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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1장 들어가며 2장 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들 식민주의와 식민자들 이주 일본인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3장 경계를 넘어간 일본인들 반식민지·반제운동과 조선 민족 해방 조선 거주 일본인과 치안유지법 식민지 인식의 내면세계 4장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1899~1982) 출생과 성장, 그리고 조선으로 실천 운동에의 투신과 체포 전향과 감옥 생활 출옥 이후 5장 조코 요네타로(上甲米太郞, 1902~1987) 조선 이주와 교육 운동, 그리고 그 좌절 의식화한 삶과 귀환 이후 엇갈리는 삶, 두 가지 평가 6장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 가족의 억압과 무적자로서의 차별 조선에서 노예와 같은 삶을 살다 조선의 기억과 고통받는 민중의 삶 방황, 그리고 가족과의 결별 나를 찾는 여정 조선과의 재회, 의식의 각성 인간 선언, 죽음을 함께 하는 삶 법정, 사상투쟁의 장에서 ‘천황제’에 도전하다 여정의 끝에서 죽음을 통해 죽음을 넘다 7장 이소가야 스에지(磯谷季次, 1907~1998) 아사쿠사의 추억과 관동대지진 조선의 끝에서 ‘황군’을 거쳐 태로의 기치 아래 식민지 감옥의 유일한 일본인 비전향 장기수 출옥과 종전, 그리고 귀환 북한 인권과 민주화를 위하여 식민자 좌익으로서의 기억 투쟁 8장 마키무라 고(槇村浩, 1912~1938) 장래가 두려운 겁 없는 천재아 시대를 상징하는 두 학교를 거치며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다 희대의 이단아로서 반전 평화운동에 참여하다 고향을 떠나 조선인에게서 이름을 얻다 프롤레타리아 혁명 시인으로 첫걸음을 내딛다 간도 빨치산의 노래 조선 독립 투쟁과 국제연대를 위한 헌시 자주적, 창의적 지역 문화 운동을 위하여 옥중에서 유일한 비전향 시인으로 천황제와 투쟁하다 9장 나가며 부록 [별표1]~[별표3] 참고문헌 미주 |
Kim Keong-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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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생활한 일본인이 단일한 집단이라기보다는 그 범주와 내부 구성이 복잡하고 다양한 실체라는 사실은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이런 다양성과 복잡성 안에는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일본과 일본인으로서의 경계를 넘어 지배의 기획에 균열을 일으키고 그에 저항하면서 피지배 진영에 대한 공감과 연대를 지향한 사례들이 있었다.
---「3장」중에서 일본인 교수라는 미야케 시카노스케의 지위는 운동에 일정한 보호막을 제공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를 더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도 했다. 체포된 지 3일이 지난 5월 24일에 그는 검찰에 송치되어 6월 4일에 예심에 회부되었다. 판결이 있고 나서 일주일 남짓이 지난 1935년 1월 9일에 경성제대는 그를 면직 처분했다 …… 인도주의의 관점에서 동정과 연민의 발로였든지 혹은 이념을 함께 하는 동지로서 연대의 표출이었던지 간에, 그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분이 뚜렷하게 설정되어 있었던 식민지 사회에서 지배 영역에 속하면서도 피지배 진영에 자발적으로 가담하였다. 그리고 이 때문에 그는 이후 평생에 걸쳐 자신과 가족의 총체적인 몰락과 불행을 감수해야 했다. 식민지에서 그가 보낸 시간은 10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치러야 했던 가혹한 대가와 지배 진영의 보복은, 어둡고 암울했던 식민지 시기의 실상과 아울러 나아가서는 지구적 차원에서 파시즘과 제국주의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4장」중에서 조코 요네타로가 교사들의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조선인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핍박받는 식민지 현실의 아이들과 조선인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불행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조선과 일본의 노동자, 농민의 연대 투쟁을 통한 사회변혁이 필요했고, 이는 궁극적으로 식민지 조선의 독립으로 수렴되어야 했다. 나중에 그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사회변혁을 통하지 않으면, 조선이 독립하지 않으면, 조선인의 행복은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일본의 노동자·농민과의 연대 투쟁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5장」중에서 가네코 후미코는 지배계급의 실체를 폭로하고 그에 대한 테러 계획을 법정에서 과감하게 드러내면서 죽음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결연히 밝히고자 했다. 사실상 실체가 없는 이 재판의 전 과정을 통해 기꺼이 자신이 확신범이 되고자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온몸을 던진 이러한 투쟁을 통해 일본의 국가기구(국체)에 대한 비판자이자 도전자로 남았다. 전향에 대해서도 그녀는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지금 한번 (세상에) 나가 보고 싶다”는 점에서 “‘개심했습니다!’라고 머리를 숙이고 한번 인사만 하면 쉽게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권력의 앞에 무릎을 꿇고 살기보다는 오히려 죽어서 끝까지 자신의 뜻에 일관할 것”이라고 그녀는 선언한다. 이처럼 전향에 대해 전혀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전향이 곧 천황제 국가에 대한 굴복이자 인정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그녀는 결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6장」중에서 흥남 공장은 수많은 노동운동가의 활동이 집중된 곳이기도 했다. 이 공장을 중심으로 전개된 제1차 태평양노동조합(이하 태로)에는 일본인 바바 마사오(馬場正雄)와 모리타 데스로(守田哲郞) 등이 참가하기도 했다. 그 뒤를 이어 이소가야는 이 공장을 근거지로 하는 제2차 태로 운동에 참여했다. 조선에 와서 일본군으로 복무하다가 식민지 노동운동에 가담한 것이다. 어찌 보면 비록 직업군인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황군’에서 혁명가로의 전환은 그의 삶에서 가장 극적인 부분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7장」중에서 1930년 5월 간도에서는 조선인의 대규모 반일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일본 신문에는 “간도에서 공산 비적(匪賊)이 출몰”, “아직도 불령선인(不逞鮮人) 소동” 등의 기사가 게재되기 시작했지만, 마키무라는 이들 형제를 통해서 그 진실을 알고 있었다. 이들을 통해서 그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라는 계급적 시각으로 세계를 보는 눈을 익혔으며, 이는 곧이어 그가 쓰게 될 시의 특질이자 기조로 되었다. 이들 형제로부터 들은 조선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그의 대표작이자 불멸의 장편시로 알려진 「간도 빨치산의 노래」의 모태로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8장」중에서 나아가서 이들의 삶은 역사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식민 지배는 기본적으로 지배 민족 전체와 피지배 민족 전체 사이의 대립이지만, 그 사이는 물론이고 각각의 범주 안에는 다양하고 복잡한 균열과 갈등, 그리고 예상치 못한 연대가 존재한다. 이들 5명의 사례는 그런 다층성과 복합성의 단면을 보인다. 이들은 소수였고, 그들의 활동이 당장 식민 지배를 끝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결단과 용기, 혹은 존재 자체가 피억압 민중에게 힘이 되었고, 지배 체제에 균열을 만들었다. ---「9장」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