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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위글스워스의 생애와 인간적 면모
제1장 투박한 질그릇에 담긴 보배 제2장 가정, 가장 작은 교회 제2부 흔들리지 않는 신학적 기초 제3장 말씀은 영원한 실체다 제4장 예수는 누구신가? 제5장 믿음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제3부 성령과 기름부음 제6장 끊임없는 성령의 역사 제7장 유익하게 하는 성령의 은사들 제4부 치유, 축귀, 그리고 영적 전쟁 제8장 마귀와 영적 전쟁 제9장 치유와 기적: 하나님의 방법 제5부 마지막 때 제10장 종말과 부활 제11장 천국 제6부 사역자의 길 제12장 사역자의 마음가짐 제13장 거룩함과 순종 에필로그 부록 1 부록 2 부록 3 참고 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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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문턱에 들어선 위글스워스는 생계를 위해 배관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는 도시의 근대화로 수도 시설 수요가 급증하던 시기였습니다. 거친 쇠 파이프를 자르고 기름때를 뒤집어써야 하는 고된 현장이었지만, 그에게는 누구보다 성실한 태도와 삶을 향한 진지함이 있었습니다.
열여덟 살 때의 일화는 그의 됨됨이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한 배관업자를 찾아갔는데, 가난한 형편 속에서도 자신이 가진 가장 깨끗한 옷을 정갈하게 입고 구두는 거울처럼 반짝반짝 빛나게 닦아 신었습니다. 외모의 단정함이 곧 내면의 성실함을 대변한다는 태도였습니다. 처음에 사장은 일꾼이 필요 없다며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위글스워스가 실망한 기색 없이 대문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당당한 뒷모습을 지켜보던 사장의 마음에 묘한 울림이 일었습니다. 사장은 그를 다시 불러 세우고 “자네에게는 뭔가 다른 점이 있군. 자네를 그냥 돌려보낼 수 없겠어”라며 그 자리에서 그를 채용했습니다. 그의 성실함과 단정함은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는 밤낮으로 기술을 연마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지역에서 실력 있는 배관공으로 성장했습니다. 훗날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사역자가 되었을 때, 배관공으로서의 경험은 그의 사역에 독특하고도 강력한 색깔을 입혔습니다. 배관공이 꽉 막힌 관을 찾아내 사정없이 뚫고 깨끗한 물이 흐르게 하듯, 그는 집회 현장에서 인간의 불신앙과 죄악으로 막힌 영적 통로를 성령의 불로 뚫어내어 은혜의 생수가 흐르게 하는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본격적인 순회 사역 중에도 그는 자신의 배관 기술을 사용하여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의 고장 난 수도를 남몰래 고쳐주곤 했습니다. 또한 “내가 맡은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기 전에는 절대로 돈을 받지 않는다”는 철저한 원칙을 고수하며, 말뿐이 아닌 자신의 손끝과 땀방울로 신앙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작은 일에도 이토록 정직하고 성실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음의 거장으로 들어 쓰실 수 있었습니다. ---『성실함으로 빚어진 배관공』 결혼 후 아내 폴리는 영국의 영적 대부흥 운동 속에서 이미 대중의 주목을 받는 탁월한 설교자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메시지에는 청중의 가슴을 찢는 영적 능력이 있었고, 집회마다 수많은 사람이 눈물로 자복하며 그리스도께로 돌아왔습니다. 반면 남편 스미스는 여전히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에 불과했습니다. 아내의 뜨거운 사역을 보며 소년 시절 품었던 복음 전파의 열망이 다시 꿈틀거렸지만, 그에게는 치명적인 육체적 약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극심한 말더듬이 버릇이었습니다. 아내 폴리는 남편의 중심에 있는 영적 불씨를 보았기에 몇 번이나 그에게 강단을 양보하며 격려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매번 참담한 실패였습니다. 수많은 회중의 시선이 집중되면 청년 위글스워스의 혀는 마비된 듯 심하게 꼬였고, 전달하려던 생각은 머릿속에서 사정없이 뒤엉켰습니다. 강단 밑의 회중들은 민망함과 당황스러움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깊은 좌절감과 자괴감에 빠진 그는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여보, 나는 정말 다시는 강단에 서서 설교하고 싶지 않소. 내게는 그럴 자격이 없는 것 같소. 나는 그냥 예배당 맨 뒤에 앉아서 당신의 구두나 깨끗이 닦고, 당신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뒤에서 돕는 편이 훨씬 낫겠소.” 그때부터 한동안 위글스워스 가정에는 세상의 이목을 끄는 독특한 사역의 형태가 이어졌습니다. 복음 집회 시간이 되면 남편인 스미스는 묵묵히 맨 뒷자리에 앉아 우는 아이들을 돌보거나, 차가운 예배당 난로에 장작을 넣으며 불을 지폈습니다. 반면 강단에는 가녀린 체구의 아내 폴리가 서서 영혼들을 향해 불을 토하는 권능의 설교를 선포했습니다. 가부장적인 성향이 짙었던 19세기 말 영국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남편이 아내의 그늘에 가려 수종을 드는 것은 자존심이 철저히 상할 법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미스는 인간적인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내의 입술을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능력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존중했고, 자신이 아직 하나님 앞에 온전히 깨어지지 않은 질그릇임을 겸손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아내 폴리 역시 눈앞의 무기력해 보이는 남편을 결코 무시하거나 타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묵묵히 난로를 피우는 남편의 거친 손에서 장차 영적 시대를 불태울 거장의 잠재력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기도가 필요한 남편의 곁을 지키며 끊임없이 격려했고, 그가 말더듬이라는 영육의 한계를 깨뜨리고 하나님의 때에 온전히 일어설 수 있도록 눈물로 기도하며 묵묵히 기다려주었습니다. 이 겸손과 인내의 시간은 훗날 스미스가 강단을 흔드는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한 가장 깊은 영적 산실이었습니다. ---『말더듬이 남편과 설교자 아내』 위글스워스의 믿음의 원칙은 때로 가족들에게 혹독할 만큼 엄격한 시험대로 다가왔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권능, 즉 신유(Divine Healing)와 건강에 대한 부분에서는 단 한 걸음의 타협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극심한 맹장염으로 쓰러져 의사들이 생존 가능성이 없다고 진단했을 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손길로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건 이후 위글스워스 가족은 평생을 좌우할 중대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제부터 그 어떤 종류의 약이나 의사의 처방, 혹은 세상의 의약품도 우리 집 문턱을 절대 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유일한 의사는 오직 여호와 라파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이것은 영적 오만이나 단순한 고집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생명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처 자식의 생명까지도 오직 하나님 한 분에게만 전적으로 의탁하겠다는, 목숨을 건 처절한 신앙의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엄격한 원칙을 실제 삶에서 지켜내는 과정은 피눈물 나는 영적 전투의 연속이었으며,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한번은 위글스워스가 몸이 몹시 아파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의 원칙에 따라 약을 전혀 쓰지 않고 기도로 버텼지만, 불행히도 그 질병이 온 가족에게 무섭게 전염되는 비참한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집안은 순식간에 신음 소리로 가득 찼고, 막내아들 조지는 차가운 다락방 바닥에 누워 고통에 신음하며 “아빠, 너무 아파요. 제발 이리 와서 기도해 주세요!”라고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보통의 부모라면 아들에게 즉시 달려가 품에 안고 위로했겠지만, 영적 아비였던 위글스워스는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는 자식의 고통 앞에 눈물을 흘리기 전, 이 영적 재앙이 임하게 된 자신의 영적 상태를 하나님 앞에서 냉철하게 점검했습니다. 가정의 영적 제사장으로서 자신에게 숨겨진 불신앙이나 죄가 없는지 돌아본 그는 가슴을 치며 외쳤습니다. “나는 갈 수 없다. 모든 것이 나에게서 온 것이다. 나는 회개하고 주님께 용서해 달라고 요청해야 할 것이다.” 그는 아들의 방으로 직행하는 대신 골방으로 들어가 하나님 앞에 자신을 처절하게 낮추며 통곡으로 회개 기도를 드렸습니다. 마침내 심령에 하늘의 확신이 임한 후, 그는 단숨에 다락방으로 달려가 고통에 겨워 가쁜 숨을 몰아쉬는 아들의 몸에 거친 손을 얹고 안수했습니다. 그 순간, 성령의 권능이 임하면서 아들을 괴롭히던 극심한 통증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열이 내리는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위글스워스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질병과 위기가 닥쳤을 때,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상황을 모면하는 것보다 하나님과의 막힌 영적 관계를 회복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언제나 최우선 순위임을 온 삶을 통해 뼈저리게 가르친 것입니다. 이 혹독한 훈련을 통해 자녀들은 눈앞의 환경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거인 같은 믿음의 세대로 자라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집에 약은 없다”라고 한 타협 없는 원칙』 수많은 집회 현장에서 마귀를 꾸짖고 수만 명의 귀머거리를 고치며 하늘의 권능을 행했던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스미스 위글스워스의 가슴 깊은 곳에도 평생을 안고 가야 했던 아픈 손가락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랑하는 딸 앨리스(Alice)의 청력 장애였습니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청각 장애인들이 그의 기도를 받고 귀가 뚫리는 기적이 연일 일어났지만, 정작 그의 곁에서 사역을 돕던 딸 앨리스는 무겁고 투박한 청력 보조기에 의지해야만 겨우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딸과 함께 대형 치유 집회에 참석할 때면, 그의 사 역을 시기하거나 믿지 못하던 짓궂은 불신자들과 종교인들은 비아냥거리며 공격적인 질문을 사정없이 던지곤 했습니다. “위글스워스 씨,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신유를 행하는 위대한 치유자가 맞습니까? 그렇다면 왜 정작 당신의 품에 있는 친딸의 귀는 고치지 못하고 저 부끄러운 청력 보조기를 끼우고 다니는 겁니까? 당신의 기적은 가짜가 아닙니까?” 사역자로서 뼈아픈 수치심과 좌절감을 느낄 법한 순간이었지만, 위글스워스는 단 한 순간도 당황하거나 구구절절 변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독설을 내뿜는 사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특유의 대담한 위트와 뼈가 있는 한마디로 그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구약 성경의 위대한 능력의 선지자 엘리사가 왜 하필 대머리였는지 나에게 명확하게 설명해 줄 수 있다면, 나 역시 내 사랑하는 딸 앨리스에게 왜 저 청력 보조기가 여전히 필요한지 당신에게 말해주겠소.” 그는 인간의 얄팍한 호기심이나 비난에 반응하여 자신의 영적 능력을 과시하거나 증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치유의 역사와 거두어 가심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전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섭리에 달린 일임을 겸손히 인정한 것입니다. 딸의 고쳐지지 않는 신체적 장애는 바울의 육체의 가시처럼 그의 사역 평생에 걸림돌이자 아픔이었을지 모르나,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그의 철저한 믿음을 훼손하거나 흔들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낙심하기 쉬운 딸 앨리스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날마다 이렇게 거룩한 비전을 선포하며 축복했습니다. “사랑하는 내 딸아, 네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면, 하나님께서 너를 온 세상으로 보내실 것이다.” 위글스워스는 자녀에게 육체의 건강이나 안락함이라는 눈앞의 조건보다, 하나님이 부여하신 영적인 사명이 비교할 수 없이 더 중요함을 삶으로 가르쳤습니다. 아버지의 이 야성적인 믿음을 그대로 이어받은 딸 앨리스는 훗날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어 황무지와 같았던 아프리카 대륙의 선교사로 자신을 온전히 헌신했습니다. 수많은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며 아버지의 거룩한 믿음의 계보를 당당히 이어 나간 것입니다. 이처럼 위글스워스의 가정 교육은 세상적인 편안함과 안정을 추구하는 과정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거룩함을 열망하며 달려가는 치열한 영적 전투였습니다. 그는 자녀들에게 세상의 썩어질 성공의 공식을 물려주는 대신, 설령 내 기도가 당장 이루어지지 않고 육체의 가시가 그대로 남아있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야성적인 믿음을 최고의 유산으로 물려주었습니다. 그 눈물과 철저한 원칙의 결과, 그의 자녀들과 후손들은 대를 이어 각자의 사역지와 일터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명문 믿음의 가문으로 견고하게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아픈 손가락, 딸 앨리스의 청력 보조기』 위글스워스의 담대함은 한 국가의 최고 권력과 공권력의 위협 앞에서도 결코 야성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빛을 발했습니다. 그가 북유럽 스웨덴 대륙에 발을 내딛고 강력한 성령의 치유 사역을 펼칠 때의 일화입니다. 수많은 청각 장애인의 귀가 뚫리고 휠체어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역사가 연일 일어지자, 기득권이었던 루터교회와 의사 단체는 거대한 영적 위기감을 느끼며 그를 거세게 경계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이들은 국가 최고 권력자인 국왕에게 탄원서를 올려 위글스워스를 스웨덴 영토 밖으로 강제 추방하라는 명령을 받아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삼엄한 기류 속에 국가 경찰들이 그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밀착 감시하며 따라다녔고, 공원에서의 대형 야외 집회를 허가해 주는 대가로 “이곳에 모인 병자들에게 절대 손을 얹어 안수 기도를 하지 말라”는 살벌한 조건을 내걸며 그의 사역의 손발을 묶으려 했습니다. 공권력의 압박 앞에 보통의 사역자라면 크게 위축되거나 집회를 포기할 법한 극한의 상황이었지만, 위글스워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담하게 마주 섰습니다. 그는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는 경찰들을 향해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약속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안수하든 안 하든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믿으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는 공권력이 내민 제약 조건을 비웃듯, 집회가 시작되자 환자들에게 손을 대지 않은 채 오직 사자처럼 포효하는 믿음의 선포와 말씀 권세만으로 현장에 모인 수백 명의 불치병 환자들을 그 자리에서 깨끗하게 치유해 냈습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권능은 인간이 만든 법적 규제나 환경의 제약에 결코 묶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스웨덴 왕실과 공권력 눈앞에서 똑똑히 증명해 보인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야성적인 담대함은 비단 스웨덴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습니다. 한번은 스위스 사역 중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현지 경찰에게 체포되어 차갑고 음침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쇠창살 안에서도 그는 죄수처럼 기죽지 않고 하늘의 대사처럼 당당함을 유지했습니다. 감옥 안을 기도로 채우며 자정이 되었을 때, 압박을 느낀 경찰관이 다가와 감옥 문을 열며 지친 목소리로 “이제 나가도 좋다”고 석방을 고지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감옥을 빠져나왔겠지만, 위글스워스는 오히려 팔짱을 끼고 경찰을 똑바로 쳐다보며 호통치듯 요구했습니다. “아닙니다. 내가 나가기를 원한다면 조건이 있습니다. 여기 있는 모든 경찰관이 무릎을 꿇고 내 기도를 받아야 합니다.” 국가의 공권력을 집행하는 경찰관들을 향해 도리어 내 기도를 받으라며 영적인 무릎을 꿇리라는 상상치 못한 요구를 던진 것입니다. 감옥을 가득 채운 위글스워스의 압도적인 하늘의 권위와 거인 같은 기백에 완전히 제압당한 스위스 경찰관들은, 결국 그의 앞에 하나둘씩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기도를 받았습니다. 차가운 감옥 한복판에서 국가 공권력의 심장부에 피 묻은 복음을 꽂아 넣은 위글스워스는, 가슴을 펴고 유유히 감옥 문을 걸어 나왔습니다. 그는 감옥이라는 비참한 환경이나 경찰이라는 세상의 권력보다, 그 좁고 어두운 쇠창살 틈바구니 속에서도 온 우주를 통치하시며 여전히 역사하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비교할 수 없이 더 크고 두렵게 보았던 진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스웨덴 국왕의 추방 명령 앞에서도 당당하게』 위글스워스는 어둠의 세력이 던지는 매서운 비난뿐만 아니라, 육신을 유혹하는 세상의 달콤한 칭찬과 영광 앞에서도 완벽하게 자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인도하던 대형 집회 중에 하늘의 문이 열리며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대폭발하듯 강하게 일어나자, 현장에 있던 수많은 군중이 감격에 겨워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눈앞에서 기적을 행하는 위글스워스를 향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라고 연호하며 그를 영웅처럼 치켜세우고 칭송하기 시작했습니다. 군중의 뜨거운 환호와 열기가 예배당을 가득 채웠지만, 위글스워스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단상 앞으로 걸어 나와 사자처럼 엄하게 호통을 치며 그들의 입을 막았습니다. “잠잠히 있으세요. 주님께서 주님 자신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사역자인 자신에게 쏟아붓는 뜨거운 박수갈채와 인간적인 영광을,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게 만들려는 마귀의 가장 간교하고도 치명적인 미혹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순간 영적으로 파멸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사람들을 향해 뼈아픈 영적 진실을 다음과 같이 선포하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박수갈채를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당신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다면 그것은 명백하게 마귀가 그들을 미혹한 것입니다.” 그는 군중이 자신을 광야의 세례 요한이나 당대의 특별한 초인적 존재가 된 것처럼 신격화하며 치켜세우는 종교적인 말들을 경계하고 차단했습니다. 수만 명의 병자를 고치는 능력의 사도가 되어서도, 그는 자신이 과거 글자 한 자 제대로 읽지 못했던 비참한 문맹의 배관공 출신일 뿐이며, 지금 나타나는 모든 초자연적인 권능은 전적으 로 거룩하신 하나님께만 속한 것임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부추기는 칭찬에 마음이 우쭐해져 교만해지거나, 반대로 사람들의 비난에 마음이 상해 낙심하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이 아닌 사람의 안색을 의식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임을 그는 영 분별로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칭찬도 비난도 주님의 십자가 앞에 한낱 배설물처럼 아낌없이 던져버린 채, 오직 하늘 보좌의 평가만을 바라보며 걸어갔던 그의 순전한 코람데오(Coram Deo) 신앙은 하나님의 영광을 탐하는 이 세대의 모든 사역자에게 거룩한 경종을 울렸습니다. ---『칭찬도 비난도 배설물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이성과 논리를 초월한 절대 권위로 믿으려 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거대한 장벽에 부딪히게 됩니다. 바로 눈앞에 펼쳐진 절망적인 현실과 인간이 느끼는 한계 가득한 감각입니다. 의학적인 진단과 눈에 보이는 현실은 도무지 회복 불가능한 절망을 말하는데 성경은 초자연적인 희망과 치유를 선포할 때, 대부분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선택하고 타협합니다. 하지만 영적 야성을 지닌 위글스워스는 환경과 감각에 지배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대담하게 선포했습니다. “나는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아 움직이지 않습니다. 나는 오직 내가 믿는 것으로 말미암아 움직입니다.” 그가 인도하던 사역 현장에서 위암으로 인해 식도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배에 인위적으로 뚫어 놓은 구멍을 통해서만 겨우 영양분을 공급받으며 간당간당하게 목숨을 유지하던 한 남자를 만났을 때의 일화입니다. 당시의 의학적 지식과 상식으로는 이 남자가 입으로 음식을 씹어 삼키는 것 자체가 절대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현실과 감 각은 절망만을 말하고 있었지만, 위글스워스는 그 불가능의 현실 앞에 성경 마가복음 11장 24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는 구절을 펼쳐 들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눈으로 그 남자를 바라보며 영적인 도전을 던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당신이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 저녁 맛있는 식사를 하십시오.” 남자는 자신의 신체적 상태를 무시한 이 황당한 요구에 기가 막혀 하며 “저는 삼킬 수 없습니다”라고 즉각 반박했습니다. 신체 구조상 음식을 삼키는 기능 자체가 소실되었기 때문에 그의 반박은 지극히 당연하고 이성적인 반응이었습니다. 하지만 위글스워스는 인간의 연약한 이성에 밀리지 않고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더 강력한 말씀의 권세로 쐐기를 박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입니다. 가서 드십시오” 이것은 환자의 상태를 배려하지 않은 무모한 강요나 영웅주의적 객기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살아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세상의 그 어떤 권위 있는 의학적 진단과 생물학적 법칙보다 완벽하게 우위에 있다는 확고부동한 믿음의 선포였습니다. 결국 그 남자는 이성을 짓누르는 말씀의 압도적인 권위 앞에 순종하기로 결단했고, 집으로 돌아가 음식을 입에 넣었습니다. 그 순간 놀랍게도 소실되었던 식도의 기능이 살아나며 음식을 자연스럽게 삼키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나중에 그 남자의 몸을 정밀하게 확인해 보니, 영양분을 주입하기 위해 배에 흉측하게 뚫려 있던 구멍은 흔적도 없이 초자연적으로 막혀 있었습니다. 위글스워스는 이 경이로운 사건을 통해,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유일한 실체이며 눈에 보이는 가변적인 현실은 잠깐 지나가는 안개에 불과하다는 위대한 성경의 진리를 온 세상에 삶으로 증명해 보였습니다. ---『이성을 파괴하는 말씀의 위력』 위글스워스는 성경을 하나님의 신분증이자 절대로 부도나지 않는 하늘의 수표처럼 여겼습니다. 우리가 은행 창구에 가서 정당한 수표를 내밀면 은행원이 그 수표에 적힌 액수만큼의 현금을 의심 없이 내주듯, 우리가 약속의 주체이신 하나님 앞에 그분의 말씀을 믿음으로 내밀면 하나님은 당신의 신용을 걸고 반드시 그 약속을 이행하신다 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는 평생 사역의 현장에서 다음과 같은 영적 원리를 선포하곤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보다 자신을 더 높이지 않으신다.” 이 고백처럼 그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과 영원한 명예를 걸고 인치신 최고의 보증서가 바로 성경임을 확신했기에, 말씀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신뢰했습니다. 그는 집회 때마다 강단에 서서 수많은 군중을 향해 가죽이 헤어진 성경책을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들고 사자처럼 호창하곤 했습니다. “이 말씀은 생명입니다. 이 말씀은 능력입니다. 이 말씀은 건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줍니다.” 그는 종교인들이 성경을 단순히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한 교양 서적이나 지킬 만한 도덕적 윤리 교과서 수준으로 취급하는 미지근한 태도를 철저하게 경계했습니다. 위글스워스가 바라본 성경은 박제된 문자가 아니라, 지금도 눈앞에서 퍼렇게 살아 숨 쉬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어떤 날이 선 검보다도 예리한 능력의 도구였습니다. 그 는 이 천국의 말씀이 예배당에 모인 모든 자들의 숨겨진 혼과 영, 그리고 골수와 관절을 사정없이 찔러 쪼개어 죄악과 질병을 도려내는 거룩한 수술 칼이 되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역설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신분증』 그는 눈앞의 상황을 뒤엎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조했지만, 그 믿음의 뿌리와 근거만큼은 철저히 기록된 말씀 위에 있어야 함을 단 한순간도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단단히 닻을 내리지 않은 믿음은 순간적인 감정의 흥분이나 인간적인 맹신, 혹은 허황된 신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영적 원칙 때문에 그는 “믿음은 들 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는 로마서 10장 17절의 약속을 평생 가장 사랑하고 가슴에 품었습니다. 그는 치명적인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자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주기 전에, 언제나 살아있는 말씀이 그 사람의 심령 골수 깊은 곳에 먼저 심기도록 사력을 다했습니다. 말씀이 심겨야 진짜 믿음이 잉태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는 영적인 준비가 되지 않은 이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말하곤 했습니다. “당신이 말씀을 듣고 믿음이 생기기 전에는 내가 기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는 말씀이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분위기에 휩쓸려 일어나는 기적은 일시적인 현상에 그칠 수 있지만, 영원한 말씀의 반석 위에 세워진 믿음으로 얻은 초자연적인 치유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복이 된다고 확신했습니다. 그에게 성경은 단순히 종이 위에 인쇄된 활자나 텍스트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그 자체였으며,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한 근원적인 재료였고, 영적으로 죽은 자를 단번에 살려내는 생명의 씨앗이었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 11:3) 위글스워스는 이 히브리서 말씀의 구절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문자 그대로 믿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오직 말씀 권세 하나로 온 세상을 지으셨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우리의 입술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선포할 때, 우리를 둘러싼 절망적인 환경과 세상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평생 사역의 현장에서 사자처럼 포효하며 드러냈던 말씀의 절대 권위의 핵심이었습니다. ---『말씀이 없는 믿음은 맹신이다』 스미스 위글스워스의 신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독특하면서도 강력한 지점은 그의 독서 습관에 있습니다. 그는 평생 수많은 책을 섭취하듯 읽어내며 다독을 자랑하는 지식인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수많은 사역자와 군중 앞에서도 스스로 “나는 성경 외에 다른 책을 읽어본 적이 없고, 그 결과 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고 하나님 앞에서 말할 수 있습니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할 만큼, 오직 성경 유일주의자로서의 순전한 삶을 고수했습니다. 그가 세상의 수많은 지식 서적들을 멀리하고 철저히 차단한 이유는 단순한 지적 편협함이나 고집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학문과 책들이 주는 유한한 지식과, 천국의 성경이 공급하는 영원한 생명의 차이를 영분별로 명확히 구분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성경은 단순히 종교적인 정보를 얻기 위한 활자가 아니라, 메마른 영혼을 살찌우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자신의 심령 속에 고스란히 이식하는 유일한 하늘의 양식이었습니다. 그는 사역의 현장에서 영적인 굶주림에 처한 이들을 향해 “음식 대신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당신의 영혼을 위해 더 낫다”고 말할 정도로, 육체를 유지하기 위한 세상의 양식보다 영적 생명을 풍성케 하는 말씀의 양식을 언제나 삶의 절대적인 우선순위에 두었습니다. ---『말씀 섭취』 위글스워스의 이러한 성경 중심적 삶은 ‘15분 원칙’이라는 영적인 습관으로 고스란히 나타났습니다. 그는 깨어 있는 동안 15분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고는 심령이 견디지 못해했다고 전해집니다. 이것은 단순히 15분마다 알람을 맞춰놓고 기계적으로 성경을 펼쳤다는 율법적인 규칙이라기보다, 단 한 순간도 주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었던 그의 뜨거운 영적 갈급함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말씀의 샘물을 마실 수 있도록, 외출할 때는 물론 집안에 있을 때도 항상 주머니에 작은 신약성경을 넣고 다녔습니다. 하루 세끼 음식을 먹을 때도, 복음을 전하러 길을 걸을 때도, 심지어 누군가와 깊은 대화를 나누다가 잠시 침묵의 틈이 생길 때조차도 그는 어김없이 주머니에서 손때 묻은 낡은 성경을 꺼내어 그 자리에서 읽어 내려갔습니다. 이처럼 그에게 성경 읽기는 형식을 갖추어 행하는 종교적 의무나 경건의 훈련이 아니라, 육체가 살기 위해 끊임없이 산소를 들이마시는 것과 같은 본능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생존의 행위였습니다. ---『주머니 속의 신약성경과 15분의 법칙』 위글스워스에게 성경 섭취는 단순히 눈으로 글자를 읽어 내려가는 지적인 독서가 아니라, 영혼 전체로 말씀을 꼭꼭 씹어 삼키는 거룩한 식사였습니다. 그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영적인 비유가 아닌, 생명이 걸린 문자 그대로의 진리로 받 아들이고 실천했습니다. 그는 성경을 대할 때 인간의 얄팍한 이성과 지식으로 분석하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고, 오직 순전한 믿음으로 고스란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매번 성도들을 향해 “우리는 이 말씀을 먹고 마셔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서 그것을 먹어야 합니다”라고 강력하게 권면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먹는다’는 영적 의미는, 말씀을 읽고 깊이 묵상하여 그것이 자신의 세포와 피와 살이 되고 뼈의 골수가 될 때까지 완벽하게 내면화하는 치열한 과정을 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히 4:12)라는 구절을 늘 인용하며, 기록된 천국의 말씀이 영혼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실제로 지친 육체의 뼈에 신선한 골수를 공급하고 굳어버린 관절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초자연적인 영적 강장제 역할을 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이처럼 말씀을 온전히 먹어 치운 그의 삶 속에서는, 선포되는 말씀마다 가차 없이 질병과 어둠을 도려내는 강력한 생명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성경은 읽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이다』 그는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강단에 서기 전, 단상 뒤에서 그저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어달라고 막연하게 부르짖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심령 속에 가득 충전하는 것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했습니다. 자신의 내면이 기록된 성경 말씀으로 한 방울의 빈틈도 없이 가득 채워져 있다면, 사역의 현장에서 성령님께서 필요할 때마다 그 말씀들을 날카로운 무기처럼 자유롭게 끄집어내어 역사하실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한 인간을 완전히 장악하여, 마침내 온몸으로 주님을 증거하는 거룩한 편지가 될 때까지 그 성품과 존재를 변화시킨다고 확신했습니다. 그의 사역을 통해 수많은 불치병 환자가 고침을 받고 악한 귀신들이 비명을 지르며 쫓겨날 수 있었던 위대한 비결은, 바로 이처럼 타협 없이 축적된 말씀의 밀도에 있었습니다. 위급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그가 사자처럼 내뱉는 치유의 선포는 한낱 인간의 감정이나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내면에 압축 투하되어 있던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강력한 압력을 받아 영적 전선 전면에 터져 나오는 초자연적인 권능의 폭발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는 영적 원칙을 삶의 매 순간 철저하게 증명해 냈습니다. 위글스워스가 평생 고수한 말씀 섭취의 태도는 오늘날 수많은 미디어와 디지털 기기의 홍수 속에서 영적인 주의력을 빼앗긴 채 살아가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강력하고도 뼈아픈 도전을 던집니다. 하루 중 세상의 수많은 정보와 영상들을 들여다보는 시간만큼, 영원을 결정짓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면하는 일에 진지하게 시간을 쏟아붓고 있는지 스스로 자문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가 온 삶으로 보여준 이 치열한 태도는, 하늘의 영적인 권능이 어느 날 갑자기 외부에서 무분별하게 주입되는 신비주의적 현상이 아니라, 내면에 묵직하게 쌓인 말씀의 밀도와 비례하여 밖으로 흘러나오는 지극히 단순하고도 정직한 진리임을 일깨워줍니다. 그는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밥은 혹여 굶을지언정, 영혼의 호흡인 말씀 만큼은 단 15분도 굶지 않았던, 그야말로 말씀과 완벽하게 물아일체를 이룬 진짜 말씀의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이 충전될 때 능력이 나간다』 스미스 위글스워스에게 성경은 도서관의 서가에 조용히 꽂혀 있는 고전이나 박제된 활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성경은 책장을 펼치는 순간 튀어 올라와 살아서 숨 쉬고 움직이는 역동적인 영적 실체였습니다. 그는 “성령이 없이는 성경은 죽은 글자입니다”라고 단언하며, 성령의 조명이 없는 성경 읽기를 경계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말씀은 인간의 고막을 울리는 단순한 소리의 파동이나 종이 위에 찍힌 잉크 자국이 아니라, 그 자체로 영이요 생명(spirit and life)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변의 많은 종교인이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공부하면서도, 정작 그 말씀이 지닌 초자연적인 권능이 삶 속에서 조금도 활성화되지 못하는 치명적인 이유를 정확히 지적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그저 머리로만 이해하려는 유한한 지식으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위글스워스는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도 살아 있는 실제이며, 믿는 성도의 육체와 환경 안에서 그대로 성취되는 강력한 진리로 역사한다고 믿었습니다. 그에게 말씀은 인간이 주체가 되어 읽고 분석하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그 말씀이 자신의 숨겨진 내면을 샅샅이 읽어 내고, 자신을 온전히 사로잡아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절대적인 능력이었습니다. 그는 집회에 모인 성도들을 향해 말씀의 살아 있는 생명력을 다음과 같이 뜨겁게 선포하곤 했습니다. “이 말씀은 불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뼈속에서 타오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삶의 모든 조직에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 고백처럼 말씀의 불꽃이 온몸에 임할 때, 인간의 이성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치유와 소생의 역사가 삶의 모든 조직 세포마다 실제로 일어난다는 것이 그가 평생을 통해 경험하고 증명해 낸 말씀의 생명력이었습니다 ---『말씀의 생명력』 그는 사역자들과 모든 성도를 향해 늘 준엄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은 지금 영적으로 불타고 있습니까?” 그에게 있어 성령 세례는 단순히 은사나 능력을 부가적으로 받는 차원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거룩한 불로 변화되는 근본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히브리서 1장 7절 말씀,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를 인용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영원히 꺼지지 않고 타오르며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고 불순물을 태워버리는 ‘불의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는 오늘날의 교회를 향해 뼈아픈 일침을 가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단순히 종교적 감동이나 줄 수 있는 ‘연기’를 피우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소멸하는 불’이 되어야 합니다.” 그에게 연기는 인간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화려한 형식이지만, 불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온 실체였습니다. 연기는 눈을 맵게 하고 시야를 가리며 혼란을 주지만, 불은 어둠을 몰아내고 차가운 심령을 데우며 죄악의 불순물을 흔적도 없이 태워버립니다. 위글스워스가 경험했던 성령 세례는 그의 내면에 떨어진 멈출 수 없는 거룩한 불이었습니다. 그 불은 그의 성정을 바꾸고, 그의 언어를 바꾸었으며, 그의 사역 전반을 완전히 재구성했습니다. 그는 불은 타오르는 본능이 있기에 가만히 머물러 있을 수 없음을 강조했습니다. 불은 주변을 태우며 끊임없이 번져나갑니다. 당신의 삶은 지금 연기입니까, 아니면 불입니까?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외형적인 종교 행위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성령의 불이 당신의 내면에 붙으면, 당신의 냉랭했던 기도는 뜨거운 간구로 변하고, 당신의 소심했던 선포는 세상을 뒤흔드는 복음의 불꽃이 될 것입니다. 당신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불로 가득 차오르게 하십시오. 불이 타오르는 곳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와 정결케 하시는 역사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이제 당신의 영혼에 성령의 불을 다시 지피십시오. ---『성령의 불』 위글스워스가 정의하는 성령의 불은 첫 번째로 정결케 하는 능력입니다. 그는 성령님은 깨끗하게 하시는 분으로서 오신 것이 아니라, 불온전한 것을 계시해 주시는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두운 방에 불이 켜지면 먼지가 보이듯, 성령의 불이 임하면 우리 내면의 깊은 죄와 불순물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성령 충만을 받으러 온 사람들에게 철저한 회개를 요구하면서 “나는 담배를 피우면서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이 부정한 성전 안으로 들어오시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거룩한 불이 임하기 위해서는 먼저 제단이 깨끗해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한번은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해 집회에 참석한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몹시 괴로워하며 위글스워스에게 “하나님이 저에게 숨겨진 것들을 드러내 보이시는데, 저는 너무나 무가치하게 느껴집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위글스워스는 그에게 “잘못된 모든 것을 회개하십시오”라고 권면했습니다. 그 남자는 거래처에 사료 대금을 제때 지급하지 않고 넘어갔던 죄를 기억해냈습니다. 그는 다음 날 아침 30마일을 달려가 밀린 돈을 갚고 정직하게 사과했습니다. 그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왔을 때, 비로소 성령의 불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위글스워스는 “하나님은 우리를 용광로에 넣으셔서 찌꺼기를 제거하시고 정금으로 만드신다”고 말했습니다. 성령의 불은 우리를 태워 없애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죄, 교만, 이기심, 세상적인 욕망 같은 불순물만을 태워 우리를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순결한 그릇으로 만듭니다. ---『정결케 하는 불』 성령의 불은 정결케 할 뿐만 아니라, 식어진 가슴에 거룩한 열정을 점화합니다. 위글스워스는 안에 있는 모든 열정을 깨워주시며, 우리를 불로 타오르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을 예로 들었습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습니다. 그의 옷은 거칠었고 음식은 초라했지만, 그의 가슴속에는 성령의 불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온 이스라엘을 진동시킬 정도로 하나님의 영에 충만함을 입고서 외쳤습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하지 않은 사람은 50년 동안 외쳐도 아무도 듣지 않지만, 성령의 불을 받은 사람이 외치면 사람들의 양심이 찔림을 받습니다.” 위글스워스 자신도 이 불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배를 타고 여행할 때나 기차를 탈 때, 가만히 있지 못했습니다. 내면에서 타오르는 복음의 열정 때문에 선장, 승무원, 승객들을 찾아다니며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는 “성령님께서 당신에게 들어오시면, 당신의 혀를 그냥 가만히 둘 수가 없게 됩니다. 주님께 말을 하지 않으면 가 슴이 터지는 듯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스위스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이른 아침 8시에 400명의 아기 엄마들과 150명의 노인들이 치유받기 위해 몰려든 것을 보았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지쳐서 쉬고 싶었겠지만, 위글스워스는 그 광경을 보고 더욱 불타올랐습니다. 그는 “내 뼈가 불에 타오르는 것을 느낍니다”라고 말하며, 3시간 반 동안 쉬지 않고 설교하고 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체력이 아니라, 성령의 불이 공급하는 지치지 않는 열정이었습니다. ---『열정을 일으키는 불』 위글스워스는 성령의 불이 한 번의 체험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제단의 불은 꺼지지 않도록 계속 관리해야 합니다. 그는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 지 29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 가슴속에서 불타올랐고, 29년 전보다 지금 더 불타고 있습니다”라고 간증했습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움직이는 존재가 되어야 하지, 금자탑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도전했습니다. 과거에 불을 받았다는 추억에 잠겨 굳어버린 기념비가 되지 말고, 매일 새로운 기름 부음을 받아 타오르는 현재의 불꽃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는 “부흥이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임하고 계십니다. 늦은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불 탈 준비가 되었습니까?” 라고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신앙은 차가운 이성입니까, 아니면 뜨거운 불입니까? 하나님은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불에 사로잡혀 자신을 태워 세상을 밝힐 불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계속 타오르게 하라』 스미스 위글스워스는 성령 세례를 졸업장이나 훈장처럼 여기는 태도를 가장 경계했습니다. 그는 “만약 당신이 ‘나는 10년 전에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며 과거의 날짜와 경험을 회상해야 한다면, 당신은 이미 타락한 것입니다”라고 충격적인 선언을 했습니다. 그에게 성령 충만은 매일 먹어야 하는 만나였습니다. 그는 “어제 받은 은혜로 오늘을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어제의 만나에는 벌레가 생깁니다”라고 말하며, 매일 신선한 기름 부으심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찾아와 과거의 화려한 영적 체험을 늘어놓는 사람들에게 단호하게 “과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지금’ 성령으로 충만합니까? 당신은 ‘오늘’ 하나님의 능력을 입고 있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성령 충만의 지속성』 위글스워스는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는 말씀의 시제가 현재진행형임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한 번 가득 채우고 끝나는 주유가 아니라, 계속해서 흘러들어오고 흘러나가는 호흡과 같은 상태입니다. 그는 “나는 성령님으로 충만케 되고, 더 충만케 되고, 더 충만케 되어서 넘쳐흐르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깨지기 쉬운 질그릇이며 영적으로 새기 쉬운 존재이기에, 끊임없이 성령을 공급받지 않으면 금세 메말라버린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만약 당신이 어제 이후로 어떤 영 적 진전도 이루지 못했다면, 당신은 퇴보한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멈춰 있는 신앙은 곧 죽은 신앙임을 역설했습니다. ---『채워지고, 또 채워지고, 넘치도록 채워지라』 그가 8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토록 강력한 능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거룩한 불만족에 있었습니다. 그는 현재의 영적 상태에 결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는 주님과의 교제에 만족해하는 사역자들의 무리와 함께 강단에 서는 것보다, 성령이 충만하고 더 충만하기를 학수고대하는 무리와 함께 있는 것을 택할 것 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더 많이”, “훨씬 더 많이” 구했습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더 많이’ 구하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것’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이 끊임없는 갈망이 위글스워스를 매일 기도의 자리로 이끌었고, 성경을 먹게 했으며, 성령의 깊은 바다로 더 깊이 들어가게 만들었습니다. ---『거룩한 불만족』 성령 충만을 지속하는 위글스워스의 구체적인 방법은 무시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한 번에 30분 이상 기도한 적이 별로 없지만, 기도하지 않고 30분 이상 보내지 않습니다. 그는 길을 걸을 때나, 밥을 먹을 때나, 누구와 대화할 때나 내면으로는 끊임없이 방언으로 기도하며 성령님과 접속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그는 “아침에 주님의 영을 받아 하루 종일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활력으로 넘치십시오. 잠든 채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에게 성령 충만은 특별한 집회 때만 입는 예복이 아니라, 매일의 삶을 살아내는 평상복이자 생존을 위한 호흡이었습니다. 그는 “당신의 기름병에는 신선한 기름이 있습니까, 아니면 굳어버린 찌꺼기만 남았습니까? 성령님은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흐르는 강물입니다. 날마다 그 강물에 당신을 던지십시오”라고 도전합니다.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