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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위기의 시대의 비평 I 한야의 소년들 먹고 먹히는 소녀들 오페라 유령 끝장내버려 나쁜 년! II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에 관하여 나쁜 TV 핑크 중국 뇌 III 사이코 분석 아무도 원치 않아 메트로 골드윈 마이라 끼리끼리 무대 뒤의 천사 여성에게 투표를 오 노 IV 권위 V 가짜 신성 울부짖는 나라 병가 혼합 은유 있을 법한 사람들 당신이 결정해야지 에필로그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
Andrea Long C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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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비평이 정말로 하나의 예술이라면, 모든 예술 가운데 가장 저급하고 가장 구체적인 예술일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비평이 고상한 기술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사전 편찬이나 번역처럼 매슈 아널드가 “잡역부가 하는 문학 관련 일”이라고 부른 것의 좀 더 고상한 예시가 아닐까. 아름다울 수는 있지만 반드시 기능적이어야 하는 것.
--- p.28 예술작품을 본래의 세속성으로 되돌리는 것, 이것이 바로 비평가의 최대 과제이다. 예술가는 세계에서 무언가를 떼어내 작품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되돌려놓는 것이 비평가의 일이다. 나는 영원과 역사, 여가와 노동, 교환가치와 사용가치의 차이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예술가는 원하는 만큼 찬란한 창조의 천국으로 올라가도 좋다. 그를 땅으로 다시 끌어내리는 일은 비평가에게 달려 있다. --- p.29 일반적으로 나는 도발하고 모욕감을 줄 예술적 자유를 옹호한다. 그러지 않을 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나는 문제적이거나 논쟁적인 발언을 검열하는 데 반대한다. 그러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렇다면 무엇을 그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 그럴 때 나는 판단하거나, 적어도 판단하려 노력한다. 즉, 사물의 불확정성을 그것에 관한 견해를 갖는다는 비일관성에 통합시키는 것이다. 견해라는 건 그런 식으로밖에는 형성되지 않는다. --- p.104 우리가 무언가를 원할 때 그걸 갖게 되리라는 걸 알아서 원하는 것은 아니다. 원하는 건 그저 원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욕망을 구조화하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근원적 실망이다. 갖게 된다고 보장된 것들만 원할 수 있다면 우리는 결코 아무것도 원하지 못할 것이다. 나처럼 처량한 트랜스들을 동정해달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머리맡에 장미는 충분하다. 다만 트랜스 여성들도 무언가를 원한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의 욕망은 다른 이들의 것만큼이나 깊고 섬세하며, 우리가 원하는 것은 놀랍도록 다채롭다.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커밍아웃이 짝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느껴지고, 처음 입는 드레스가 첫 키스처럼 느껴지고, 성별 불편감이 실연의 아픔처럼 느껴지는 걸지도 모른다. 결국 실망의 다른 이름은 사랑이다. --- p.132 시스젠더 여성들은 트랜스 여성들이 자기들을 부러워하는 걸 싫어한다. 아마도 부러워할 만한 것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없어서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에겐 공통점이 있다. 두 종류의 여성이 두 종류의 자기혐오를 가지고 나란히 붙어 있는 방에 각자 갇혀 서로 벽에 귀를 대고 상대방의 존재를 엿들으려 하면서, 그렇게 경쟁자를 의식하면서도 혼자가 되는 건 두려워한다. 자매여, 나는 그대가 가진 것을 원하는 게 아니라 그대가 그것을 갖지 못하는 방식을 원한다. 나는 그대의 풍요가 아니라 그대의 공허가 부럽다. 이제 나는 그걸 증명할 구멍을 갖게 되었다. 그대의 방식으로 나 자신을 증오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내주겠다. 그게 내가 나 자신을 증오하는 방식과는 다르다면 말이지만. --- p.169 적어도 마르크스 이후의 급진 정치는 자의식이라는 도박에 자신을 걸어왔다. 이 환상의 골자는 “앎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해준다”는 것이다(이 구절은 로빈 위그먼의 것이다). 그러한 결과는 1970년대 페미니즘 의식 고양 집단의 명목상 목표였으며, 오늘날 ‘워크 TV’와 ‘워크 트위터’의 목표이기도 하다. 이제 환상은 거짓말일 필요가 없다. 그것은 거짓이라 하더라도 믿고 말 어떤 것이다. 그 믿음의 강도는 욕망의 힘을 보여준다. 선거든 뭐든 여러 실망들로 메말라버린 정치적 환경 속에서, 원한다면 이것을 실망의 장점이라 불러도 좋다. 그 모든 반증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덩어리처럼 살아갈 것이다. 자고 일어나 데이트를 하고, 반려동물에게 먹이를 주고, 조직하고, 전화로 선거 유세를 하고, 뭔가를 읽으면서. 투쟁은 실로 실재한다. 하지만 어쩌면 나아질지도 모른다. 누가 알겠는가. --- p.260 우리의 제도는 무너지고 있고, 시민적 책무감은 약화되고 있으며, 현세적 권위는 자신이 법 위에 있다고 믿고 있다고 자유주의 불꽃을 지킨다는 이들이 점점 더 불안해하며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다음엔 무엇이 올까? “권위도 없고, 권위의 원천이 권력과 권력자를 넘어선다는 자각도 없는 정치 세계를 살아간다는 것은 신성한 기원에 대한 종교적 믿음 없이, 전통적이며 따라서 자명한 행동 기준의 보호 없이, 인간이 함께 살아간다는 데 따르는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시금 마주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1954년 한나 아렌트는 썼다. 이는 무엇보다 권위의 끔찍한 공백을 인종말살적 폭력으로 메웠던 전체주의의 부상에 대한 냉철한 경고였다. --- p.299 만약 비평이 오랫동안 권위의 시험장이 되어왔다면, 이제는 권위의 부재를 시험하는 장도 되어달라고 요구해야 할지 모른다. ‘권위’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지우자거나 권위적인 문체를 만날 때마다 거부하자는 뜻이 아니다. (이 글에서 나도 그런 문체를 써보려 애썼다!) 그러나 우리는 비평의 지배적 개념으로서의 권위란 모순적이며, 일관성 없고, 텅 빈 것이라는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무엇보다, 권위 없이 비평을 한다는 것은 학문이나 전통, 역사, 재치, 카리스마를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보았듯, 비평가들이 어마어마한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해 그러한 것들은 권위가 아니라고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이는 반가운 소식이다. 권위가 언제나 비평에서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다면 우리는 별로 아쉬워할 게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권위를 갈망하는 우리의 마음을 다뤄내야 할 것이다. --- p.299~300 결국 비평가는 언제나 사회 비평가라는 말을 하려고 먼 길을 돌아온 것 같다. --- p.399 내 기준에서 볼 때 유일하게 가치 있는 비평은 사회 전반을 개선한다고 주장하는 종류가 아니라, 존 버거가 쓴 바 있듯,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사회를 파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그런 비평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나는 그 일을 과대평가하고 싶지 않다. 기업이 소유한 인쇄 잡지의 전속 작가가 가지는 정치적 힘에 대해 나는 어떠한 환상도 갖고 있지 않다.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치부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지만, 그리 대단하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최선의 경우 비평은 작은 자유의 몸짓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 p.4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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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PC야?”라는 문장 앞에서 어떻게 창작하고 비평해야 하는가?
‘정치적인 것’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제대로 읽어내야 하는가? 소셜미디어로 인해 모두가 자유롭게 무엇이든 비평하고 평가할 수 있는 시대, 비평은 존재 위기를 맞았다. 모두가 비평할 수 있는 오늘날, 좋은 비평은 무엇이며 왜 필요할까? 이 책에서 롱 추는 이 시대의 젊은 비평가로서 문화예술 비평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무엇이 좋은 비평·비평가인지를 진지하게 논한다. 특히 롱 추는 미투 운동 이후 들불처럼 일어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과 ‘워크니스(wokeness)’에 대한 피로감을 호소하는 자유주의자들과 예술만의 불가침적 자유와 순수성을 말하는 예술가·비평가들에게 일갈하며 예술의 ‘세속성’에 대해 역설한다. 그는 “결국 비평가는 언제나 사회 비평가”라고 말하면서 정치적인 비평을 옹호하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만약 비평이 정말로 하나의 예술이라면, 모든 예술 가운데 가장 저급하고 가장 구체적인 예술일 것이다. 아름다울 수는 있지만 반드시 기능적이어야 하는 것.” 롱 추에게 비평이 지닌 ‘기능’이란 바로 천상의 예술과 지상의 세상을 연결하는 세속성이다. 그는 동시대 작가·작품의 사회적 맥락을 파고들어 작품의 정치적 위치와 욕망의 이면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트럼프 당선이라는 상징적인 사건 전후, 백래시와 파시즘의 광풍 속에서 우리 사회는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예술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떤 이들은 예술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며, 있는 그대로 존재해야만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롱 추는 정치와 예술은 별개라는 명제를 거부하고, 치명적인 유머 감각과 논쟁을 불사하는 명쾌함으로 좌파가 어떻게 냉소주의자나 기계적 중립을 말하는 이들에게 휘말리지 않고 문화비평에 임할 수 있는지 시범을 보인다. 그는 예술 속 “정동의 물길을 따라 흐르는 사상이 가진 살아 움직이는 성격”을 꿰뚫어보며, 그것이야말로 비평가가 예술과 세상, 작가와 독자를 연결하기 위해 마땅히 수행해야 하는 책무라고 생각한다. 롱 추는 이렇게 쓴다. “예술가는 원하는 만큼 찬란한 창조의 천국으로 올라가도 좋다. 그를 땅으로 다시 끌어내리는 일은 비평가에게 달려 있다.” 이 책에는 소설, 논픽션, 드라마, 뮤지컬, 비디오 게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미디어를 아우르는 롱 추의 ‘동시대적’ 비평이 잘 드러나 있다. 게이 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리틀 라이프』를 쓴 한야 야나기하라의 인물관을 신랄하게 분석하고(〈한야의 소년들〉), 『아르고호의 선원들』로 지성적인 에세이스트로 자리매김한 매기 넬슨의 새로운 저작을 안일하다고 비판하는(〈나쁜 년!〉) 등 롱 추는 실시간으로 맥락을 이해하고 지켜볼 수 있는, 동시대 작품을 ‘까는’ 비평의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 또한 〈오페라의 유령〉을 통해 뮤지컬극의 형식을 역사화하고(〈오페라 유령〉) 〈라스트 오브 어스〉를 통해 비디오 게임만이 가질 수 있는 예술성을 칭송하는(〈끝장내버려〉) 등, 오늘날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콘텐츠를 직시하고 장르를 뛰어넘어 예술의 범위를 넓히기도 한다. 무엇보다 그의 비평에는 작품의 정치적 맥락을 파악해 예술이 우리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지, 우리가 그것을 통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말하는 힘이 있다. 롱 추의 글에는 차별과 혐오, 백래시와 파시즘, 전쟁과 대량 학살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정치적 위기에 비추어 작품을 어떻게 읽어내고 해석해야 하는지, 오늘날 예술과 문화적 표현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주장과 명확한 비평론이 담겨 있다. 오테사 모시페그의 소설 속 모순과 그의 엘리트주의를 비판하며 작가가 독자를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하고(〈가짜 신성〉), 아시아계 미국인 작가들의 소설의 계보를 역사화하며 인종적 경험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며(〈혼합 은유〉),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개인적 정체성이라는 틀에 가두지 않고도 존재하게 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한다(〈있을 법한 사람들〉). 설령 롱 추를 잘 모르는 독자라도 그의 명쾌한 글을 읽으면 좌파적 정치성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비평은 어떻게 전개되는지, 어떻게 작품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사회로 끌어들여 해석하고 이해해야 하는지, 성별·인종·성적 지향·정치적 성향 등을 둘러싼 ‘정체성 정치’ 시대를 넘어 우리가 나아가야 할 예술과 비평의 모습은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에는 롱 추를 세상에 알린, 퀴어-트랜스-페미니스트로 살아오며 쓴 초기 에세이들도 수록되어 있다. 트랜지션 경험이나 조울증 치료에 관한 에피소드 등을 이야기하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비평하는 글에는 냉소적이면서도 진솔한 매력이 깃들어 있다. 롱 추가 가장 천착해 있는 주제이자 자주 사용하는 비평적 관점인 ‘욕망’과 ‘실망’이라는 개념이 무엇인지도 엿볼 수 있다. 읽는 이가 ‘관점’을 갖게 하는,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게 만드는 날카로움! 지금 여기, 가장 급진적이고 중요한 안드레아 롱 추의 첫 비평집 롱 추가 쓰는 비평의 가장 매력적인 특징은 특유의 과감함과 공격적인 문체로 무장하고, 그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매료시키고 몰입시킨다는 점이다. 롱 추의 신랄한 비평을 읽다 보면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의 주장에 대비해 스스로의 ‘관점’을 세울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의도하고 또 믿는 비평의 효능이다. 롱 추는 비평 하나가 사회 전반을 변화시킨다고는 믿지 않는다. 다만 그는 비평이 독자가 어떤 주제에 관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게 만든다고 믿는다. 그의 글은 독자를 논쟁이라는 링 위로 끌어올리고, 자신의 입장을 정해 주먹을 쥐게 한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작품과 작가 그리고 시대에 대한 찌르는 듯한 비판을 읽는 데서 오는 짜릿함, 확고한 가치관을 바탕으로 입장을 전개하는 작가를 지켜보는 즐거움, 위트 넘치는 문장을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사상 초유의 정치적 위기를 맞고 있는 오늘날, 동시대 문화예술과 콘텐츠를 마주할 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정치적 현실 속에서 인식하고 해석하며 비평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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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적 ‘PC’의 시대, 비평은 스릴을 잊었다. 《권위》는 맹렬한 문체로 “저급” 예술로서 비평의 본질이 공개 ‘저격’의 퍼포먼스에 있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하며, 오늘날 보기 드문 비판과 계몽의 야심을 보여준다. ‘까는’ 비평의 흥분과 스릴은 비평을 육체라는 세속으로 “되돌려놓는”다. ‘움찔’하는 반응에서 ‘판단’이 태어난다. 이 책은 이를 경험하기에 더없이 완벽한 장소다. - 이연숙 (작가·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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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두렵고 논쟁적이며 고통스러운 주제에 대해 말할 때조차 롱 추의 위트와 유머는 쉬지 않는다. 롱 추의 글은 독자를 매달고, 묶고, 조마조마하게 방치하고, 세게 당기고, 부드럽게 밀치고, 간헐적으로 짜릿하게 찰싹 때린다. 그녀의 글을 읽는 동안 독자는 저자의 논점에 동의하건 말건, 그녀가 세팅한 무대로 끌어당겨져 격렬한 춤을 추게 된다. - 이희우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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