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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시간
이정수 희곡집 
이정수 저
그래도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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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6 마유는 이레간 포르르 포르르
98 낙조 落照
184 하마 河魔
279 작가의 말
282 이정수 희곡집 『사람의 시간』: 역사의 시선, 빛을 발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 「하마」·「낙조」·「마유는 이레간 포르르 포르르」를 중심으로

저자 소개 1

1991년 대전 출생. 소설을 쓰고 희곡을 짓는다. 노동, 인권, 가난 그리고 부조리를 쓴다. ― 2017 제1회 디멘시아 문학상 최우수상 수상_ 소설 〈섬〉 2020 제28회 전태일문학상 소설부문 수상_ 소설 〈어금니〉 2021 제13회 대전창작희곡공모 수상 _ 희곡 〈하마〉 2023 한국극작가협회 한국희곡 명작선 선정 _ 희곡 〈파운데이션〉 2023 세 번째 희곡열전 이상 전 우수예술상 수상 _ 연극 〈이상, 기형, 13〉 2026 대산창작기금 희곡부문 선정 ― 〈파운데이션〉, 〈여덟 살 우주〉, 〈하마〉, 〈백파〉, 〈어금니〉, 〈재비 : 새,
1991년 대전 출생. 소설을 쓰고 희곡을 짓는다.
노동, 인권, 가난 그리고 부조리를 쓴다.
―
2017 제1회 디멘시아 문학상
최우수상 수상_ 소설 〈섬〉
2020 제28회 전태일문학상
소설부문 수상_ 소설 〈어금니〉
2021 제13회 대전창작희곡공모 수상
_ 희곡 〈하마〉
2023 한국극작가협회 한국희곡 명작선 선정
_ 희곡 〈파운데이션〉
2023 세 번째 희곡열전 이상 전
우수예술상 수상 _ 연극 〈이상, 기형, 13〉
2026 대산창작기금 희곡부문 선정
―
〈파운데이션〉, 〈여덟 살 우주〉, 〈하마〉, 〈백파〉,
〈어금니〉, 〈재비 : 새, 다시 날다〉, 〈제비다방〉,
〈노고지리는 무엇을 노래해야 하는가〉, 〈홍상수
영화처럼〉, 〈반원 안에는 동그라미가 있다〉, 〈알
고리즘〉, 〈Blue Lemonade〉, 〈운수 없는 날〉, 〈두
번째 가족〉, 〈노고단은 보라색이다〉, 〈운산〉 외
다수의 희곡을 발표했다.

Instagram : @booljang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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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8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292쪽 | 331g | 140*214*15mm
ISBN13
9791199058811

책 속으로


이 사건은 1932년 일제강점기 대전, 일본 거대 자본이 운영하던 누에실 공장에서 발생했습니다. 조선인 여성 노동자들이 민족 차별과 인간 이하의 노동환경에 맞서 궐기했고, 그들의 단호한 단식투쟁은 단 이레(7일) 만에 사측의 항복을 받아내며 요구 조건을 쟁취한 역사적인 승리로 기록됩니다. 노동자의 투쟁이 무기력으로 귀결되던 암울한 시대에, 이것은 기적 같은 ‘만세’였습니다.
--- p.7

그럼. 그때 우리 여공들 손은 다 똑같이 생겼었어. ‘군시제사 훈장’이라고 불렀지. 펄펄 끓는 가마솥에다가 이 맨손을 집어넣어야 했으니까. 고무장갑? 그런 게 어딨어. 맨손으로 휘저어야 고치 실마리가 잡히거든. 처음엔 손이 익어서 빨개지다가, 나중엔 하얗게 불어 터지고, 결국엔 껍질이 벗겨져서 피가 나. 근데 그 피가 나면 또 안 돼. 비단에 피 묻는다고 감독관이 몽둥이질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아파도 손을 오므릴 수가 없었어. 피가 나면 몰래 작업복에 쓱 문지르고, 다시 그 끓는 물에 손을 넣었죠.
--- p.11

우리는...이 마유를 닮았어. 열여섯, 열일곱. 꿈틀거리는 생명을 억지로 끓는 물에 집어넣고, 실적이라는 이름의 실을 토해내야 하는 존재들. 그런데 말이야... 가끔 궁금해. 만약 우리가 이 뜨거움을 견디지 않고, 실을 내어주지도 않고... 그저 이 딱딱한 껍질을 스스로 깨고 나온다면. 그래서 실을 잣는 기계가 아니라, 날개를 가진 나방이 된다면. 세상은... 우리를 뭐라고 부를까?
--- p.13

그 손 치우세요. 우리는 더 이상 당신들의 매질에 춤추는 기계가 아닙니다. 오늘부로 군시제사 대전공장 제1작업반 전원은 작업을 거부합니다.
--- p.41

아니요. 소용 있습니다. 아주 큽니다. 지금 여러분이 굶고 있다는 소식에 대전 시민들이 울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드디어 찾았습니다. 동아일보 기자가 지금 대전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제가 그분을 만나서 명주 씨가 쓴 글, 소이 씨가 정리한 부당 노동 행위 기록, 다 넘길 겁니다. 내일이면 신문에 날 겁니다!
--- p.63

희곡 「낙조」는 이승만 정권의 2인자였던 이기붕의 맹목적인 권력 추구가 개인과 가족을 어떻게 파멸시키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이다. 이기붕은 사사오입 개헌과 3.15 부정선거를 주도하며 권력의 정점에 섰지만, 도덕적 가치와 공익을 외면하고 가족을 권력 유지의 도구(아들 이강석의 양자 입적, 부정 입학)로 삼았다. 그의 삶은 권력의 허망함과 책임감 없는 엘리트 리더십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진정한 성공은 공익 추구와 도덕적 책임감에 있음을 강조한다.
--- p.99

제가 뵌 장관님은 정치적 계산에 있어서만큼은 지독히 철저하신 분입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숫자 몇 개쯤은 어떻게든 맞출 분이십니다. 그것이 이 집안의 권력을 지키는 길이라고 믿고 계시죠.
--- p.114

135표는 헌법 개정안의 정족수를 이미 충족시킨 것입니다. 최초의 발표는 국회 의사국 직원의 단순 계산 착오에 불과합니다. 수학적, 행정적으로 정족수는 135명입니다!
--- p.118

무슨 나약한 말씀이세요! 이기붕 장관! 우리는 ‘낙오’할 수 없습니다! 각하의 후계자이자 강석이 아버지인 당신에게 그럴 일은 없어요! 낙조는 패배의 상징이 아닙니다. 권력이 가장 짙게 물들어가는 순간입니다. 그 붉은빛은 우리의 힘입니다. 내일 당신은 부통령이 됩니다. 그 지위는 절대 떨어지지 않아요. 그리고 당신은 최후의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그 꿈은 예언이 아니라, 당신의 욕망이 만들어낸 환영일 뿐이에요. 이제 그 붉은 빛을 잊고, 내일 밝게 떠오를 태양만 생각하세요.
--- p.143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문제는 통시적 문제임을 감안하여 작품에서 현재를 그리기보다 과거를 그리고자 하였고,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 현대사 중 대국민 사기극이라 평가받는 1986년, ‘평화의 댐 사건’을 작품의 주요 소재로 두었습니다. 이는 거시적 관점으로, 현재까지 변하지 않은 국민 정서에 대한 문제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적합한 소재라 여기었기에 의도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언젠가 우리 시대의 자화상 속에서 얼룩이 지워지기를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 p.185

그래서 우리 세원 중학교도 국가 안보를 위해, 서울의 물바다를 막기 위한 평화의 댐 성금 모금이라는 거룩한 애국에 적극 동참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국가의 미래가 여러분들에게 달려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 p.198

양반 새끼들이에요. 양반 새끼들. 어차피 농민이 농사를 지으면 그 농사한 것이 땅주인인 양반한테 가잖아요. 양반 새끼들이 자기들 배 채우려고 모내기를 강행한 거예요. 조정에서 간부가 오면 그들 손에 적당히 돈을 주고 돌려보내고 모내기를 한 것이죠. 근데 그것을 아는 그 어떤 누구도 신고하지 않았어요. 당장 먹고 살기 힘든데 모내기를 함으로써 배부르게 살 수 있었거든요.
--- p.228

그러니까 학교의 모금 목표와 모금 방식에 문제가 있었고, 매일 같이 학생들이 매질을 당하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교사로서 학생들 대신에 성금을 냈습니다. 그것을 교무부장이 오해를 해서 저희 반 아이를 폭행했고, 그 모습을 가만히 볼 수가 없어서...
--- p.269

출판사 리뷰

작가의 말

혼자만의 활자가 누군가의 입술을 거쳐 무대의 언어로 변모해 온 지난 시간들을 가만히 되짚어 봅니다. 본래 소설의 문장으로 고요한 방 안에서 홀로 세계를 짓던 제가, 어느새 극장이라는 소란스러운 공간에 들어와 있습니다. 무대 위에서 조명의 빛을 조율하고, 땀 흘리는 배우들의 동선을 좇으며 희곡을 쓰는 극작가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때때로 저 자신에게도 무척 낯설고 아이러니하게 다가옵니다. 홀로 타자기를 두드리던 소설가가 수많은 사람이 부대끼는 연극 현장에서 숨을 쉬고, 고맙게도 그곳의 연극인들에게 점차 신뢰받는 작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소회를 마주할 때면, 마음 한구석에 묵직한 돌덩이 하나가 얹힌 듯한 서늘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제가 이야기를 짓고 인물을 탐구하는 바탕에는 ‘관세음(觀世音)’이라는 철학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구원하고 자비를 베푸는 보살의 이름이 아니라, 철저하게 ‘세상의 신음을 그저 바라보는 자’로서의 태도입니다. 저는 섣불리 인물들을 위로하거나 구원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저 앓는 소리를 내며 살아가는 이들의 곁에 서서, 그들의 마르고 앙상한 얼굴을 오래도록 피하지 않고 지켜볼 뿐입니다.
그렇기에 제가 쓰는 모든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캄캄한 디스토피아를 향해 걸어갑니다. 가난과 부조리, 벼랑 끝에 몰린 언더독들의 팍팍한 삶이 가감 없이 무대 위에 오릅니다. 누군가는 왜 그리도 희망 없는 세계만을 끈질기게 그리느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이 이야기가 가진 묘한 힘이라고 믿습니다. 바닥까지 추락해 처절하게 발버둥 치는 인물들을 보며, 독자와 관객이 ‘그래도 내 삶은, 지금 이 이야기 속 사람들보다는 조금 낫지 않은가’ 하는 안도감을 느끼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이기적일지 모를 이 심심한 위로가, 팍팍한 현실을 다시 하루 버텨내게 하는 아주 작은 동력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번 희곡집의 제목을 『사람의 시간』으로 엮어낸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거창하게 기록된 거대한 서사만이 역사는 아닙니다. 저는 역사를 빚어낸 것은 결국 이 미약하고 투박한, 사람들의 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의 파도에 흔적도 없이 쓸려갈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기어코 모래성을 쌓아 올리는 무모하고 바보 같은 시간들. 비록 그 모래성은 처참히 무너져 내릴지라도, 무언가를 쌓으려 했던 그 헛된 투쟁의 흔적 역시 하나의 역사로서 현재 우리의 삶에 투명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 책에 담긴 세 편의 희곡은 바로 그 무너진 모래성 곁에 남은 사람들의 덤덤한 신음입니다.
「마유는 이레간 포르르 포르르」는 단 이레라는 짧은 시간 동안 유성처럼 퍼덕거리다 스러지는 미약한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찰나의 생일지언정, 그 가녀린 날갯짓이 공기 중에 남긴 궤적을 묵묵히 따라가 보고자 했습니다.
「낙조」는 시대의 해가 저무는 끝자락, 피할 수 없는 짙은 어둠을 온몸으로 맞이하는 군상을 그립니다. 쇠락해 가는 빛 속에서 길게 늘어지는 제 그림자를 질질 끌고 걸어가야만 하는 씁쓸한 인간의 풍경을 담았습니다.
「하마(河魔)」는 거대한 폭력과 부조리라는 탁류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휩쓸리면서도, 어떻게든 숨을 한 번 더 쉬기 위해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미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절망의 강물 속에 도사린 괴물 같은 현실 속에서도 끝내 버둥거리는 삶의 비릿한 민낯을 직시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책으로 묶여 활자로 박제된 희곡은 아직 미완의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희곡의 궁극적인 존재 이유는 결국 연극이 되어 무대 위로 올라가는 것에 있습니다. 종이 위에 납작하게 누워 있던 인물들은 연출가의 고뇌와 배우들의 뜨거운 숨결을 통해 육체를 얻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캄캄한 객석에 앉은 관객들과 시선을 맞추고 호흡을 섞을 때, 비로소 이 이야기들이 온전한 의미로 완성된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묶어 세상에 내보내는 마음은 칠흑 같은 밤바다를 향해 뚜껑을 닫은 유리병 편지를 무심히 던지는 심정과 같습니다.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리다 어느 이름 모를 해변에 닿을지, 혹은 영영 가라앉을지 알 수 없으나, 부디 이 세 편의 덤덤한 신음이 ‘사람’에게 무사히 가닿기를 바랍니다. 어디선가 묵묵히 자신만의 모래성을 쌓고 있는 당신에게, 이글이 아주 작고 쓸쓸한 위안으로 읽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추천평

「하마」·「낙조」·「마유는 이레간 포르르 포르르」까지 세 편의 꽤 긴 희곡들을 단숨에 읽었다. 역사가 엮어진 연극은 무심코 넘겼던 시대의 타임라인에서 특별한 이면의 사연을 들춰낸다는 점에서 언제나 흥미롭다. 세 편의 각 작품이 다루는 시대적 배경은 격동의 근현대사를 아우르고 있는데, 1932년 일제강점기 대전의 군시제사공장의 노동쟁의(「마유는 이레간 포르르 포르르」 이하, ‘마유는’), 1950년대 말부터 1960년 3·15부정선거와 4·19를 관통하는 이기붕 일가의 성쇠(「낙조」이하, ‘낙조’), 1986년 말, 전두환 정권 하의 경기도 변두리 한 중학교를 배경으로 ‘평화의 댐’ 모금운동(「하마」, 이하 ‘하마’)를 소재로 삼고 있다. 시대 배경이 서로 다른 세 작품을 한데 묶었다는 점은, 작가의 분명한 사회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바로 이번 희곡집에서는 권력의 폭력성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도 그 역사의 뒤안길에서 포착하고 있는 빛을 잃어가는 것과 빛을 발하는 것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역사적 사건을 꼼꼼하게 리서치하면서, 전체주의와 독재의 폭압을 견뎌내는 시대인의 저항과, 권력의 욕망에 굴복하거나 침묵하는 이들을 대비해 이를 섬세한 무대언어로 형상화한다. 이번 희곡집의 작품들은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삼아 극적 장면으로 재구성해 되살려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이런 스케일의 작업을 시도했다는 점을 알기에, 이 연극의 무대화가 성공하리라 기대하게 된다.
극작가 이정수는 2020년 제28회 전태일문학상 소설 부문에서 비닐 공장 생산직 노동자의 하루를 그린 작품 「어금니」가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가 활동에 하게 된다. 2021년 제13회 대전창작희곡공모에서 「하마」로 금상을 수상했고 2022년 대전문화재단 ‘차세대artistar’선정되기도 했다. 작품으로는 「어금니」, 「알고리즘」, 「제비다방」, 「김수영, 외줄 위에서」, 「노고지리는 무엇을 노래해야 하는가」, 「노고단은 보라색이다」, 「blue lemonade」, 「반원 안에는 동그라미가 있다」, 「여덟 살 우주」, 「이상, 기형, 13」, 「제비다방」, 「운수 없는 날」 등이 있으며, 2023년 제23회 대전연극제 〈조선으로 베다〉의 드라마트루그, 극단 라일락의 〈아Q정전:광인일기〉 각색ㆍ재창작, 〈모두 행복해졌으면 좋겠어〉(남명옥 작, 연출)각색, 극단 나무시어터 사회적협동조합의 〈알래스카 교도소〉(정미진 원작/남명옥 연출)각색, 마당극〈운산〉 창작 등 다수의 작품을 창작하고 공연에 참여하는 등, 대전을 기반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젊은 작가면서 그의 희곡은 이미 서울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작품이 공연되고 있다. 이번 희곡집 『사람의 시간』은 이전 단편희곡선인 『파운데이션』(평민사, 2023) 이후 두 번째 희곡집이라 할 수 있는데, 이번 희곡집에 실린 ‘하마’, ‘낙조’는 이미 무대화된 작품이고, ‘마유는’은 지역스토리 브랜딩 작품으로 앞으로 무대화를 기대하고 있다.
먼저 최근에 공연된 희곡 「낙조」(극단 통, 2026.3.10.~3.15. 경험과상상)는 이승만 정권 의 2인자였던 이기붕 일가의 파멸을 다룬 작품인데, 인상적인 것은 격동의 한국 현대사의 장면을 세익스피어의 비극과도 같이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도입부의 화진포 바다의 낙조를 그려내는 지문, “붉은 해가 완전히 수평선 아래로 사라지고, 하늘은 짙은 남색으로 변하기 시작한다.”라는 전조가 어떻게 무대화돼 연출될 것인가에 대한 상상부터 갖게 했다. 화진포 별장에서 바라보는 붉은 노을을 두고 “저 붉은 기운이 우리의 미래를 비추는 것 같지 않아요?”라고 묻는 프롤로그에서 이미 작가는 이 가족의 운명을 암시한다. ‘낙조’는 아름답지만 저무는 것이며 그 빛은 찬란할수록 어둠이 깊다는 메시지가 굵게 박힌다. 이러한 작가 특유의 전경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지문은 여타 희곡의 서사적 묘사의 아쉬움과는 다르게 무대 배경을 생생하게 묘사해 공간, 시대, 분위기를 구축하는 차별성이 두드러져 보인다. 서대문 자택 벽에 걸린 이승만의 사진이 ‘찬란하게 빛나고’ 이기붕의 호(晩松)가 담긴 액자는 ‘빛나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무대 지문도 연속되는데, 작가의 이 단순한 시각적 대조는 작품 전편에 걸쳐 반복되는 양상이다.
그것은 권력의 중심에 붙어 있을수록, 자신은 점점 빛을 잃어간다는 메시지가 이 두 액자의 포커스에 담겨 있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사실 이기붕 일가의 몰락을 다루는 정치 비극을 무대화한다는 것은 역사적 사건 기반을 중심으로 사실 전달의 기능과 창작적 재구성 사이에서 쉽지 않은 선택이 분명하다. 작가는 사사오입 개헌(1954)과 3·15 부정선거(1960)를 극적 뼈대로 삼고, 그 사이에서 이기붕, 박마리아, 이강석 그리고 운전기사 한길수라는 네 인물을 관계를 촘촘히 얽혀 내고 있다. 극중 관객은 역사적 지식 없이도 극적 장면만으로도 당대의 역사 인식을 갖게 한다. 부결된 개헌안을 사사오입(四捨五入)의 수학적 궤변으로 뒤집는 과정을 통해 권력의 실체를 고발하면서,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으로 135명이라는 극중 최인규의 말에 이기붕의 권력의 욕망이 발현하는데, 여기서 작가는 ‘이강석’이라는 새로운 인물로 재구성하고 극중 다른 중심축으로 삼는다. “대단하십니다. 0.333은 버려야 한다. 그 궤변으로 이 나라 민주주의의 양심을 깔끔하게 ‘버려’주셨습니다.”라는 대사 한 토막은 ‘역사 앞에 양심’이라는 스스로 자신의 결핍을 인지하는 찰나에서 단순한 권력 혐오의 서사와는 다른 차원을 만들어낸다. 권력을 욕망하는 인간의 비루함과 그에 대한 자기혐오가 공존시킴으로 특별한 비극적 인물을 재창조해내고 있다. 아버지의 덕으로 부정하게 서울대와 육사에 들어간 이강석은 총검술 동작을 하며 ‘찔러야 할 것’에 대한 대상, 즉 나와 아버지라는 주체 혐오의 부정인식을 독백하면서, ‘버려짐’에 대한 인식을 극적 형상화하고 있으면서 이를 비극적으로 작품에 압축해낸다. 한편, 다소 희박해 보이는 이기붕 일가의 운전기사 한길수는 극 전체에서 민중의 시선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불의를 목격하면서도 생존을 위해 침묵해야 하는 그의 자리는, 역사의 방관자가 아니라 목격자의 자리인데, ‘한길수’를 통한 ‘바라봄’의 시선은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발현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수 있다.
「하마(河魔)」는 작가가 2021년 대전창작희곡공모에서 금상을 받은 작품으로 이후, 2024년 지역대표예술단체 지원사업에 선정된 대전 극단 앙상블의 작품 〈하마(河魔)〉(2024.12.12.~12.15, 한남대학교 서의필홀)로 무대화됐다. 〈하마〉의 배경인 1986년 말 ‘평화의 댐’ 모금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무대화된 작품이 바로 24년 12월 3일 비상계엄과 이후 계속 이어진 탄핵 거리집회까지 정말 소용돌이치는 숨 막히는 정국에서 올렸던지라 이 작품에 대한 인상이 강렬하다. 무대는 가상의 세원중학교 교무실 안을 중심으로 무대 후면 태극기가 액자로 걸려있고, 블록벽면을 비대칭적으로 뜯어내 장면 별로 시대별 뉴스 영상이나 모금액 현황판 등이 영사됐다. 무대 삼 면을 교사의 책상 의자, 철제 캐비닛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무대 하수 쪽에 경사된 창틀과 이 작품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국어교사 박단일의 책상을 놓았었다. 평면적 무대를 입체화하는데 꽤 공들였던 작품이었는데, 그보다도 작품 희곡이 소재로 다루고 있는 1986년의 ‘평화의 댐’ 모금은 그 시대를 겪었던 세대들에게 다양한 기억을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정서적 공감대가 컸던 작품이다. 당시 전두환 독재정권은 북한의 금강산댐 공사를 수공(水攻) 작전이라고 칭하고 국가안보상 대비책으로 국민의 성금을 모아 댐을 건립하는데, 당시 댐 건설 과정에서 정부가 북한의 위협을 과장하여 국민에게 불안감을 조성하는 등 댐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는 정황이 밝혀지면서 이후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 사건이었다. 작가의 문제의식은 극단적 반공주의가 지금까지도 이어지면서 여전히 반공국가의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시절의 광기가 잔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있다. 그만큼 세 편 중 작품 중 가장 날 선 작품이 ‘하마(河魔)’라고 할만하다. 이전 리뷰 글에도 썼던 바, “아마도 이 세상 모든 연극 가운데 ‘빨갱이’라는 단어가 제일 많이 쏟아져 나온 작품이 이 작품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빨갱이’라는 단어는 극에서 쉴 새 없이 거칠게 쏟아진다. 당대의 성금모금 과정에서의 부패한 사회 구석구석과 부풀려지고 왜곡된 가짜뉴스를 보도하기 바빴던 당시 언론매체의 실상은 바로 사십여 년이 지난 지금의 현실과 바로 데칼코마니처럼 겹쳐질 수밖에 없다.
극중 교무부장과 박단일 캐릭터는 이 작품의 대비되는 인물 갈등의 축으로 그려지는데 교무부장의 “딱 생긴 것부터가 빨갱이 같아!”라고 순환 고문 같은 대화로 선생님들을 몰아붙이는 그의 언어는 터무니 없이 폭력적이면서 전체주의적 언어가 어떻게 피해자를 어느 방향에서도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에 가두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에 반해 박단일 선생은 이 작품의 중심인물로, 이 억압적 환경 속에서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갈등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검고 굵은 매를 들고 수업에 들어가는 권위주의적 외형의 박단일의 모습은 그 자체로 모순의 형상화라 할 수 있다. 희곡은 학교라는 공간을 배경에 두고 있지만, 이는 부조리한 권력과 군중심리 등과 같은 한 개인의 사회의식을 중심에 놓고 본다면 그 시의성이 만만치 않다. 특히 극중 ‘충정봉’의 쓰임이 달라졌다는 것은 이 작품에서 주목해 바라봐야할 지점이다. 권력에 맞서는 용기, ‘검은 매’를 누구에게 들어야 하는지, 오늘의 진실을 두려워하지 않고 민주시민이 직면한 도전과 책임을 성찰해봐야 할 듯하다. 우리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무대를 보면서 그것이 오늘을 비추는 거울로서 우리 사회가 지켜나가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유는 이레간 포르르 포르르」는 1932년 일제강점기 대전의 군시제사공장의 조선인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쟁의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롭다. 일제의 노동착취에 맞서 7일간의 단식투쟁으로 승리를 쟁취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은 그간 잘 알지 못했던 지역사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이이야기를 단순한 여성노동자의 노동쟁의 승리의 기록으로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의 시선과 1932년의 기억을 교차시키는 구조를 선택하고 있다. 프롤로그에서 109세 노파 박복례가 요양병원 창가에 앉아 방송작가의 인터뷰에 응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희곡 도입부에 “어제 먹은 점심밥은 기억 안 나도, 그날 새벽 공기 냄새는 코끝에 쨍하니 박혀 있어. 비릿한 번데기 냄새도...”라는 복례 할머니의 목소리는 이 연극
이 아카이브 속 기사 사건 기술에 그치는 게 아니라, ‘몸에 새겨진 기억’으로 ‘화인(火印)’으로 뭉개지고 굽어진 손가락의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시각화된다는 지문은 작가의 역사 기억의 메시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제목 「마유는 이레간 포르르 포르르」만해도 많은 걸 내포하고 있다. ‘마유まゆ(繭)’는 ‘누에가 만든 고치’를 뜻하고, ‘이레’라는 숫자 ‘7’은 하늘의 근원적인 수의 상징으로 보면서 성과 속, 하늘과 땅, 영혼과 육체가 통합된 수로의 탈바꿈에서 강한 여성성 상징으로 봐진다. 또한 얇은 종이나 털 따위에 불이 붙어 가볍게 타오르는, 그리고 작고 가볍게 떠는 모양을 뜻하는 부사어 ‘포르르 포르르’가 결합되어 이 여성노동쟁의의 서사를 단적으로 지칭한다는 점에서 희곡에 대한 호기심이 클 수밖에 없다.
연극은 뜨거운 물에 삶아야 실이 풀리는 누에고치처럼, 여공들을 마치 용광로에서 단련된 철과 같은 존재로 ‘쓸모’의 주체적 감각을 드러내면서도 극중 강명주의 대사를 통해서는, “만약 우리가 이 뜨거움을 견디지 않고, 실을 내어주지도 않고... 그저 이 딱딱한 껍질을 스스로 깨고 나온다면. 그래서 실을 잣는 기계가 아니라, 날개를 가진 나방이 된다면. 세상은... 우리를 뭐라고 부를까?”라는 독백에서 새로운 주체 서사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희곡을 읽는 독자는 노동자의 저항은 어떤한 감정의 분노에 그치는 게 아니라 ‘포르르 포르르’라는 작은 날갯짓의 상상이야말로 이 작품에서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 추측하게 한다. 또한 여공들의 연대 과정을 형상화하면서, 쟁의 과정에서의 일련의 극적 전개는 사건을 통한 희비극의 교차와 유형화된 악인을 구성해 이야기를 능숙하게 끌어간다. 노동현장에 대한 오늘의 시대적 감각을 결합시키면서 여공들의 다양한 캐릭터도 큰 무리 없이 입체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은 익숙하면서 각 캐릭터의 균형감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작가는 이 연극을 통해 그들의 쟁의가 단순한 집단행동을 넘어 개인들의 선택과 의지로 결집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주제화하고 있는데, 이것이 오늘의 노동극으로서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역사를 끊임없이 취재하는 젊은 시선, 오늘의 희곡에 드러나는 이정수 작가의 가장 두드러진 강점은 소재 선택의 탁월함이라 할 수 있다. 사사오입 개헌과 이기붕 일가, 금강산댐과 평화의 댐 성금 사기극, 군시제사 여공의 노동쟁의 등과 같은 이러한 소재들은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지만 무대 위에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은 장면들이다. 특히 군시제사공장 여공의 파업은 대전 지역의 역사적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지역 무대에서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 덧붙여 작가의 성실한 취재도 눈에 띄는데, 실제 역사 기록에 충실하면서도 극적 허구의 공간을 열어두는 균형 감각은 확실히 남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작품 서사의 정제되지 않는 거침에 대한 앞선 지적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선택한 작가적 태도를 읽었을 때, 과도하게 그려지는 위계적 폭력과 이에 바로 맞서지 못하는 패배감, 회의감이 여과 없이 보여지는 것은 관객에게 안전하게 소화된 역사 재현이 아니라, 그 시대의 공기를 그대로 감각시키고자 하는 의지로 바라봐야 될 것 같다. 이정수 작가의 이번 희곡집은 젊은 작가다운 스펙터클한 역사를 바라보는 예리한 시선과 극적 무대를 그려내는 참신함을 확인할 수 있다. 덧붙여 우리는 그 연극 속에서 ‘빛을 잃어가는 것’의 부정성이 아니라 ‘빛을 되찾아가는 것’, ‘빛을 발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끓는 물에 손을 집어넣는 열여섯 살 소녀의 표정, 극 중에 진정 빛나야 하는 그 숨겨진 살아 숨 쉬는 그 표정들을 찾아내는 것, 나는 그것이야말로 이 연극과 소통하는 법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희곡집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거나 잊고 지낸 역사의 장면을 오늘의 무대 위로 다시 불러내, 지금 여기에서 무엇이 빛을 발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그 물음에 귀 기울이며 이 희곡을 나와 마주한 이에게 건네 보고 싶다. (*) - 조훈성 (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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