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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벌레 여자
윤대녕
이룸 2001.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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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 크리스마스 이브, 지하철 2호선 시청역
2. 라면 요리사
3. 밤비둘기
4. 천수만에서 그녀가 한 얘기
5. 사이버 무인 호텔
6. 그는 누구일까?
7. 포푸리 냄새와 히야신스
8. 호텔 스탠드바에서 옷을 벗는 모델
9. 분홍색 문, 하늘색 문
10. 이계진 아나운서가 앉아 있는 옆 테이블
11. 만리장성
12. 삼십이 년만의폭설
13. 사슴벌레 통신
14. 그때 누군가가 나의 등을 두드려 왔다
15. 내가 강릉에 간 이유
16. 수선화 진 다음

저자 소개 1

YOON DEA NYUNG,尹大寧

1962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대전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단국대 불문과에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하던 198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원」이 당선되었고, 1990년 [문학사상]에서 「어머니의 숲」으로 신인상을 받아 등단했다. 출판사와 기업체 홍보실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1994년 『은어낚시통신』을 발표하며 전업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이 책을 통해 존재의 시원에 대한 천착을 통해 우수와 허무가 짙게 깔린 독특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며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 후 9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떠오르며 '존재의 시원에 대한 그리움'을 그만의 독특한 문체로 그려나가고
1962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대전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단국대 불문과에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하던 198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원」이 당선되었고, 1990년 [문학사상]에서 「어머니의 숲」으로 신인상을 받아 등단했다. 출판사와 기업체 홍보실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1994년 『은어낚시통신』을 발표하며 전업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이 책을 통해 존재의 시원에 대한 천착을 통해 우수와 허무가 짙게 깔린 독특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며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 후 9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떠오르며 '존재의 시원에 대한 그리움'을 그만의 독특한 문체로 그려나가고 있다. 오늘의 젊은예술가상(1994), 이상문학상(1996), 현대문학상(1998), 이효석문학상(2003), 김유정문학상(2007), 김준성문학상(2012)을 수상했다. 2019년 현재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여섯 살 이전의 기억은 전혀 뇌리에 남아 있지 않다는 그의 최초의 기억은 조모의 등에 업혀 천연두 예방 주사를 맞기 위해 초등학교에 가던 날이다. 주사 바늘이 몸에 박히는 순간 제대로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일곱 살 때 조부가 교장으로 있던 학교에 들어갔다. 입학도 안 하고 1학년 2학기에 학교 소사에게 끌려가 교실이라는 낯선 공간에 내던져진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할아버지에게 한자를 배웠다. 한자 공부가 끝나면 조부는 밤길에 막걸리 심부름이나 빈 대두병을 들려 석유를 받아 오게 했다. 오는 길이 무서워 주전가 꼭지에 입을 대고 찔끔찔끔 막걸리를 빨아먹거나 당근밭에 웅크리고 앉아 석유 냄새를 맡곤 했던 것이 서글프면서도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독서 취미가 다소 병적으로 변해,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 대기 시작한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들어가 우연히 '동맥'이라는 문학 동인회에 가입한다. 그때부터 치기와 겉멋이 무엇인지 알게 돼 선배들을 따라 술집을 전전하기도 하고 백일장이나 현상 문예에 투고하기도 했고 또 가끔 상을 받기도 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거의 한 달에 한 편씩 소설을 써대며 찬바람이 불면 벌써부터 신춘 문예 병이 들어 방안에 처박히기도 했다.

대학에 가서는 자취방에 처박혀 롤랑 바르트나 바슐라르, 프레이저, 융 같은 이들의 저작을 교과서 대신 읽었고 어찌다 학교에 가도 뭘 얻어들을 게 없나 싶어 국문과나 기웃거렸다. 1학년 때부터 매년 신춘 문예에 응모했지만 계속 낙선이어서 3학년을 마치고 화천에 있는 7사단으로 입대한다. 군에 있을 때에는 밖에서 우편으로 부쳐 온 시집들을 성경처럼 읽으며 제대할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그때 군복을 입고 100권쯤 읽은 시집들이 훗날 글쓰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제대 후 1주일 만에 공주의 조그만 암자에 들어가 유예의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을 투명하게 보려고 몸부림쳤다. 이듬해 봄이 왔을 때도 산에서 내려가는 일을 자꾸 뒤로 미루고 있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뻔한 현실론에 떠밀려 다시 복학했고 한 순간 번뜩,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문학이라는 것을 아프게 깨닫는다.

데뷔 이래 줄곧 시적 감수성이 뚝뚝 묻어나는 글쓰기로 주목을 받은 윤대녕은 ‘시적인 문체’를 지녔다는 찬사를 받는다. 그의 글에서는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그만의 시적 색채가 느껴지는 문체가 있어서이다. 동시에 그의 글에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일상을 마치 스냅사진을 찍듯 자연스럽게 포착하여 그려내는 뛰어난 서사의 힘이 느껴진다.

윤대녕은 고전적 감각을 견지하면서 동시에 동시대적 삶과 문화에 대한 예리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의 작품들을 지향점을 잃어버린 시대에 삶과 사랑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젊은 세대의 일상에 시적 묘사와 신화적 상징을 투사함으로서 삶의 근원적 비의를 탐색한다. 내성적 문체, 진지한 시선, 시적 상상력과 회화적인 감수성, 치밀한 이미지 구성으로 우리 소설의 새로운 표정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작품으로『남쪽 계단을 보라』,『많은 별들이 한 곳으로 흘러갔다』,『대설주의보』를 비롯해 장편소설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추억의 아주 먼 곳』,『달의 지평선』,『코카콜라 애인』, 『사슴벌레 여자』, 『미란』 등을 발표했다. 산문집 『그녀에게 얘기해 주고 싶은 것들』, 『누가 걸어간다』, 『어머니의 수저』,『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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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01년 04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240쪽 | 466g | 148*210*20mm
ISBN13
9788987905396

책 속으로

혼자 살게 되면서부터 저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에 그야말로 모든 것 다 바쳐야 했어요. 외로움을 느낄 사이도 없었죠. 그런데 집에 사람이 들어오니까 오히려 외로움이 자주 찾아와요.

*그쪽과 함께 지내면서 점점 마음이 약해지고 있는 걸 느껴요. 이때껏 느껴보지 못한 안온함이랄까 따뜻함 때문에 그런 걸까요. 솔직히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자칫 잘못 받아들이면 나중에 상처가 될게 뻔하니까요.

--- p.46

잠든 그녀에게 슬그머니 다가가 그는 티셔츠를 걷어올리고 그녀의 등을 보았다. 문득, 그의 숨이 멎었다. 설마 했는데, 그녀의 왼쪽 어깨에 사슴 벌레 문신이 찍혀 있었다. 그녀의 몸에 이불을 덮어주고 나서 그는 커튼을 닫고 벽쪽으로 돌아누워 낮게 숨을 몰아 쉬었다. 그러고 나서 하나 두울 숫자를 세며 잠을 청했으나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 p.193

서하숙은 8시가 넘도록 육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백상기념관 위에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던 비둘기도 이제는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사이사이 그녀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긴 발신음만 계속될 뿐이었다. 그녀는 혹시 내가 돌아오는 걸 원치 않는 것이 아닐까. 이런 자문에 시달리며 나는 처음 그녀를 만났던 덕수궁 옆 편의점과 시청역 지하철을 돌아보고 나서 9시쯤 다시 육교 아래도 돌아왔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않았다. 그녀는 남산 서울 타워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7시부터 줄곧 안국동쪽을 내려다보며 그곳에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언젠가 그녀와 한 약속을 지키게 된 셈이었다. 사금 가루가 뿌려져 있는 듯한 서울 시내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그녀는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마침내 10시가 되어 문을 닫는다는 장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그녀가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고 나를 돌아보았다.

--- p.219-220

'당신을 증오해요. 제게 삶은 늘 광고 전단지 같은 거였어요. 늘 사람들 손에 구겨져 쓰레기통에 버려지곤 했죠. 죽음으로 삶을 계속하겠어요'
그녀는 혀가 굳어가는 소리로 쉼 없이 중얼거렸다.
'그동안 저는 남들이 결코 가보지 못한 곳들을 다녀봤어요. 어두운 컴컴한 습기로 가득 찬 하늘. 비둘기들이 모여 사는 시체 소각장. 문을 닫은지 이미 오래된 시계공장. 나쁜 꿈들이 도깨비처럼 우글거리는 음습한 방. 일 년 내내 시커먼 불길이 솟아오르는 밤의 유전. 이제 이런 기억들도 내게서 사라지겠죠.'

--- p.169

누군가 나의 등을 두드려 뒤를 돌아보는 순간, 옷의 잠결이 밀려와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어두운 계단 모서리에 지친 다리를 끌고 잠시 앉아 있다 일어나는 순간, 우리들의 기억은 한 갓 낡은 실처럼 쉽게 끊어져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낯선 골목 모퉁이를 막 돌아 나올 때, 술에 취해 심야 버스에서 혼자 잠들어 있을 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난데없이 이별의 말을 듣는 순가에도 어쩌면 그렇지 않을까?

--- p.208

'내게 만약 휴대폰이 없다면, 텔레비젼이 없다면, 또 컴퓨터와 신용카드와 자동차가 없다면 과연 제대로 존재할 수 있을까? 그들이 내 신분과 정보를 보장하고 관리해 주지 않는다면 말이다.'
대답은 우울하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없다! 였다.

--- p.238. 작가의 말 중에서

나는 약 세달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시청역 지하철 벤치에서 깨어났을 때의 상황부터 오늘까지의 일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그러나 무인호텔에서 있었던 일은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그는 사이사이 고개를 끄더깅며 주의 깊게 내 예기를 듣고 있었다. 경찰서에 찾아갈 수 없었던 이유와 심정에 대해서도 그는 잘 이해하는 듯 했다. 내 말을 다 듣고 난 다음 그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밝혔다.

--- p.200

깨어보니 그는 수갑이 풀린 채 소파에 누워 있었다. 머리의 통증은 잔존감처럼 계속 남아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러간 것일까. M은 등을 돌이고 창밖을 내다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밖에서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아득히 들려오고 있었다. 오줌을 지렸는지 아랫도리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목이 말라붙어 그는 말을 할 수조차 없었다.

그가 깨어난 것을 눈치채고 M은 돌아서서 담배를 끄고 그의 맞은 편에 와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그에게 전달될 물건이 들어 있는 두툼한 비닐 봉투가 놓여 있었다. M이 하나씩 그것을 꺼내놓았다. 주민등록증과 신용카드와 운전면허증과 대한항공에서 발행한 스카이패스와 휴대폰과 한국통신 발행의 KT카드와 기억을 이식받기 전에 작성한 서류 한 벌 들어 있었다.

아니,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봉투 옆에 플라스틱으로 만든 네모난 상자가 놓여 있었는데 안을 들여다보니 검은 사슴벌레 세 마리가 톱밥 위를 기어다니고 있었다. 웬 것인가 싶었는데 물을 사이도 없이 M이 설명을 했다.
“위탁자가 특별히 전해 달라고 부탁한 겁니다. 수뢰인께 전해지는 돈의 일부는 사슴벌레의 사육 비용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는 M에게서 눈을 떼고 상자 안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사람의 시선을 느꼈는지 사슴벌레는 이내 죽은 듯 몸을 웅크렸다. 질문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로서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명구라는 사람은 아직 살아 있습니까? 위탁자 말입니다.”

M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더니 곧장 가방을 집어들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대꾸없이 무인 계산기에 현금을 집어넣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M이 복도에 서서 모자를 고쳐 쓰며 말했다.
“문은 이대로 열어놓겠습니다. 문이 닫히면 다시 요금을 지불하고 나와야 하니까요. 앞으로 오 분 내 문이 닫히지 않으면 직원이 올아올겁니다. 아, 그리고 입력된 기억은 사십팔 시간이 지나면서부터 효과적으로 작용하기 시작할 겁니다. 그럼 기회가 되면 다시 만나죠.”

말을 마치고 나서 M은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가 있는 복도 끝으로 사라져버렸다. 오 분 내에 그도 방에서 나가야만 했다. 통장에는 칠백 만원의 돈이 들어 있었고 주민등록증과 신용카드는 새로 발급된 아주 새것이었다.

머리가 묵직한 것말고는 그는 별다른 이상을 느낄 수 엇었다. 사슴벌레 상자를 들고 방을 나가기 전 그는 거울을 통해 타인의 기억이 이식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그의 이름을 조용히 불러보았다.
이명구. 스물여덟 살. 사슴벌레를 키우던 남자.

서하숙과 함께 집으로 돌아와 그는 이틀 동안 수능을 마친 학생처럼 길게 잠들어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일요일 오후, 그는 또 그 사이에 세상이 완전히 변해 버린 듯한 공막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pp.76-79

그렇지만 내게도 기억에 없는 며칠이 있었다. 그때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 역시 알아야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다시 환상으로 변한 기억들을 끌어안고 나도 그 누구도 아닌 제3의 존재로 살아가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쨋든 내게는 현실이 필요한 것이다.

--- p.221

그럼 앞으로 뭘 할 생각이지? 라고 묻자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글쎄요... 만리장성에 다시 가봐야 하지 않겠어요? 그 기억이 나지 않은 하루에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꼭 알아내고 싶어요.'
'그래.'
나는 그동안 내게 일어났던 일을 그녀에게 말해 주었다. 그녀는 대꾸 없이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내가 말을 마치자 그녀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내가 아주 돌아온 것인가를 물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렇다고 했다.

--- p.220-221

그녀는 검은색 진 재킷에 자줏빛의 긴 목도리와 장미 무늬가 박혀있는 구두를 신고 있엇으며무두질이 잘된 회색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가 온수통 앞에 서서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동안 그녀는 문을 밀치고 들어와 진열대에서 새우탕큰사발면을 집어들고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사발면을 음수대에 내려놓고 그와 나란히 밖을 내다보는 자세로 서 있었다. 무심결에 그는 옆을 돌아보았고 그녀와 엇갈리듯 눈이 마주쳤다. 그는 슬쩍 눈길을 피하며 컵라면의 뚜껑을 열었다. 낯선 사람과 눈이 마주치는 것이 그러서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상태였다. 면발이 조금 덜 풀린 상태였으나 그는 젓가락을 들고 컵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가방을 사이에 두고 서 있던 그녀가 곁눈질로 이족을 기웃거리며 무슨 말인가를 건네려다 도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유난히 키가 작은 여자였다. 그렇다고 난쟁이라고 할 수는 없었으나 기껏해야 150센티미터가 될까 말까 한 기형에 가까운 체구였다. 언뜻 뒷모습만 보았다면 중학생쯤으로 작각했을 터이었다.

--- p.13

'그 쪽이 좀 더 담담해지면 좋겠어요. 따지고 보면 사람의 기억이란 것도 단지 필요한 것 중 하나일 뿐예요. 생필품처럼 말예요. 어둠 속에 혼자 벌거벗고 누워 있으면 누구나 쉽게 무의미한 존재로 변해요.지금부터 필요한 것들을 가지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쿨하고 심플하게 살아가는 거예요. 아마 그게 인생의 전부인지도 몰라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아직 못 가진 것들이 많지만 하나씩 마련한 생각이구요. 그리고 저 그쪽이 아주 좋아요. 가까이에 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함께 밥을 먹거나 화투를 치거나 시장을 보거나 하는 일 모두가 아주 좋단 말예요.'

낮에 백화점 스낵 코너에서 그도 비슷한 생각을 잠깐 하고 있었다. 그래, 어쩌면 이것이 삶의 전부인지도 모른다. 바로 이 순간 손에 거머쥘 수 있는 삶의 전부.

--- p.98

“나는 지금 막 슬프고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미친 생각이기도 하죠. 하지만 당신은 새로 업데이트 된 최신의 컴퓨터를 갖게 되더라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원할 건가요?”
-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로부터 받은 이메일

지난해 겨울 광화문에서 유난히 키가 작은 여자와 만난 적이 있다. 키가 작긴 했으나 어디서나 흔히 만날 수 있는 여자 중 하나였다. 무슨 얘긴가를 나누다 그녀가 아주 당돌한 어조로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난 컴퓨터와 휴대폰과 텔레비전이 남자 친구나 가족보다 더 소중해요. 정말로 말예요.”

표정으로 보아 농담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인스턴트 식품만 먹고 사는 여자였고 치아 교정기에 초록색 콘택트 렌즈를 끼고 있었다. 그리고 ‘내 피틑 푸른 색’이라는 광고 카피와 <블레이드 러너> 같은 공상과학 영화를 좋아했다.

처음엔 그녀가 낯설어 보였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비슷한 또래의 다른 사람들도 그녀와 비슷한 취향과 사상(?)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픙로 그녀의 꿈은 가슴 확대 수술을 하는 것과 ‘입고 다니는 컴퓨터’를 소유하는 것이었다.

내가 이름을 물어보자 그녀는, 사이보그라고, 재치 있게 대답했다. 역시 농담이지 싶었지만 그녀는 끝내 본명을 밝히지 않았다.

그녀와 만나고 나서 나는 이런 질문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내게 만약 휴대폰이 없다면, 텔레비전이 없다면, 또 컴퓨터와 신용카드와 자동차가 없다면 과연 제대로 존재할 수 있을까? 그들이 내 신분과 정보를 보장하고 관리해 주지 않는다면 말이다.”
대답은 우울하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없다! 였다.
그로부터 나는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약 오 개월 전쯤의 일이다.

---pp.237-238

...누군가 나의 등을 두드려 뒤를 돌아보는 순간, 오수의 잠결이 밀려와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어두운 계단 모서리에 지친 다리를 끌고 잠시 앉아 있다 일어나는 순간, 우리들의 기억은 한갓 낡은 실처럼 쉽게 끊어져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낯선 골목 모퉁이를 막 돌아나올 때, 술에 취해 심야 버스에서 혼자 잠들어 있을 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난데없이 이별의 말을 듣게 되는 순간에도 어쩌면 그렇지 않을까.

--- p.208

“나는 지금 막 슬프고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미친 생각이기도 하죠. 하지만 당신은 새로 업데이트 된 최신의 컴퓨터를 갖게 되더라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원할 건가요?”
-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로부터 받은 이메일

지난해 겨울 광화문에서 유난히 키가 작은 여자와 만난 적이 있다. 키가 작긴 했으나 어디서나 흔히 만날 수 있는 여자 중 하나였다. 무슨 얘긴가를 나누다 그녀가 아주 당돌한 어조로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난 컴퓨터와 휴대폰과 텔레비전이 남자 친구나 가족보다 더 소중해요. 정말로 말예요.”

표정으로 보아 농담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인스턴트 식품만 먹고 사는 여자였고 치아 교정기에 초록색 콘택트 렌즈를 끼고 있었다. 그리고 ‘내 피틑 푸른 색’이라는 광고 카피와 <블레이드 러너> 같은 공상과학 영화를 좋아했다.

처음엔 그녀가 낯설어 보였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비슷한 또래의 다른 사람들도 그녀와 비슷한 취향과 사상(?)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픙로 그녀의 꿈은 가슴 확대 수술을 하는 것과 ‘입고 다니는 컴퓨터’를 소유하는 것이었다.

내가 이름을 물어보자 그녀는, 사이보그라고, 재치 있게 대답했다. 역시 농담이지 싶었지만 그녀는 끝내 본명을 밝히지 않았다.

그녀와 만나고 나서 나는 이런 질문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내게 만약 휴대폰이 없다면, 텔레비전이 없다면, 또 컴퓨터와 신용카드와 자동차가 없다면 과연 제대로 존재할 수 있을까? 그들이 내 신분과 정보를 보장하고 관리해 주지 않는다면 말이다.”
대답은 우울하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없다! 였다.
그로부터 나는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약 오 개월 전쯤의 일이다.

---pp.237-238

...누군가 나의 등을 두드려 뒤를 돌아보는 순간, 오수의 잠결이 밀려와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어두운 계단 모서리에 지친 다리를 끌고 잠시 앉아 있다 일어나는 순간, 우리들의 기억은 한갓 낡은 실처럼 쉽게 끊어져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낯선 골목 모퉁이를 막 돌아나올 때, 술에 취해 심야 버스에서 혼자 잠들어 있을 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난데없이 이별의 말을 듣게 되는 순간에도 어쩌면 그렇지 않을까.

--- p.208

출판사 리뷰

우리는 기억을 빌려 존재하는 사이보그였다, 사슴벌레였다, 버려진 푸른 바다였다
윤대녕의 다섯번째 장편소설 『사슴벌레 여자』가 출간되었다. 윤대녕의 새로운 세계를 기다려온 독자 그리고 작가 자신에게 이번 작품이 갖는 의미는 크다. 이제까지의 빛나는 심미안, 이미지적 문장들, 존재의 시원에 머물던 시선들로 규정되어왔던 윤대녕 소설 미학을 재검토해야 할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이미지 대신 서사를, 서정적인 자연 묘사 대신 스피드한 플롯으로써 소설이 갖는 '이야기'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마치 SF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의 공상과학적 모티프를 적극 수용, 인간이 현실 공간에 존재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엄밀하게 탐색한 흔적이 역력히 드러나 있다.

세상 속에 '나'를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과연 '존재'란 어떤 상태를 뜻하는가. 이런 철학적인 질문에 대해 언어적인, 추상적인 대답이 삶에 별 도움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실제의 삶에 좀더 실천적으로 가 닿는 장르는 바로 문학 또는 소설일 것이다. 이야기로써, 보편적 감동과 울림으로써 읽는 이를 근원적인 세계로 이끄는 소설의 미학을 확실하게 보여준 작품이 바로 윤대녕의 『사슴벌레 여자』이다.

'디지털 현실에서의 인간의 기억과 존재'라는 심도 있는 주제를 소설 형식으로 탐구한 연구 보고서 『사슴벌레 여자』는 윤대녕이라는 작가에게 보내왔던 찬사를 수정하게 하는, 혹은 우려를 불식시킬 만한 가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윤대녕'이라는 작가의 새로운 시도이기에 더욱 주목된다.

첨단문명을 사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극대화된 상상적 어법으로써, 즉 소설이라는 장르의 영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는 『사슴벌레 여자』는 가벼운 터치로 흘러가는 스토리 위에 현대인의 존재 상실감을 무게감 없이 얹어놓은 듯한 느낌을 부여한다. 즉 기술적으로 타인의 기억을 이식받아 자아와 타아가 공존하는 분열된 삶을 사는 사이보그적 인간의 전형을 그려냄으로써 기계화되는 존재의 고독을, 그것을 방관하는 현대 사회의 비극을 폭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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