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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들어가며 1부 성공으로 가는 여정 1 어린 장사꾼 2 샌드위치 맨 3 코넬의 날개를 달고 4 기회를 낚아채다 5 호랑이 등에 올라타다 6 벼랑 끝에 몰리다 7 행운의 하와이 8 홍콩의 악어 떼 9 엔화를 좇아 2부 소리 소문도 없이 조용히 10 얼마나 많아야 부자일까? 11 버뮤다를 둥지 삼아 12 두둑한 배짱과 두둑한 현찰 13 백만장자가 된 억만장자 14 묻지도 말하지도 마라 15 아일랜드에 찾아온 행운 16 베팅 실패 17 부유하고 냉혹하며 악착같은 자들 18 결별의 씨앗 19 한 발 더 깊이 20 아일랜드의 새로운 기틀 21 평화 중재단 3부 결별 22 프랑스의 큰손 23 다 된 밥에 재 뿌리기 24 둘로 쪼개지다 25 절묘한 마무리 4부 더 넓게 더 멀리 26 비밀 공개 작전 27 마음씨 고운 분 28 바우어새 29 개혁을 위해 30 다시 미국으로 31 지역 확장 32 노익장들 33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5부 막바지에 찾아온 위기 34 진짜 미국인다운 괴짜 35 좋은 일을 하고도 욕을 먹는 수가 있다 36 피바람이 불다 37 뉴욕시를 찾은 산타클로스 38 가족 재산 기부 39 자선사업계의 제임스 본드 40 피니 웨이 |
김정아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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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복무했고 도쿄 올림픽에도 다녀온 척은 인구가 1억 명에 이르는 일본이 빗장을 열고 밖으로 나오려는 낌새를 알아차렸다. 1964년 일본인 약 2만 명이 해외 관광 여행을 허가받았다. 그래봤자 하루 평균 55명에 그치는 숫자였지만 목적지가 대부분 호놀룰루였다.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인 사이에 일었던 분노가 희미해진 때였다. 하와이는 일본인 관광객에게 매력 있는 여행지였다. 아열대 기후와 모래 해변이 흥미를 끌었을뿐더러 일본에서 쉽게 올 수 있는 데다, 현지인 가운데 일본인의 후손이 많았다. 게다가 소비주의의 심장인 미국 땅이었다. 초창기 일본인 관광객의 주요 목적은 일본에는 아예 없어서 못 사거나 터무니없이 비싸 엄두를 못 냈던 외제 상품을 사는 것이었다. 이들이 눈독을 들인 상품은 고급 양주, 향수, 시계, 만년필, 보석, 가죽 제품이었다.
---1부 「성공으로 가는 여정」 중에서 쉰세 살이던 척은 법률 사무소에서 펜을 몇 번 휘갈겨 서명하는 것으로 거의 전 재산을 양도했다. 물론 재단 의장으로서 재단 운영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었다. 자신이 일군 기업 제국을 이제 모두 재단에 넘겼지만 빈털터리가 되지도 않았고 여전히 제너럴 애틀랜틱 그룹 의장으로서 회사를 운영하고 연봉을 받을 예정이었다. 그렇기는 해도 저 꼭대기의 억만장자 자리에서 내려와 순자산이 500만 달러도 안 되는 사람이 된 것이다. 나중에는 이런 농담을 던지곤 했다. “백만장자가 되는 법이요? 먼저 억만장자가 되십시오.” 역사상 단일 규모로는 손에 꼽게 큰 자산 양도였지만 상세히 관여한 사람조차 정확한 규모를 알지 못했다. ---2부 「소리 소문도 없이 조용히」 중에서 10월 1일 화요일, 척과 파커는 서명 준비를 모두 마쳤다. 척은 평소에 입던 옷을 벗고 정장에 버튼다운 셔츠, 파란색 실크 넥타이를 매고 나타났다. 그래도 손목에 척의 상징인 검정 플라스틱 시계는 그대로였다. 와이셔츠 차림에 금시계를 찬 변호사들이 뒤에서 서성이는 가운데 척과 파커가 긴 유리 탁자 위 빨간 직인이 찍힌 법률 문서들에 서명했다. 마침내 거래가 성사되었다. 척과 파커는 DFS의 전체 자본 가치 추정액인 42억 달러를 바탕으로 LVMH에 DFS 지분을 넘겼다. 돋보기 너머로 시선을 돌린 척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보조원이 척에게 샴페인 잔을 건넸다. 거품이 올라오는 잔을 손에 들고 일어난 척이 하비 데일, 짐 다우니, 크리스 엑슬리와 카메라 앞에 섰다. ---3부 「결별」 중에서 마크 콘로이도 평생 만난 사람 가운데 척이 누구보다 “뛰어나고 사려 깊은 사람”이라고 평했다. “누구든 마지막에는 관에 들어갑니다. 그때 돈으로 휘감고 들어갈 수는 없죠.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며 부를 쌓으려고 합니다. 이런 일을 하면 돈을 사람을 도울 수단으로만 생각합니다. 흔히들 말합니다. ‘나는 200달러밖에 없어요. 나도 돕고 싶지만, 부자들처럼 기부할 수 없어요.’ 그런 사람들한테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거 아세요? 화상을 입은 얼굴을 그 200달러 덕분에 치료한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선이란 사람들이 스스로 일어서게 돕는 겁니다. 언젠가는 그 사람들이 교육을 받고 멋진 기회를 얻어 서로 돕고 살아가기를 바라면서요.” ---4부 「더 넓게 더 멀리」 중에서 코넬에서 ‘피니 웨이’ 명명식이 열렸을 때 프랭크 로즈는 척이 구상하고 만들어낸 사방의 캠퍼스 건물들을 가리키며, 런던 세인트폴 성당에 안치된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의 비문을 인용했다. “이 글을 읽는 이여, 그의 기념비를 찾으려거든 주위를 둘러보라.” 오늘날 세계 곳곳의 대학, 의료 기관, 연구소를 둘러보면 척 피니가 남긴 익명의 기념비를, 최첨단 건물들을 볼 수 있다. 어쩌면 척이 한동안 종종 눈에 띄지 않게 이곳들에 머물며 자신이 만들어낸 공간에서 지식 활동이 펼쳐지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봤을지도 모른다. 그런 기념비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변함없이 지식 발전에 기여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척 피니가 한결같이 걸어온 길이었다. ---5부 「막바지에 찾아온 위기」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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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드위치를 팔던 청년에서 세계 23위 억만장자로
전후 세계의 격변을 기회로 삼아 42억 달러 면세 제국을 일군 사업가의 이야기 아일랜드계 미국인 척 피니는 넉넉하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공군에 자원입대해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제대 군인에게 주어지는 장학금으로 코넬대학교에 진학했다. 생활비를 마련하려고 캠퍼스에서 샌드위치를 팔던 청년은 졸업 후 유럽으로 건너가 미군을 상대로 면세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1960년에 동업자들과 DFS를 설립하고, 일본인 관광객들의 구매력을 빠르게 포착해 하와이와 홍콩을 거점으로 세계적인 면세 기업을 일궜다. 1996년에 42억 달러 가치 평가를 받고 LVMH에 DFS 지분 38.75%를 넘겼다.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친 미국, 전후 유럽과 아시아의 변화가 한 사업가의 성장과 맞물려 극적으로 전개된다. 기회를 향한 도전과 실패, 동업자들과의 협력과 갈등이 이어지는 이야기를 기자 출신의 저자 코너 오클리어리가 완성했다. 10개국 이상을 척 피니와 동행하며 저널리즘에 기반해 철저하게 진행한 수십 명의 인터뷰와 척 피니가 제약 없이 활용하도록 제공한 자료들을 모두 담은 이 책은 한 편의 소설처럼 느껴진다. 빌 게이츠, 워런 버핏, 일론 머스크, 마크 저커버그의 자선 단체 더 기빙 플레지의 영감을 준 기업가 “살아생전에 기부하라” 앤드루 카네기의 「부의 복음」을 여러 번 읽고 영향을 받았던 척 피니는 부를 쌓는 능력만큼이나 부를 사용하는 책임을 중요하게 여겼다. 재단을 설립해 1984년에 거의 모든 재산을 넘기며 ‘살아생전 기부’를 실천한 그의 삶은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에게 영향을 주었고, 두 사람이 멀린다 게이츠와 함께 시작한 ‘더 기빙 플레지’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더 기빙 플레지는 사후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겠다는 서약에 서명한 억만장자들의 모임이다. 게이츠는 척 피니를 “보기 드문 롤모델이자, 살아생전 기부의 극치를 보여주는 본보기”라고 평가했다. 버핏 역시 “인생에서 올바른 영웅을 품고 있다면 이미 목표의 90퍼센트쯤은 다다른 셈”이라며 척 피니를 “나의 영웅이자 빌 게이츠의 영웅”이라고 말했다. 척 피니는 이미 거의 모든 재산을 내놓았기에 새롭게 기부를 서약하는 것이 적절한지 망설였지만, 더 많은 부자가 살아생전 기부에 나서기를 바라며 지지 서한을 보냈다. 부호들이 기부를 약속하기 전에 이미 그는 삶으로 그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었다. 사람은 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남겼는가로 정의된다 척 피니의 기부는 한 기관을 넘어 사회, 국가의 미래를 바꾸는 규모였다. 코넬대에는 10억 달러를 기부해 장학금과 교육·연구 시설을 지원했고, 뉴욕의 코넬 테크 건립에만 3억 5,000만 달러를 내놓았다. 아일랜드에서는 2012년까지 대학들에 16억 달러를 기부하며 고등교육과 연구 기반의 도약을 뒷받침했고, 북아일랜드 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기여했다. 베트남에서는 1998년부터 2006년까지 건설·장학·보건 사업에 2억 2,000만 달러를 지원했다. 대학 도서관과 의료 시설을 확충하고, 호찌민 로열 멜버른공과대학 설립에는 3,360만 달러를 투입했다. 쿠바에도 2007년까지 의료 교육 협력을 중심으로 약 1,100만 달러를 기부했다. 그 돈으로 구개열 때문에 입을 가리던 아이는 수술을 받고 활짝 웃었고, 시력을 잃었던 농부는 다시 세상을 보게 되었다. 환자 셋이 병상 하나를 나눠 쓰던 병원에는 한 사람씩 누울 수 있는 새 병동이 들어섰고, 학생들은 새로 지어진 도서관에서 교육받게 되었다. 이토록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면서도 척 피니는 자신의 기부를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1988년 《포브스》가 그를 미국 400대 부자 중 23위에 올렸을 때는 이미 거의 모든 재산을 자선 재단에 넘긴 뒤였다. 세상이 그의 재산을 헤아리는 동안, 그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그 돈으로 사람들의 삶을 바꾸고 있었다. 지원한 건물에도 자신의 이름을 새기지 못하게 막았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는 말처럼, 그는 부를 움켜쥐는 대신 살아 있는 동안 세상에 돌려주는 길을 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