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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아널드 아이작스의 소개 글
트로츠키의 서문
옮긴이 머리말

1장 반란의 씨앗
2장 중국 혁명의 문제
3장 새로운 각성
4장 광저우: 누구의 권력인가?
5장 광저우: 1926년 3월 20일 쿠데타
6장 광저우에서 장강으로
7장 상하이 봉기
8장 탕자의 귀환
9장 침묵의 공모
10장 1927년 4월 12일 쿠데타
11장 우한: “혁명의 중심”
12장 “혁명의 중심”의 활동
13장 토지를 위한 투쟁
14장 모스크바와 우한
15장 우한의 붕괴
16장 추수 봉기
17장 광저우 코뮌
18장 패배의 결과
19장 ‘소비에트 중국’의 흥망
20장 새로운 ‘민족통일전선’

후주
연표
인물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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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3

저해럴드 아이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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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old Isaacs

중국 혁명을 현장에서 직접 취재하고 기록한 미국인 저널리스트다. 스무 살의 초보 언론인이던 1930년에 중국으로 건너가 5년간 수많은 혁명가들을 인터뷰하고 동시대 자료를 수집하고 번역하고 기록해 1938년에 이 기념비적 저작 《중국 혁명의 비극 1925~1927》을 출판했다. 1945년에는 장제스 정부에 의해, 1949년 혁명 후에는 마오쩌둥 정부에 의해 추방당한 뒤 30년 동안 입국이 금지될 만큼, 장제스와 국민당의 적인 동시에 마오쩌둥과 공산당의 적이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중국 정치와 아시아의 혁명운동을 연구하며 저술 활동을 했고 매사추세츠공과대학 정치학·경제학 교수와
중국 혁명을 현장에서 직접 취재하고 기록한 미국인 저널리스트다. 스무 살의 초보 언론인이던 1930년에 중국으로 건너가 5년간 수많은 혁명가들을 인터뷰하고 동시대 자료를 수집하고 번역하고 기록해 1938년에 이 기념비적 저작 《중국 혁명의 비극 1925~1927》을 출판했다. 1945년에는 장제스 정부에 의해, 1949년 혁명 후에는 마오쩌둥 정부에 의해 추방당한 뒤 30년 동안 입국이 금지될 만큼, 장제스와 국민당의 적인 동시에 마오쩌둥과 공산당의 적이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중국 정치와 아시아의 혁명운동을 연구하며 저술 활동을 했고 매사추세츠공과대학 정치학·경제학 교수와 명예교수를 지냈다.
《영국 광부파업과 계급정치》, 《1947년 르노파업》, 《LO의 진실한 역사》, 《미국 트로츠키주의 역사》 등 해외 노동자 투쟁과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역사를 소개해 왔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실천하며 틈틈이 번역도 하고 있다.

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10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736쪽 | 152*225*40mm
ISBN13
9788979662931

책 속으로

후진국의 ‘민족자본가’들은 외국의 후원을 받으며 민중에게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계급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이들의 지도 아래서는 ‘부르주아’ 혁명의 과제를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 p.24 「민중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적대감」중에서

현대적 형태의 생산·교통·금융이 낡고 해진 과거의 양식 위에 덧씌워져 부분적으로만 결합돼 있다. 이미 1세기 전에 서방이 상품·총·탐욕·사상을 가지고 중국을 침입했을 때부터 오랜 구조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충격의 결과는 재앙적이고 혁명적이었다. 중국 경제는 강제적으로 변형됐다. 정말 오랫동안 변동 없던 사회 계급들이 격렬한 변화의 시대로 들어섰다. 정부 형태와 관습, 사회적 균형이 완전히 뒤집혔다. 변화 과정은 복잡했다. 그것은 중국의 생산력이 번창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의 건설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임무를 제기했다. 이로부터 충돌이 발생했는데, 그것은 곧바로 쌓이고 가속도가 붙어, 해결을 위해 빠르게 계급투쟁의 전장으로 향했다.
--- p.42~43 「‘후진국’의 역사적 과제」중에서

세계혁명이야말로 민중의 필요에 따라 세계경제를 합리적으로 재편하고 세계의 상품을 합리적으로 분배할 수 있었다. 이것은 자본주의 세계시장의 무정부성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했다. 중국이 이 새로운 질서 속에 자리 잡는다면, 좀 더 발전한 국가들의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원조를 보장받을 것이고, 모든 민중의 경제적·문화적 수준을 보편적으로 끌어올리는 활동을 조화롭게 벌여 나갈 것이다. 중국이 진정한 민족 해방을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국내외 착취자들에 맞선 투쟁으로 농민을 결집시켜야만 가능했다. 제국주의의 앞잡이인 자본가계급은 그런 투쟁을 이끌 수 없었다. 기계에 익숙해지지도 않은 젊은 노동자계급이 대다수 민중을 이끌고 미래를 열어야 하는 임무에 직면했다. 다른 어떤 계급도 그럴 수 없었다.
--- p.103~104 「누가 해결할 것인가?」중에서

홍콩과 사몐의 모든 주요 공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25만 명이 벌인 파업은 모든 외국인의 공업 생산과 상업 활동을 순식간에 마비시켰다. 광저우 노동자들은 도박장과 아편굴을 일소했고, 그것을 파업 노동자의 숙소와 식당으로 바꿔 놓았다. 2000명의 규찰대가 파업 노동자들 중에서 모집됐고, 교통을 차단하는 장벽이 홍콩과 사몐 주변에 둘러쳐졌다. 운동은 매우 훌륭하게 조직됐다. 50명당 1명씩 선출된 대표들로 파업노동자대표회의가 구성됐고, 그중 13명이 집행위원회의 임무를 맡기 위해 지명됐다. 중국에서 최초의 맹아적 소비에트라 할 수 있는 이 노동자계급 기구의 후원 아래, 남녀 노동자와 자녀를 위한 은행 1개와 학교 7개가 설립돼 운영됐다. 특별위원회가 구성돼 자금과 기부금 관리, 압수품의 경매, 기록 보관 등을 담당했다. 파업 법정이 설치돼 배척 운동을 파괴하려 하거나 공공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재판했다.
--- p.144 「마침내 일어난 노동자 혁명」중에서

외국인 착취자와 중국인 착취자의 단결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상하이 총파업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대표적 제국주의 신문인 〈노스 차이나 데일리 뉴스〉는 상하이 유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여러분과 맺어 온 다년간의 우호적 관계를 통해, 여러분이 폭동자들과 파업자들에게 공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 무정부적이고 파괴적이며 쓸모없는 노동자들에게 협조하지 말아야 한다. … 이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여러분의 평화·행복·안전을 위협할지는 주로 여러분에게 달렸다.”
--- p.153~154 「제국주의와 중국 자본가계급의 공모」중에서

크렘린은 더는 노동자계급 정책을 중심축으로 삼지 않았다. 그들은 중국 민족주의 운동을 자본가계급이 지도해야만, 시급히 필요한 동맹자들이 더 빠르게 형성되리라 믿었다. 소련과 코민테른의 정신적·물질적 지원은 공산당을 통해 대중운동에 전해진 것이 아니라, 이른바 모든 계급의 정당으로 합리화돼서 공산당원과 대중이 반드시 복종해야 했던 부르주아 국민당을 통해서 전해졌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3월 20일 쿠데타로 이어졌다.
--- p.186 「1926년 3월 20일 광저우 쿠데타」중에서

장강을 향한 진격과 대중운동의 놀라운 용솟음은 국민혁명 운동 안의 계급 모순을 폭발 직전까지 밀어붙였다. 장제스는 공공연하게 제국주의와 타협하기 위해 상하이를 향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더욱더 엄혹한 참수의 방식을 통해서만 대중운동을 꺾을 수 있을 것이었다.
--- p.236 「북벌과 대중운동의 폭발」중에서

6시에 상하이 북역 상공에 백기가 나부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혁명군 1사단이 룽화를 떠나 마이건루에 도착했다. 사단장 쉐웨가 부대원들의 압력을 받아 결국 명령에 불복하고 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가 도착한 것은 노동자들이 모든 일을 끝낸 뒤였다. 강철 철책 뒤에서 분노와 두려움에 휩싸인 공동조계와 프랑스 조계를 제외한 상하이 전역이 노동자들의 수중에 장악됐다. 바오산루, 바오퉁루, 중싱루 일대는 총성 대신 승리를 축하하는 폭죽 소리와 노동자들의 환호성으로 뒤덮였다.
--- p.255 「상하이 봉기」중에서

은행가들과 상인들은 파업이 총파업으로 발전하고, 총파업이 봉기로 발전하는 것을 지켜봤다. 노동자들의 상하이 장악은 그들에게 제국주의와의 흥정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하는 지렛대를 제공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또한 그들이 대중의 힘이라는 위험한 무기와 단절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음을 경고했다. 그들의 이익은 제국주의의 이익만큼이나 위험에 처해 있었다. 임박해 있는 중국 자본과 외국자본 사이의 협상에서 핵심 조건 하나는 대중운동의 분쇄였다. 그들은 돌아온 탕아 장제스에게 그런 임무의 수행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 p.258 「장제스의 상하이 입성」중에서

‘민족통일전선’ 또는 ‘4계급 연합’을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유지해야 하는 신비로운 숭배 대상으로 떠받들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것은 국민당이 중국공산당을 속박하고 자본가계급이 노동자·농민을 속박하도록 보장하는 것임이 드러났다. 이 정책은 이미 광저우에서 리지선이 노동자들에 대한 야만적 탄압에 기초해 성공적으로 군사독재를 수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또한 북벌군의 장강 진군을 가능하게 만든 광범한 대중운동의 과실을 자본가계급이 이용할 수 있게 해 줬다. 이제 상하이의 자본가계급은 장제스를 통해 그 과실을 빼앗기 위해 준비하기 시작했다.
--- p.281~282 「침묵의 공모」중에서

계급투쟁의 강철 검은 모스크바의 교서보다 강력했다. 노동자들은 ‘연합’을 위해 죽었지만, 그렇게 성립된 연합은 피억압 인민에 맞선 억압자들의 연합일 뿐이었다. “4계급 연합”이라는 저속하고 찢어진 외투는 벗겨졌고, 남은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상하이 노동자계급의 시신뿐이었다. 그 시신 아래에서 군벌들과 은행가들이 약탈물을 나누기 위해 도박과 거래를 시작했다.
--- p.336 「여전히 국민당에게 매달리는 스탈린」중에서

그렇지만 스탈린에게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세력은 여전히 국민당과 그 “좌파”, 우한 정부였다. 그는 이제 우한 정부가 혁명의 중심이 됐다고 선언하고, 노동자와 농민은 이 정부가 군벌과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을 수행하고 농민 봉기를 지원하기를 기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 p.330 「1927년 4월 12일 상하이 쿠데타」중에서

농민이 토지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일반 명제(모두가 원칙적으로 동의했다)에서 출발한 국민당 토지위원회는 곧 “어떤 농민이 어떤 토지의 주인이어야 하는가?” 하고 물었다. “토지를 경작자에게!”라는 구호는 매력적이고 급진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누구의 토지를? 왕징웨이는 소지주의 토지는 확실히 아니라고 말했다. 국민당은 소부르주아계급의 정당으로서 소지주를 보호하는 것이 의무가 아니었던가. 탕성즈는 군 장교의 토지도 확실히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후난성 농민들이 이미 군 장교와 그 친족의 재산을 빼앗고 있다고 불평했다.
--- p.381 「우한 정부의 실체」중에서

국민당은 기껏해야 25퍼센트의 지대 인하와 매년 20퍼센트의 이율 “제한”을 기치로 내걸었다. 또한 모호하게 “평등한 소작권”을 말했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끝내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대중운동이 개시된 후 국민당 좌파에게 강령상의 이런 온건한 조항들조차 실행할 능력과 의지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대중적 자각의 힘은 직접적 논리에 따라 농민들을 “모든 토지를 경작자에게!”라는 구호로 급속히 이끌었다. 농민들은 이 구호를 가차 없이 간단한 방식으로 실현해 나갔고, 잃을 것이 있는 자들에게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4월 말에는 후난성과 후베이성의 많은 현에서 토지와 재산 몰수가 흔하게 벌어졌다.
--- p.395~396 「토지를 위한 투쟁」중에서

스탈린·부하린은 말로는 계급투쟁을 원했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피하려 했다. 이 점에서 그들은 노동자·농민과 결별했는데, 노동자·농민이 모든 피억압자의 확실한 본능에 따라 말을 믿지 않고 행동에 나섰기 때문이다. 농민과 지주의 유일한 공통점은 토지였는데, 경작은 농민이 하고 이익은 지주가 보는 구조였다. 농민의 삶의 목표는 토지에서 지주를 쫓아내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됐다. 토지혁명의 내용을 간단히 말하면 바로 이것이다. 농민을 지지하거나 지주를 지지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이제 왕징웨이와 친구들은 토지와 농민에 대한 모든 호언을 거두고 이미 농민반란을 짓밟고 있는 자들을 분명하게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 p.465 「계급 연합의 붕괴」중에서

[소련공산당 측 고문으로 오랫동안 국민당을 도운] 보로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자본가계급은 진정으로 제국주의에 맞서지 않기 때문에 결코 중국을 통일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제국주의와 동맹을 맺고 그것에서 이익을 얻습니다. 소부르주아계급은 한편의 노동자·농민과 다른 편의 대자본가계급 사이에서 동요하다가 결국 후자의 편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중국을 통일할 수 없습니다. 노동자·농민은 소부르주아계급을 너무 믿었기 때문에 중국을 통일할 수 없었습니다.”
--- p.497 「보로딘의 뒤늦은 고백」중에서

지난날 중국공산당이 배운 유일한 것은 거대한 대중의 힘이 작동하며 혁명의 물결이 상승하는 상황에서 대중을 적대계급들에게 복종시킴으로써 그들을 억제하고 의지를 꺾는 법이었다. 이제 그 물결은 반동의 암벽에 부딪혀 “물거품처럼 부서졌다.” 살아남은 공산당원들은 돌이킬 수 없이 손상을 입은 처지를 때늦은 군사행동으로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 속에, 기회주의와 타협이라는 한 극단에서 모험주의라는 정반대의 극단으로 무자비하게 내몰렸다. 그들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필사적이고 가망 없는 시도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공산당은 모스크바의 직접적 명령에 따라 봉기의 길로 접어들었다.
--- p.502 「가망 없는 봉기로 내몰린 중국공산당」중에서

운동이 정점에 올랐던 1927년 4월에 공산당은 6만 명의 당원을 보유했고, 그중 58퍼센트가 주요 산업도시에 자리 잡은 산업 노동자들이었다. … 공식 수치에 따르면, 노동자 당원의 비율은 1928년에 10퍼센트, 1929년에 3퍼센트, 1930년 3월에 2.5퍼센트, 9월에 1.6퍼센트로 추락했고, 그해 말에는 사실상 0퍼센트가 됐다.
--- p.569~570 「중국공산당원 구성의 변화」중에서

1928~1929년에 화중 지방의 산악 지대에서 등장하던 당시의 이른바 홍군은 심지어 주로 농민으로 구성된 군대도 아니었다. 그들이 점령한 각 현에서 농민의 일부 부문을 결집할 수 있었던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홍군은 주로 토지를 빼앗긴 농민, 일자리가 없는 농업 노동자, 반란을 일으킨 병사, 현지의 도적 등 모두 농업 생산에서 직접적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 탈계급화된 이들로 구성됐다.
--- p.568 「홍군의 구성」중에서

‘민족통일전선’은 1937년의 새로운 역사적 무대에서 재건됐다. 1927년에 공산당은 강력한 대중운동의 선두에 있었다. 1937년에는 거대한 민중으로부터 고립된 10만 농민군의 선두에 있었다. 1927년에 공산당원들은 노동자계급이 자본가계급과의 연합에서 ‘주도권’을 획득해 민족해방운동을 승리로 이끌 것이라고 믿었다. 1937년에 공산주의자들이 결성한 연합의 기초는 국민당이 홍군을 흡수하는 것, 소련 관료 집단의 눈앞의 이해에 복무할 항일 투쟁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민족 해방의 문제는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새로운 연합과 이를 지지한 외국 공산주의자들이 영미 제국주의를 향해 개입하라고, 그래서 영미 제국주의의 이익을 위협하는 일본에 대항해 지배력을 확보하라고 공공연하게 호소했기 때문이다.
--- p.645~646 「새로운 ‘민족통일전선’」중에서

출판사 리뷰

세계사의 또 다른 분수령,
1925~1927년 중국 혁명을 다룬 기념비적 고전

보통 ‘중국 혁명’ 하면 1949년 혁명이나 심지어 ‘문화혁명’을 떠올린다. 1925~1927년에 중국에서 ‘노동자 대혁명’이라 불리는 거대한 반란이 있었다는 사실은 좀처럼 알려져 있지 않다.

1925~1927년 혁명이 중요한 것은 이 혁명의 패배가 중국 역사와 나아가 세계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친 분기점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 혁명의 패배로 중국공산당은 노동계급 기반을 잃고 농민 게릴라 부대에 기반을 둔 집단이 된다. 오랜 내전을 거쳐 1949년 결국 권력을 잡게 되지만 이렇게 건설된 ‘신중국’은 중국공산당이 훗날 무엇을 천명했든 간에 진정한 사회주의(노동계급의 자력 해방과 그에 뒤따르는 노동자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체제로 발전하게 된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시작으로 각국을 휩쓸던 노동자 혁명의 물결은 1918~1923년 독일 혁명과 1925~1927년 중국 혁명의 패배를 분기점으로 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이것은 러시아 혁명 자체의 완전한 변질로도 이어졌다).

1949년 혁명이 본질적으로 지식인 지도부가 농민군을 동원해 수행한 반제국주의 민족 해방 혁명이었던 반면, 1925~1927년 혁명은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한 혁명운동이었다.

이 혁명은 제국주의에 맞선 파업 운동으로 시작해, 노동자들이 자치 기구를 수립해 일부 도시를 장악하고 운영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갔다. 노동자들은 외국인 자본가뿐 아니라 중국인 자본가에도 맞서 싸웠고, 농촌에서는 농민이 스스로 지주를 몰아내고 토지를 몰수했다. 중국 남동부를 휩쓴 이 혁명의 절정은 1927년 3월 상하이 노동자들이 무장봉기해 군벌 군대를 몰아내고 임시정부를 세운 사건이었다. 강력한 노동자 혁명이 제국주의·지주·자본가·군벌 세력을 모두 물리치고 진정한 노동자 권력 수립으로 나아갈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불행히도 스탈린과 부하린이 이끈 코민테른 지도부는 이런 경로를 극구 가로막았을 뿐 아니라 노동자들을 ‘4계급 연합’(이른바 노동자, 농민, 도시 중간계급, 민족자본가의 연합)이라는 족쇄에 묶어 두며 무장 해제시켰다. 그 결과는 제국주의와 손잡고 중국 자본가계급의 지원을 등에 업은 국민당 군대의 노동자·농민 대학살이었다.

계급 연합의 함정

1925~1927년 중국 혁명의 패배와 국민당 군대의 노동자·농민 학살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줬다. 국민당 지도자들을 ‘혁명의 기수’로 치켜세웠던 코민테른 지도부는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려고 중국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철저히 숨기려 했지만, 국민당 군대의 만행을 고발하고 중국 혁명의 패배에서 교훈을 이끌어 내려는 노력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이런 노력이 낳은 문학적 결실이 저명한 프랑스 작가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과 『정복자들』이라면, 역사학적 결실이 바로 이 책 『중국 혁명의 비극 1925~1927』이다.

지은이 해럴드 아이작스는 미국인 저널리스트로, 스무 살의 초보 언론인이던 1930년에 중국으로 건너가 5년간 수많은 혁명가들을 인터뷰하고 동시대 자료를 수집하고 번역하고 기록해 1938년에 이 기념비적 저작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아이작스는 제국주의와 손잡고 노동자·농민을 학살한 국민당 정부를 고발했을 뿐 아니라 노동자·농민을 국민당과의 계급 연합(국공합작)에 묶어 놓은 코민테른 지도부도 비판했다. 이 때문에 1945년에는 장제스 정부에 의해, 1949년 혁명 후에는 마오쩌둥 정부에 의해 추방당한 뒤 30년 동안 입국이 금지될 만큼, 장제스와 국민당의 적인 동시에 마오쩌둥과 공산당의 적이 됐다.

1925~1927년 중국 혁명의 패배에서 교훈을 이끌어 내는 것은 오늘날에도 중요하다. 오늘날 세계적인 극우와 파시즘의 발흥에 맞서려면 계급을 초월한 국민적 연합, 바꿔 말하면 좌파와 자유주의자의 연합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마치 상식처럼 돼 있기 때문이다(한국에서는 이재명 정부가 우경화하는데도 대다수 좌파가 아래로부터 저항을 조직하기를 회피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1938년에 영어로 처음 출판된 이래 프랑스어판·독일어판·스페인어판·이탈리아어판·중국어판·일본어판 등 수많은 언어로 번역된 이 책은 100년 전 중국에서 노동계급의 독자적 행동을 억제하고 계급 연합에 매달린 자멸적 전략이 얼마나 큰 비극을 낳았는지 똑똑히 보여 줄 것이다.

추천평

시종일관 과학적 연구의 전형을 보여 준다. 이 책은 방대한 원본 자료와 보충 자료를 진지하게 연구해서 쓴 것이다. 아이작스는 이 작업을 위해 3년 이상 매진했다. 그가 중국인의 삶을 살펴본 관찰자이자 기자로서 중국에서 약 5년의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도 덧붙여야 한다. 이 책의 저자는 혁명가로서 혁명에 접근했고, 그 사실을 숨길 이유가 전혀 없다고 여긴다. 속물적 시각에서는 혁명적 관점에서 접근하면 과학적 객관성을 잃을 수밖에 없다고 볼 것이다. 우리는 반대로 생각한다. 오직 과학적 방법론으로 무장한 혁명가들만 혁명의 객관적 역동성을 보여 줄 수 있다. … 1925~1927년의 중국 혁명을 이해하는 데 이 책보다 나은 것은 아직까지 찾을 수 없다. - 레온 트로츠키
훌륭한 역사 서술이다. 명료하고 흥미진진하며, 증거와 해석의 균형이 잘 잡혀 있다. 아이작스는 1925~1927년 혁명의 기원과 결과를 상세하면서도 매우 읽기 쉽게 서술한다. … 1949년을 기준으로 중국 현대사를 양분해 역사의 복잡한 흐름을 단순화하고 과거와 현재의 의미를 가려 버리는 세태에 성공적으로 맞선다. - 시그리드 슈말저 (매사추세츠대학교 역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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