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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한국과 일본의 조선인 피폭자
1장 식민의 땅에서 강제 연행되어 - 31인의 증언 박창환‘미쓰비시’가 군청까지 데리러 왔습디다 박영분혼자만 두면 도망갈까 봐 가족들을 불러들인 거죠 박수룡조선 사람들이 불을 지른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진우생섬광이 번쩍하더니, 굉음과 함께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김종구탄광에서 콩깻묵이나 수수, 기장만 주는데 너무 배고팠습니다 성수남정신대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열여섯에 결혼했지요 이영헌어디로 가지는지도 모르는 채 경찰에 이끌려 히로시마에 양기성징용령을 받고 모인 조선인들을 일본도를 들고 감시하는 군인들 이수동탄광, 전쟁, 원자폭탄이라는 세 가지 지옥에서 살아남아 박종래징용공으로 끌려간 미쓰비시 공장에서 피폭당했습니다 김판근히로시마역 플랫폼에서 지붕에 깔려 김상근화상을 입고 머리는 3배나 부풀어 올랐더랬죠 정기장아버지가 빚보증을 서는 바람에 가족 모두의 운명이 박민규암기하지 못하면 물 채운 양동이를 들고 서 있어야 했습니다 윤갑수속아서 홍등가에 팔렸어요 정원달모두 저를 가리키며 조선인 형사가 왔다고 하더군요 김응선징병되느니 차라리 히로시마로 징용되는 편이 기뻤습니다 윤정순같은 고향 사람들을 80~100명이나 고용한 시아버지를 도와서 서정우‘군함도’에서 몇 번이나 자살하려 했는지 모릅니다 김재현‘천황 폐하를 위한 산업 전사’가 되는 거라며 징용했습니다 김순상눈이 내리는 날에도 훈도시 하나 걸친 채로 일을 시키더군요 백창기목에 밧줄을 감고 소에 끌려다니면서도 ‘독립 만세’를 외친 청년들 신복수내 아이가 타들어 가는 걸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던, 지옥이었어요 윤참현“조선 돼지”라고 놀림 받으면서도 일본 아이들과 놀았습니다 김정현작곡 공부를 하다가 학도병이 되어 고사포 부대로 배우성농사를 지어도 쌀밥은 구경도 못 하니 시모노세키로 건너왔지 천금락그땐 ‘살아 있었네’가 인사였습니다 강수원독립운동했다고 고문받고 히로시마 형무소 독방에서 원폭을 맞았습니다 이일수건물 철거에 근로 봉사 갔다가 몸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김용복조선 사람만 부려 먹고, 바보 취급했습니다 김재갑우라카미 성당 앞 언덕에서 달리는 말에 매달려 2장 피폭 - 49인의 증언 박해종깜짝 놀라 뛰쳐나가니 우라카미 일대가 불바다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수룡등에 구더기가 끓는데도 감자를 갈아 발라 줄 뿐이었어요 오봉수“조선인 주제에!”라며 호통을 치는데 나락으로 굴러떨어지는 기분이었지 옥아이발가락이 잘리고 머리도 이상했지만 아픈 줄 몰랐어요 김명금두 아들은 껍질이 벗겨진 채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생선 같았습니다 김인조세 딸의 죽음을 생각하면 지금도 원통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김정순저는 한쪽 눈이 튀어나오고, 딸은 빛을 보면 무서워하고 최영순검은 물체들이 다가오는데 모두가 사람이었습니다 박화옥나가사키 항구에서 바다로 뛰어내려 배의 키를 안고 잠수했죠 김달막아들은 마치 타 버린 생선 같았습니다 임옥선10살 때 피폭당한 뒤로 점점 팔다리가 오그라들었습니다 안영천형제들을 찾아 시내를 헤맸는데, 시체 냄새가 한 달이나 몸에 배어 있었지요 김연순근로 동원되었다가 하리모토(장훈) 선수 누나랑 같이 구덩이를 팠어요 정등명얼굴과 손에 큰 화상을 입고 40년간 켈로이드로 고통받았습니다 김복련운전 일을 하던 남편과 두 살배기 딸도 죽고 말았습니다 권억상아무 일도 할 수 없으니 죽고만 싶습니다 박영환지금도 탄광 사고 때 박힌 석탄 조각이 몸속에 있습니다 강화순더 나빠지지 않도록 오른팔을 절단했어요 장을생“살려 줘, 살려 줘” 하다가 아내는 숨을 거뒀습니다 최을룡갈증을 참을 수 없어 제 오줌을 마셨습니다 장태희장기의 말들처럼 쓰러지는 히로시마 시가지를 보고 기절했습니다 강아기원폭으로 다섯 아이 중에 둘이 죽었어요 박영윤형수는 화장해서 뼈를 강물에 흘려보냈습니다 신영수제 얼굴을 더듬어 보니 눈도, 코도, 입도 녹아서 수박 같았습니다 박기희새까맣게 타 버린 뼈만 남았는데, 누가 누구인지 어떻게 분간하겠어요 강소룡죽을힘을 다해 달려간 강에서 사람들이 수없이 죽어 갔습니다 변명규지금도 큰딸이 어딘가에 살아 있지 않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정대일켈로이드 때문에 다리에 힘을 줄 수가 없어서 가벼운 일밖에 못 해요 소윤생아버지는 옷이 막 타고 있는데도, 꼼짝 않고 웅크리고 있는 겁니다 김종환모가지며, 손이며 흩어져 있었고, 내장이 쏟아져 나와 있었습니다 가나자와 후미코몸이 타 버린 사람들을 한 집, 한 집 들여보냈어요 송순민자동차 보닛을 들여다보는데 느닷없이 번쩍하더군요 최계철드디어 제가 피폭자라는 걸 증언해 줄 사람이 나타나 ‘원폭 수첩’을 받았습니다 서윤심이미 죽었겠지 했던 딸이 이틀째 되던 날 살아 돌아왔어요 황재명군인이 저를 업고 강으로 뛰어 들어가 목숨을 건졌습니다 유세은타지 않은 건 수레 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바닥뿐이었습니다 장세택우라카미 형무소에 뒹구는 새까맣게 탄 시체들 속에서 찾아냈습니다 이윤재제 딸들의 요통은 부모가 원폭을 맞은 탓이 아닐까 합니다 박맹련전차 안에 사람이 꽉 찼는데도 바깥의 섬광이 보였어요 황응팔“소이탄이다!”라는 소리에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박차점의사가 다리를 자르자고 하길래 허둥지둥 도망쳐 나왔어요 강기달방공호 속에서 네다섯 달을 살았습니다 주석제가 억지로 학교에 보냈던 남동생을 시쳇더미 속에서 찾아다녔습니다 신희식일주일 동안 방공호 안에서 누운 채로 지냈습니다 배옥련아들을 품에 꼭 안고 3층에서 뛰어내렸지요 최영탁저는 군인들의 시신을 강물에 던지라고 지시했습니다 송연순눈도, 입도 비뚤어져서 사람들은 “귀신이다”라며 모두 도망쳤습니다 김기석어머니, 용케도 원폭의 고통을 견디며 살아 내셨네요 김임선일본 정부가 산더미만큼 돈을 준다 해도 제 가슴의 아픔은 덜어지지 않습니다 3장 한국으로 돌아간 사람들, 일본에 남은 사람들 - 49인의 증언 곽귀훈조선인들 때문에 전쟁에 졌단 말을 듣고 분노로 온몸이 떨려 왔습니다 이순이작은 배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일주일 만에 부산에 도착했지요 이정수일본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전 이렇게 살고 있진 않았을 겁니다 김정자아들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피폭 조선인’으로 살아가겠다고 결심했어요 김판희‘이재민 증명서’는 제가 피폭당한 증거라서 잘 간직하고 있죠 이양선피폭에 책임이 있는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는 조속히 보상해야 합니다 변금순‘우리 아기가 내 몸속의 독을 모두 빨아 가 줬구나’라고 생각했지요 정익판“조센징은 어서 너희 나라로 가, 가라고” 하더군요 정장수차라리 죽어 버리면 고통이라도 줄지 않을까 윤성상아내와 갓난아기, 그리고 동생의 뼈가 지금도 도로 아래 묻혀 있을 겁니다 유택련귀국했지만 우리말도 모른다고 괴롭힘당하고,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강문희부모님이 잠든 히로시마를 떠날 수 없어 원폭이 떨어진 벌판에 머물렀습니다 정두진아내는 어디를 찾아봐도 없고 갈기갈기 찢긴 심정으로 귀국했지요 이정수위를 잘라 내서 힘들어요. 한평생 일만 해 온 인생입니다 백인기2000평 있던 땅도 치료비로 모두 날렸습니다 이실근같은 피폭자여도 조선인은 차별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박옥순차별과 억압에 굴하지 않고, 비굴해지지 말길 노장수귀국하던 배가 태풍으로 침몰해 ‘미쓰비시’ 징용공 등 246명이 행방불명되었죠 백경이저의 가장 큰 바람은 아들을 일본에서 치료받게 하는 겁니다 익명언젠간 아이들과 아내에게 제가 피폭자란 걸 밝힐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죠 이필이일본에서 치료받고 싶어요. 이런 몸으로 아이 다섯을 키우며 사는 게 고달픕니다 박수복이토록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사느니 차라리 죽음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임복순한국의 피폭자는 지금도 그날의 히로시마를 등에 짊어진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판이히로시마에서도 한국에서도 폭격당해 정말 전쟁이라면 진저리가 쳐집니다 엄분련피폭자를 모른 체하고 도대체 어떤 세계 평화를 실현한다는 겁니까 김분순원폭을 맞고 난 뒤로 후유증과 가난만 남았습니다 전상학일본에서 치료받은 지 6개월이 되자 강제로 퇴원시키더군요 이순출누님은 1960년, 형님은 1961년, 아버지는 1963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정익준처가에선 어째서 뻔뻔하게 혼자만 살아 돌아왔느냐며…… 이삼수일본인 피폭자와 똑같이 대해 주세요 김영근고향에 돌아가서는 형들과 밥을 구걸해서 가족과 함께 먹었습니다 이기상기어서 변소에 갔더니 “아이고, 아이고” 하는 조선 사람의 탄식 소리가…… 최무선남편과 생이별하고 아이들과 셋이서 귀국했습니다 김이술저는 이 지옥 같은 세상이 두려워 예수님을 믿게 되었죠 정정오원폭을 투하한 미국의 책임이 크지만, 일본에도 절반 책임이 있습니다 이순이죽기 전에 일본에 있는 남편 무덤에 가 보고 싶습니다 강계호조선소에서 일하다 공습으로 다쳐 입원한 병원에서 피폭까지 당했습니다 김옥련다리 통증이 심해져서 오른쪽 허벅지 아래를 절단했지요 손진홍제가 히로시마에서 죽은 줄만 알고, 저를 보자 춤추며 축하해 줬습니다 한명정앞으로도 치료를 받을 수 없다면 빨리 죽는 게 나아요 김복희제게 켈로이드가 있다는 걸 모르고 결혼한 남편은 “속았다”라면서…… 한봉우밀선을 사서 귀국하니 부모님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셨지요 김남출군가를 듣거나 장갑차 행진을 보면 소름이 끼칩니다 이대규암시장, 밀주, 도박……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뭐든지 했지 김순길일본 정부와 미쓰비시 중공업에 체불 임금 지급과 손해 배상을 요구합니다 김의조원폭 피해자는 세계 평화를 떠받치는 살아 있는 기둥입니다 차정술히로시마, 한국 전쟁, 베트남, 세 전쟁에 모두 휘말려…… 이맹희일본 대사관 앞에서 죽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백봉학살면서 좋은 일 하나 없었어. 사는 게 진절머리가 나 1부 해설 한국·조선인 피폭자 - 그 역사와 존재의 의미가마다 사다오 2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간 사람들 - 17인의 증언 김원선부모님은 피폭되어 돌아가시고, 우리 일곱 형제는 거지처럼 살 수밖에 없었지요 강정희원폭이 떨어지고 나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히로시마 시내로 들어갔습니다 손경숙사촌 오빠는 전차에 기어오르다 죽고 말았습니다 신배근같은 피폭자라고 해도 우리가 놓인 상황은 일본인과 다릅니다 김만옥아이들이 엄마가 피폭당해서 우리까지 고생한다고 말하곤 합니다 이복순건물 철거에 동원된 반 친구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정군숙제가 형제 중에 가장 먼저 죽을 거라고 했건만 이계선똑같이 피폭당했는데, 왜 나라와 민족이 다르다고 차별하나요? 이원호병원 가던 길에 어머니 등에서 피폭되었습니다 이도순학교를 폐쇄하려고 경찰들이 우리를 교실에서 내쫓았죠 이재호피폭자를 무시하는 처사에 더 참을 수 없어 저도 피폭자라는 걸 밝혔습니다 전순옥어머니는 “어린 너희들을 두고 가야 하니, 걱정이구나”라면서 눈을 감으셨어요 박문숙일본은 ‘세계 평화의 상징’이에요.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이기창내가 스무 살까지라도 살아 버틸 수 있을까 생각하곤 했지요 이성우타고 있던 기차가 히로시마역을 통과할 때 원폭의 충격으로 전복되고 말았습니다 여일숙지금도 시신을 태우는 광경이 눈에 선합니다 나윤순제 아들은 피폭의 심각성을 깨닫고 의사가 되었습니다 2부 해설이토 다카시 한국어판에 부쳐 증보 개정판 후기 |
Ito Takashi,いとう たかし,伊藤 孝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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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조선 사람이라는 이유로 셀 수 없으리만큼 차별받아 왔습니다. 전쟁 중에는 탄광에 끌려가 감옥 같은 방에 살면서 착취당하고. 낙반 사고로 사람이 죽는 것도 목격하고. 수송선을 타다가 잠수함과 비행기 공격을 받고, 급기야 원폭까지 맞았으니 세 가지 지옥에서 살아남은 겁니다. 사실, 저는 이미 죽었어야 할 사람이에요. 그러니 제게는 얼마나 인간답게 사는가가 중요합니다. 차별이나 원폭 같은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p.39 우리 아이 몸이 타들어 가는 걸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어요. 생지옥이었습니다. ---p.72 스미요시의 노동자 합숙소로 달려가니, 작업 현장은 그야말로 전멸되고 전소된 상태였습니다. 터널 안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무사했는데, 밖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온전치 못했습니다. 번쩍하는 광선에 검게 타고, 눈알은 하얗고, 피부는 석류처럼 갈라져 있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머리에 불이 붙었어요. 불 좀 꺼 줘요!”라고 외쳤지만, 모두가 제 몸 가누기도 힘든 지경이었습니다. 나뒹구는 시체 위를 넘어 다니면서……. 지금도 생각해 보면, 소름이 돋습니다. ---p.80 집에 도착하니, 집 안에서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가족들이 저의 제사를 지내고 있었던 겁니다. 히로시마가 원폭으로 전멸했으니 저도 죽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부모님과 형제들은 꿈 같다며 기뻐했습니다. 우린 서로 껴안고 울었습니다. 그때의 감격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p.211 1970년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건립했습니다. 고향에 돌아가진 못했지만, 그 비석에 쓰인 돌은 모두 한국에서 채석하고, 조각해서 가져온 것입니다. 처음에는 ‘평화공원’ 안에 세우려 했지만, 히로시마시가 끝까지 허락하지 않아, 건설성이 부지를 빌려줘 여기 강변 땅에 세웠습니다. 지독한 차별과 편견에 시달리며 살아왔는데, 죽어서까지도 이렇게 쫓겨나다니……. 이 모습이야말로 ‘히로시마 속의 한국’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p.249 남편이 갑자기 공화국에 가자는 겁니다. 아이들을 반쪽짜리 조선인이 되게 할 수 없다고, “조국에서 조선인답게 키우자!”라면서요. 저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민족 차별을 당하는 일은 없겠지 하는 바람으로 동의했지요. 1972년 5월, 남편과 시어머니, 시동생, 아이들 넷과 함께 귀국했습니다. ---p.386 저는 피폭 2세예요. 원폭은 2세, 3세한테도 영향을 끼칩니다. 아버지는 원폭이 떨어지고 곧바로 동원되어서 피폭 지점에서 일하셨고, 어머니는 부상자를 돌보셨거든요. 피폭된 부모한테서 태어난 저는 얼굴 신경 마비와 협심증 등 처음부터 장애를 갖고 태어났어요. ---p.400 저는 오랫동안 제가 피폭자라는 사실을 감추고 살아왔지요. 결혼이나 사회생활, 자식들의 인생에도 영향이 갈 테니까요. 하지만, 결국 피폭자라는 걸 분명히 밝혀야겠다 결심했습니다. 제 몸에 장애가 있다는 걸 누가 알게 되는 건 창피했지만, 일본 정부가 조선인 피폭자를 무시하는 처사에 더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p.401 저는 저에게 일본인으로 귀화하라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귀화한다고 해도 얼굴로, 말투로 조선 사람이란 걸 다 안다. 전쟁 전부터 전쟁 끝날 때까지 속아서 일본인으로 살았는데, 난 이젠 조선인으로 살겠다. 우리에게는 우리나라의 통일과 평화를 실현할 권리와 의무가 있으니까”라고 말이죠. ---p.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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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유일의 피폭국 일본’에 묻힌 ‘피폭된 조선’의 역사
조선인 피폭자 7만 명의 존재를 밝히다 일본은 세계 유일의 피폭국이다. 1945년 8월,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그해 12월까지 약 21만 명이 사망했으며, 약 5년간 10만 명이 추가로 사망했다. 끔찍한 범죄가 일본 땅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70만 명의 피폭자 중 무려 7만 명이 조선인이었다는 점은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이다. 살아남은 조선인 피폭자 146인의 증언을 담은 『피폭된 조선』은 잊혔던 과거를 되살린다. 식민 지배와 강제 동원, 피폭 피해에 대해 말하는 목소리는 ‘피폭된 조선’이라는 역사적 형상을 세상에 드러내며, 해방 후 일본, 한국, 북한으로 흩어져 삶을 이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생히 들려준다. 또한 반핵·평화 운동의 지주였던 가마다 사다오 교수의 한일 역사 해설, 오늘날 세계적으로 다시 확산하는 핵 위협에 대한 저자의 글은 이 비극의 구조적 맥락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돕는다. 무엇보다 이 책의 정수는 포토저널리스트 이토 다카시가 담아 낸 사진이다. 과거를 회상하는 생존자들의 얼굴과 표정, 눈빛, 그들의 터전, 그리고 역사적 사건이 새겨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곳곳의 사진은 우리에게 그날의 역사를 선명히 보여 준다. 저자는 1983년부터 지금까지 800명에 달하는 일본의 전쟁 범죄 피해자와 유족을 끈질기게 취재해 왔다. 이토 다카시가 한평생을 이 일에 바친 계기가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욕에 삶을 유린당한 조선인 피폭자를 알게 된 순간이었던 만큼, 이 책은 40년의 오랜 취재를 집대성한 정수이다. 그는 투철한 책임 의식으로 ‘세계 유일의 피폭국 일본’이라는 프레임 뒤에 묻혀 있던 ‘피폭된 조선’의 역사를 널리 알린다. “징용공으로 끌려간 미쓰비시 공장에서 피폭당했습니다” 왜 조선인이 그곳에 있었는가? 평화의 도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사실 군사 도시였다 오늘날 평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본래 일제 군국주의의 핵심 전초기지였다. 미쓰비시 중공의 조선소, 기계 공장, 도요 공업, 히로시마 정기 등 수많은 군수 공장이 들어선 군사 도시는 수만 명의 병력과 노동자를 필요로 했다. 이로 인해 많은 조선인이 강제로 끌려갔고, 가혹한 수탈로 생활이 곤궁해진 이들이 일감을 찾아 건너가기도 했다. 피해자들은 공장 인근의 합숙소나 거주지, 작업 현장에서 원폭 투하라는 참극을 맞게 된 이유다. 이 책은 조선인들이 겪었던 고난의 세월을 구체적으로 보인다. 일본에 억울하게 끌려가(“‘천황 폐하를 위한 산업 전사’가 되는 일이라며 징용으로 끌려갔어요. 용산역을 출발해 ‘미쓰비시 조선소’로 갔습니다”, “‘이렇게 가난하게 사느니 방직 공장에서 일하면 어떠냐’ 하는 말에 속아 마을의 젊은 처녀들, 과부들과 같이 일본에 왔다가 홍등가에 팔렸어요”) 영문도 모른 채 피폭되던 순간(“8월 6일, 근로 동원된 배전 공장에 있었지요. 작업대에 막 앉으려던 순간 섬광이 번쩍 빛났어요”), 피폭 이후의 끔찍한 고통(“등에 구더기가 끓는데도 감자를 갈아 발라 줄 뿐이었어요”), 피폭된 도시를 떠나지 못하고 헤맨 날들(“제가 억지로 학교에 보냈던 남동생을 시쳇더미 속에서 찾아다녔습니다”)까지, 피해자들의 과거에는 식민지 조선의 비극과 인류사의 비극이 겹쳐 있다. 이토 다카시는 한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일본 언론이 일본인을 태평양 전쟁의 피해자로만 묘사해 왔다”고 짚었다. 전후 일본은 피폭의 참상을 강조하며 평화 운동을 전개했지만, 침략 전쟁과 식민지 지배, 수탈과 학살 등 일본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기억은 뒤로 미루어 왔다. 그러나 수많은 피식민지 강제 노동자가 타국에서 피폭당했다는 사실, 심지어 그 수의 10%를 이웃 나라의 주민이 차지한다는 사실은 일본에 무거운 책임을 요구한다. 일본인에게 원폭 투하는 미국이 저지른 참혹한 피해의 역사겠지만, 조선인 피폭자에게 이 비극은 식민 지배라는 일본의 가해에서 비롯된 고통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전 이렇게 살고 있진 않았을 겁니다”라는 피해자의 목소리는 원폭 피해라는 비극 이면에 존재하는 식민 지배의 구조적 맥락을 짚어내고 있다. “한일 양국의 정치적 관계 틈바구니에 끼여 외면당해 왔습니다” 피폭 이후, 남·북·일본으로 흩어진 채 버려졌던 수십 년의 세월 해방 이후 생존자들은 일본, 한반도의 남과 북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약 2만 3000명이 한반도로 돌아왔으며, 그중 2만 명이 남쪽으로, 3000명이 북쪽으로 돌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무관심뿐이었다. 원폭 투하를 ‘일제의 자업자득’이라 여기거나, 식민지 조선을 해방시킨 계기로 바라보는 시선이 대중적이다. 하지만 이런 시선은 전쟁이 단발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한다. 수십 년에 걸쳐 사회 구성원들에게 장기적인 고통을 남기며, 종전 후에도 국가 차원에서 보살펴야 할 역사적 과제다. 한국에서는 2016년 ‘한국인 원폭피해자 지원법’이 통과되었으나, 이전의 70여 년간 국가의 보호 책임은 유명무실했다. 피해자들이 일본과 미국을 상대로 책임과 배상을 요구할 때 국가는 어떠한 외교적 노력도, 지원을 위한 실태조사도 하지 않았다. 일본이 1957년 3월 원폭의료법을 제정하여 자국 피폭자에게 치료 지원을 하였으나, 일본 바깥에 거주하는 사람은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기나긴 법정 투쟁을 거쳐야만 했다. 복잡한 정치적 셈법 속에서 생존자들의 삶은 신체적, 정신적 고통의 연속이었다. 귀국 후에는 생존을 위한 고단한 노력이 이어졌고(“암시장, 밀주, 도박……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뭐든지 했지”, “고향에 돌아가서는 형들과 밥을 구걸해서 함께 먹었습니다”), 사회적 낙인과 차별 속에 과거를 숨긴 채 노심초사하며 평생을 살았다(“화상을 입은 제 모습 때문에 우리 가족은 시골의 구경거리였죠”, “제게 켈로이드가 있다는 걸 모르고 결혼한 남편은 늘 ‘속았다, 속았다’ 입버릇처럼 말했죠”, “저는 오랫동안 제가 피폭자라는 사실을 감추고 살아왔지요. 결혼이나 사회생활, 자식들의 인생에도 영향이 갈 테니까요”, “앞으로 아이들에게 어떤 후유증이 나타날지 정말 걱정되지요”). 나아가 이토 다카시는 “일본에서는 심한 켈로이드(피폭 때 생긴 열상 흉터)가 남아 있는 피폭자를 거의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1980년대와 90년대의 한국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제대로 된 수술조차 받지 못한 채 생활하고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이런 차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세대 원폭 피해자들의 고통은 원폭 피해자 2세, 3세의 고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생존자 중 많은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와 살았는데, 한국에 돌아와 적절히 치료받지 못한 이들의 자손에게 심한 후유증이 발생한 것이다. 오늘날 피폭은 아문 흉터가 아니라, 여전히 해결되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두 번 다시 저희와 같은 피폭자를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다시 도래한 전쟁의 시대에 평화를 당부하다 오늘날 일본 정계와 젊은 세대 사이에서 피폭의 기억은 빠르게 희미해지고 있다. 생존자 또한 급격히 줄고 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재무장’과 ‘평화헌법 개정’을 추진하는 군국주의적 흐름이 채우고 있다. 이는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2010년대 중엽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한국인 원폭피해자 지원법’이 만들어지고, 일본의 ‘원자폭탄 희생자 위령제’에 미국이 참여하는 등 평화를 위한 분위기가 형성되는 듯했다. 그러나 불과 10년 만에 세계 곳곳에서 전쟁에 대비해 무장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현재 세계적으로 핵탄두는 1만 2187개에 이른다. 그리고 1945년 8월, 70만 명의 삶을 끔찍하게 망가뜨린 핵무기의 수는 고작 2발이었다. 평생을 트라우마 속에 살아온 피폭자들이 국경과 이데올로기를 초월해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는 단 하나다. “핵무기도 없고, 차별과 억압도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다시 도래하는 전쟁의 시대, 간신히 전해진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삶을 파괴당한 이들의 무참한 얼굴을 본다. 몸으로 견뎌 낸 고통의 역사를 읽는다. 그리고 평화를 당부하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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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폭된 조선》은 아주 오랜 시간 헤아려지지 못했던 이들에게 잃어버린 이름과 얼굴, 그리고 목소리를 되찾아 주는 책이다. 이토 다카시는 1985년 합천에서 피폭자들을 처음 만난 뒤 40년간 남과 북을 아흔 차례나 오가며 취재를 이어왔다. 그렇게 마주한 146명의 증언과 2만 5천여 컷의 필름 가운데 209장의 사진을 이 책에 엮어냈다. 특히 북한 피해자들에 대한 기록은 유례를 찾기 힘든 유일한 증언이다.
책에 기록된 이들의 대다수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이제 그들의 숨결을 느낄 길은 오직 남겨진 기록뿐이다. 식민 지배와 전쟁, 그리고 원폭 투하라는 거대한 비극이 한 인간의 삶에 어떻게 겹겹이 새겨지는지 마주하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이 책을 권한다. 이는 우리가 마땅히 이어가야 할 기억의 전승이자, 실천의 출발점이다. - 서영걸 (사진 작가) |