따라 가치가 상향 또는 하향 조정될 수 있다. 이와 같이 급진화된 관념 이동 이론은, 서구 문화에서 철학, 과학, 종교, 예술이라는 주요 담론들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는 기능주의적 역사로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이 절의 범위를 넘어서는 질문들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다시 과학의 이론적 담론으로 돌아가, ‘신물리학’이라 불리는 분야에서 미학과 놀이가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게다가 이 활용 방식은 바이힝거의 ‘마치 ~인 것처럼(as if)’ 철학에서 발견되는 방식과 놀라울 만큼 유사하다. --- p.405 실제로, 아인슈타인에게 있어서, 그리고 플라톤적 이성주의 전통 전체에 있어서 감각의 세계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세계로 간주된다. 그리고 바로 그 감각 세계를 조사하고 통제하는 것이 이성의 역할이다. 과학에서의 놀이의 논리적 역량은 단순한 ‘공허한 개념’의 놀이와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이것은 반드시 상상력의 놀이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자크 아다마르(Jacques Hadamard)가 수학적 발명에서의 심리 작용에 대해 질문했을 때,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답했다: 그의 사고 메커니즘의 근간은 상상력의 ‘결합적 놀이’에 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에게 있어 이러한 결합적 놀이는 어떤 언어 이전의 기호와 모호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진다는 창조적 과정의 첫 번째 단계일 뿐이며, 이것은 곧 논리적 단계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 게다가, 이 첫 단계에서도 이미 상상력의 놀이는 ‘논리적으로 연결된 개념들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에 의해 지향되고 있다. 이 욕망은 곧, “[언어 이전의 기호들과 다소 불분명한 이미지들]과 함께 하는 이 다소 모호한 놀이의 감정적 기초”라고 그는 설명한다(『수학자의 정신(A Mathematician’s Mind), 25쪽』). 따라서, 이러한 전(前)논리적 존재들과의 놀이는 이미 다음과 같은 지향성을 갖고 있다: “탐색 중인 특정한 논리적 연결들과 유사한 관계를 만들어내려는 시도”, 그리고 “이러한 상상력의 연상적 놀이가 충분히 확립되고 자유롭게 재현 가능해지면”, 그것은 곧 이성의 놀이 속에 통합된다. --- p.422 하이젠베르크는 새로운 물리학과 오래된 물리학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양자역학과 자연과학의 다른 영역들 사이의 관계 역시 상보적인 것으로 제시한다. 특히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원자물리학이 생물학 전반, 그리고 특히 다윈의 진화 이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그의 관찰이다. 비록 생물학에서 생물학적 현상을 오직 물리·화학적 과정의 관점에서 설명하려는 현재의 경향이 상당한 실험적 성공을 거두어 왔고, 특히 진화 이론과 관련해서 그러했지만, 하이젠베르크는(보어를 따라) 모든 생물학적 현상을 설명하는 데 물리·화학적 요소들만으로 충분하다고 믿는 유전학자들 사이의 널리 퍼진 신념에 대해 경고한다. 그는 현대 생물학에는 두 가지 주요한 관점이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지배적인 환원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다윈의 이론을 물리학과 화학과 결합하면 유기적 생명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가능하다. 이에 반해 보어가 제안하고 하이젠베르크 자신도 공유하는 유기체적 관점에 따르면, 살아 있는 유기체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그 유기체의 완전한 분자 구조에 대한 지식과 상보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구조에 대한 완전한 지식은 유기체의 생명을 파괴해야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생명이 그 기저에 있는 물리·화학적 구조의 완전한 규정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생물학은 양자 이론과 마찬가지로, 그 질문들이 “살아 있는 유기체의 범주에 속하는 종으로서의 인간’에 의해 제기된다”는 사실, 혹은 우리가 “과학적으로 정의하기 이전에 이미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다시 말해, 생물학도 다른 모든 과학과 마찬가지로 존재라는 위대한 “드라마 속에서 우리는 배우이자 동시에 관객이다”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 p.439 파이어아벤트는 과학적 진보라는 개념(그것이 상대적인 형태이든 절대적인 형태이든)을 효과적으로 비판한다. 반면 쿤은 여전히 이 개념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과학 혁명이 지닌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성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이 점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쿤 자신이 지적하듯, 새로운 규율 매트릭스가 형성되는 중심에는 일반적으로 기존의 과학 전통이나 심지어 종교적, 문학적 전통에서 차용된 이론들이 있다. 과학 혁명은 거의 항상 과거의 허구로의 ‘회귀’를 수반하며, 이러한 허구들은 다시금 지식과 진리의 권위를 부여받는다. (이 지점에서 쿤은 우리가 수정한 바이힝거(Vaihinger)의 사고 전환의 법칙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모든 혁명이 (과학적이든 정치적이든) 되돌아오는 것은 반드시 동일한 힘 구조는 아니지만, 동일한 힘 지향적 사고방식이다. 이 사고방식은 새로운 공동체적 및 제도적 틀을 창조함으로써 주기적으로 자신을 재생산한다. 따라서 쿤이 말하는 진보 개념 속에서는, 가장 자유주의적인 과학 철학자들과 과학사학자들조차도 자신들의 분야가 지닌 문화적 권위에 대한 특수한 주장과 이성 중심의 과학적 사고방식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저항감을 분명히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과학적 사고방식은 힘이 곧 정의다라는 원칙을 (타인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조차) 부정하려 하지만, 실제 실천에서는 이 원칙을 따르면서도 그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 p.4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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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이 스파리오수의 책은 내가 접한 놀이의 본질에 관한 가장 설득력 있는 기록 중 하나다. 그 지식의 폭과 깊이는 놀랍고, 놀이의 중요성에 대한 이해도 주목할 만하다.” - 제임스 S. 한스 (웨이크 포레스트 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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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이 스파리오수는 폭넓고 인간적인 공감을 가진 대담한 사상가이자 뛰어난 기량과 품격을 지닌 작가이다.” - 스탠리 콘골드 (프린스턴 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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