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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와 이웃 사이에서, 산밭과 마을 안에서
자차분한 세계와 나눈 조곤조곤한 이야기 시집을 펴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마흔 해를 아내와 더없는 짝으로 살아온 이의 정다운 일상이, 곁에 시가 있어 견딜 수 있었던 쓸쓸하고 고달픈 나날의 기억들이, 다정한 이웃들 ‘집집마다 얽히고설킨 사연들이’, 평범한 이들이 삶 속에서 깨친 ‘이치’가 담긴 생생한 잠언들이, 갑작스레 다가선 죽음을 당면한 이가 되짚는 깊은 상처와 그리움이, 어느새 슬며시 곁에 자리 잡고서 말을 건넨다. 무슨 일인지, 올해는 때맞춰 들어오지 않는 오랜 단골의 감자값을 걱정스레 기다리고, 너구리 메뚜기 오소리 고라니 멧비둘기 밥상이 되고 있는 밭에서 뭐라도 좀 거둬 보려고 전전긍긍 아내와 머리를 맞대고, 수해로 떠내려간 논밭과 다리 낮은 언덕을 앞에 두고 거기 살던 개구리와 어린 고라니 여치와 메뚜기의 생사를 걱정하고, 마을 들머리 찻길 넓힌다고 베어져 나간 몇 그루 나무들의 빈 자리 곳곳이 볼 때마다 애틋하던 시인은 마침내, 갑자기 찾아든 ‘낯선 손님’을 맞아 지나온 생의 곳곳에 맑은 눈물처럼 맺힌 끝모를 슬픔을 마주한다. 오랜 시간 가려져 있던 깊은 슬픔의 은거지가, 어찌할 수 없는 서정홍 시의 원점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시집 성큼 눈앞으로 다가선 죽음 앞에서 아래로 아래로 내려앉은 그가 닿은 곳은 하염없는 ‘슬픔’이었다. 스스로 들여다본 적도, 누구에게 내어 보인 적도 없이 해묵은, 오래된 은거지였다. 슬픔이 또 다른 슬픔 위로 켜켜이 쌓일 때마다 그리움도 또 다른 그리움 위로 차곡차곡 쌓여 갔던 것일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슬픔의 땅켜와 그리움의 땅켜가 땅을 울리며 서로를 부를 때, 어쩌면 그 사이로 눈물처럼 맑게 반짝이는 착한 시들이 어쩌지 못하고 터져나왔는지도 모른다. 그는 차마 꺼내어 다독이지 못한 슬픔과 그리움 대신 터져나온 시들을 통해 그 자신이 위로받았고, 또 함께 걸으며 길을 찾는 이들을 위로했다. 그러다 “갑자기 찾아온 ‘낯선 손님’을 맞”아 “태어나 처음으로 하던 일을 멈추고 누워만 있”던 그는 마침내 그 깜깜하고 아득한 슬픔과 그리움의 골을 마주한다. “한평생 다리 절뚝거리며 그러나 그 불편한 다리를 단 한 번도 원망하지 않고 사신 아버지” “어느 추운 겨울날 야간 중학교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밤 연탄불마저 꺼진 싸늘한 방에, 그 싸늘한 흙벽에 기대어 홀로 돌아가신 어머니” 기꺼이 그 모든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걸어 주던 “눈이 소 눈처럼 맑고 깊은” 벗을 강물에 떠나보내고 숨죽여야 했던 스무 살 시절. 이후로도 “너무도 고달프고 쓸쓸하여 혼자 느티나무에 기대어 운 날이 많았던 지난 날”의 기억을 “저녁 강물처럼 세월이 흘러” 어느새 예순 중반을 지나고서야 비로소 꺼내 놓는다. 맥풀 없이 꺼져 가던 육신으로, 더듬을수록 깊고 아득한 골을 어루만지며 오래된 슬픔을 하나하나 꺼내어 위로하고 다독이는 사이, 시인 스스로도 여태 알아채지 못했던 서정홍 시의 ‘원점’이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예순아홉, 오래된 슬픔을 건너 여기까지 온 이가 건네는 기대어 슬픔을 가누던 느티나무와 같은 시집 오래 묻어 둔 아득한 슬픔으로 들어선 길은, 다시 돌아 원망과 절망을 헤쳐 나오는 길이기도 했다. 그래서 기어이 마주하고, 다독이고, 다시 돌아나온 그의 오늘은 “그저 살아 있어 좋은” 때였다. 누구보다 그윽한 시선으로 아무 일 없는 듯 가만한 풍경 속에 감도는 말긋말긋한 생기와 오보록한 재미 들을 응시해 온 한편으로, 서정홍의 시는 잇고 품는 ‘시의 마음’을 간직하고, 울퉁불퉁한 마음 밭을 예순 해 넘도록 날 선 데 구긴 데 없이 다독이며, 정성스레 골라 온 자취였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슬픔은 어쩌지 못할 탄식과 서러움이 아니라 “어제와 오늘을 잇는“그리움이자 “내일을 여는” 희망으로 피어났다. “삶이 너무 고달프고 쓸쓸”할 때조차 그는 홀로 주저앉아 울지 않았다. 가누기 벅찬 슬픔이 밀려들 때면 느티나무를 찾았다. 그가 존재를 덮치듯 밀려드는 깊은 슬픔에 무너지지 않은 것은, 어떤 순간에도 ‘기대”는 법을 놓지 않고 ‘함께’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매서운 세월을 되짚어 헤아리는 때조차, 비뚜름한 구석도, 모난 데도 없이 반듯하고 다정한 시들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심성을 닮은 것이었다. 그저 “‘시인’이 되려고 쓴”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람’이 되려고 쓴 시”에는 그래서 숨길 수 없이 온화하고 어진 기품이 절로 배어난다. 죽음이 손에 잡힐 듯 가깝던 고통 속에서도 이제 마음을 다해 아픈 사람을 위로할 수 있게 된 처지에 안도하고, 비록 고달팠으나 “가난을 물려주신 아버지 덕에 / 흥청망청 살지 않고 /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려 / 땀 흘려 일하고 꾸밈없이 살았다는 것”에 감사하고, “모든 시간이 /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왔으니” “헛된 시간은 없었”노라고,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서도 / 약해지거나 기죽지” 않고 살아 낸 ‘오늘’이 있어, “함부로 흔들”리지 않을 단단한 ‘내일’이 열릴 거라고, 그는 다짐하듯 읊는다. 지금껏 “어질고 고운 사람”들 곁에서 기쁨과 희망을 발견해 온 시인이, “버거운 슬픔 맞이한 사람들 보듬어 주”고, “어둡고 칙칙한 세상 밝히는 사람들 / 지키”고 싶어 철마다 망울을 터뜨리는 꽃처럼 환하게 피워 낸 시 86편을 천천히 읽어 나가다 보면 그의 오랜 슬픔처럼 깊고, 그리움처럼 짙은 위로를 만날 수 있다. “고달픈 삶에 지쳐 쓰러진” 이들을, “무어 하나 내세울 게 없는 보잘것없는” 이들을, “주눅 들지 않게 북돋아 주”고 “따뜻하게 보듬”는 느티나무와 같은 시들을, 오늘도 기대어 마음 가눌 곳을 간절히 찾는 이들에게 모아 건넨다. 아흔네 살, 밀양 할매가 농부 시인에게 ‘건네는 말’ 상추쌈은 시집 뒤에 ‘건네는 말’을 실어 왔다. 이 산문은 시를 해설하거나, 가치를 가늠하거나, 시인의 뜻을 헤아리지는 않는다. 이번 시집의 건네는 말에는 1933년 태어나 올해 아흔네 살인 배판세(참산댁이)가 딸이 읽어 주는 시를 듣고, 딸과 나눈 이야기를 실었다. 이문재 시인이 추천사에서 ‘세상에 없을 것 같은 애틋한 부부애’라고 적은 것은 할매의 말에서 ‘그 집 마느래가 참 정답기 이야기를 하네.’로 풀어진다. 한 편 한 편 시를 들으며 스스로가 B품 인생으로 살아온 것이나, 후두락비를 맞으며 비설거지를 했던 어느 날도 되짚어 끌어 올린다. 시를 마주한 아흔넷 할매의 무심한 듯 던지는 이야기들은 ‘구만리 장천 너머 눈에 비이지도 않는 태풍이 더 안 낫나’하는 삶에 새겨진 통찰로 이어진다. 그러고는 죽음이라는 낯선 길을 더듬는 (아직 일흔도 되지 않은) 시인에게 ‘그 양반도 아픈갑네. 우야든지 하루하루 쌀 귀재비 떨어진 거만치라도 낫다 보머 어느 날은 안 괘안캤나. 너무 걱정하지 말고 몸단속 잘 해라 캐라.’ 하는 살가운 말씀을 남기신다. 할매와 딸이 나눈 이야기가 무엇보다 이 시집을 읽은 독자들이 자신의 이야기와 더 깊이 만나는 마중물이 되기를, 저마다 스스로의 이야기를 덧붙여 나가기를 바란다. [편집자의 편지] ** 아래 글은 마감을 하던 어느 날에, 편집자가 저자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여러 편지와 이야기들이 오간 가운데, 글 하나를 뽑아 여기 보도자료에 덧붙여 둡니다. * 선생님, 더위가 조금 꺾인 9월입니다. 애태우던 가뭄도 이어진 비에 해갈이 되려나 봅니다. 건강은 좀 어떠신지요. 홍보물과 보도자료를 준비하며 새 시집의 막바지 교정을 봅니다. 아, 이번 시집도 참 좋구나, 책상을 마주보고 앉은 편집자 두 사람이 이런 대화를 주고 받으며 마감을 하는 나날이라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성큼 눈앞으로 다가선 죽음 앞에서 아래로 아래로 내려앉아 닿은 그 하염없는 ‘슬픔’이 시집 곳곳에서 반짝입니다. 시 하나 하나, 선뜻 넘기지 못하고, 한참 마음을 추스릅니다. 착한 사람 서정홍과, 농부 시인 서정홍의 시가 빛났던 것은 이 끝모를 슬픔 때문이겠구나, 깨닫습니다. 그 혹독한 시간의 켜들을 헤아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마음 아프고 애틋해지는 한편으로, 선생님 시를 아끼는 독자로서는 말할 수 없이 반갑고 기쁜 발견에 이른 기분입니다. 존재의 원석에 다채로운 빛과 기품을 더해 온 그 깊은 슬픔을 꺼내어 보여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비할 데 없는 위로와 힘이 되는 시들이었어요. 다음 시집에는 또 어떤 면모가 담길까, 벌써 궁금해져서 마감하다 말고 불쑥 몇 자 적습니다. 부디 오래 건강하시기를, 미처 꺼내 보이시지 않은 서정홍다움이 담긴 시들을 더 많이 나누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9월을 열며 더없이 여전하고, 더없이 새로운 선생님을 만날 수 있어서 기쁜 편집자 서혜영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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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을 고 김종철 선생님과 [녹색평론] 독자들께 바치고 싶다.
아니다, 아니다. 오늘도 주식 창과 인공지능(AI) 앱에 들어가는 분들께 강권하고 싶다. 세상에 없을 것 같은 애틋한 부부애, 조만간 사라지고 말 (늙은) 이웃과 마을, 저승길을 코앞에 두고 하나하나 다시 불러보는 이름들……. 눈물겹지만, 기어이 꿈을 부여잡게 하는 이 시편을, 시를 모르는 분들, 시가 왜 있어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모든 분께, 가서, 품에 안겨 드리고 싶다. 우리가 이렇게 사는 이유, 우리가 이토록 모질게 사는 가장 큰 이유가 자기 안에 있는 ‘시의 마음’, 즉 하늘과 땅의 마음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를 아끼는 분들, 시와 함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이 시집을 집어 들 이유가 없다, 전혀 없다. 나는, 이 시집이 누군가에게 시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기를 앙망한다. 양옆으로, 앞뒤로 손을 내밀며 앙망한다. - 이문재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