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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1장 상당上堂 - 상당 설법 2장 시중示衆 - 대중에게 법을 설하다 3장 감변勘辨 - 상대를 검증하다 4장 행록行錄 - 행적을 기록하다 5장 탑기搭記 - 탑의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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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에 우연히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란 말을 듣게 되었는데, 그 해석이 ‘곳곳마다 주인이 되어서, 그 자리에서 진실하게 대하라’였다. 그 순간 드는 생각이 ‘부처님은 무아를 깨달았는데, 그 제자가 없던 자아도 만들어서 주인이 되라고 한다면 그게 말이 되나?’ 였다. 그래서 그 말이 등장하는 『임제록』을 직접 읽고,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우여곡절 끝에 수많은 오류를 잡아가며 19번이나 번역과 퇴고를 거치고 나서야 본뜻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것은 “12입처를 좇아가면 주관을 만들고, 세워진 입처에선 모두가 진짜”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자아와 세상은 없고, 무아와 법계로 드러난다는 게 임제의 결론이었다. ---「머리말」중에서 임제는 승려의 그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려고 할을 했다. 선사들은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경우가 많은데, 말로 대답하는 순간 언어의 함정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언어는 상대되는 반대개념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극단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선사들은 그 폐단을 잘 알기에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할은 정말로 없는가?」중에서 사람들은 몸속 어딘가에 위치도 없는 진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간다. 그래서 ‘자아’나 ‘영혼’ 등의 실체가 육신에 깃들어 있다고 여기지만, 그 자아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두루뭉술 대답할 뿐 구체적이지 않다. 눈으로 볼 때는 눈에 있는 듯하고, 귀로 들을 때는 귀에 있는 듯하다. 이렇게 자아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위치를 특정할 수 없다. 그래서 임제가 ‘위치가 없는 참사람[無位眞人]’이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증명된 적도 없는 자」중에서 대상에 잘 집중하면 오롯이 대상과 나만 남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런 경험은 태어나서 한 번도 없었기에 경험 정보를 꺼내 처에서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의식은 지금까지의 통제와 조작을 포기하기에 이르는데, 이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어마어마하게 황홀한 모습이 발현된다. 이 황홀함은 사망 직전에도 주마등처럼 스치면서 일어나는데, 이 황홀함을 경험한 수행자는 평생 그 기억을 잊지 못하고 집착하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경험이 수행자로 살아가는 계기도 되지만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고 하셨고, 조사들은 이런 황홀경은 모두 망상이니 제아무리 거룩한 부처님이 나타날지라도 버리라고 한 것이다. 수행자라면 이것이 망상이 빚어낸 환상임을 알아야만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임제가 살불살조를 말한 것이다. ---「마음의 경지」중에서 임제는 진정으로 도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세간의 허물[世間過]’을 구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무슨 뜻일까? 세간은 존재하는 세상이고, 법계는 조작된 법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따라서 세간의 허물은 ‘존재로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오류’를 지적한 말이다. 그러니 참되고 바른 견해는 12처에서 구현된 ‘법으로 된 세계[法界]’를 말하는 것이다. 세계의 허물을 구한다면 열반의 세상이 따로 펼쳐져 있을 것이고, 그 세상에 가려는 노력을 수행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올바른 견해를 갖는다면 법으로 된 세상임을 깨달아 그 자리에서 바로 번뇌가 사라진 열반이 드러날 것이다. ---「세상에서 잘못을 찾지 말라!」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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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동안 읽혀 온 ‘선어록의 왕’ 『임제록』,
‘절집의 숨은 고수’ 고광 스님이 임제의 말을 다시 깨우다 동아시아 선종의 황금시대를 연 임제의 가르침 『임제록』은 중국 당나라의 선승 임제의현의 법어와 언행을 제자 삼성혜연이 기록한 대표적인 선어록이다. 달마에서 혜능으로, 다시 마조와 백장, 황벽으로 이어진 조사선의 흐름을 계승한 임제는 이후 중국 선종의 중심 법맥으로 성장한 임제종의 문을 열었다. 그의 선풍은 중국을 넘어 한국과 일본의 선불교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상대의 분별을 단박에 끊어내는 ‘할喝’을 비롯한 거침없는 가르침은 오늘날까지 선의 전통 속에 살아 있다. 그 임제의 말과 행적을 담은 『임제록』은 흔히 ‘선어록의 백미’, ‘선어록의 왕’이라 불릴 만큼 선종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성철 스님은 『임제록』을 ‘세계 4대 귀서貴書’ 가운데 하나로 꼽기도 했다.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번역과 해설이 이어져 온 까닭도 여기에 있다. ‘무아’를 깨우친 붓다가 ‘주인’이 되라고 했다니? 그 하나의 의문에서 스무 차례의 번역이 시작됐다! 『고광 스님의 불교 도장 깨기』를 통해 익숙한 불교의 말과 개념을 원점에서 다시 물었던 고광 스님은, 그 두 번째 작업으로 『임제록』을 택했다. 출발점은 『임제록』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구절 가운데 하나인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었다. 흔히 ‘곳곳마다 주인이 되어, 그 자리에서 진실하게 대하라’는 뜻으로 풀이되는 말이다. 그러나 고광 스님은 여기에서 의문을 품었다. ‘무아’를 깨우친 붓다의 가르침과 ‘주인이 되라’는 해석은 과연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 질문에서 시작해 니까야와 『아함경』을 함께 살피고 『임제록』의 용어와 문맥을 거듭 짚으며, 스무 차례에 걸쳐 번역과 퇴고를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고광 스님은 익숙하게 읽혀 온 임제의 말에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핵심은 ‘처處’를 어떻게 읽느냐에 있다. 고광 스님은 ‘수처작주’와 ‘입처개진’의 ‘처’를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주관과 객관이 성립하는 12처十二處의 작용으로 읽는다. ‘처를 따라 주관이 만들어지고, 그렇게 성립한 주관에 의해 대상 또한 객관적인 실재처럼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읽으면 ‘수처작주 입처개진’은 어디에서나 주체적으로 살아가라는 삶의 격언과는 전혀 다른 질문을 품게 된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세계는 과연 있는 그대로의 세계인가’, ‘내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하는 물음에 닿게 된다. 다시 말해, 고광 스님은 ‘처’의 작용을 살피는 데서 우리가 실재라고 믿어 온 ‘나’와 ‘세상’을 다시 바라볼 실마리를 찾은 것이다. 하나의 ‘처處’에서 시작해 『임제록』 전체로, 12처를 따라 임제의 말들이 새롭게 연결된다 12처는 ‘수처작주 입처개진’ 한 구절을 새롭게 풀이하기 위한 열쇠에 머물지 않는다. 고광 스님은 12처를 중요한 해석의 축으로 삼아 ‘나’와 ‘세상’이라는 인식이 어떻게 성립되고, 그로부터 번뇌와 집착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살핀다. 그리고 그 관점에서 『임제록』의 또 다른 문장들을 서로 연결해 읽으며, 다른 각도에서 읽을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진정견해眞正見解’는 세상을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법으로 이루어진 세계[法界]로 바라보는 견해로, ‘무위진인無位眞人’은 생각으로 만들어 낸 ‘나’를 참된 자기로 붙잡는 데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 보고 느끼며 현존하는 자리를 직접 알아보게 하는 말로 읽는다. 임제의 가장 파격적인 말로 알려진 ‘살불살조殺佛殺祖’ 역시 부처와 조사를 부정하라는 극단적인 선언이 아니라, 수행 중 마주하는 특별한 체험이나 깨달음마저 실체화해 붙잡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읽는다. 임제의 파격, 그 끝에서 다시 만난 붓다 『고광 스님의 임제록 도장 깨기』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말의 어원과 쓰임, 그리고 그 말이 놓인 불교적 맥락을 거듭 확인한다는 점이다. 고광 스님은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번역과 해석도 그대로 따르기보다, 초기불교 경전과 한역 경전을 오가며 그 말이 어떤 맥락에서 쓰였는지를 추적한다. 그 과정에서 고광 스님이 발견한 것은 임제의 파격적인 언어와 붓다의 가르침 사이의 연결이다. 겉으로는 상식을 뒤집고 때로는 불교마저 부정하는 듯 보이는 임제의 말이, 고광 스님의 독법에서는 붓다가 무아와 연기를 설명하고, 집착에서 벗어나라고 한 가르침과 맞닿는다. 스무 번째 번역에 이르러 고광 스님이 “임제의 소름 돋도록 놀라운 안목”에 경의를 느꼈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존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수행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깨달음이란 과연 특별한 체험인가’. 그 질문 끝에서 마주하는 것은 어떤 생각에도, 불교에도, 나아가 깨달음에도 붙잡히지 말라는 임제의 날카로운 가르침이다. 묻고 답하고, 때로는 서로의 생각을 거침없이 뒤흔드는 선지식들의 활발발한 문답을 따라가다 보면 천 년 전의 말은 지금 여기의 질문이 된다. 나는 지금 무엇을 진실이라 믿고 있는가. 무엇에 붙들려 있는가. 『임제록』은 그 물음 속에서 다시 살아 움직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