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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피
2.싹 3. 금고 4. 붕괴 5. 잿더미 6. 공작 7. 총알 8. 밀항 9. 추적 10. 사냥 11. 동냥 12. 적선 13. 함정 14. 증발 15. 최후 16. 서명 17. 깃털 18. 접선 19. 매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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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2시, 방배동 빌라. 형광등 불빛이 어둠 속에 퍼지고 경비실 유리창 안에선 졸음을 이기지 못한 경비원이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짙게 선팅한 성규의 그랜저가 빌라로 들어섰다. 전조등이 경비실을 비추자, 경비원이 겨우 고개를 들어 차 번호를 확인하고 차단봉을 올렸다. 차가 천천히 지하 주차장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엔진을 끈 차들이 숨을 거둔 물고기처럼 줄지어 누워 있었다.
장우는 깨끗하게 비워놓은 자동차 트렁크를 열어놓고 조수석 에 걸터앉아 성규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규의 차가 다가오자 트렁크 안을 한 번 더 들여다봤다. '여기에 사람이 탈 수 있을까?’ 성규가 내리자 장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형!” 기묘한 탈출 작전이 막상 현실이 되자 기가 막혀 웃음이 나왔다. 성규가 차에서 내리며 짜증을 잔뜩 섞어 말했다. “짜식! 지금 웃음이 나오냐?” 쩌렁쩌렁한 성규의 목소리가 지하에서 울리며 사방에서 되돌아왔다. “당장 잡혀가지 않은 게 어디야. 좋아서 웃어요. 좋아서.” 성규는 대꾸도 하지 않고 트렁크 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주눅이 들었다거나 불안한 표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긴장한 건 오히려 장우 쪽이었다. --- pp.7-8 「도피」 중에서 몇 해 전, 서둘러 찾아온 겨울이 첫서리를 뿌린 밤이었다. 북한산 자락에서 내려온 칼바람이 평창동 고갯길의 가로등 불빛을 불안하게 흔들었다. 소파 끝에 앉아 있던 비서들이 숨을 죽이며 윤호양 후보의 달싹거리는 입을 바라봤다. 윤호양 후보가 마른 입술에 침을 적시고선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명을 기다리던 비서실장에게 윤호양이 말했다. “그 사람이… 그래 입이 무겁다꼬?”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젊은 비서가 눈치를 보았다. 생사고락을 함께한 비서실장은 그 의중을 정확히 알아챘다. 백전노장. 서두르지 않고 가장 적절한 단어를 선택하고선 신중하게 대답했다. “네, 후보님. 사람들은 그의 입을 자물통이라고들 합니다.” --- pp.38-39 「싹」 중에서 장우가 명동에 다다르자, 비가 그쳤다. 소낙비가 갓 지나간 뒷골목에서는 젖은 신문 냄새가 났다. 채 실장 사무실은 간판 하나 없는 3층 건물 끝 방이었다. 청테이프로 깨진 곳을 때운 복사기가 종이를 토해내고, 금속 트레이 위엔 도장이 찍힌 서류들이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책상 한쪽엔 이빨 빠진 접시 위에 연필과 볼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깔끔하지도 질서정연하지도 않았지만, 꼭 필요한 만큼의 규칙은 확실히 있어 보였다. “조장우 씨 맞죠?” 문을 닫기도 전에, 채 실장이 이름을 불렀다. 얼굴은 길고 말투는 짧았다. 안경테 안에서 굴러다니는 눈알이 민첩했다. 그녀가 내민 종이 위에는 오늘 처리분의 종목, 액면, 만기, 할인율, 수수료 따위가 가지런히 적혀 있었다. --- p.45 「금고」 중에서 “하기사, 사고 나면 죽는 건 매한가지 아니겠습니까.” 동의와 부동의의 경계가 모호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렇죠. 며칠 있으면 사라질 증권사도 한둘이 아닌데. 이렇게 된 거 은퇴 전에 고별 작품 하나 찍어보세요.” 배민수는 잔을 연달아 세 번 들이붓고, 숨을 길게 뱉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 뭐 어차피 인생, 갈 데까지 가보는 거 아니겠습니까? 시나리오 한번 봅시다.” 장우는 아무 말 없이 수표 몇 장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배민수는 그걸 한참 내려다본 뒤 전화를 꺼냈다. “계좌 몇 개 빌릴 사람들 있습니다.” --- p.54 「금고」 중에서 “총회장님, 영업 마감 시간까지 결정해 주셔야 합니다. 그 이후엔 절차대로 갑니다.” “절차라니, 그게 뭡니까. 은행들 몇이 모여서 태양을 죽이려는데 개발은행이 보고만 있겠다는 말입니까?” 한태경은 시선을 들지 않았다. “국가의 뜻입니다.” “국가? 국가를 내 모를 것 같소? 국가가 짓으라 캐서 시작한 공장이야. 국가가 하라 카이 한 기라. 근데 이제 와서 무너뜨린다고? 그게 국가의 뜻이라꼬?” --- p.85 「붕괴」 중에서 “네가 지금 하는 말은 나한테 계산서를 내미는 거잖아?” “계산서?” “그래. 네가 한 일을 계산해서, 얼마나 기여를 했는지 따져서 그 대가를 요구하는 거.” “그게 왜 잘못된 거야?” “잘못됐다기보단…” 성규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이어 말했다. “그게 바로 동냥이지.” 그 단어가 나오는 순간, 장우는 숨을 들이켰다. 귀가 단어를 거부했다.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지금 뭐라고 했어.” “동냥.” 성규가 다시 말했다. 반복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형,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지.” “왜?” “내가 형한테 구걸한 적은 없잖아.” “지금 하고 있잖아. 난 너에게 적선할 마음은 없어.” --- pp.221-222 「동냥」 중에서 창고 밖, 어둠이 짙게 깔린 산업지대의 공터에는 알레한드로를 태우고 왔던 검은색 SUV가 엔진을 끈 채 서 있었다. 차에서 내려 담배를 태우던 사내는 먼 곳에서 다가오는 헤드라이트 불빛을 발견하고는 길게 연기를 내뱉었다. 낮은 콧노래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트럭이 다가오자 사내는 익숙한 몸짓으로 창고의 거대한 강철 문을 밀어서 열었다. 적재함에 수십 개의 드럼통을 가득 실은 낡은 트럭이 불규칙한 엔진음을 내며 창고 안으로 꽁무니를 집어넣었다. --- p.276 「증발」 중에서 두석은 입술을 깨물었다. 혀끝에 쇳가루 맛이 났다. 자신이 지금 어떤 문 앞에 서 있는지 알았다. 선택은 어느 쪽이든 지옥이었다. 다만 한쪽은 돌아갈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기대식 일당이 다시 소파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두석이 시선을 돌리자 기대식이 더 가까이 오면서 자신의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툭툭 쳤다. 두석은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이 끝났음을 알아차렸다. 인사를 대신한 눈 맞춤. 차동원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앉아 있던 의자를 뒤로 물리고 창고 옆으로 뚫린 간이문을 통해 두석이 밖으로 빠져나갔다. 운전석에 앉아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성규가 감시하지 못하는 두 번째 휴대전화의 스위치를 켰다. --- pp.296-297 「서명」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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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비밀을 마주한 작가의 정직한 시선
혼돈과 탐욕의 시대, 가장 어두운 바닥을 비추는 한 권의 책 조용래의 첫 장편소설 《밀(密)》은 ‘의리'의 가면을 정직하게 벗긴 책이다. 한국 사회는 오래도록 ‘의리’를 신성한 곳에 두어왔다. 친구 사이의 의리, 조직 사이의 의리. 그 단어 앞에서 사람들은 흔히 자기 행동의 윤리를 묻지 않았다. 소설 속 청년 조장우는 그 단어 뒤에 자기를 숨긴다. “의리로 하는 일이니, 죄는 아닐지도 몰라.” 한국 사회의 모든 부정한 거래가 한 줄의 자기합리화 위에 세워졌다. 소설은 의리의 정체를 한 겹씩 들춰낸다. 의리라는 이름 뒤에서 사람이 옮겨지고, 흔적이 지워지고, 끝내 사람이 사라지는 풍경. 의리 뒤에는 돈이 있었고, 돈 뒤에는 권력이 있었고, 권력 뒤에는 ‘나라를 위한 일’이라는 거대한 명분이 있었다. 재벌 회장은 권력자에게 묻는다. “국가가 짓으라 캐서 시작한 공장이야. 근데 이제 와서 무너뜨린다고? 그게 국가의 뜻이라꼬?” 이 한 줄에 한국 정경유착의 본질이 압축되어 있다. 정치는 자본에 명분을 주고, 자본은 정치에 돈을 주었으며, 한 덩어리가 마침내 한 사회 전체를 부도로 밀어 넣었다. 소설이 깊이 들여다보는 것은 권력만이 아니다. 작가는 그 거대 권력의 그늘 아래에서 숨을 쉬던 사람들을 소설 속으로 소환한다. 하지만 작가는 인간의 잔인함을 도덕적 단죄로 그리지 않는다. 대신 모두가 빠져 들어간 거대한 늪으로 바라본다.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돈을 향해 뛰어들지만, 한 번 발을 디딘 순간 누구도 빠져나오지 못한다.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다른 사람이 사라지고, 자기는 빠져나갈 수 있다고 믿었던 자들이 끝내 서로의 목줄을 쥐며 같은 늪 안에서 허우적댄다. 그 늪 안에서 인간의 가장 밑바닥 본능은 야생의 먹이사슬처럼 작동한다. 약자는 강자의 도구가 되고, 강자는 더 큰 강자의 도구가 된다. 누군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누군가는 살아남아 그 시간을 견딘다. 권력의 품에서 비대해진 자본, 그리고 권력이 무너지자마자 새로운 동아줄을 찾는 재벌의 생리. 그러나 새로 들어선 권력의 속성 역시 전과 다르지 않다. 지배자의 이름은 끊임없이 바뀌어도 권력과 자본이 한 몸으로 움직이는 공생의 질서는 완강하다. 작가는 이 냉혹한 생리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소설의 시선을 과거의 어느 한 시절에만 가두지 않는다. 혼돈과 탐욕의 시대를 정직하게 서술한 조용래 장편소설 《밀(密)》은 한국 정치경제 스릴러의 지평에 묵직한 선을 긋는 작품이다. 이 선명한 기록은 우리가 외면해 온 거대한 늪의 가장 어두운 바닥을 마침내 비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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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래 작가는 역사의 소용돌이, 그 한복판에 있던 인물이다. 그 속으로 빠져들어 갈 뻔한 사실의 조각들을 나에게 던져주곤 했다. 그런 그가 장편소설을 냈다. 이제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을 듯하다. 독자들은 흥미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 갈 순간만 남았다.” - 이규연 (탐사저널리스트〈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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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밀》에서 작가는 부도, 비자금, 검찰, 밀항 같은 익숙한 단어들 사이에 끼어 있는 인간의 욕망을 끝까지 파고든다. 책을 덮고 나면, 우리가 어떤 세상에서 살아남았는지 생각하게 된다.” - 류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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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은 1997년 IMF 외환위기, 거대한 균열의 이면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소설 속 장우와 성규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자신의 탐욕과 안위만을 좇았던 인간들의 민낯이 살벌하리만큼 생생하게 드러난다. 이 작품의 힘은 분명하다. 무겁고 아픈 현대사의 한 장면을 다루면서도, 놀라울 만큼 강한 흡인력으로 독자를 끌고 간다. 혼돈 한가운데, 아무도 말하지 못했던 은밀한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 장원석 (영화 〈왕과 사는 남자〉·〈범죄도시〉 시리즈 제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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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래 작가의 인생 스토리가 넷플릭스 그 자체다. 그래서 책으로 써야 한다고 소주잔을 부딪힐 때마다 종용했다. IMF를 전후로 실제 벌어진 기득권 카르텔의 민낯이 고스란히 담겼다. 오롯이 기록하지 못한 현대사라고 할 수 있다. 기자의 촉으로 보건대 머지않아 OTT 시리즈 드라마로 변주될 것이다.” - 봉지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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