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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나와 그녀의 얼굴 우리 엄마는 화가다 | 페미니스트 작가라는 말 | 너무 큰 꿈 | 영화관 | 서로 다른 모녀 그네 위의 그녀 열아홉의 꿈 | 아들과 딸 | 멈춰 선 기억 | 엄마의 뒷모습 | 그네 위에서 손, 손, 손 큰손 | 축하 파티 | 반성문 | 널 믿어 | 진짜 어른 편지 손편지 | 거짓말 그리고 눈물 | 〈인디아나 존스〉 | 허리 디스크 화실 밖에서 호기심 천국 | 허난설헌 | 여행과 모험 사이 | 백화점과 박물관 그래도 작업실로 가서 쉬더라도 | 살아 있는 마네킹 | 기계 박사 | 일중독 | 참는 자에게 온 복 다시, 봄 능소화 | 첫 번째 인정 | 윤석남 작가의 조수 | 강아지 손주들 | 엄마가 돼보지 못한 딸 수록 작품 목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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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이 넘었지만 난 아직도 엄마의 토닥토닥이 좋은 엄마의 아기인 것 같아. 우리의 기억들이 더 이상 흐려지지 않게 이곳에 남겨둘게, 언제라도 꺼내 볼 수 있게.
---p.9 “엄마, 나 어렸을 적 진짜 꿈이 뭔 줄 알아?” “뭔데?” “나 진짜 꿈은 현모양처였다. 웃기지?” 그런데 가볍게 웃어넘길 줄 알았던 엄마가 정색하고 물었다. “근데 왜 그런 얘기 안 했어?” “창피해서.” 엄마는 생각보다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그게 왜 창피해?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데.” ---p.25 그림 자체가 좋기도 했지만 잊고 있던 엄마의 여행이 떠올랐다. 아무 일 없이 무사히 귀국했기에 지금 이 그림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만약 엄마가 그곳에 직접 가지 않고 상상으로만 그렸다면 과연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었을까? ---p.108 장을 보러 가실 때면 엄마는 경마장의 경주마가 되신다. 앞만 보게 하는 눈가리개를 찬 듯 오로지 직진뿐이다. 항상 사는 물건이 정해져 있어서 과일 코너로 곧장 가 구매를 완료하면 곧바로 두부와 콩나물 코너로 돌진한다.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 훑어볼 수 없게 만드는 투명 장치를 장착하신 게 분명하다. … 하지만 이런 우리의 상황이 정반대로 역전될 때가 있다. 박물관이나 갤러리에 갔을 때다. 그곳에서 엄마는 나무늘보가 되어 작품 앞 유리에 코를 붙이다시피 하고는 함함하게 들여다보신다. 반면 나는 다시 우사인 볼트급 전력 질주로 작품들을 슥 스캔하고 지나가 버린다. (114~115쪽) “저거 꼭 혈관 같지 않니? 줄기는 몸속의 혈관 같고, 꽃은 꼭 혈관이 터진 것 같아.” “응?????” 아니, 나의 어여쁜 능소화를 보며 대체 무슨 상상이란 말인가! 엄마는 웃으며 작업실로 향하셨고 나는 어이없는 기분으로 남겨져 능소화만 바라봤다. ---p.137 “엄마, 이렇게 복잡한 걸 왜 가위로 해. 칼로 하면 훨씬 깔끔하고 디테일하게 자를 수 있어.” 나는 곁에 있던 조각도를 쥐고 종이 한 장을 순식간에 정교하게 도려내 보였다. 내가 오려낸 매끄러운 단면을 보며 엄마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하셨다. “지선아, 이것 좀 네가 다 오려줄 수 있니?” ---p.143 우리 집 네 마리 중 스피츠 ‘구름이’는 동네를 떠돌아다니다가 스스로 우리 집을 선택해 걸어 들어온 유기견 출신이다. 엄마는 어떻게 알고 제 발로 찾아왔느냐며 그 녀석이 신기하고 대견하다며 유난히 애정을 쏟으신다. 1,025마리의 나무 개를 깎으며 세상의 거대한 모성을 이야기했던 엄마는 오늘도 진짜 강아지 손주 구름이를 데리고 다정하게 동네 산책을 나선다. ---p.1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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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실에서 울던 아이가 엄마를 쓰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 엄마의 화실 한구석에서 잠들었다 깬 아이는 벽을 가득 채운 그림 속 할머니들이 무서워 엉엉 울었다. 수십 년이 지나 엄마의 초기작을 정리하던 딸은 그 할머니들이 더는 무섭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열 살에는 공포였던 얼굴들이 중년이 된 지금은 일상처럼 느껴진다. 책은 이 첫 장면에서 출발해, 지은이가 화가의 딸로 살아온 시간을 서른세 개의 장면으로 펼쳐 보인다. 작품론 너머 ‘사람’ 윤석남에 대한 첫 기록 『우리 엄마는 화가다』는 화가 윤석남의 작품이 아니라 그 작품을 만든 ‘사람’에 집중한다. 평론의 언어 대신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반세기를 함께한 딸의 기억으로, 작업실 안팎에서 살아온 한 사람의 얼굴을 그려낸다. 화가의 일상과 고집, 엄마로서의 순간들은 곁에 있던 사람만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인간 윤석남을 만나는 데 있어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기록이 된다. 딸이 그려내는 작업실 밖의 윤석남은 유쾌하고 고집스럽고 엉뚱하다. 식구는 셋뿐인데 김장은 70포기씩 담그고 만두소는 들통 가득 버무리는 큰손이다. 오래된 휴대폰을 손에 꼭 쥐고 놓지 않는 기계치이면서 나무 커팅 기계만은 손처럼 다룬다. 백화점에서는 매장을 쏜살같이 지나치다가 미술관에서는 유리에 코를 붙이다시피 하고 그림을 들여다본다. 맹장이 터져 복막염이 될 때까지 아픈 걸 참고, 수술 이튿날에는 링거대를 밀며 간병인이 쫓아오기 버거울 만큼 빠르게 복도를 걷는다. 몸이 아파도, 오전에 다른 일정이 있어도 작업실에서 쉬는 게 마음이 편하다며 기어이 작업실로 향한다. 엄마로서의 윤석남도 선명하다. 초등학교 5학년 겨울, 초경을 죽을병인 줄 알고 울던 딸에게 엄마는 파티를 해줘야겠다며 축하를 건넸다. 아빠의 양복바지에서 꺼낸 돈으로 문구를 잔뜩 사 온 딸에게는 물건을 모두 버린 뒤 같은 문방구로 데려가 똑같은 물건을 다시 사주었다. 답안지를 베끼고 거짓말까지 한 딸을 뒷산으로 데려갔을 때는 매 대신 바위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 그날 이후 딸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정작 엄마는 그날을 기억하지 못한다. 딸의 인생을 바꾼 순간이 엄마에게는 그저 엄마로서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작품이 태어난 자리를 비추는 기억 딸의 기억은 작품이 태어난 자리를 비춘다. 윤석남이 마흔에 붓을 들며 처음 붙잡은 주제는 여성, 그리고 ‘어머니’였다. 6남매를 홀로 길러낸 외할머니의 삶은 〈어머니〉 연작이 되었다. 작품 속 여성들이 왜 그네 위에 앉아 있느냐는 딸의 질문에 화가는 ‘불안’이라고 답한다. 딸이 강아지를 자식처럼 키우는 모습을 지켜본 일은 유기견 1,025마리를 나무로 깎은 〈1,025: 사람과 사람 없이〉로 이어졌다. 딸의 글 곁에는 윤석남의 드로잉과 설치작품을 포함한 도판 서른세 점이 놓였다. 〈그네 타는 여자〉(1983)부터 나무 위에 여성을 새긴 〈어머니〉 연작, 〈1,025: 사람과 사람 없이〉(2003~2008), 저자가 조수로 참여한 〈룸〉(2009~) 연작, 이라크 방문 후 그린 드로잉(2004), 〈우리는 모계가족〉(2018)까지 다양한 시기의 작품을 담았고, 미발표 드로잉도 다수 실었다. 화가가 손글씨로 글을 시처럼 적어 넣은 드로잉은 그 글을 원문 그대로 옮겨, 그림과 함께 화가의 생각까지 읽을 수 있게 했다. 그중 “우리 엄마는 화가다. 그러나 / 솔직히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로 시작하는 〈동문서답 Ⅱ〉(2001)는 각별하다. 엄마가 25년 전 그림 속에 적어둔 딸의 물음이 딸이 쓴 책의 제목이 되었고, 딸은 한 권의 책으로 그 물음에 답했다. 1992년 미국에 있는 딸에게 보낸 엄마의 손편지도 원본으로 실어 화가의 손글씨를 직접 마주할 수 있게 했다. 딸이자 조수가 쓴 기록 이 책은 딸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미술이 엄마를 빼앗아 갔다고 여겨 미술 과목마저 싫어했던 아이는 미국에서 미대에 진학했지만, 창작의 한계를 느끼고 예술가의 길을 걷지 않았다. 오랫동안 영어 강사로 살던 저자는 2009년 엄마가 가위로 한지를 오리던 〈룸〉 연작 작업에 칼을 들고 뛰어들며 ‘윤석남 작가의 조수’가 되었다. 핑크룸에서 시작해 화이트, 블루, 블랙, 그린, 레드룸까지, 작품이 태어나는 자리를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다. 성격도 정치 성향도 음악 취향도 다른 모녀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기까지, 책은 두 사람이 함께 걸어온 반세기를 담담하게 따라간다. 흐려지는 기억을 대신 붙잡는 책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는 서문을 대신한 편지 〈엄마에게〉에 담겨 있다. 화가의 딸로서 엄마를 글로 남겨달라는 제안에 오래 망설였지만, 엄마와 나의 기억을 남기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펜을 쥐었다. 어제 일은 깜빡하면서도 피난길 화물기차 안의 풍경과 부산 거리의 구운 오징어 냄새는 생생하게 들려주는 엄마 곁에서 딸은 쓴다. “엄마의 기억은 자꾸 흐려져도 내가 모든 걸 다 기억하니까.” 이 책은 화가 윤석남에 대한 평가나 해석을 앞세우지 않는다. 한 사람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사랑하고 지켜본 이의 기억이 한 예술가를 어떻게 새롭게 비추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