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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야기의 시작
신화에서 계시로
정우조
지우 2026.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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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여는말 ‘창세기 1-11장’을 읽는 가장 지혜로운 방식 10

1장 창조의 시작 · 1:1-5 14
2장 보시기에 좋았더라 · 1:6-23 29
3장 하나님의 형상과 안식 · 1:24-2:3 47
4장 최초의 성소 · 2:4-17 62
5장 나와 너, 그래서 우리 · 2:18-25 80
6장 최초의 범죄와 타락 · 3:1-13 95
7장 최초의 징벌과 심판 · 3:14-24 113
8장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 · 4:1-15 129
9장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 4:16-26 143
10장 경건한 자들의 계보 · 5:1-32 158
11장 하나님의 눈동자에 새겨진 사람 · 6:1-8 173
12장 내 언약을 세우리니 · 6:9-22 191
13장 새로운 시작을 위한 완전한 종말 · 7:1-24 206
14장 기억하시는 은혜 · 8:1-22 222
15장 언약의 무지개 · 9:1-17 238
16장 포도주에 취한 노아 · 9:18-29 258
17장 축복과 저주 · 10:1-32 277
18장 바벨에 임한 심판 · 11:1-9 295
19장 멈춰 선 소명 · 11:10-32 314

맺는말 333

저자 소개 1

부산에 소재한 광야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목사. 주중에는 복싱장에서 수석코치로 일하며, 이중직 목회자의 삶을 살고 있다. 성서학과 고대근동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그 내용들을 설교와 강의에 쉽고 편안하게 녹여내는, 자칭 신학/성경 커뮤니케이터가 되고자 정진하고 있다. 공저 「지금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읽는 이유」(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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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6월 04일
쪽수, 무게, 크기
336쪽 | 125*188*30mm
ISBN13
9791193664162

책 속으로

하나님께선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지만 성경은 이미 “빛이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빛은 여타 피조물들과 다릅니다. 성경은 빛이 하나님의 본성이자 하나님 자신이심을 일관되게 증언합니다. 요한복음 1장 5절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가리켜 ‘빛’이라 부르고, 그 빛이 어둠에 비취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빛과 어둠을 나누시는 예수님의 사역을 넌지시 암시합니다. 급기야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은 완전히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에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으며 밤도 없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빛이신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빛은 있으라고 명령되었지만 사실 이전부터 존재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밝은 빛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첫 번째 피조물처럼 되셔서 창조의 서막을 친히 여신 셈입니다.
--- p.27

선과 악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이 무너지면 사람들은 선과 악을 본인이 스스로 규정할 수 있다는 오만에 빠지게 됩니다. 이는 이미 사사시대에도 나타났던 모습입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피해자가 가해자로 몰리고, 역사적 사실마저 정치적 목적에 따라 부정되거나 왜곡됩니다. 학살자가 영웅이 되고, 선함과 정의는 시대에 뒤떨어진 가치로 취급되며, 사익과 욕망만을 좇는 삶이 지혜로운 것처럼 여겨집니다. 도덕적 기준이 점점 모호해지는 오늘날의 세상이, 사랑과 공의로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질서가 사라진 ‘혼돈’ 그 자체로 되돌아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듭니다.
--- p.40

신의 아들이자 형상은 이처럼 권력층에만 적용되던 개념입니다. 고대인들은 신화를 통해 세상을 설명했고, 거기에 나오는 신들의 통치를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따라서 신의 형상 혹은 아들이라 불린 이들의 지배 역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하늘신, 태양신, 달신, 강물의 신 등은 각 자연 영역의 지배자들이었는데, 지배계급은 그 신들의 형상이자 자손이 바로 ‘왕’이고 ‘귀족’이라 홍보하며 자신들의 특권을 정당화했습니다. 현실을 설명하고자 만든 ‘신화’(Myth가 소수에 의한 다수의 지배를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악용된 것입니다.
--- pp.50-51

최초의 성전은 단순히 크고 장엄한 종교시설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평범하지만 평화롭고 아름다운 정원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을 굳이 그리스도교적 상징들로 가득 채울 필요는 없습니다. 종교적 언어들로 가꾸고 기계적 신앙고백들로 삶을 덧칠해야만 우리 몸이 성전이 되는 게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인정하고, 그분이 우리를 통해 이 세상을 평온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꾸미길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됩니다.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이웃들과 조화를 이루고 일상을 안온한 정원과 같이 조성해 가는 것이야말로 우주적 성전의 청지기로 창조된 우리의 진정한 ‘부르심’입니다,
--- pp.68-69

고대근동 세계는 여성에게 매우 억압적이었지만, 성경은 일관되게 남녀의 차별 없이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역사 속에서 많은 이들이 ‘돕는 배필’의 의미를 왜곡하거나 지나치게 축소해서 받아들였습니다. ‘돕는 배필’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정확히 말하면 ‘이 사람이 없으면 나는--- p.온전한 내가 될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옆에서 잡일만 해주는 종속적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남성은 그 자체로 미완성입니다. 여성이 함께함으로써 남성은 비로소 한 ‘인간’으로 완성됩니다. 남성이 여성에게 갖는 의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남성과 여성 서로가 서로에게 필수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등한 배필’이 보다 정확한 의미입니다. 신구약의 표현을 빌리자면 ‘돕는 배필’이란 바로 ‘형제자매’요 ‘이웃’입니다.
--- pp.87-88

길가메시 서사시와 같은 신화에서 심판은 인류의 멸절을 목표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의 판결문 끝에는 기이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직접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장면입니다. 에덴에서의 추방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가 공존할 수 없기에 발생한 아픈 이별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하나님은 화염검으로 길을 막으시는 동시에(보호, 가죽옷을 통해 그들이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배려하십니다(은혜. 이는 심판의 목적이 파괴가 아니라 장차 임할 완전한 회복을 준비하는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 p.127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기 전에 먼저 예배자를 받으십니다. 악을 행하는 자의 예배는 그저 종교의식에 불과합니다. 자기만족을 위한 허례허식이자 영적인 자기 위로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위해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자신이라는 우상에게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가장 깊은 곳까지 감찰하시는 분이시며 절대로 우리에게 속지 않으십니다. 가인이 아무리 정성스레 많은 예물들을 준비했다 한들 하나님은 예배자가 아닌 그의 예배를 받으실 수 없었습니다.
--- pp.140-141

가인에서 라멕으로, 그리고 훗날 네피림까지 이어지는 죄악의 족보는 사실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이웃을 해치고 죽음으로 몰아가면서까지 자신의 이득을 취하고 폭력과 음란으로 남을 다스리는 라멕들이 존재합니다. 두 사람이 만나 하나를 이루는 하나님의 원칙을 무시하고, 정욕을 따라 마음대로 짝을 취하는 이들 역시 라멕의 후예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양심의 가책조차 없이 그것을 즐기는 이들, 하나님의 존재를 멸시하고 조롱하면서 이 세상을 망가뜨리고 있는 자들은 가인의 후손 곧 ‘뱀의 후손’들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교회 밖은 물론 교회 안에도 무수히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알곡과 가라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 p.153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신자들은 개인의 윤리적 탁월함은 물론 사회적이고 공적인 차원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가치, 즉 정의와 상생과 평화를 이루기 위해 함께 협력하여 선을 이뤄낼 책무가 있습니다. 교회의 일원이라 자부하면서 세속의 가치관들, 즉 강자의 군림이 당연하고 약자에 대한 억압과 착취가 당연하다는 그런 가치를 받아들이고 있다면,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많이 가진 자와 적게 가진 자를 나누고 차별하고, 직분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구분해서 대하며, 힘과 돈의 논리로 공동체를 운영하려고 한다면, 그런 우리가 바로 ‘네피림’인 것입니다. 심판의 대상은 바로 우리가 될 것입니다.
--- pp.183-184

대홍수 심판 내러티브를 읽으며, 최종적 심판과 구원의 그날이 오기까지 어쩌면 우리의 삶 자체가 이 루틴(종말과 죽음/새창조와 새 출발의 반복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구약성경에서도 단 한번의 심판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역사의 중요한 변곡점마다 하나님의 초월적인 개입이 일어나 마치 종말과 새시작의 구도인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반복되었습니다. 어쩌면 중요한 결정이나 사건의 모양으로 시시각각 종말의 순간들이 임하고, 그렇게 다시 출발하게 되는 새 창조와 같은 순간들의 반복이 인간의 인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pp.216-217

무지개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케세트’입니다. 한데 사실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활’입니다. 전쟁할 때 쓰는 무기인 활말입니다. 사실 근동지역에서는 무지개를 볼 기회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아마도 매우 건조한 기후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인지 무지개를 의미하는 독자적인 단어가 없고 무지개가 활의 모양과 비슷하기에, 그 단어에 무지개라는 뜻도 담아서 함께 병행해서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무지개 곧 ‘활’을 구름 사이에 걸어두셨다는 이미지는, 생각해 보면 이제 하나님의 진노의 화살이 더 이상 땅을 향하지 않는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 활은 하늘, 곧 하나님을 겨누는 모습입니다. 인간의 여전한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더 이상 인간에게 활을 겨누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스스로에게 겨누십니다. 오히려 당신 자신을 쏘심으로, 다시 말해 자기 스스로를 희생하심으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분이 되시는 겁니다. 어쩌면 이것이 먼 훗날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인간의 죄악을 담당하고 죽음을 맞이하시는 모습의 원형(原形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 p.252

추천평

고대 근동의 맥락에서 구약성경 본문을 읽고 성찰한 글이 매우 적은 국내 현실에서 정우조 목사님의 책을 읽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구약성경, 특히 창세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기록되고 전승된 고대 근동의 문화적·종교적 토양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국내 성경 연구와 설교 현장에서 이러한 접근은 여전히 낯설고 드물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 책이 다루는 창세기 1-11장은 특히 고대근동 신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에 더욱 흥미롭습니다. 고대 근동의 신화적 전통과 창세기 본문 사이의 유사성과 차이를 진지하게 살펴보면, 우리는 성경 전승이 전달하고자 했던 신앙의 진리에 더욱 풍부하고 입체적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정우조 목사님의 이러한 시도는 성경을 더욱 깊고 풍부하게 이해하는 길을 여는 선구자적 작업임이 분명합니다. 이 책이 한국 교회와 신학계에서 구약성경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는 데 작은 디딤돌이 되기를 바라며, 이 새로운 시도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냅니다.
-주원준_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저자 정우조 목사는 강단에서 말씀을 펴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체육관에서 글러브를 매는 사람입니다.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미트를 든 채로 살아가는 그의 일상은 그 자체가 한 편의 원 역사 같습니다. 흙과 숨, 땀과 피, 견뎌야 하는 라운드와 다시 울리는 종소리… 창세기 1-11장이 펼쳐 보이는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풍경들이, 사실은 저자가 매일 살아내는 현장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열면, 독특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저자는 전통이라는 익숙한 링에서 안전하게 잽만 날리고 마는 길을 택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성경을 신화로 손쉽게 처리해 버리려는 헤이메이커(haymaker, 온 힘을 다해 휘두르는 큰 한 방)도 거부합니다. 대신 그는 창세기를 “모든 역사의 근원이 되는 이야기”로 다시 세우고, 길가메시 서사시와 아트라하시스, 이집트의 창조 이야기 같은 고대근동의 강자들과 한 라운드씩 정직하게 맞붙습니다. 성경이 그 이야기들과 닮아 보이는 지점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 자리에서 어떻게 그것들을 뒤집어 야훼의 계시로 다시 써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솜씨가 마치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는 것 같아서, 본문 위를 가볍게 미끄러지듯 풀어내다가도 결정적인 지점에서는 독자의 가슴 한복판을 정확하게 때려옵니다. 책의 흐름은 손에 땀을 쥐게 합니다. 창조와 안식을 다루는 도입부에서 인간은 진화의 종착점이기에 앞서, 흙으로 빚어져 코에 숨이 들어간, 우주 성전을 지키도록 세워진 제사장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에덴은 단순한 낙원이 아닌 최초의 성소로 그려지고, 그 안에서 부부와 공동체의 의미가 두텁게 펼쳐집니다. 타락을 언급하는 본문에 이르러 저자는 죄가 늘 “참과 거짓 사이에 똬리를 틀고 있다”라고 말하는데, 이건 페이크와 진짜 펀치의 차이를 몸으로 아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장입니다. 가인과 셋의 두 계보는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대립”으로 다시 읽히고, 노아 홍수는 처벌이 아니라 혼돈으로 되돌린 뒤 다시 시작되는 새 창조로 풀어집니다. 마치 한 라운드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곧바로 다음 라운드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되는 장면과 같습니다. 이 책은 그 종소리가 결국 어디로 향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노아를 “기억하신” 하나님(창8:1)에서 시작해, 누가복음의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를 지나, 성찬의 “나를 기념하라”에 닿습니다. 모든 라운드의 끝에는 결국 한 분, 예수 그리스도가 서 계셨던 것이지요. 아니, 예수님은 모든 라운드에 계셨던 분이십니다.

생각해 보면 저자가 섬기는 교회의 이름부터가 “광야”입니다. 광야는 길을 잃기 좋고, 모함받기 쉽고, 마음 한 자락이 어이없을 만큼 쉽게 부서지는 자리입니다. 저자는 그 광야를 오래 통과해 온 사람입니다. 사실이 아닌 말들에 둘러싸여 본 적도, 견디기 힘든 상처에 무릎이 꺾여 본 적도 있는 사람이지요. 그러나 그는 매번 다시 링 위로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그가 가인의 분노를 말하고, 죄가 똬리를 트는 자리를 짚고, 홍수가 끝난 자리에 다시 시작되는 창조를 그릴 때, 그 문장들은 삶에서 길어 올려졌다는 점을 느끼게 됩니다. 같은 본문이라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 무게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다 보면 새삼 느끼게 됩니다.

이 책이 좋은 이유를 하나만 더 말하자면, 신학과 삶이 같은 지평에서 논의된다는 점을 들고 싶습니다. 도서관의 냄새 대신, 새벽 기도와 저녁 운동 사이를 오가는 사람의 땀냄새가 본문 곳곳에 배어 있습니다. 고대 근동의 자료를 정성껏 다루지만 자료에 함몰되지 않고, 매 장 끝마다 결국 “오늘 우리의 일상은 어떠한가”로 독자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깁니다. 각 장 말미에 놓인 ‘더 깊이 생각하기’와 ‘나눔 질문’은, 혼자 읽어도 좋고 소그룹에서 함께 펼쳐도 좋도록 친절하게 마련되어 있습니다. 치열하게 살아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창세기 강해입니다. 머리로만 읽는 신앙에 지친분, 익숙해진 창세기가 더는 가슴에 와닿지 않는 분, 그리고 신앙의 첫 라운드를 다시 진지하게 시작하고 싶은 모든 분께 권합니다. 그리고 권투 하는 목사의 말씀 펀치에 한번 제대로 맞아보고 싶은 분에게도 추천합니다.
-이상환_ 독립연구가, 『Re:성경을 읽다』 저자

신앙 고백은 해석된 역사라는 토대 위에서 형성됩니다. 또한 전승, 기록, 편집의 과정에서 각 시대의 세계관을 지나 문학의 형태로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은 그렇게 수많은 시대의 배경과 해석을 품고 문학으로서 형성되어 전해져 왔습니다. 우리의 성경 읽기는 바로 이런 전제 위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 책은 우리에게 이런 읽기의 시작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이런 읽기를 통해 실제로 어떤 메시지들을 읽어볼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저자는 고대 근동이라는 ‘인지 환경’, 즉 당시 공유된 지적·문화적 세계관을 토대로 창세기 1-11장의 이야기를 읽어갑니다. 텍스트를 구성하는 모티프나 표현들,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과 고대의 신앙 형태까지, 그 각각을 고대근동이라는 맥락에서 더 다양하게 읽고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줍니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 되는 이 이야기가 단순히 고대 근동의 그것과 닮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은 아닙니다. 저자는 이 이야기를 저항문학으로 이해합니다. 다른 여타의 고대 근동의 이야기와는 분명한 차별점이 있고, 그 부분에서 오히려 텍스트의 진정한 메시지가 드러나고 있음을 역설합니다. 이 책의 가치는 바로 그 메시지를, 인간다움을 지켜나가고, 윤리적인 삶을 권유하며, 세상을 돌보고 긍휼과 용서로 이웃과 타자를 환대하는 것이라고 읽어내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 발 더 내디뎌, 저항문학으로서 작동했던 이 이야기가 오늘 우리의 세상에서도 여전히 저항의 메시지로 의미 있게 읽어져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마치 저자의 설교를 듣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듣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해 함께 사유하길 원하는 마음이 충분히, 그리고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신앙하는 인간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함께 고민하길 원하시는 분들은 ‘모든 이야기의 시작’부터 다시금 시작해 보시면 어떨까요?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 ‘오늘 우리들의 신앙 이야기의 시작’이 되는 경험을 해보시길 추천합니다.
-신기열_ 더봄교회, 『새로운 신앙을 만나려는 당신에게』 저자

“태초에”로 시작하는 창세기의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합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입문서처럼 읽거나, 반대로 역사성과 과학성 논쟁의 대상으로만 소비해 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책은 창세기를 전혀 다른 자리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저자는 고대 근동의 신화와 문화라는 배경 속에서 성경을 읽으면서도, 단순한 비교나 지식 전달에 머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오래된 이야기 속에서 오늘 우리의 욕망과 두려움, 폭력과 불안, 공동체의 균열과 제국의 논리를 발견하게 만듭니다.

이 책의 특별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비슷한 주제를 다루는 많은 책들이 “성경과 신화는 얼마나 비슷한가” 혹은 “무엇이 다른가”를 설명하는 데 집중한다면, 이 책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래서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를 묻습니다. 저자는 신화적 언어를 인간 존재를 비추는 거울처럼 사용합니다.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창세기를 단순한 고대 문헌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의 이야기로 읽게 만듭니다.

또한 이 책은 “신화”라는 개념을 통해 오히려 성경의 독창성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주변 세계의 이야기들과 비교할수록, 성경이 인간의 폭력과 권력, 제국과 욕망을 얼마나 독특하게 바라보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독자는 성경이 단지 오래된 종교 문헌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를 새롭게 이해하게 만드는 급진적인 이야기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창세기를 새롭게 읽고 싶은 분들, 신화와 성경의 관계를 고민해 온 분들뿐 아니라, 오래된 성경 이야기가 오늘 우리의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궁금했던 이들에게도 이 책은 통찰과 사유의 기쁨을 선물할 것입니다. 이 책을 덮고 나면, 창세기는 더 이상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전원희_ 오후다섯시교회, 『우리의 춤은 변하여 슬픔이 되고』 저자

창조 이야기, 대홍수 이야기는 성경 말고 다른 고대 신화들에도 다 나오던데요? 성경이 그냥 그 신화들을 표절한 건 아닐까요?” 이렇게 묻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과연 그때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그걸 몰랐을까요?”

다른 신화에 성경과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대단한 발견이겠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었을 겁니다. 그들은 꾸준히 이집트 신화, 메소포타미아 신화, 가나안 신화에 노출되었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성경은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합니다. 그런데 이전과는 아주 다른 취지로 그 이야기들을 재구성합니다. 그리고 그 재구성 안에는 성경만이 가지고 있는 세상을 향한 독특한 메시지와 사랑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을 유일무이한 특별한 책으로 만들어주는 요소입니다.

이 책은 그 요소들을 잘 정리해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잠시 고대근동 사람이 되어봅시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으로 창세기의 원 역사를 읽어봅시다. 왜 이 이야기가 당시에 특별했는지,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왜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 깨닫게 되실 겁니다.
-차성진_ 모두교회, 유튜브 ‘엠마오연구소’ 운영자

창세기 1-11장을 어떻게 설교해야 할까요? 이 질문 앞에서 많은 목회자가 멈칫합니다. 창조과학의 방패를 드느라 본문의 신학을 잃거나, 신화적 외피를 너무 의식한 나머지 텍스트의 힘 자체를 포기하곤 합니다. 둘 다 패배입니다. 광야교회 정우조 목사의 이 책은 그 이분법에서 빠져나오는 제3의 길을 제시합니다.

저자는 먼저 창세기가 처음 기록되었을 때, 그것을 처음 읽은 이스라엘의 인지환경(Cognitive Environment)은 무엇이었는지 묻습니다. 에누마 엘리쉬가 마르둑의 창조를 노래하고, 길가메시 서사시가 대홍수를 신들의 변덕으로 그리던 그 세계에서, 창세기는 조용히 읽힌 책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논쟁이었고 도발이었으며, 정면 돌파였습니다. 정우조 목사는 이 “대항 서사”(counter-narrative)의 논리를 19개의 강해를 통해 촘촘히 추적해갑니다. 창조에서 타락으로, 가인에서 네피림으로, 홍수의 심판을 지나 기억하시는 은혜까지—이 전체가 하나의 일관된 신학 서사임을 설득력 있게 증명합니다.

저자는 존 월튼(John Walton)의 기능적 창조론과 주원준 박사의 고대 근동 연구라는 두 기둥을 학문적 좌표로 삼고, 그 기둥 위에 강단의 언어와 목회적 통찰을 덧입혔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루돌프 불트만(Bultmann)의 탈신화화(demythologization)와의 구별입니다. 불트만이 신화적 언어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흘렀다면, 정우조 목사의 탈신화화는 그와는 반대로 작동합니다.

태양과 달과 바다 괴수를 신의 자리에서 끌어내려 피조물의 자리에 돌려놓음으로써,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신이심을 더 강력하게 선언합니다. 계시의 권위를 해체하지 않고, 오히려 강화하는 것이죠. 이것이 이 책이 기존 논의와 만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창조기사는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를 ‘변증’하기 위한 본문이 아닙니다. 고대 세계를 다스렸던 폭력적인 신들의 가치 체계에 저항하며 그것을 전복시키는 하나님의 통치를 선언하는 이야기입니다.” 책의 심장부에서 위의 문장을 만났습니다. 이 한 문장을 만나는 순간, 창세기 강단의 무게중심이 이동합니다. 변증에서 선포로, 방어에서 공격으로. 그 이동이 이 책이 독자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이 책이 가장 절실한 독자가 있습니다. 창조와 진화 논쟁이 두려워 창세기 설교를 아예 피해 온 목회자, 고대 근동 배경이 중요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던 신학생, 그리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를 지성적으로 어떻게 붙들어야 할지 흔들리면서도 그 흔들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성도들—이 책은 바로 그 자리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의 창세기 설교의 약점이 보였음을 고백합니다. 저는 창조를 논증하느라 에너지를 쏟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1장이 선포인지 변증인지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한 채로 말입니다. 대홍수 이후 하나님이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라고 선언하시는 그 장면—이것이 하나님의 자기 극복이자 은혜의 시대를 여는 결정적 분기점이라는 저자의 통찰 앞에서, 저는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책을 사십시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세요. 창세기가 새롭게 보이고 강단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 김관성 (낮은담 침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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