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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1 윤 철 원 박사 l 서울신학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신약학 주임교수 1
추천사 2 김 선 욱 박사 l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 3 서문 10 제1부 풍랑을 잔잔케 하신 예수님 이야기 17 제1장 마가의 메시지(막 4:35-41) 자연과 사탄의 세력을 제어하시는 예수님 18 제2장 마태의 메시지(마 8:18, 23-27) 예수님의 신적 권위와 제자도 42 제3장 누가의 메시지(눅 8:22-25) 구원자로서의 예수님과 진정한 믿음 59 제2부 거라사 광인 이야기 82 제4장 마가의 메시지(막 5:1-20) 강한 자의 세간을 강탈하시는 예수님과 서로 상반된 반응 83 제5장 마태의 메시지(마 8:28-34) 귀신들을 제압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 120 제6장 누가의 메시지(눅 8:26-39) 귀신들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능력과 구원의 의미 133 제3부 세례 요한의 죽음 이야기 158 제7장 마가의 메시지(막 6:14-29) 참 제자의 모델인 세례 요한과 왕의 잔치 159 제8장 마태의 메시지(마 14:1-12) 예수님의 선구자, 세례 요한의 죽음 191 참고 문헌 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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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신학자가 마가복음 4-5장에 있는 네 개의 기적을 1) 자연 이적, 2) 귀신 축출, 3) 질병 치유, 4)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마가복음의 문맥을 고려하면 풍랑 사건과 거라사 광인 치유 기적은 단순한 이적이 아니다. 사탄보다 더 강한 예수님이 “먼저” 사탄을 제어하고, 사탄의 영역에 침입하여 “결박한 후” 사로잡힌 자를 되찾아 오시는 구조(救助) 이야기다. 다른 복음서와 다르게 마가복음 3:27 헬라어 원문은 ‘먼저’와 ‘결박한 후에’를 이중으로 강조한다. 예수님은 ‘먼저’ 풍랑 사건을 통해 자신의 영역 침입을 방해하려는 사탄의 세력을 제어하신다. 그리고 ‘그 후에’ 사탄의 영역에 들어가 군단 귀신에게 사로잡힌 자를 자유롭게 하여 하나님의 가족으로 삼으신다.
--- p.21 예수님이 주무신 이유가 무엇일까? 왜 누가만이 “행선할 때” 주무셨다고 기술하며 주무신 시점을 강조할까? 브루스 바톤은 예수님이 무리에 시달리며 힘든 하루를 보내셨기에 피곤하여 주무셨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것은 마가복음의 문맥에서나 가능하다. 마가복음에서는 비유를 말씀하신 특정한 날을 언급하며 그날의 힘든 일과를 소개한다....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전체적으로 풍랑 사건을 일반화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의 믿음을 테스트하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주무심이 예상 밖이고, 희귀한 동사(선잠에 빠지다)로 표현되었으며, 씨 뿌리는 비유(8:13, 15)와 연결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다. --- p.70 상당수의 학자가 거라사 지역 주민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를 경제적 손실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사도행전에 이와 유사한 사건이 있다는 점을 근거로 내세운다. 그렇지만 이러한 해석은 본문의 문맥과 강조점, 문학적 기교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다. 분명히 사도행전 기사에는 경제적 손실에 대한 언급이 명시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본문은 돼지 떼가 죽은 경제적 피해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이 오직 구원받은 상태에만 초점을 맞춘다. --- p.150 본문을 마태복음과 비교하면 뚜렷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마태는 초청된 손님이 누구인지 언급하지 않는다(14:6, 9). 하지만 마가는 이들이 사회의 각 분야를 대표하는 엘리트 그룹임을 분명히 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헤롯의 연회는 오병이어 만찬과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마가복음 저자가 이 부분을 전체적으로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만찬 주관자, 연회 장소, 개최 이유, 참석한 손님 그리고 현장 분위기를 서로 비교해 보라. --- p.180 헤롯 왕궁 연회장의 난잡한 분위기와 푸른 풀밭 위에 ‘식사 대형으로’(쉼포시아) 질서 정연하게 앉아 ‘다채로운 꽃밭’(프라시아이)을 상기시키는 예수님의 만찬 장면. 얼마나 기막힌 대조인가! “떼를 지어”, “푸른 잔디”, “떼로 백 명씩”, “오십 명씩”이라는 표현은 마태복음에 없다. ‘쉼포시온’과 ‘프라시아’, 이 두 명사는 사복음서는 물론이고 신약성경 다른 곳 어디에도 없다. --- p.1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