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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은이 일러두기 7
엮은이 서문 9 제1강. 1972년 2월 25일 47 제2강. 1972년 3월 3일 91 제3강. 1972년 3월 17일 143 루이 알튀세르 약전 195 옮긴이 후기 198 |
Louis Pierre Althus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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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는 그러한 철학자들이 “자연 상태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성”을 제대로 감지했지만 “아무도 거기에 이르지는 못했다”고 공언합니다. 그들이 거기에 이르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여전히 “고질적인 편견들”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루소로 말하자면 그는 유일하게 다음과 같은 것을 행하는 유일한 인물인데요. 즉 루소는 그 너머로 나아가기를, 그 한계에까지 나아가기를 결심했고, 마땅히 “그 뿌리까지 파고들어가” “고질적인 편견들”의 수준을 넘어서야 했습니다. 이 뿌리란, 사실상 철학자들, 모든 철학자들이 도달할 수 없었거나 도달할 줄 몰랐던 수준 내지 종착점이며, 그래서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연 상태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 p.61 사회계약에 의해 분리가 이뤄지는 자연권 이론의 발생과 마찬가지로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발생도 그처럼 이뤄집니다. 이 발생은 네 가지 계기들을 포함하는데요. 첫 번째 계기가 순수 자연 상태, 즉 그 분리 속에서 순수한 기원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왜냐하면 순수 자연 상태는 인간들을 서로 접근하도록 만드는 우주적 규모의 거대한 장애들, 즉 계절의 변화라든지 대양의 전복이라든지 하는 것 등이 개입되지 않는다면 무한정 재생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들은 흩어진 상태로, 범세계적인 숲 속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거기서 인간들은 방랑하며 서로서로 떨어진 채로 자연에 일치해 있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그 자연에 의해서 다시 모이도록 강제되는데요. 바로 이때부터 어떤 새로운 것이 시작됩니다. --- p.108 연민의 고유성은 자연 상태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관계라는 점에 있습니다. 자신의 동류에 대한 동정심은 순수하게 부정적인 하나의 관계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들을 결속시키지 못하죠. 연민은 다른 데서는 마주칠 일이 없는 그 인간들을 결속시키지 못하며, 인간들이 마주치는 경우에는 그저 서로를 해치는 것을 막을 뿐입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하나의 부정적 관계라는 것인데요. 그러니까 연민은 사회성, 사회적 욕구, 타인들에 대한 욕구가 아닌 것입니다. 절대 아니죠. 그것은 단순히 동정심, 타인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기, 자기 자신의 종에 속한 한 존재자에게 고통을 주지 않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순수하게 부정적인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만약 인간들이 마주친다면 행해지는 것입니다. 제가 “만약 인간들이 마주친다면”이라고 말한 것은 자연 상태에서 인간들은 실제적으로는 마주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이 루소가 가진 가장 놀라운 역설인 것입니다. --- p.123 루소에게 “동물적” 존재란 무엇일까요? 동물적 존재란 감각 기관들을 통해 외부 세계로부터 받아들인 정보들을 기반으로 자체적으로 재조립되는 기계 존재인 것입니다. 동물적 존재란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킴으로써 그 기계의 생명을 공고히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동물적 존재는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며, 동물의 그러한 필요들은 생리적 필요들인 것입니다. 이 용어는 지극히 중요한데요. 루소 사상의 한 부분 전체가 생리적 필요와 도덕적 필요 사이의 구분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 p.151~152 |
루소에 가려진 루소,
알튀세르에 가려진 알튀세르 읽기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관한 알튀세르의 이 강의는 1972년 윌므가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 교원자격시험 대비용으로 행해진 것이다. 최초로 알튀세르의 육성 기록을 책으로 엮었다. 수험대비용 강의이지만 루소에 대한 알튀세르의 독창적 해석이 여실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알튀세르가 교육 현장에서 펼쳤던 강의는 그 자신만의 사고를 짜내는 제조와 실험의 공간이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알튀세르가 마키아벨리, 스피노자와 더불어 마르크스로 가는 왕도라고 꼽았던 루소. 따라서 여러 해에 걸쳐 펼쳐졌던 알튀세르의 루소 강의의 궤적은 알튀세르 사고의 진화 과정을 드러낼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이 책에 담긴 1972년 루소 강의는 이른바 “말년 알튀세르”의 것이라고 알려졌던 마주침의 유물론 또는 우발성의 유물론이 이미 이 무렵 매우 완숙한 단계에 이르렀음을 잘 보여 준다. 나아가 이 강의는 루소의 텍스트를 읽는 새로운 방식을 열고 새 세대 루소 연구자 군을 만들어 낸 강의이기도 하다. 사회 이전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알튀세르의 강의는 세 차례에 걸쳐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라는 교재를 다루고 있다. 알튀세르가 주로 이야기하는 것은 루소가 사회에 앞서는 기원, 즉 “순수 자연 상태”에 관해 기술하는 부분이다. 루소는 세 가지 불연속적 계기들로 세분화된 자연 상태를 제시한다. 순수 자연 상태, 세계의 청춘기, 전쟁 상태. 알튀세르는 외부의 우발적인 사건들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각각의 상태는 무한정 재생산되고 말 것이라는 의미에서 세 국면들을 원환이라고 표현한다. 탈자연화된 상태인 나머지 계기들과 달리 순수한 자연 상태의 원환을 따로 두는 이유는 기원에 대한 사고를 비판하기 위함이다. 루소는 사회와 법이 존재하지 않는 순수 자연 태를 설명하기 위해 ‘숲’이라는 비유를 든다. 숲이라는 이 무한한 공간을 떠돌아다니는 인간들에게는 결속이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서는 설사 인간들 간의 마주침이 있더라도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는 일회적 사건이 된다. 자연 상태를 넘어서 사회로 넘어가는 것은 그러한 공백에서의 도약이며, 시민적 상태 내지 사회 상태에는 지속적이고 불가피한 마주침의 상태가 부과될 것이다. 요컨대 루소가 제시하는 이러한 계열들에서 특징적인 것은 인간들 간의 관계의 발전에 관한 모든 변증법을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우선적으로 조건 짓는다는 점, 그리고 이행은 마치 무한정한 순환성의 상황에서 우연들이 요청되듯이, 그런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과정 외부에 있는 우발 사건들의 개입이 필연적이라는 듯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20여 년의 루소 독해에서 비롯된 “마주침의 유물론” 알튀세르가 강의에서 줄곧 강조하는 것은 루소의 역사 개념의 독창성이다. 알튀세르는 루소에게는 우연성이 필연성으로 전환되는 과정에 대한 사고가 명확히 자리한다고 말한다. 루소에게 나타난 우발 사건과 돌발, 그리고 계약은 필연으로 전환된 우연적인 것들이다. 그런데 우연성이 필연성으로 전환하지만 이 필연성은 기존의 필연성과 같은 것이 아니다. 이행은 상이한 수준들 사이에서 벌어진다. 알튀세르의 이러한 설명은 데리다가 기원의 물음에 관한 “방법서설”로서 루소의 “외재적 목적론”에 대해 말할 때, 또한 “대체보충성의 기록법은 논리로 환원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와 흡사하다. 무엇보다 알튀세르 말년의 저술들에서 뚜렷이 나타난 “마주침의 유물론”은 20여 년간의 루소 독해에 힘입은 바가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필연성을 우연적인 것들의 필연적인 마주침으로 이해하는 그의 사유는 루소의 독창적인 역사 개념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알튀세르가 이야기하는 우연성의 필연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를테면 정세의 사고, 계약의 마주침이 발생할 수 있는 조건들에 대한 사고와 관련 있다. 곧 계약의 구성은 지극히 모험적인 정치적 기도이므로 그러한 우연성의 가능성 조건으로서 어떤 존재론적 차원을 확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래서 루소가 제시한 계약은 기존 정치의 형태들 안에서 공백을 발견하고 새로운 마주침의 여지를 둔다. 알튀세르가 이 강의를 닫으면서 말한 “유토피아에 대한 사고가 사고되는 바로 그 순간에 유토피아에 대한 사고 자체”를 비판하는 루소의 의식이란 바로 그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
“1972년 루소 강의의 발견은 알튀세르가 남긴 유산을 복원하는 와중에 발생한 진정한 기적 가운데 하나이다. 당시 강의를 직접 듣기도 했던 걸출한 루소 연구자 이브 바르가스에 의해 멋지게 글로 엮였다. 우리는 이 72년 강의를 통해 그 이전부터 유명했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알튀세르의 루소 해석에서 어떤 예기치 못한 진전이 이뤄졌는지를 알 수 있고, 말년 알튀세르의 철학 “우발성의 유물론”의 원천을 이해하는 데서도 빈틈을 메울 수 있다. 기쁨과 영감을 주는 독서가 될 것이다.” - 에티엔 발리바르 (『자본을 읽자』의 공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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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알튀세르의 1972년 루소 강의에서 마주침의 유물론의 개념적 틀이 완전하게 사용됨을 확인할 수 있다. 공백의 형상화, 숲으로 예시되는 마주침과 마주침 없음의 공간, 모든 목적론의 근본적 부정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강의는 관념론이 취하는 주요한 형태들 가운데 하나가 기원에 대한 사고라는 알튀세르의 테제를 루소 읽기를 통해 근거 짓는 시도라고도 할 수 있다.”
- 파나지오티스 소티리스 (『위기, 운동, 전략: 그리스의 경험』의 저자) |
“묵직한 수직선과 붙어 있는 원환 이미지는 알튀세르의 분석에서 항구적인 이미지 정식인 것 같다. 이는 알튀세르가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해설할 때 잘 드러났던 점이다. 특히 자체적으로는 아무것도 갖추지 못하고 자체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는 기원의 원환으로서 순수 자연 상태와, 여러 원환들에 의해 과정들, 단절들, 사건들, 차이들이 이어지는 자연 상태 간의 단절을 설명할 때가 그렇다. 비록 이러한 과정에 대한 착상이 갖는 효과들이 루소에게 가시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바로 이 지점이 역사에 관한 하나의 사유가 꿈틀거리기 시작한 곳이다.” - 마르크뱅상 울레 (『장자크 루소: 인간을 신뢰하는 인간』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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