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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론과 정치적 실천
2. 마키아벨리의 이론과 이론적 배치 3. '새로운 군주'의 이론 4. 새로운 구준의 정치적 실천 5. 부록 : 마키아벨리의 고독 |
Louis Pierre Althus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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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가 매우 주목해야 할 것은 마키아벨리가 자신의 텍스트를 위해 고정시킨 장소, 그의 관점의 장소가 군주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주는 결정적인 정치적 실천의 '주체'로 결정되고 있지만, 인민이라는 점이다. 역설적이게도, 로렌초 데 메디치라는 통치자에게 헌정하는 책의 서두에서, 마키아벨리는 군주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하면서도 서슴없이 언명하고 있는 것이다. '통치자들의 성격을 적절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민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따라서 통치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통치자들이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인민의 관점을 제외하고서는 통치자들에 대한 어떤 지식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비록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와 관련하여 통치자들의 관점을 제외하고서는 인민에 대한 어떤 지식도 있을 수 없다는 단언은 위의 언명을 적합하게 하는 슬기로운 방식처럼 여겨질 수 있다. 왜냐하면 마키아벨리는 인민에 관해 논의하겠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인민론』이란 제목의 선언을 집필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좀더 나아가야 한다. 마키아벨리가 인민이 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특정 군주의 본성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군주들의 본성을 알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합의하는 바는 여러 부류가 있다는 것, 따라서 인민의 관점으로부터 그들 중에서 선택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 pp.53-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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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로부터 그의 일반 명제들, 그의 역사이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관계를 이해하게 된다. 그 명제들을 다룸에 있어서, 그는 그것들을 모든 가능한 대상들의 일반적 진리로 간주하여 특수하고 구체적인 대상에 적용하기는커녕, 그 명제들을 배열하여 차례차례 부정하면서 규정한다. 그가 이렇게하는 이유는, 철학적 원리와 개념적 모체라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자신의 고유한 이론적 토대 위에서, 그 명제들로부터는 전혀 연역할 수 없는 개념들을 생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자 그대로 본다면, 이 명제들은 모순적이며, 그것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효과는 어떤 담론도 미리 배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들이 배열된 상태에서 고려된다면, 그 배치와 상호작용, 비일관성은 새로운 이론적 공간과 정확한 개념적 효과들을 생산하게 된다. ---p. 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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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로마인 이야기』로 널리 알려져 있는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자신의 책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를 이렇게 끝맺고 있다.
"독자 여러분, 이것을 다 읽고 나신 지금, 여러분에게도 이 사나이는 '나의 친구'가 되었습니까?"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음흉하고 비열한' 마키아벨리즘의 주인공을 그녀는 어떻게 친구로 삼게 되었을까? 『르 몽드』가 '마지막 맑스주의자'라며 추모한 알튀세르는, 이미 1960년대부터 시작된 '마키아벨리'의 재해석을 자신 생의 마지막 작업으로 삼아 집필하다가 1990년 숨을 거두었다. 사후 발견된 그의 원고는 놀라운 것이었다. 거의 동일시에 가까운 마키아벨리에 대한 '사로잡힘!' 교조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을 만큼 엄격한 맑스주의 이론가였던 그는 어떻게 마키아벨리와 하나가 될 수 있었을까? 시오노 나나미가 '고독한 영웅'의 '당대와의 완벽한 투쟁'이라는 전기적 모티브에 매료되어 마키아벨리와 동화되어 가는 하나의 과정을 자신의 책에서 보여주고 있다면, 이 비운의 철학자 알튀세르는 '맑스주의의 전화'라는 그 자신 필생의 이론적 기획의 완성, 그 길목에 다다르는 목마른 언덕에서 만난 동병상련의 마키아벨리를 '혁명적'으로 해설함으로써 우리의 물음에 답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와 주제가 지닌 풍부한 사상에 새로운 빛을 비춰줌으로써, 이 책은 마키아벨리와 알튀세르의 연구자들에게 똑같이 환영받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