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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희생하는 고통의 저항’에서 ‘새로운 유형의 자발적이고 즐거운 정치 참여’를 주체적으로 창조했고, ‘품격과 흥이 넘치는 동행’이야말로 참여자들이 지치지 않고 독재와 싸움을 이어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우리는 내란세력의 끈질긴 저항을 진압하면서 새로운 민주주의 교과서를 써나가는 중이다.
--- p.16 왕실과 최고위 귀족층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이 은밀한 오락은 18세기에 이르러 중대한 변곡점을 맞이했다. 베르사유 궁중의 담장 안에서 이루어지던 당구가 파리의 수많은 카페로 확산하면서, 사교의 성격 자체가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과거 궁중의 당구가 철저한 감시와 복종을 확인하는 정치적 무대였다면, 카페의 당구대는 신분과 서열을 떠나 누구나 자유롭게 어우러지고 소통하는 수평적 사교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 p.55 혁명의 3대 이념인 자유, 평등, 우애(형제애)에서 혁명이 과격하게 변질됨에 따라 형제애를 강요하는 모순이 발생했다. 혁명 정부에 반대하거나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은 어김없이 ‘반혁명 분자’로 낙인찍혔고, 이는 ‘형제가 아니므로 죽여야 한다’라는 광기의 논리로 이어졌다. --- p.123 문득 2024년 12월 여의도 집회에 나부끼던 깃발 하나가 떠오른다. “제1교시 수능 끝나면 놀 수 있을 줄 알았는데 / 수능 끝난 제3영역(탄핵형)”, 이 기발한 문구는 10여 년 전 광화문 광장을 수 놓았던 수많은 깃발, 그 ‘비정치적 구호의 정치화’ 현상을 다시금 소환한다. --- p.215 17세기 프랑스의 성군 앙리 4세는 “일요일마다 모든 국민의 냄비에 닭 한 마리를!”이라고 외치며 국력을 키웠다. 그러나 21세기의 탄핵당한 대통령은 법정에서 ‘못 사준 통닭’ 타령하며 자신의 내란죄를 변명했다. 똑같은 ‘닭’을 입에 올렸지만, 한쪽은 위대한 군주의 약속이었고 다른 한쪽은 국가 번영보다는 자신과 처가의 이익부터 챙기다가 몰락한 권력자의 비루한 식탐으로 기억될 뿐이다. --- p.248 시민들이 생업을 뒤로하고 거리로 나와 이들을 ‘괴롭혀야’만 정의가 작동하는 현실은 분명 서글픈 일이다. 그러나 개인의 복을 비는 차원을 넘어, 눈앞의 부조리에 맞서 공동체의 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이 행위야말로 로베스피에르가 미처 완성하지 못한 ‘진정한 시민 종교’의 실현일지도 모른다. (중략) ‘빛의 혁명’은 어둠 속에 숨어 국정을 농단하던 주술사들을 대명천지로 끌어내어 발가벗겼다. 그러나 아직도 그들이 저지른 잘못을 낱낱이 알아내지 못했다. 그것을 밝히는 일은 아주 어렵겠지만, 빛의 혁명이 가져올 미래를 상상만 해도 더없이 유쾌하고 통쾌할 뿐이다.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바보나 술주정꾼이 공동체를 망치는 권력을 휘두른다고 하더라도, 다수의 의지로 그 잘못을 막아내는 제도, 그것이 민주주의라는 사실. --- p.294 이토록 단기간에 많은 피가 쏟아지자 당국은 결국 단두대를 옮겨야만 했다. 기존 혁명 광장이 내뿜는 끔찍한 피비린내 때문이었다. 땅이 그 많은 피를 흡수하지 못하자 당국은 기계를 바스티유 광장으로 옮겼으나 주민들의 격렬한 항의에 부딪혀 단 사흘 만에 다시 이동시켰다. 결국 단두대는 도심 외곽 바리에르 뒤 트론Barriere du Trone(오늘날 나시옹 광장)으로 치워졌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단두대는 쉴 틈 없이 작동했다. 구경꾼조차 이제는 환호하지 않았다. 군중은 너무 많은 죽음을 목격한 나머지 공포를 넘어 무관심, 아니 권태를 느꼈다. 죽음은 이제 충격적인 ‘정치적 이벤트’ 가 아니라 매일 오후 4시에 배달되는 일간지처럼 일상이 되었다. --- p.301~302 혁명은 피를 나눈 형제들조차 이념의 칼날 위에서 춤추게 했다. 미라보 가문의 형제는 서로에게 총구를 겨눈 대표적인 예였다. 미라보 백작(오노레)은 혁명의 불꽃을 피운 위대한 웅변가였지만, 동생인 술꾼 미라보 자작, ‘술통 미라보’는 형의 혁명을 조롱하고 왕당파를 이끌었다. 그들이 철저히 다른 길을 걸었다면, 로베스피에르 형제는 죽음까지 함께한 동지였다. 동생 오귀스탱은 형 막시밀리엥의 그림자였다. 그는 의회에서 형의 체포 명령이 가결되자 “나도 형과 함께 유죄다. 형의 미덕을 공유했으니, 형의 운명도 공유하겠다”라며 체포를 자청했다. 그날 밤, 진압군을 피해 시청 창문으로 뛰어내려 다리가 부러지는 처참한 최후를 맞으면서도 그는 끝까지 형의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 단두대에 섰다. --- p.303 쿠통은 공화국을 대표하는 자신들이 ‘국민공회’의 이름으로 소집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로베스피에르는 고개를 저으며 정정했다. “아니, ‘인민의 이름으로’ 소집해야 합니다.” 절박한 상황에서 나온 이 대답은 로베스피에르라는 인간의 본질을 곧이곧대로 보여준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국민공회’라 는 헌법기관의 권위를 함부로 사칭하거나 부정하려 하지 않았다. 국민공회에 맞서기 위해서는, 국민공회에 권력을 부여한 유일한 주권자인 ‘인민’의 이름만이 정당성을 가진다고 믿은 것이다. --- p.335 프랑스 혁명은 구체제를 너무나 신속하고 과격하게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완전히 새로운 체제를 앉혔다. 당시 혁명을 이끌었던 부르주아지는 법률적 지식과 행정적 실무 능력을 갖춘 엘리트였으나, 이 낯설고 새로운 정치 체제를 책임지고 통제해본 ‘정치적 경험’은 전혀 없었다. 그들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길을 잃었고, 국경 밖에서는 전 유럽의 군주들이 ‘반혁명 동맹’을 맺어 그들을 포위했다. 내부의 미숙함과 외부의 적대적 환경, 이 이중고가 프랑스를 공포정치라는 극단으로 몰고 간 근본 원인이었다. --- p.38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