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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를 죽이고 싶어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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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고니와 자신을 구분해 고니를 손쉽게 이용하고자 동물이라는 개념을 발명했습니다.
---p.12 이모 발굽에 깔려 죽어 간 고니는 너처럼 바깥 출신이었어. 고니 전시장에서 도망쳤대. 거기선 인간에게 자기가 좋은 대우를 받는지 아닌지 너무 헷갈려서 정신병이 생겼대. 사육사는 한결같이 친절했고 건초와 과일은 맛있었대. 왜 한곳에 발이 묶여 있어야 하는지 끝내 이해할 수 없었대. ---p.37 인간은 고니가 인간과 같은 이유로 운다고 여기길 좋아하죠. 눈물이 있는 곳에 슬픔이 있고, 슬픔이 있는 곳에 눈물이 있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p.45~46 강풍에 가지가 꺾인 나무를 섣불리 동정하는 것도 인간, 여느 관광지의 방목장에서 승용 고니와 깊이 교감하는 체험을 마치고 다음 코스로 불고기를 구워 먹는 것도 인간입니다. ---p.67 그는 죽을 때까지 사랑이 뭔지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미련이라면 미련일 것입니다. ---p.71~72 질병에 걸리든 사고를 당하든 그들에게 은퇴는 죽음의 동의어입니다. 생산성을 잃은 고니의 목숨을 연장할 비용으로 사지 멀쩡한 고니를 들여야 하니까요. ---p.94 E의 전 애인이 고상한 고니즘이니 뭐니 다 소용없고 공장식 축산업에 동조하는 인간을 식목일에 나무 심듯 주기적으로 죽이는 게 지름길이라는 망상에 깊이 빠지면, 어느새 괴담의 주인공이 될지도 모를 일이죠. ---p.119 고니도 인간이 만들어 낸 가상의 동물인걸. 착하고 귀엽고 버릴 게 없는 고니는 인간의 머릿속에나 존재하는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해해? ---p.135 이딴 걸 밥이라고 먹어? 가격이 싸기라도 하면 모를까 영양가도 별로 없고 입맛이 똑 떨어지네. 돈 아까워. 역시 채식은 할 게 못 돼. 입에 쩍쩍 달라붙는 고기 요리를 쉽게 포기하다니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p.147 F가 제멋대로 설정한 계급의 꼭대기엔 본인이 있습니다. 코코의 지위는 이름 없는 고니보다 높고 고니를 해치는 인간의 지위는 고니 고기보다 낮습니다. 대다수의 인간이 고니를 해치는 데 관여하니 인간 전체가 하등하다 해도 무방합니다. ---p.148 그건 비겁한 육식이 아닐 것입니다. 다른 종을 공격하는 것보다 식인이 더 윤리적일 것입니다. ---p.150 잘 잤어? 배고프지? 고기 먹을래? 구울까, 볶을까, 부칠까, 튀길까, 삶을까, 데칠까, 찔까, 조릴까, 무칠까? 맛있겠지? 맛있지? 배불러? ---p.171 결국 여전히 고기를 먹어야 힘이 난다는 손님들 덕에 킬바이어 조직이 존속할 수 있습니다. ---p.177 넌 희열을 느끼려고 자진해서 물건으로 전락하는 고니를 상상할 수 있어? 진짜 고니라면 복날 특수를 맞은 도축장 예냉실 갈고리에 고깃덩이같이 걸려 있는 놀이를 고안할 수 있겠냐고. 냉동실에 몇 년째 처박혀 있는 순살 튀김 놀이는? ---p.2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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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형의 살점 아래 스며든 무심한 시선
‘동물’이라 호명된 존재의 비극적 일대기 깜찍한 식인 외계인을 주인공으로 타자화된 몸을 탐구했던 돌기민이 이번에는 귀엽지만 추하고 유용한데다 필수적인 존재 ‘고니’를 내세워 인간 너머의 존재, 곧 ‘확장된 타자’를 조명한다. 『고니를 죽이고 싶어』는 개도 돼지도 소도 사라진 세계에서 유일한 동물인 고니 ‘687’의 반복되는 삶과 죽음을 따라간다. 푸르스름한 털과 구슬 같은 남색 눈을 지닌 ‘687’은 축사에서 태어나 인간에게 코를 제공하기 위해 길러진다. 인간은 스스로도 고니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고 믿을 만큼 정교하게, 그러나 효용이 다할 때까지 반복해서 코를 벤다. 그러나 그 배려는 폭력을 지우는 언어이자, 폭력을 정당화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687’은 끝내 하나의 생명이 아니라, 효용이 다할 때까지 관리되고 소모되는 자원으로 취급된다. 회복력을 잃은 ‘687’은 버려질 곳으로 향하는 트럭에 실렸다가 동료의 희생 끝에 가까스로 야생으로 탈출한다. 야생 고니들은 낯선 ‘687’을 경계하지만, 그에게 호기심을 품은 ‘구수미’는 번호뿐이던 존재에게 이름을 선물한다. 과연 이름을 얻은 ‘687’의 삶은 달라질 수 있을까? 우리는 매일 누군가 혹은 무언가의 희생 위에서 살아가면서도, 그 희생을 보지 않는 데 익숙해져 있다. 효율과 위생, 분업이라는 이름 아래 현대 문명은 생명의 고통과 죽음을 시야 밖으로 밀어내는 방식을 정교하게 발전시켜 왔다. 『고니를 죽이고 싶어』는 그동안 파편화되어 인식되지 못했던 폭력과 희생을 고니라는 하나의 존재에 응축함으로써, 타자의 고통을 끝없이 비가시화하는 문명의 메커니즘을 집요하게 드러낸다. 다정한 듯 비웃는 듯한 관조적 내레이터의 목소리는 우화적 상상력과 냉철한 현실 인식을 교차시키며, 독자를 끝내 하나의 질문 앞에 세운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겨온 삶은 과연 누구의 희생 위에 세워져 있는가. 먹고, 타고, 입고, 사랑하고, 연민하는 모든 방식에 깃든 폭력 그리고 시초부터 인류와 함께한 ‘고니’의 대답 첫 삶이 종결된 ‘687’은 고니를 귀엽게 형상화한 인형 ‘다르랑’ 공장에서 다시 태어난다. 이후 인간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욕설로, 고상한 희곡의 주인공으로,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다시 태어나며 때로는 사랑받고, 때로는 조롱받고, 때로는 숭배되고 소비된다. 다시 말해 이 세계에서 고니는 인간의 식탁만 책임지는 존재가 아니다. 살과 내장, 코, 가죽, 털까지 남김없이 소비될 뿐 아니라, 관용구와 속담, 욕설, 민간신앙, 예술과 대중문화에 이르기까지 인간 문명의 구석구석을 떠받치는 상징으로 기능한다. 마치 현실의 인간 문명이 곰과 호랑이, 늑대 같은 동물을 신화와 상상력의 원천으로 삼아온 것처럼, 『고니를 죽이고 싶어』의 세계에서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고니를 소비하고 숭배하며 희화화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배운다. 아이들은 고니 캐릭터가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을 보며 자라고, 어른들은 고니를 소재로 한 희곡과 소설을 통해 웃고 운다. 관용구와 욕설 속에서도 고니는 끊임없이 호출되며, 인간의 언어와 감수성, 상상력의 일부가 된다. 반려동물인 고니는 인간에게 가장 친숙한 존재이지만, 문화가 빚어낸 사랑스러운 이미지와 현실의 고니 사이에는 끝내 메워지지 않는 간극이 존재한다. 이처럼 『고니를 죽이고 싶어』는 가장 낯선 방식으로 가장 익숙한 현실을 응시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무엇보다 평안을 갈망하는 고니가 끝내 도달하고자 하는 곳이 되풀이되지 않는 완전한 죽음이라는 사실은 오래도록 독자의 마음에 남는다. 인간의 삶을 유지하는 데 고니의 희생이 불가결한 세계에서, 고니가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가 죽음뿐이라면 그것은 과연 누구의 비극인가. 고니가 끝내 바라보는 미래는 어쩌면 인간이 마주해야 할 미래와도 맞닿아 있을지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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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는 유니콘보다도 공상적이고 돼지보다도 현실적인 종種이다. 이 이야기는 발명보다 발견에 가깝고 이 발견은 어떤 발명보다도 오리지널하다. 평범한 작가는 작품 안에 갈등을 만들고 훌륭한 작가는 작품과 독자 사이에 갈등을 만든다는데 돌기민은 작품과 세계 사이 갈등을 발견한다. 내가 독재자라면 블랙리스트 첫 줄에 ‘돌기민’을 적을 것이다. 이 글이 흔들어 깨울 의식과 정동을 두려워하며. 세계의 전제를 오래 직시한 자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게슈탈트 붕괴를 맞이하게 된다.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 책이 바로 추군루에Zugunruhe다. 듣는 사람한테만 들리는 비명이 넋들을, 판에 박힌 문자들을 일으켜 세운다. 작가가 마지막 마침표를 찍은 뒤에 죽지 않아 다행이다. 돌기민은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었다. 이제 우리는 그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 - 원소윤 (스탠드업 코미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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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행 연습』의 애독자인 나는, 『고니를 죽이고 싶어』를 읽기 시작했을 때 내가 준비된 독자인 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돌기민 작가 덕분에 또다시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되었다. BBC 자연 다큐 화자인 데이비드 아텐보로 할아버지의 차분하고 명쾌하면서도 애정 어린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문체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결코 상상도 못 했을 존재들의 이야기에 곧 나 스스로의 내면을 투영하면서 읽었다. 『고니를 죽이고 싶어』는 이토록 친절한 존대어로 전개되며 타자화를 보듬는 행위로 가장해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고니, 소수자, 먹고사니즘을 불쌍히 여기는 스스로를 확인하면서, 우리들의 이러한 친절(?)에도 타자의 핍박이 허용되는 세상은 먼 곳이 아니라는 불편한 사실과 직면하기 때문이다. 친절한 타자화 행위, 이 소설의 데이비드 아텐보로는 결국 우리 자신이다. - 안톤 허 (소설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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