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나를 말하기 시작했을 때
위조된 시간 속에 네가 있었다 내 가난을 전시하지 마세요 가벼워질수록 사라지는 것들 |
|
“타인의 시선이 선의의 얼굴을 하고 다가올 때, 아이들은 어디까지 자신을 지켜 낼 수 있을까.”
《내가 나를 말하기 시작했을 때》는 청소년의 일상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안에서 마주하는 문제들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이 단편집은 노골적인 폭력보다 더 오래 마음에 남는 말들, 배려라는 이름으로 건네지는 차별, 그리고 기록과 숫자와 사진이 한 사람을 대신 설명해 버리는 순간들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네 편의 단편은 서로 다른 자리에서 시작된다. 학생부 마감을 앞두고 봉사 시간을 채워야 하는 아이, ‘다문화 우수학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자기 이름마저 낯설게 느끼는 아이, 학교의 지원을 받는다는 이유로 좋아하는 것조차 숨겨야 하는 아이, 오디션의 체중 기준 앞에서 무대보다 숫자에 더 매달리게 되는 아이가 등장한다.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이들은 모두 비슷한 압박을 견디고 있다. 이 책이 인상적인 이유는 문제를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야기로 나누지 않는 데 있다. 담임의 다정한 목소리, 학교 홍보문에 적힌 문장, 친구의 농담, 부모의 걱정은 모두 현실에서 흔히 마주치는 장면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물들이 느끼는 수치심과 분노는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상처는 언제나 뚜렷한 악의에서만 시작되지 않는다. 무심코 건넨 말과 좋은 뜻이라고 믿은 선택이 누군가에게는 자기 이름을 의심하고, 자신의 시간과 몸을 남의 기준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독자는 익숙한 일상을 따라가다가 그 평범함 속에 숨어 있던 위태로운 폭력을 마주하게 된다. 이 단편집의 중심에는 결국 ‘자기 목소리’가 있다. 주인공들은 처음부터 당당하게 맞서지 못한다. 거짓말을 하고 숨기고 모른 척하고 때로는 남이 기대하는 모습에 자신을 맞춘다. 하지만 작품은 그런 선택을 쉽게 비난하지 않는다. 대신 아이들이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차분히 보여 주며 그들이 조금씩 자기 자리를 되찾아 가는 과정을 따라간다.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용기, 필요한 것을 말하는 힘, 숨겨 온 마음을 인정하는 순간, 부당한 기준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태도. 그것은 거대한 승리라기보다 오늘 하루 자신을 완전히 잃지 않기 위해 붙잡는 작은 용기에 가깝다. 이 작품은 청소년 독자에게 내면에 있는 미처 말하지 못한 감정을 비춰 준다. 성인 독자에게는 선의와 배려의 언어가 어떻게 누군가를 좁은 자리로 밀어 넣을 수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학교생활, 가난, 다문화, 외모 기준, 입시와 비교과 활동이라는 현실적 소재를 통해 이 책은 묻는다. 우리는 누군가를 돕는다고 말할 때, 정말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까. 나는 언제부터 남이 붙인 설명 대신 나 자신의 말로 나를 설명할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