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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머리에
강물은 또 몇 천리 ■ [해제] 내게 구원을’: 어느 페미니스트의 외침_ 손유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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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희 소설 전집 간행 의사를 접한 주변의 첫 반응은 ‘아직 없었느냐’는 것이었다. 전집이 없다는 것이 의아하다는 말은 전집이 있을 법한 혹은 있어야 할 작가를 향한 말이다. 20세기 전반을 가로지르며 작가, 배우, 기자로 활약한 최정희(1906~1990)는 역동적 한국 현대사의 충실한 기록과 그 이면에 대한 도발적 폭로를 수행한 프로페셔널한 전업 여성작가였다. 일제강점기 민중의 현실과 지식인의 고뇌, 해방기의 민족적 혼란, 전쟁과 분단이 야기한 젠더 구조의 재편성에 이르기까지, 최정희는 한국 현대사의 계급, 민족, 젠더의 핵심 이슈를 우회하지 않고 그대로 관통하면서 수많은 논란과 빛나는 문학적 성취를 낳은 우리 문학사상 최고의 문제적 작가이다.
“나는 이런 것을 보았다.” 산문집 『젊은 날의 증언』(육민사, 1963) 한 챕터 제목이기도 한 이 문장은 작가 최정희의 치열한 글쓰기가 개인과 사회를 향한 그의 철저한 응시에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 시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내면이나 직관적으로포착되는 영혼의 움직임에 가 닿기도 하고, 노골적 폭력이나 격정적 사랑을 향하기도 하며, 눈앞에 전개되는처절한 인간사와 그 이면의 진실에 접근하기도 한다. 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최정희소설전집편집위원회는 최정희의 이러한 면모가 더 많은 독자에게 더 잘 이해되고 더 입체적으로 파악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전집 발간 작업에 임하였다. --- 「'책머리에'」 중에서 이럴즈음에 승현의 소식을 들었다. 일터를 찾아온 승현의 동지라는 사나이의 말인즉 조승현이 북간도에 있다는 것이었다. 승현은 사나이에게 수표교다리 근처, 수표정 ××번지에 가서 강주를 찾으라고 일러주더라는 것이고 만약에 그집에 거주하지 않고 다른데 이사를 갔더라도 그집 주인들에게 물으면 강주의 행방을 알 것이라고해서 사나이는 그말대로 거기 가서 일터를 알게 되었다는 말까지 했다. 강주는 금새 몸속에 얼음이 꽉찬 듯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수염이 무성한 사나이의 얼굴을 멀뚱멀뚱 보고만 있었다. “조승현 동지께선 훌륭히 싸우고 있어요.” 사나이가 멀뚱멀뚱 보고만 있는 강주를 뚫어지게 보아가며 말했다. 죽은 지 오랜 그가 누구와 무엇을 싸우고 있냐고 이런 소리를 치고싶었으나 소리는 나오지 않고 입술이 약간 달싹거렸을 뿐이었다. 강주 눈앞엔 살아있다는 승현은 떠오르지 않고 뒤범벅이 되어 알아볼 수도 없던 시체가 가로놓였던 것이다. “조승현 동지께서 부인을 대동하고 오라는 사명을 나에게 주었읍니다. 나는 부인을 대동하고 조승현 동지에게로 가면 내 사명을 마치는 겁니다.” “네?” 이 소리는 강주 입에서 나왔다. 그러나 강주는 제소리를 듣지도 못하고 쓰러졌다. 그는 피범벅이 되어있는 승현의 시체와 시누이와 아이의 한테 붙은 시체를 보고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안개와 같은 뽀얀 기체 속을 둥둥 떠올라가면서 강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강주는 내밀어 잡는 그들의 손을 붙잡고 공중으로 공중으로 둥둥 떠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 pp.274-2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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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은 또 몇 천리』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 동경 유학파 출신 인텔리 여성 서강주가 남편 조승현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10여 년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식민지 시기 연극 운동의 현장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는 최정희의 1930년대 초중반 생애도 반영되어 있어 작가 연구에도 필수적인 자료이다.
배우를 꿈꾸던 서강주는 연극 운동을 하는 조승현에게 강간을 당한 뒤 낮에는 그가 주간으로 있는 잡지사 기자로, 밤에는 그의 여자로 살면서 그의 성적, 신체적 폭력을 견딘다. 생계를 위해 지방 순회극단 배우로도 일하면서 방탕하고 무책임한 남편 대신 시댁 식구까지 먹여 살리며 고군분투하지만, 조승현은 친족 살인까지 저지르고 자살을 위장하여 도피했다가, 다시 나타나 서강주를 위협한다. 서강주의 피폐한 삶에서는 민족의 해방조차 떠나 보낸 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번민이 깊어지는 사건 중 하나일 뿐이다. 『강물은 또 몇 천리』는 해방 공간의 혼란상 속에서 마무리된다. '해제' 중에서 (전략) 『강물은 또 몇 천리』는 1930년대 연극 운동의 한복판에서 극단 여배우로 생계를 이어가는 주인공 서강주가 폭력적이고 방종한 남자 조승현으로부터 신체적ㆍ정서적 고통을 겪으며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친 10여 년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서사 전체에 자전적 요소가 적절히 풍부하게 섞여 있어서 식민지 시기 연극 운동의 현장을 복원하고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1930년대 초중반 최정희의 생애를 재구성하는 데 필요한 핵심 자료로서 손색이 없다. (중략) 『강물은 몇 천리』 1부는 이처럼 해방을 감격과 희열이 아닌 상실과 번민으로 경험하는 서강주가 절대자를 향해 간절히 구원을 요청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나라가 독립이 되어도 서강주는 인습의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한다. 승현과 승현의 세계는 반성 없이 건재한다. 『인간사』에서 최정희가 도저한 염세주의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은 ‘동경 시절’의 청춘들이 꿈꾸었던 이상과는 거리가 먼, 그 시절의 잔해이자 찌꺼기 같은 곳임을 웅변했듯, 『강물은 몇 천리』는 식민지 시기 내내 무능한 마초들의 세계에 “말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던 인텔리 여성 서강주에게 민족의 해방은 과거와의 단절이나 미래로의 도약을 결코 보증하지 않는, 철저히 외삽된 에피소드였음을 극적으로 시사한다. ―손유경(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