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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프란체스코 차노트
에세이 판지의 풍경들 코다크롬: 서문 초기 사진들 코다크롬 풀밭 위의 아침 식사 카탈로그 0.25km f/11, 1/125, 자연광 지도책 이탈리아 아일라티 장난감 나라 전경 ‘∞’ 무한 축척 몽타주 사진 스틸 라이프 서문 사진 작업 십 년 후 스틸 라이프: 지형학-도상학 막다른 골목의 미다스 왕 끝없는 세계: 윌리엄 에글스턴 노란 집 너머의 액자 없는 풍경 가장 작은 모험 앨범 빈첸초 카스텔라 프랑코 비메르카티 사진, 열린 시선 열린 작업 사진: 강에서 바다까지 휴대용 조가비 베네치아로 가는 길 워커 에번스가 어루만진 세상 무고한 자들의 학살 (또는) 모래성 사진과 외부 재현 그것을 바라보는 법: 길에서… 태양 아래 오래된 것은 전혀 없다 풍경에 대한 생각 이탈리아의 밤 자크 앙리 라르티그에 관한 고찰 베네치아에서 보는 애덤스와 고시지의 미국 소실점 시각의 대상 곳곳이 박물관 길 위에서, 딜런의 열혈팬들 애덤스의 세계 강으로 향하는 문 팻 개릿 삶의 하늘에 핀 구름 사진의 수수께끼 필요한 이미지를 생각하며 백일몽 마을들을 지나며 알도 로시를 위해 태양 아래 오래된 것은 없다 불안한 시선, 감정의 선집 우리 지금의 이야기 에덴에 한 발을 두고 콘타리나에서 프린스까지 대지의 노래처럼 음악을 위한 이미지 이탈리아 풍경 불가능한 풍경 집, 다리, 대문… 사진의 역사 사물을 만들다 차창 밖으로 벽에 비친 빛 달콤한 글자 해양 예보 자전적 이력 인터뷰 초상-세르조 알레바르디 기술: 거부감이 들지만 많이 그렇지는 않은-로베르토 토메사니 유사성의 왕국에서-마르코 벨폴리티 루이지 기리, 잃어버린 원본의 사진가-마리오 쿠라티 빛은 모든 것을 포옹한다-클로드 노리 장소들을 찍다, 건축물을 찍다-마리오 루파노 대지의 노래-에마누엘라 테아티니 풍경과 드러냄-카를로 디뇰라 루이지 기리-조르조 달 보 순간들의 수집가-안드레아 델몬테 이야기 속으로 떠나는 여행-아르투로 카를로 퀸타발레 옮긴이 주(註) 수록문 출처 찾아보기 |
Luigi Ghir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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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서 프레임을 둘러싼 바깥 공간을 삭제하는 것은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이러한 삭제를 통해 이미지는 측정 가능해지고 의미를 띠게 된다. 동시에 이미지는 삭제가 만들어낸 가시적 영역에서 계속되면서, 표현되지 않은 현실의 나머지 부분을 보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p.27
“한편으로는 인생의 흔적을 가로채기 위해 숨은 관찰자가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p.47 “이런 이유로 나는 시각의 전문가가 되라는 요구를 거부한다(내 직업은 ‘안경사’가 아니기에). 그리고 프레임이 억지로 창의력을 발휘해야 하는 백지로 간주되거나 독특하고 우월한 시각의 인증으로 여겨지는 것 또한 거부한다.” ---p.59 “미국 사진의 경우뿐만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사진은 우리에 게 현실을 보여준다고 믿는 순간 현실에서 가장 멀어진다. 셰익스피어의 『심벨린』에 나오는 대사는 이러한 모순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 무슨 끔찍한 아이러니인가, 그토록 좋은 눈을 지니고서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가다니!’” ---pp.86-87 “우리가 대부분의 사진에서 느끼는 이질감은 방향 감각의 상실에서 비롯된다. 그것들은 우리와 관련 없는 이미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은 이미지다. 에번스에게는 이런 것이 전혀 없다. 우리는 그의 작업을 통해 사랑에 흠뻑 빠진 듯한 애정 어린 관계로 들어간다. 장소와 공간과 얼굴은 즉시 알아볼 수 있고 친숙하게 느껴지고 머물 수 있다고 여겨진다.” ---p.131 “길 위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끊임없는 움직임을 묘사하려면 단순히 공장이나 창고, 슈퍼마켓이나 술집, 학교의 항상 같지만 또 다른 정면을 포착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건물 안으로 직접 들어가거나 아이들이나 근로자들이 나오기를 기다리거나 빛이 어떤 방식으로 정면을 드리워서 ‘어느 집의 초상’이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p.146 “사진을 찍기 위해 이탈리아 곳곳을 여러 차례 여행하면서 마음속이 묘하게 불편할 때가 있었다. 조명이 켜지기 시작한 유적지, 종루나 탑의 움직이지 않는 은빛 첨탑, 공원과 정원의 산책로에 줄지어 있거나 별장이나 저택 입구로 이어지는 네온 불빛, 다양한 광원에서 빛이 퍼져 나오는 광장을 마주치면 그러했다. 도시 외곽의 고독과 황량함을 부각시키는 수많은 가로등은 말할 것도 없다.” ---p.153 “내가 라르티그의 사진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세계와의 화해나 평화로운 모습 너머로, 위협적이진 않을지라도 분명히 불안을 드러내는 암시가 없지 않다는 것이다. 그의 사진은 사람이 사물과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을 누군가가 처음 알아차린 듯하다.” ---p.157 “결국 우리가 알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재현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고 경험하는 사물과 풍경, 장소의 표면에 나 있는 작은 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p.168 “나는 모든 것이 끝나기 전에, 그리고 공간과 사물이 조용히 어둠 속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서둘러 방을 나선다(물건들도 우리가 옮기고 보고 저울질하고 판단하는 것에 지쳐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p.175 “딜런의 노래를 들을 때면 항상 하늘에 구름이 있고, 그의 목소리와 음악이 내 앞에 놓인 세계를 들여다보게 하는 기적의 비밀인 것처럼, 신비로운 재구성의 마법이 일어난다. 그래서 삶의 아름답고 깨끗한 모든 것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리고 완성하지 못할 일, 하지 않을 일, 가 보지 못할 땅을 생각하고 후회한다.” ---p.202 “하나의 풍경을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처럼 보는 것은 세상의 모든 풍경에 대한 애착과 소속감을 결정한다. 그 감정은 ‘세상 속에 있다’는 자연스러운 몸짓을 상기시킨다.” ---p.235 “내가 택했던 시선과 접근 방식은 건축가의 ‘시각’을 인증하는 것 이상으로 비밀스러운 측면과 기능을 드러내고 건축 경험의 이미지를 복원하고자 한 것이지요. 어쨌든 건축물을 촬영한다고 해서 내 표현의 좌표를 변경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p.328 “빔 벤더스는 자신의 사진집에서 임박한 출현 이전의 대상들을 증언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와 달리 나는 신비로움과 매력을 불러일으키는, 이 반복되지 않을 출현 자체를 재현하고 싶습니다.” ---p.3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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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 자율적인 텍스트로서의 에세이
『루이지 기리의 사진 수업』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을 엮은 만큼, 기리의 작업과 관점을 깊이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 책은 기리가 사진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서 출발해 활동 초기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그의 내밀한 성찰과 작업 과정을 연대순으로 따라간다. 아울러 글쓰기를 통해 어떻게 사진을 사유했는지, 사진 매체의 가능성에 대해 어떤 고민과 질문을 지속했는지 고스란히 담아낸다. 기리의 글은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도구임은 분명하지만, 중요한 점은 사진에 종속되지 않고 그 자체로 독립적이면서 높은 완성도를 지닌 텍스트라는 사실이다. 기리는 자신이 사진을 찍는 것과 같은 목적, 즉 탐구하기 위해 글을 썼다. 따라서 이 글들은 개별 이미지를 묘사하거나 해설하지 않으며, 그의 사진과 마찬가지로 불투명하거나 해결되지 않은 부분들을 남겨 두어 독자들을 새로운 사유로 이끈다. 그것들은 철학과 건축, 미학과 도시계획, 음악과 정치 등의 여러 영역에 걸쳐 있어 ‘사진 에세이’라는 범주로 한정되지 않는다. 어떠한 정의나 해석에 갇히지 않고 뻗어 나가는 글들은 마치 완성하기 어려운 초대형 퍼즐 조각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기리는 정해진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규칙 자체를 탐구한다. “기리의 말에서 느껴지는 전반적인 인상은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의 말은 일정하게 구획된 경계의 벽을 밀어서 모래성처럼 허물어 버린다. 그에게 이미지가 가진 의미론적 생동성을 가둬 버리는 장르는 용납되지 않는다. 언어와 이론, 표현 형식은 서로 뒤섞이고 스며든다.” 서문을 쓴 이탈리아의 큐레이터이자 사진 평론가 프란체스코 차노트(Francesco Zanot)는 이러한 이유로 기리의 에세이가 독보적이라고 평한다. 이미지를 통해 사유하는 법 기리의 에세이는 크게 자신의 작업에 관한 글, 좀더 포괄적으로 예술 분야를 다룬 글, 동료 사진가들에 관한 글로 나뉜다. 모든 글에서 감지되는 확고함은 기리가 예술가이자 지식인으로 활동한 기간 내내 지속했던 사진적 태도와 맞닿아 있다. 끊임없는 주장, 저항, 재개, 반복의 연속은 단순한 반복강박이 아니라 마치 사진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여러 관점을 발견해 나가듯, 이해의 경지를 끌어올리는 시도이다. 특히 책 앞쪽에 나오는 ‘코다크롬’ ‘풀밭 위의 아침 식사’ ‘카탈로그’ ‘몽타주 사진’ ‘스틸 라이프’ 등 기리의 주요 시리즈에 관한 글들은 그동안 단편적인 이미지로만 접하기 쉬웠던 그의 작업을 체계적으로 짚어 볼 수 있게 한다. 한국어판에서는 작가의 글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는 시리즈 설명을 ‘옮긴이 주’로 보충했다. 기리의 주된 촬영 대상이자 글감은 그가 일상을 보내며 훤히 알고 있는 도시와 교외 풍경이다. 이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대상이야말로 비판적 분석이 가능하며, ‘새로운 풍경’으로 제시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눈앞의 풍경은 단순한 조망이 아니라 분석과 성찰의 기회이다. 도시의 흔한 건축적 요소에 주목한 시리즈 ‘카탈로그’나 전원 지역의 초상을 그려낸 시리즈 ‘풀밭 위의 아침 식사’는 개별 이미지만 보면 유사한 대상들을 무심히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일한 것과 다르게 보이는 것을 비교하며 시선의 기계적 성질을 나타내고 인식의 활성화를 도모하는 데 의도가 있다. 지도의 관례적 기호들을 지워 나가며 직접 경험의 파괴를 시도한 시리즈 ‘지도책’과 미니어처 테마파크에 현실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시리즈 ‘축척’은 사소한 사건들을 들여다보며 세계와 대화하는 그만의 방식을 보여준다. 이러한 탐구의 바탕에는 기리에게 영향을 미친 예술가들의 작업이 자리한다. 그는 워커 에번스를 비롯해 윌리엄 에글스턴, 앤설 애덤스, 폴 스트랜드 같은 미국 사진가들에 대한 글을 남겼다. 특히 미국의 칠십년대 ‘뉴 토포그래픽스(New Topographics)’ 사진가들의 작업에서는 수십 년간 견고히 무르익은 사진 전통과 그들의 깊은 일체감을 발견하고, 미국적 시각의 명료성을 이탈리아의 맥락으로 옮겨 오고자 했다. 나아가 밥 딜런, 루초 달라, 보르헤스, 페터 한트케, 페르난두 페소아, 알도 로시, 조르조 모란디, 브뤼헐, 세잔, 페데리코 펠리니까지, 미술, 영화, 문학, 건축, 음악을 넘나드는 인물들은 루이지 기리라는 한 사진가를 구체화해 나가는 중요한 퍼즐 조각이 된다. ‘태양 아래 오래된 것은 없다’라는 책 제목은 기리가 보르헤스의 책에서 인용한 문구로, 본래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태양 아래에 ‘새로운’ 것이란 없다는 구절을 뒤집은 것이다. 이처럼 기리에게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세계와 인간사의 반복과 덧없음을 받아들이기보다, 사춘기 아이의 시선으로 세계의 경이로움을 다시 발견하는 일이다. 하나의 풍경을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처럼 바라볼 때 새로운 인식이 열리며 세상 속에 존재한다는 감각과 풍경에 대한 애착이 깨어난다. 자신의 작업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성찰을 담은 에세이 「열린 작업」에서 사진은 자극과 감각, 질문과 답변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며, 사고와 시선이 행하는 거대한 모험으로 그려진다. 이미지 과잉의 시대에 사진은 그 속도를 잠시 늦추고, 마비된 주의력을 가동시키며, 무한을 향한 우리의 열망을 펼쳐 보이는 강력한 시각적 언어이다. 영토의 정체성을 되찾는 여정 이 책에는 기리가 꾸준히 이어 간 전시기획과 비평적 활동의 기록 또한 비중있게 담겨 있다. 전시기획자로서 기리는 주로 개인전보다 그룹전에 참여하면서 이탈리아의 사진 문화를 확산시키려는 책임의식을 드러냈다. 이탈리아의 유서 깊은 간선도로인 에밀리아가도(Via Emilia)를 다룬 프로젝트와 이탈리아 현대사진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이탈리아 여행(Viaggio in Italia)’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기리는 비슷한 관심사를 지닌 사진가들을 모으고 문화기관과의 연결고리를 구축했으며, 극적인 풍경이나 기념비적 건축물은 배제하고 사람이 살아가는 작은 시골 마을, 포평야, 대도시의 확장으로 변형되어 가는 교외 지역에 주목했다. 에세이 「사진: 강에서 바다까지」에서는 에밀리아가도 프로젝트를 위해 어떻게 사진가를 선정했는지부터 작업 지침, 각 사진가들이 맡은 대상과 지역, 프로젝트 이후 사진의 보존 방식까지 기록되어 그의 기획자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벽에 비친 빛」은 변형된 영토에서 사라진 감각과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기리의 태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에세이다. 기리는 폰타넬라토 산비탈레요새에 현존하는 카메라 옵스쿠라와 볼로냐에 위치한 조르조 모란디의 작업실을 언급하며 빛과 장소의 관계를 성찰한다. 특히 모란디가 도시의 변화가 앗아 간 빛을 되찾기 위해 작업실에 캔버스 구조물을 설치한 일화를 통해, 한 장소를 이루는 고유한 조건과 감각이 사라지는 ‘풍경의 상실’을 발견한다. 이러한 상실은 기리에게 변화된 영토를 새롭게 관찰하고 조사할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기리의 작업들은 낭만적이고 정형화된 풍경, 관광업과 산업화로 퇴색된 영토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체성과 가능성을 회복하려는 시도이자, 이미지의 출발점과 도착점을 찾아가는 근원적인 여정이었다. 산업화로 지형이 변해 버린 산업 도시 사수올로, 획일적인 구조에서 벗어나고자 주민들이 집을 꾸미게 된 페라라의 시골 마을, 하늘과 ‘동맹’하는 알도 로시의 건축물까지, 「가장 작은 모험」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기리는 무한한 유사성의 영역에서도 우연히 마주치는 균열과 일탈을 구별해내고자 한다. 이탈리아 사진계에서 지위가 공고해진 기리는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고 기성 작가를 조명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그들의 작업을 단순히 긍정하거나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엄격한 논리에 따라 분석하며, 그들이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되짚고 작가적 관점을 가다듬는 계기로 삼는다. 대화 속에서 확장되는 사진 담론 특정한 주제를 하나의 정의나 설명에 가두지 않고 다각화하는 태도는 인터뷰에서도 다르지 않다. 기리는 여러 분야와 대상에 두루 관심을 기울이며, 상대가 누구든 수평적으로 사고하고 논의를 여러 방향으로 넓혀 나간다. 그 특별하고 긴 대화에서 담론의 조각들은 서로 가까워지거나 결합되며 중심과 주변부를 오가면서도 명료해진다. 이에 대해 프란체스코 차노트는 무엇을 복잡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아니라, 복합성을 이해하려는 문제로 해석한다. 대화는 이탈리아 사진 시장으로도 이어지는데, 그는 시장의 잠재력을 인정하면서도 공공과 민간 차원의 후원이나 작품의 출처나 에디션을 보증할 제도적 기반이 부족한 실정을 비판한다. 또한 사진 평론이 작업의 방향과 분석적 틀을 제시하기보다는 완성된 작업을 소개하는 보조 역할에 그치는 현실 또한 지적한다. 실질적인 시장과 비평이 부재한 가운데 사진가들은 독창성에 대한 강박과 매너리즘에 빠져 있으며, 이러한 작가주의적 고립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대화를 시도하지 않는다면 사진은 시대에 뒤떨어진 ‘골동품’으로 전락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사진이 지닌 대체 불가능한 가능성을 끝까지 강조함으로써, 사진을 향한 한결같은 애정을 확인시킨다. 인터뷰의 마지막에는 기리 생전의 마지막 사진집인 『고대 미로로 떠난 여행』의 출간을 기념한 동명의 대화가 실려 있다. 상대는 이탈리아의 미술사학자이자 평론가인 아르투로 퀸타발레(Arturo Carlo Quintavalle)로, 기리의 작업을 꾸준히 조명한 연구자이다. 기리와 활동 초기부터 생애 말년까지 친밀한 관계를 이어 간 만큼, 주제 면에서나 분량 면에서 가장 높은 밀도를 이룬다. 두 사람은 이미지의 배열과 몽타주, 풍경의 재현, 기억, 이탈리아 여행의 의미를 폭넓게 짚어 간다. 이 대화가 비추는 것은 세계를 바라보고 사유하는 일을 멈추지 않은 예술가의 태도이다. 루이지 기리는 때때로 즉흥적인 발상에 따르는 모순도 두려워하지 않고, 얽히고설킨 생각의 타래를 풀어내며 사진의 본질과 가능성을 탐구해 나갔다. 그 궤적이 집약된 이 책은 사진을 사실적 기록이나 예술 작품에 한정하지 않으며,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믿는 현실을 새롭게 바라보고 인식을 확장하는 언어로서 이해하게 한다. 한편, 새로 선별 수록한 도판들과 옮긴이 주, 수록문 출처, 찾아보기와 같은 장치들은 각각의 글이 어떤 맥락에서 씌어졌고 어떤 키워드가 분포하고 있는지 일별해 볼 수 있게 한다. 사진을 공부하는 이들이나 사진에 관심있는 일반 독자들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문화와 역사, 예술가의 글쓰기를 경험하고 싶은 이들에게도 흥미로운 읽기가 되리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